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83화 (83/1,000)
  • 83화 대왕의 제전 (2)

    눈앞에 존재하는 검은 포탈.

    그것은 잠보다 달고 죽음보다 깊은 것.

    “가즈아!”

    나와 드레이크는 그 포탈 안으로 거침없이 다이브했다.

    이윽고.

    귓가에 음산한 알림음이 들려왔다,

    -띠링!

    <악(惡)의 고성 심층부 ‘대왕의 제전(1)’에 입장하셨습니다>

    <최초 방문자의 이름이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됩니다>

    오랜만에 듣는 ‘최초 방문자’ 호칭.

    별다른 특전은 없지만, 게이머들은 이 소리 한 번을 듣기 위해 아무도 공략하지 않는 장소를 날밤 새 가며 뒤진다.

    그것이 게이머라는 종족!

    ……그리고 또 아주 혜택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나중에 아카식 레코드의 관리자를 만났을 때 도움이 되지.’

    최초 클리어, 최초 방문, 최초 발견 등등…….

    모든 ‘최초’ 타이틀은 누적될 시에 꽤나 큰 특전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먼 미래의 이야기.

    나는 눈앞의 풍경에 집중했다.

    이윽고.

    풍경이 변했다.

    시커먼 어둠이 블록처럼 흩어지며 새로운 맵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의 심부. 대왕의 제전.

    벽돌로 만들어진 거대한 홀, 중세 풍의 웅장한 가구들이 즐비하다.

    그리고, 허공에 매달린 열 개의 해먹.

    [호호호호호-]

    간드러지는 웃음소리들이 메아리쳤다.

    “호오?”

    드레이크의 눈이 가늘어졌다.

    허공에 매달린 열 개의 검은 해먹 위로 사람의 머리가 보인다.

    제각기 다르게 생긴 이목구비, 하지만 너무나도 아름다운 얼굴들.

    몽마(夢魔) 서큐버스들의 등장이다!

    <서큐버스> -등급: B+ / 특성: 어둠, 이상성욕, 레이디 퍼스트, 양자택일, 융합

    -서식지: 악의 고성, 자살 숲, 썩고 불타는 땅, 고독 못.

    -크기: 1.8m.

    -어둠 대왕을 섬기는 시녀.

    어지간한 남자는 서큐버스들로 이루어진 하렘에 들어가는 즉시 몸이 녹아내린다.

    미모와 함께 전투력도 인정받아 어둠 대왕으로부터 악(惡)의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눈을 둘 곳이 없게 만드는 비현실적인 몸매.

    한번 시선을 마주치면 눈을 뗄 수가 없는 미모.

    열 명의 미녀들이 해먹 위로 몸을 일으켰다.

    “오랜만이네.”

    나는 서큐버스들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예전 용자의 무덤에서 서큐버스와 1:1 끈적끈적 대혈투를 펼쳤던 기억이 새록새록 돋아난다.

    그때 아마 미성년자 관람불가 딱지 받고 연재, 아니 방송 짤릴 뻔했었지 아마?

    “아, 이번에도 짤리는 건 아닌지 몰라.”

    나는 우측 상단의 빨간 불빛을 힐끔 쳐다보았다.

    ●[REC]

    녹화가 잘 되고 있는 것을 확인하며, 나는 인벤토리에서 아이템 하나를 꺼냈다.

    그것은 용자의 무덤에서 썼던 것과 같은 핑크색 젤이다.

    -<슬라임 퀸의 정수> D

    슬라임 퀸의 살점을 끓인 뒤 핵심 물질만 걸러낸 것이다.

    나는 그것을 열 마리의 서큐버스들에게 쫙 뿌려버렸다.

    [갸아아악!]

    기분 나쁜 젤에 뒤덮인 서큐버스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른다.

    동시에, 그녀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둠의 기운이 50% 정도 더 강력해졌다.

    특성 ‘이상성욕’이 발동된 것이다!

    이내, 열 마리의 서큐버스들은 ‘양자택일’ 특성까지 발동시켰다.

    우우웅-

    서큐버스들의 손바닥에 시커먼 포탈이 열렸다.

    칼이 나오느냐, 지팡이가 나오느냐.

    서큐버스들의 무기에 따라 물리 공격력 형태인지 마법 공격력 형태인지가 갈린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팁!

    서큐버스들은 여러 마리가 뭉쳐있을 경우 대게 공격 특성을 통일하려는 경향이 있다.

    주로 첫 번째로 무기를 꺼내든 개체가 무얼 선택하느냐에 따라 나머지 아홉 마리의 특성이 전부 정해지는 편이다.

    …….

    운이 좋았다.

    스팟!

    첫 번째로 무기를 꺼낸 서큐버스, 그녀의 손에는 해골로 만들어진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마법 공격 타입!

    뒤이어, 나머지 9마리의 서큐버스들도 첫 번째 서큐버스를 따라 지팡이를 꺼내들었다.

    여기 짜장 10개 통일! ……뭐 그런 느낌이다.

    ‘확실히 이런 분위기에서 혼자 짬뽕 시키기는 뭐하겠지.’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서큐버스가 마공형이라면 전투가 조금 쉬워진다.

    퍼펑!

    나는 반지를 문질러 요르문간드를 소환했다.

    [쉬이익!]

    독과 마법에 엄청난 저항력을 보이는 이 녀석이라면 마공형 서큐버스를 상대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리라.

    또한.

    나는 옆에 있는 드레이크의 등을 손바닥으로 팡 쳤다.

    “잘 부탁해, 친구.”

    “……?”

    드레이크가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확-

    나는 드레이크와 요르문간드를 서큐버스들의 하렘으로 떠밀었다.

    핑크색 젤이 가득한 하렘!

    뜨겁고 끈적끈적한 열기가 감도는 요람!

    “우왓!? 어진, 이게 무슨 짓……우왓!?”

    반라의 미녀들이 손을 쫙 뻗고 있는 그곳으로, 드레이크는 떠밀려 갔다.

    “……좋아! 나한테 맡겨라 친구!”

    이내, 드레이크는 내 쪽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과연 탑 티어 급 랭커다운 적응력…일까?

    ‘……저런 캐릭터였나.’

    나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재빨리 하렘을 스쳐 지나갔다.

    이내, 열 마리의 서큐버스들이 마법을 쓰는 소리가 들린다.

    칠흑의 뱀 요르문간드와 드레이크 역시도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띠링!

    <악(惡)의 고성 심층부 ‘대왕의 제전(2)’에 입장하셨습니다>

    <최초 방문자의 이름이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됩니다>

    안내음이 한 번 더 들려온다.

    내가 들어온 곳은 서큐버스의 하렘을 지나야 진입 가능한 최심층부.

    악의 고성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구역이다.

    대왕의 제전 (1)은 드레이크에게 맡겼으니 (2)는 무슨 일이 있어도 클리어해야 한다.

    나는 각오를 다진 채 계속해서 안으로 들어갔다.

    모든 것이 어두운 방.

    나는 바닥에 나 있는 붉은 카펫을 따라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이내.

    거대한 돌기둥들을 지나자 높은 계단과 그 위에 존재하는 왕좌가 보인다.

    드높은 왕좌에는 한 명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창백한 안색, 흰 머리. 몸을 뒤덮고 있는 칠흑의 갑주.

    이마에는 검게 솟아오른 두 개의 뿔을 가졌다.

    검은 불길이 타오르고 있는 망토를 걸치고 손에는 붉은 장갑(裝甲)을 착용했다.

    냉막한 이목구비.

    하지만 오로지 눈만은 웃는 듯 부드럽게 휘어져 있다.

    무엇보다 특이한 것은 그의 눈동자였다.

    흰자위 따위는 없다.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검은 눈.

    그것은 주변을 온통 잠식하고 있는 어둠보다도 훨씬 더 어두운 눈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독보적으로 어두웠기에 오히려 눈에 똑똑히 보일 정도.

    [……나는 누구지. 기억이 나지 않아.]

    왕좌에 앉아 무거운 목소리로 혼자 독백하는 왕.

    그가 바로 바실리스크와 샌드웜에 이은 세 번째 보스 ‘어둠 대왕’이다!

    <어둠 대왕> -등급: A+ / 특성: 어둠, 혈액포식자, 소환, 선택

    -서식지: 악의 고성, 싸움 나락

    -크기: 2.5m.

    -아득히 오래 전. 지옥과 천상이 격돌할 때, 전장의 최선두에서 수없이 많은 천사들의 심장을 노획한 군주가 있었다.

    그는 모든 흡혈귀들의 왕이었으며 7대 마왕 중 하나인 루시퍼가 가장 신임하는 부하이자 남대륙 본토에서는 적수를 찾을 수 없는 어둠의 용자였다.

    그의 손에 죽은 천사들의 수가 백만이 넘어갈 무렵부터, 모든 종족들은 그를 부를 때 본명 대신 어둠의 대왕이라고 칭하기 시작했다.

    “…….”

    나는 어둠 대왕을 바라보며 전율을 느꼈다.

    어둠 대왕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은 그야말로 압도적인 것!

    ‘전생에서 한번 겨뤄 본 적이 있었지.’

    나는 그리움과 흥분이 공존하는 눈으로 어둠 대왕을 바라보았다.

    원래대로였다면 나는 앞으로 10년 뒤에나 이 자리에 설 수 있다.

    그리고 눈앞의 저 어둠 대왕과 1:1로 싸우게 되었을 것이다.

    그 당시 나름 한국랭킹 100위권의 고수였던 나는 어둠 대왕과 24시간을 맞서 싸웠다.

    도중에 칼이 깨지면 다른 칼로 바꿔 들었고 방패가 깨지면 다른 방패로 바꿔 들었다.

    온갖 주문서와 물약, 방송 중계를 보고 있던 시청자들의 훈수와 함께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 것도 없다.

    있는 것이라곤 오로지 맨몸.

    그리고 지난 15년 동안 겜창으로 살며 살에 새기고 뼈에 사무쳐들게 한 숙련도뿐!

    [……기억이 나지 않아. 나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어둠 대왕이 왕좌에서 일어났다.

    ‘저런 대사가 있었던가?’

    나는 바짝 긴장한 채 뒤로 물러섰다.

    내 기억 속 어둠 대왕은 저런 대사를 내뱉지 않았다. 그저 살육에 취해 껄껄 웃어 대기만 했을 뿐이다.

    이성을 완전히 상실한 채로.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어둠 대왕은 그때와는 전혀 다르다.

    미친 듯 광소만 터트리던 때와 달리, 또렷한 발음으로 대사를 내뱉는다.

    검게 물든 두 눈에서는 광기(狂氣) 대신 고뇌의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

    하지만.

    어둠 대왕이 옥좌에서 일어서자.

    쩌적- 쩌적-

    그 기세만으로도 주변의 돌바닥들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나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어둠 대왕은 대사만 약간 바뀌었을 뿐, 내 기억 속의 전투력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첫 발견자만 들을 수 있는 대사일까?’

    아마 내 짐작이 맞을 공산이 크다.

    모든 첫 발견자는 아무래도 그 뒤의 후발대에 비해 뭔가 색다른 과정을 추가로 겪을 가능성이 다분하니까.

    가령 뭔가 다른 보상을 받는다거나, 숨겨져 있는 게임 설정을 알게 된다거나…….

    ‘녹화 잘 되고 있지?’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우측 상단을 살폈다.

    ●[REC]

    모든 영상은 이상 없이 녹화되고 있다.

    ‘조디악 번디베일, 그 미친놈은 보스 몬스터의 숨겨진 설정 같은 건 그냥 무시해 버렸을 테니까.’

    사이코가 뭘 알겠나? 놈은 누군가를 괴롭히는 것 말고는 관심 없는 존재.

    그런 놈에게 어둠 대왕의 숨겨진 설정을 알 기회를 준다는 것은 실로 아까운 일이다.

    이내.

    나는 계단을 내려온 어둠 대왕과 마주하게 되었다.

    원래대로라면 이 자리에서 서 있어야 하는 이는 조디악 번디베일.

    내 차례는 지금으로부터 10년 뒤에나 온다.

    하지만.

    나는 지금 이 자리에 당당히 서 있다.

    3신기(三神技). 신조차 죽일 수 있다고 알려진 세 아이템.

    바실리스크의 심장.

    샌드웜의 가죽.

    그리고 그 두 아이템의 뒤를 잇는 마지막 조각, 히든 피스!

    그것을 눈앞의 어둠 대왕이 가지고 있다.

    쿵-

    나는 앞으로 크게 한 발을 내딛었다.

    눈앞의 짙은 어둠은 이제 곧 나의 힘이 될 것이다.

    밝은 미래로 가기 위한 칠흑 같은 어둠.

    나는 눈에 힘을 주고 어둠 대왕을 마주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눈부신 어둠, 그 아이러니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