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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77화 (77/1,000)
  • 77화 히든 피스 (3)

    “드디어 도착했네.”

    나는 축축한 흙과 썩은 낙엽으로 덮인 계곡 꼭대기에 섰다.

    눈앞에는 거대한 성벽이 보인다.

    <악(惡)의 고성> -등급: A

    성벽은 마치 썩어서 주저앉은 잇몸처럼 생겼다.

    닳아 문드러진 성가퀴들이 그 위에 드문드문 충치처럼 올라서 있었다.

    드레이크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 역시 성벽의 을씨년스러운 모습을 보고 몸을 한번 파르르 떤다.

    “남쪽인데도 쌀쌀하군.”

    남대륙은 열대성 기후가 대부분인 지역.

    하지만 이곳만은 물안개가 짙게 껴 쌀쌀하다.

    “바로 다이브하지.”

    나는 악의 고성의 정문.

    썩어서 주저앉아 있는 나무문을 가리켰다.

    우리는 크레바스처럼 깊은 해자를 건너 성문에 난 구멍으로 들어갔다.

    “그 인검 열쇠를 쓸 곳이 여기는 아닌가 보군?”

    드레이크는 뻥 뚫린 성문을 바라보며 내게 농담을 걸었다. 왜 저렇게 열쇠에 집착하는 건지 원 참.

    뭐, 아무튼.

    나는 이 저주받은 성을 곧장 가로질러 보스에게 직접 통하는 비밀 문을 찾아낼 것이다.

    ‘말하자면…백도어(Back Door)랄까?’

    이 성의 외곽에는 보스방으로 바로 직통으로 뚫린 비밀통로가 있다.

    당연히 15년 동안 이 게임을 플레이한 고인물만이 알 수 있는 특급정보지.

    ‘다만 문제는…이 성에 쫙 깔린 귀찮은 좀비들을 뚫고 가야 한다는 건데…….’

    성 안의 좀비들은 정말 많다.

    지금이 낮이라고 해도 그 수를 다 상대하려면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피해 가는지가 관건.

    …….

    바로 그때.

    “어?”

    나는 생각 도중 발을 멈칫했다.

    “꺄아아아악!”

    저 앞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유다희.

    그녀가 느려터진 좀비들에게 쫒기며 울상을 짓고 있었다.

    찢어진 셔츠 속으로 출렁거리는 가슴, 과하게 씰룩거리는 엉덩이, 볼 위로 주르륵 흘러내리는 악어의 눈물.

    나는 표정을 절로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쟤는 저기서 뭐 하는 거야?’

    기껏 부푼 마음으로 최종보스를 잡으러 왔더니 웬 이상한 것이 초를 치고 있다.

    심지어…….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그녀는 좀비들을 상대로 생존 스릴러 페이크 다큐를 찍고 있다. 누가 봐도 가식적인 모습. 저런 것에 누가 속을까?

    “어진! 저기 여자가 위기에 빠져 있다! 구해 줘야 한다!”

    ……얘가 속네.

    나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옆에 있는 드레이크를 돌아보았다.

    “이봐, 똑바로 보라고. 저번에 샌드웜 레이드에서 만났던 여자잖아.”

    “…아? 그런가? 동양인 얼굴은 구분하기가 어려워.”

    드레이크는 그제야 사태를 파악했다.

    샌드웜 레이드 당시에도 유다희의 레벨은 꽤 높았었다.

    이런 곳에서 땡볕에 너프된 좀비들에게 잡힐 정도로 약하지 않다는 말이다.

    “뭐, 어그로가 쏠려서 좋네. 우린 이 틈에 가자고.”

    이번 생에서 설마 유다희의 덕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나와 드레이크는 조심조심 성벽에 붙어 구석으로 기어갔다. 유다희를 쫓아다니는 팬클럽(?)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하며.

    “그런데 어진, 지금 뭘 찾는 건가?”

    드레이크는 내 뒤를 따라오며 작게 물었다.

    나는 손가락을 뻗어 성의 외곽, 무너져 내린 성당의 한켠을 가리켰다.

    한때는 고해성사실이 있었을 그곳은 지금 뻥 뚫려 있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눈과 입이 뻥 뚫려 있는 여자 좀비 하나가 흐느적거리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험담쟁이 카밀라> -등급: B / 특성: 어둠, 언데드, 독

    -서식지: 악의 고성

    -크기: 1.6m.

    -남의 말을 전하고 다닌 죄로 혀가 뽑힌 채 생매장된 여자.

    어둠에 오염된 것은 오히려 그녀에게 있어서는 축복이었을지도.

    “찾았다, 카밀라.”

    나는 고해성사실 앞을 배회하는 이 네임드 몬스터를 향해 눈을 빛냈다.

    성가대 복장을 하고 있는 이 여자 좀비는 허리에 낡은 오보에를 달고 있었다.

    [우어어- 에에에엑-]

    카밀라는 이내 내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뻥 뚫린 입 속에서 보라색으로 길게 늘어진 혀를 덜렁거리며 달려왔다.

    “별로 강해 보이지는 않는군.”

    드레이크가 바로 쇠뇌와 마름쇠를 꺼내들었다.

    후두둑- 후둑-

    바닥에 떨어진 마름쇠들이 카밀라의 앞길을 꼬챙이 가시밭길로 만든다.

    푹- 푹- 뿌직-

    카밀라는 쇠꼬챙이의 길에 그냥 무작정 뛰어들었다.

    살가죽이 찢어지고 근섬유들이 픽픽 끊어져 나간다.

    당연하게도, 카밀라는 그대로 바닥에 엎어져 버둥거리게끔 되었다. 두 발바닥이 넝마쪼가리가 되었으니 당연하다.

    드레이크는 그런 카밀라의 뒤통수와 혓바닥에 화살을 몇 대 박아 넣었다.

    퍼퍽! 퍽!

    썩은 혈액이 요란하게 튄다.

    카밀라는 격렬하게 버둥거렸지만 딱히 무언가를 하지는 못했다.

    드레이크는 고개를 갸웃했다.

    “보통 좀비들은 자폭 특성이 있기 마련인데……. 이 녀석은 그게 없군?”

    “눈썰미 좋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손을 들어 만류하자, 드레이크는 쇠뇌를 거두고 뒤로 반 보 물러섰다.

    그러자.

    -띠링!

    이내 버둥거리던 카밀라의 머리 위로 느낌표가 하나 떴다.

    [남의 말을 전하고 다닌 게 그리 큰 죄였을까요?]

    이내, 카밀라의 시체 위로 반투명한 영혼이 떠오른다.

    카밀라의 생전 모습을 하고 있는 유령.

    그리고.

    -띠링!

    <히든 퀘스트 ‘험담의 대가’를 발견하셨습니다>

    이내 익숙한 알림음이 떴다.

    히든 퀘스트.

    험담쟁이 카밀라는 이내 나와 드레이크에게 퀘스트를 주었다.

    [신부님은 험담쟁이인 제게 벌을 주셨어요. 성당 지붕에 올라가 베개를 칼로 찢은 뒤 흩날린 깃털들을 모두 주워 모으는 것이에요. 저는 그것을 완수하지 못하고 죽었지요. 그게 한이네요.]

    카밀라는 손에 하얀 베개피를 들었다. 그것은 길게 찢어져 있었다.

    이내, 퀘스트의 자세한 내용이 떴다.

    -띠링!

    <험담쟁이 카밀라를 도와 깃털을 모으자!>

    -흰 깃털 모으기 0/19,910,321

    그것을 본 드레이크는 입을 딱 벌렸다.

    “너무 많잖아!”

    확실히, 이 주변에는 베개 안에 들어 있던 것으로 보이는 흰 깃털들이 즐비하다.

    하지만 이것들을 다 언제 주워 모은단 말인가?

    드레이크가 바람에 날아가는 몇 장을 주웠지만.

    <험담쟁이 카밀라를 도와 깃털을 모으자!>

    -흰 깃털 모으기 12/19,910,321

    고작 12장을 모았을 뿐이다.

    드레이크는 암담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다.

    나는 답답하다는 얼굴로 그런 드레이크의 어깨를 몇 번 툭툭 쳤다.

    “이 퀘스트는 그렇게 깨는 게 아냐.”

    그와 동시에.

    쿵-

    나는 발을 굴렀다.

    간쇼마루의 신발이 뜨거운 열을 내며 바닥의 폐목에 불을 질렀다.

    쿠르륵-

    불길에 닿은 깃털들은 순식간에 모두 타버린다.

    -띠링!

    <험담쟁이 카밀라를 도와 깃털을 모으자!>

    -깃털 모으기 12/12

    드레이크의 손에 들려 있는 12개를 제외하고는 모든 깃털들이 사라졌다.

    드레이크는 가볍게 투덜거렸다.

    “……에이, 좀 억지 아닌가?”

    “원래 퀘스트 자체가 억지잖아. 저걸 어떻게 다 모으냐고, 2천만 개나 되는데.”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흰 깃털 12개를 가져가 카밀라의 영혼에게 넘겼다.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지만, 말을 들은 사람을 죽여서 소문을 막을 수는 있어.”

    그러자.

    내 위로(?)를 들은 카밀라는 밝은 표정으로 깃털을 받아들였다.

    [고마워요! 덕분에 깃털을 모두 모을 수 있었어요!]

    그녀는 이내 하늘로 승천한다.

    동시에, 그녀는 추신을 남겼다.

    [찢어진 게 흰 베개라서 다행이에요. 만약 검은 베개였다면 큰일이 났을 걸요?]

    드레이크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했다.

    저게 무슨 뜻일까?

    하지만 나는 그 말의 뜻을 이미 알고 있다.

    나는 카밀라의 영혼이 사라지고 난 뒤, 그녀가 있던 고해성사실을 뒤졌다.

    그러자, 이내 카밀라가 남긴 아이템 하나가 드랍 되었다.

    -<험담쟁이 카밀라의 검은 보따리> / D

    카밀라는 자기 전 베개에 대고 수다를 떠는 습관이 있었는데 좋은 소문은 흰 베개에 대고 털어놓고 나쁜 소문은 검은 베개에 대고 털어놓았다고 한다.

    미담은 느리게 퍼지지만 험담은 그보다 훨씬 더 빨리 퍼진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아이템.

    겉보기에는 베개에 가깝지만 사실은 보따리이다.

    “이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드레이크는 검은 보따리를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줘 봐.”

    나는 드레이크에게서 검은 보따리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쫘악-

    단도를 꺼내들어 그것을 확 찢어 버렸다.

    그러자 그 안에서 수없이 많은 검은 깃털들이 나부낀다.

    카밀라가 줍고 있었던 흰 깃털과는 다르게, 검은 깃털들은 놀라운 속도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 검은 깃털들은 무수히 많은 궤적을 그리고 하늘로 날아오른다.

    이윽고.

    하늘에 닿은 검은 깃털들은 이변을 일으켰다.

    쿠르릉-

    갑자기 몰려오기 시작한 먹구름.

    스스스스-

    빗방울이 옅게 떨어지기 시작한다.

    태양빛은 점점 줄어들더니 종국엔 아예 사라져 버렸다.

    갑작스럽게 밤이 찾아왔다.

    “……호오? 일정 범위 내의 밤낮을 바꾸는 아이템이었나?”

    드레이크는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참으로 별 효과를 가진 아이템이 다 있다 싶다.

    이윽고.

    악의 고성은 낮밤이 뒤바뀌게 되었다.

    성벽을 넘어서면 낮이지만, 적어도 이 공간만큼은 칠흑과도 같은 밤에 잠긴다.

    -띠링!

    <밤이 되었습니다>

    <죽은 자들이 고개를 듭니다>

    <죽은 자들이 주변을 확인합니다>

    밤이 되자 오싹한 알림음이 들려왔다.

    후욱-

    좀비들이 뿜어내는 숨소리가 더욱 강렬해졌다.

    “여윽시 악의 고성은 밤에 와야 제맛이지!”

    나는 개운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이제 한 관문을 넘었다.

    보스방으로 통하는 비밀문은 오로지 밤에만 열리기에 일부러 카밀라의 히든 퀘스트까지 찾아 깼다.

    ……애초에 밤에 오면 안 되는 거였냐고? 그러면 좀비들 때문에 귀찮잖아.

    나는 뭐든 쉽게쉽게 가자는 주의라서 말이지.

    “…….”

    고개를 돌리자, 저 앞 성의 내벽과 폐허의 터가 연결되는 경사로에 커다란 구멍이 나 있는 것이 보인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힘든 변화.

    그렇다.

    졸졸졸졸-

    오물과 핏물이 섞여 흘러나오고 있는 하수도. 그곳에 채워져 있던 철창의 자물쇠가 열렸다!

    개구멍이 생긴 것이다!

    ‘오로지 밤에만 생기는 개구멍이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겠지만.’

    밤이 되면 좀비들에게 쫓기기 때문에 이런 외진 구석의 지형변화까지는 알아차리기 힘들 것이다.

    오죽했으면 15년 뒤에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을까?

    나는 드레이크에게 손짓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막 비밀통로를 향해 한 걸음을 떼려는 순간…….

    “야!!!”

    저 멀리서 이쪽을 향한 샤우팅이 들려왔다.

    ……?

    뭔가 싶어 고개를 돌리니, 폐목재들 사이에서 고개를 내밀고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여자가 보인다.

    유다희다.

    패기 좋게 외친 것은 좋지만, 그 때문에 좀비들의 주목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그녀는 조금 당황하는가 싶더니…….

    “너 이 샊! 거기 딱 기다려!”

    내 쪽을 향해 미친 듯이 뛰어오기 시작했다.

    “아, 뭐 저런 게 다 있어.”

    나는 노골적으로 귀찮은 티를 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노골적으로 귀찮기 때문이다.

    휙-

    나는 유다희를 무시한 채 드레이크를 끌고 하수도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기다려어! 기다리구우! 기다리란 말이야으아아아아!”

    유다희는 마치 홈을 향해 도루하는 야구선수처럼 달려와 슬라이딩을 했다.

    촤악-

    오물과 핏물이 배에 닿아 튀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아했다.

    [우어어어어어!]

    발끝에 닿을 듯 몰려오는 좀비 떼의 이빨과 손톱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도 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철컹-

    창살이 맞물리는 소리가 싸늘하게 들려왔다.

    졸졸졸-

    하수도 아래.

    핏물이 섞인 구정물 한 줄기만이 조용히 흐르고 있을 뿐이다.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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