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히든 피스 (1)
마동왕으로 프로리그 입단 계약서를 쓰고 난 뒤.
며칠인가의 시간이 흘렀다.
-띠링!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당신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나는 또다시 게임에 접속했다.
이번엔 고인 물, 원래 나의 메타로서.
쿵-
나는 알몸으로 땅 위에 착지했다.
그러자, 저 앞 바위에 걸터앉아있던 남자가 일어나 반긴다.
짙은 눈썹과 적갈색의 눈, 호남형 얼굴에 큰 키를 가진 사내.
바로 드레이크였다.
“늦었군.”
“미안, 이런저런 처리할 것이 있어서.”
오늘은 드레이크와 레이드를 같이 뛴다.
나 혼자서는 힘든 던전을 공략할 계획이기 때문이다.
3신기!
3개가 조합되면 신도 죽일 수 있다는 아이템.
나는 오늘 그 중 마지막 것을 손에 넣을 계획이다.
샌드웜, 바실리스크에 이은 마지막 A+급 몬스터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잠시 들릴 곳이 있어.”
나는 드레이크를 데리고 중앙대륙의 초보자 마을로 향했다.
* * *
퍼엉- 쿵- 푸슉- 삐이익- 쾅- 철커덩-
온갖 고물들이 산더미처럼 늘어져 있는 곳.
나와 드레이크가 찾은 곳은 바로 ‘고물상’이었다.
강철과 가죽, 광물, 뼈, 목재, 석조, 그 외 각종 폐기물들.
쓰레기들이 거대한 탑을 이룬 채 더미를 이루고 있다.
곳곳에서 철과 광물이 서로 부딪쳐 깨지는 소리, 뼈나 가죽이 짓눌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푸슉- 삐이이익-
꽉 눌린 고물들 사이에서는 뜨거운 증기와 함께 기적 소리 비슷한 것들이 뿜어져 나온다.
“굉장하군. 이런 곳도 있었나?”
드레이크는 놀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멀리서 보면 크고 장엄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이렇게 쓸데없는 것들의 집합이 또 없다.
모든 파괴되고, 버려지고, 낡고, 쓸모없는 것들이 죄다 여기에 쌓여 있었다.
부러진 칼, 구멍 난 방패, 닳아버린 갑옷, 찢어진 워커, 깨진 보석, 녹슨 투구, 썩어 버린 물약…….
그것들은 무거운 철추에 깔려 한데 뭉쳐지고 있다. 그러면서 발생한 뜨거운 열은 고물과 폐기물들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것이다.
삐익-
뿌연 수증기가 강철과 광물들이 뒤엉킨 더미 사이로 뿜어져 나온다.
그리고, 그 가운데 있는 널찍한 공터에 세 명의 사람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고물상인 NPC들이다.
첫 번째로 보이는 이는 훤칠한 키에 서글서글한 인상을 가진 남자였다. 이름은 ‘그레이드’
[등급이 높은 아이템이 깨졌나요? 저에게 가져오시면 값을 잘 쳐 드리겠습니다]
두 번째로 보이는 이는 섹시한 몸매에 한쪽 팔만 강철로 된 여자다. 이름은 ‘리엔포스’
[아앙? 강화가 많이 된 아이템이 깨졌다고? 어차피 똥값 된 것 그냥 나한테 넘기는 게 어때?]
세 번째로 보이는 이는 키 작고 추레한 노숙자였다. 이름은 ‘홈리스’
[폐 아이템 줍는 것도 꽤나 쏠쏠한 부업이라네. 깨진 게 필요 없다면 나 주게나]
세 명의 고물상인들을 본 드레이크는 나를 돌아보았다.
“여기에는 왜 온 건가?”
나는 대답 대신 인벤토리를 열어 아이템 하나를 보여 주었다.
-<인검(印劍)> / 양손무기 / B+
어둠 대왕은 몽마들에게 막강한 권한을 하사하였다.
그들은 별도의 보고 없이도 반역자들을 즉결 처단할 수 있다.
-공격력 +2,000
-어둠 속성 공격력 +900
-어둠 속성 저항력 -70%
-특성 ‘이상성욕’ 사용 가능
인검.
‘켠김에 제왕까지’ 프로그램에 출현해서 용자의 무덤을 공략했을 때 얻었던 아이템.
당시 나는 서큐버스를 잡고 이 아이템을 얻은 바 있다.
인검의 능력치는 상당히 준수한 편이었다.
깡 공격력 2천에 어둠 속성 공격력 900, 도합 2900의 공격력을 가졌다.
붙어 있는 특수 옵션은 ‘이상성욕’
상태이상에 걸렸을 때 공격력이 증가하는 특성이다.
…….
하지만.
그 준수한 능력치의 아이템은 지금 전혀 다른 것으로 변해 있다.
“……뭔가 이 쓰레기는?”
드레이크는 눈살을 찌푸린 채 내 손에 들린 아이템을 쳐다보았다.
-파괴된 칼 조각 / D
파괴되기 전만 해도 명검의 반열에 들었던 칼의 조각. 희미하게 +9강의 냄새가 풍긴다.
인검.
아니, 한때 인검이었던 아이템.
그것은 지금 D등급의 쓰레기 잡템으로 바뀌어 있었다.
“+9강까지 강화했다가 10강에서 깨져 버렸지.”
“…9강이라고? 왜 그런 짓을 했나!”
내 말을 들은 드레이크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인검 정도의 능력치를 가진 고등급 칼이었다면 +9강이라는 시점에서 엄청난 가치를 지니게 되었을 터이다.
모르긴 몰라도 슈퍼카 한 대쯤은 살 수 있었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 그것을 깨 먹었다니?
드레이크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내 손 안의 칼 조각을 바라본다.
하지만.
나도 다 생각이란 게 있다.
이 칼의 능력치는 초보들이 혹할 만한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이 아이템은 금세 어디에도 쓰이지 못하게 된다.
바로 어둠 속성 저항력 디버프 옵션 때문이다.
<어둠 속성 저항력 –70%>
이 옵션이 가지는 엄청난 디메리트를 지금 유저들은 아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중에 대격변이 일어나게 되면…….’
나는 얼마 뒤의 미래를 생각했다.
지금이야 필드를 돌아다니는 몬스터들의 속성이 제각각이지만, 훗날 대격변이 일어나게 되면 모든 필드, 던전의 몬스터들은 전부 타락하거나 오염되게 된다.
자연스럽게 대부분의 몬스터들은 전부 ‘어둠’ 속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때가 되면 인검이 가지고 있는 이 ‘어둠 속성 저항력 –70%’라는 옵션은 그야말로 치명적인 디버프로 변한다.
‘이 칼은 마검(魔劍) 그 자체지.’
인검은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둠에 먹혀 버린다.
준수한 공격력을 가졌지만 단지 그뿐.
서큐버스는 죽어서 떨군 아이템으로도 상대방에게 해를 끼치는, 그야말로 충직한 어둠의 시녀인 것이다.
‘이걸 누군가에게 비싸게 판다면, 그건 사기겠지?’
나는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은 채 인검을 내려다보았다.
“그런데……왜 쓸데없이 강화는 9강까지 성공하고 난리야?”
생각해 보니 어이가 없네? 전생에서도 가장 높은 강화가 8강이었는데.
‘그러고 보니 집행검도 8강까지 갔었지. 캬, 그놈 참 대단한 A+템이었어…….’
내가 9강까지 성공했었던 감각을 떠올리며 추억에 젖어 있을 때.
“이봐, 어진.”
드레이크가 내 어깨를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그는 내게 물었다.
“네 말을 들어보면, 마치 일부러 이 칼을 깨트리기 위해 강화를 한 것 같은데. 맞나?”
“응.”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숨길 게 무언가?
“…그렇군. 알았다.”
드레이크는 자신의 생각이 맞다는 걸 알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뒤로는 입을 다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지는 나를 따라다니며 볼 테니 더 이상 질문은 필요 없다는 것이겠지.
나는 그의 적은 말수가 참 마음에 든다.
뭐 아무튼.
나는 손바닥 위의 칼 조각을 들고 고물상 중앙의 세 NPC에게 갔다.
내가 먼저 들린 이는 깔끔한 복장에 깐깐하게 생긴 사내. 그레이드였다.
[등급이 높은 아이템이 깨졌나요? 저에게 가져오시면 값을 잘 쳐 드리겠습니다]
그는 파괴된 아이템 중에서도 등급이 높은 아이템을 사들이는 고물상이다.
그가 들고 있는 저울에 칼 조각을 올려놓자.
이내, 아이템의 매각 가격이 떴다.
-파괴된 칼 조각 / D
전 등급: B+
가격: 4503G
그레이드는 외눈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이것은 파괴되기 전만 해도 꽤나 등급이 높은 아이템이었군요. 특별히 비싼 가격에 사 드리죠.]
하지만, 나는 그에게 넘길 생각이 없다.
나는 발걸음을 돌려 그 옆에 있는 기계 팔 여자 리엔포스에게 향했다.
[아앙? 강화가 많이 된 아이템이 깨졌다고? 어차피 똥값 된 것 그냥 나한테 넘기는 게 어때?]
손에는 망치, 입에는 담배.
기름때가 묻은 얼굴이지만 그녀는 참 예쁘다.
나는 그녀가 들고 있는 저울에 아이템을 얹었다.
-파괴된 칼 조각 / D
전 강화도: +9
가격: 6974G
리엔포스는 담배연기를 훅 뿜어내며 말했다.
[오오? 이건…대단하군! +9강까지 강화했던 거야? 10강에서 터져 버린 모양인데! 하핫! 배짱이 대단한 남자로군. 나는 그런 남자가 좋더라. 당장 내게 넘겨! 특별히 가격은 잘 쳐 줄게!]
그레이드의 저울에 올려놨을 때보다 가격이 더 나간다.
확실히 +9강짜리 고물이라 그런가 대우가 좋군.
하지만.
나는 이번에도 발걸음을 돌렸다.
내가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세 번째 NPC 홈리스 노인이었다.
[폐 아이템 줍는 것도 꽤나 쏠쏠한 부업이라네. 깨진 게 필요 없다면 나 주게나]
나는 그가 들고 있는 작은 저울에 칼 조각을 올려놓았다.
그러자.
-파괴된 칼 조각 / D
무게: 1.8 Kg
가격: 72G
홈리스 노인은 내 고물을 무게로 달아 그냥 가격을 내 버린다.
전의 두 NPC와는 확연히 차이나는 금액.
하지만.
나는 거침없이 매각버튼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짤그랑!
내 인벤토리에 돈이 들어온다. 자그마치…72골드가!
동시에.
저울 위에 있던 칼 조각은 사라져 버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드레이크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봐, 그걸 그렇게 팔아도 되나? 차라리 전에 여자 NPC에게 넘기는 게…….”
하지만.
드레이크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한다.
[이보게 친구.]
NPC 홈리스 노인이 다시 내게 말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저 두 사람이 아닌 나를 선택해 준 것은 고마운데……나는 고물상인이라네. 고물이 아닌 것은 받지 않아. 이것은 멀쩡한 아이템이잖은가?]
그는 내가 방금 팔았던 칼 조각을 내게 다시 돌려주었다.
그러자.
“……엇!?”
드레이크의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돌아온 칼 조각은 뭔가 조금 바뀌어 있었다.
-(감별된)파괴된 칼 조각 / 열쇠 / D
얼핏 쓸모없는 폐품인 듯 보이나, 끝 부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치 열쇠처럼 보이기도 한다.
희미하게나마 어둠의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아이템 이름과 설명이 조금 바뀌었다.
“…….”
나는 시커먼 칼 조각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절묘하게 빠진 이, 뾰족뾰족한 절단면.
칼 조각은 마치 열쇠와도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사실 세 번째 고물상인은 아이템 감정사야. 앞의 두 고물상인은 낚시용이지.”
내 말에 드레이크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파괴 전 등급과 강화도에 따라 고물의 가격이 차별화된다는 디테일한 설정, 그리고 두 NPC의 개성 있는 외모 때문에 깜빡 속아 버렸다.
설마 낚시용으로 만들어진 NPC였을 줄이야.
“가끔은 깨져야 진짜 가치가 발휘되는 아이템들이 있어. 그런 히든 피스들을 감정하려면 저 노인 NPC에게 가져가면 돼.”
정말 고물이라면 몇 천 골드쯤은 손해 보겠지만…….
만약 고물이 아니라 히든 피스라면 개이득일 것이다.
“참고로 앞의 두 NPC는 히든 피스든 고물이든 그냥 돈 받고 먹어 버리니 가능한 이용하지 말고.”
내가 조언하자, 드레이크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드레이크는 내 손에 들린 검은 열쇠를 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툭하면 히든 피스로 열쇠가 나오는군? 바실리스크 레이드 때도 그랬고.”
“응? 그게 왜?”
“그냥 뭔가 설정놀음 같달까? 이런 설정은 만드는 작가만 재밌는 게 아닐까 싶다. 실제로 스토리를 따라가는 쪽은 뭐랄까…재미도 없고 지친단 말이지.”
“……걱정 마. 열쇠 가지고 질질 안 끌어. 진도 빨리빨리 뺄 거야.”
“제발 그랬으면 좋겠군.”
“다음에 바로 목적지로 가서 보스 잡을 거니까 너무 답답해하지 말라고.”
나는 하차하겠다고 투덜거리는 드레이크를 잘 달래며 고물상을 벗어났다.
그래, 열쇠 아이템으로 떡밥 뿌리는 건 나도 지겹다. 쓰는 놈이나 재밌지 그런 건.
게임은 추리소설이 아니다.
뭐니뭐니해도 스토리 팍팍 진행해 나가는 맛으로 하는 것이지!
“자, 가자.”
나는 드레이크와 함께 마을을 떠났다.
3신기 중 최종 템트리.
마지막 아이템을 손에 넣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