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야겜 H씬 (3)
“우와! 늦겠다!”
홍영화는 잽싸게 택시정류장으로 뛰어나갔다.
오늘은 BJ고인물, 어진을 만나기로 한 날이다.
미팅 시간은 5시.
앞으로 1시간 반 정도 남았지만 오늘 미팅 상대가 상대이니 만큼 적어도 1시간 정도는 일찍 나가 있을 계획이었다.
‘파이팅이다, 복덩아! 다음 방송 출연 의사도 꼭 물어보고! 출연료 같은 건 신경 쓰지 말고 팡팡 질러! 내가 다 책임진다! 넌 얼마를 부르든 간에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섭외만 해 와!’
조태호 부장이 신신당부하던 것이 떠오른다.
어진과의 방송 계약을 체결한 이후, 홍영화는 팀에서 복덩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었다. 이번 미팅에도 팀원들의 기대가 크다.
‘반드시 부응해야 해!’
홍영화는 자그마한 두 주먹을 야무지게 콱 말아 쥐었다.
“택시!”
그녀는 지나다니는 차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정류장에는 한 대의 택시도 없었다. 빈 차들도 다 예약 표시를 달고 쌩 지나쳐 가기 일쑤다.
“으아, 택시!”
홍영화는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으로 다시 손을 흔들었다.
그렇지만 택시는 여전히 잡히지 않고 있다.
바로 그때.
빵빵-
택시 정류장에서 누군가 클락션 소리를 울린다.
“……?”
홍영화가 뭔가 싶어 고개를 돌리자, 이내 차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검은색 바디에 붉은색 내장을 가지고 있는 오픈카. 한눈에 보기에도 초고가임을 알 수 있는 슈퍼카다.
포르쉐 크로커다일. 그것이 지금 홍영화의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쳇, 뭐야. 차 좋다고 자랑하는 거야? 그래 난 서민이라 택시 탄다!’
홍영화가 막 셀쭉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안 타요?”
운전석 창문이 내려가며 얼굴 하나가 쑥 튀어나온다.
…….
바로 나다.
* * *
부웅-
나는 차를 몰고 오늘 미팅 장소로 향하는 길이다.
‘켠김에 제왕까지’는 성공적으로 방영되었다. 오늘은 그 후기를 듣기 위한 미팅.
막 약속장소로 가는 골목에 접어드는 순간.
저 멀리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 여자가 보인다.
홍영화.
그녀는 몸매의 굴곡이 잘 드러나 보이는 검은 니트에 블랙 진을 입고 있었다.
신고 있는 힐 역시 검은색이다. 걸치고 있는 코트가 갈색이라서 올 블랙 패션과도 잘 어울렸다.
“저 사람은 뭐 혼자 화보를 찍고 있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홍영화를 스쳐 지나갈 때마다 흘끗흘끗 돌아보는 것이 보인다. 확실히 아우라가 다르긴 다르네.
생전 저렇게 예쁜 여자를 실제로 볼 일이 또 있을까?
‘아, 한번 있었지.’
문득 유다희 생각이 난다.
그녀 정도는 되어야 저기 있는 홍영화와 미모를 견줄 수 있겠지.
‘뭐 인성은 비할 바가 아니지만 말야.’
나는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클락션을 울렸다.
빵빵-
그러자, 홍영화는 이쪽으로 다가오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우와, 뭘 타고 다니시는 거예요?”
“차요.”
“그건 아는데. 와, 엄청 비싸 보이네요.”
홍영화는 조심스럽게 조수석 문을 열고 탔다.
통!
행여나 생채기라도 날까, 조수석 문을 살포시 닫는 그녀다.
“응? 조수석 문 안 닫혔어요. 조금 더 세게 닫으세요.”
“아앗, 그러다 흠집이라도 나면…저는 물어드릴 돈이 없어요, 흑흑.”
“……됐으니까 세게 좀 닫아 봐요.”
그제야 홍영화는 조수석 문을 쿵 소리 나게 닫았다. 그리고는 살짝 내 눈치를 본다.
“기스 안 났죠? 기스 안 났죠?”
“…안 났을 거예요. 났어도 청구 안 할게요.”
“앗, 진짜죠? 녹음해야 돼, 이건.”
“…….”
나는 그녀를 잠시 무시한 채 차를 몰아 한적한 카페로 향했다.
이내. 나와 그녀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홍영화가 먼저 말을 걸었다.
“저녁은 드셨어요?”
“…지금 3신데요? 아직 점심 먹은 지 한 시간도 안 됐어요. 뭐 이리 일찍 나오셨어요?”
“어진 씨 만나는 데 늦을까 봐요.”
“…다음부터는 좀 늦어도 되니까 시간 맞춰 오세요. 두어 시간씩 일찍 나오시는 건 너무 죄송스럽잖아요.”
“앗? ‘다음부터’? 그 말인즉슨 다음에 또 만나 주신다는 뜻?”
“…….”
나는 한숨을 쉬며 차를 주차장에 댔다.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하는 동안, 홍영화는 연신 나를 빤히 바라본다.
나는 계속되는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물었다.
“왜 그렇게 빤히 바라보세요, 자꾸?”
“좋아서요.”
“뭐가요?”
“어진 씨가요.”
홍영화는 싱긋 웃으며 대답한다.
딴에는 스물다섯이라고 네 살 어린 나를 놀려 보려는 모양이겠지만, 안타깝게도 내 속은 그녀보다 열 살은 더 많다.
나는 홍영화를 돌아보았다.
“저도 좋아해요.”
“……!”
내 말에 홍영화의 얼굴에서 잠시 미소가 걷혔다.
이내 빠르게 달아오르는 홍영화의 얼굴,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빙긋 웃었다.
“저도 제가 좋아요.”
“아, 뭐야!”
홍영화는 이내 표정을 찌푸리고는 고개를 돌린다.
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핸드폰을 들어 보였다.
핸드폰 속에는 지난 번 방영된 ‘켠김에 제왕까지’가 재생되고 있었다.
“자, 일 얘기나 합시다.”
“…….”
이내, 홍영화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나를 따라 소파에 앉는다.
나와 그녀는 이내 방송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홍영화는 일 이야기를 하자 바로 사무적인 어조로 바뀌었다.
그간의 어리버리한 이미지는 간 곳이 없다.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서두를 꺼냈다.
“일단 방통위에서 경고 먹었어요. 선정적이라고.”
“……죄송합니다.”
나는 바로 꼬리를 말았다.
잠시 한숨을 쉬어 보인 홍영화는 말을 이었다.
“그래도 다행이에요. 19금을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청률이 압도적이었어요. 방송이 괜찮으면 어떻게든 다 본다니까요 사람들은.”
“아하. 반응이 좋아서 다행이에요.”
“맞아요. 방송 마무리가 정말 넘사벽으로 충격이었죠.”
홍영화는 아직도 떨린다는 듯 왼쪽 가슴을 지그시 누른다.
한편.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마무리가 충격이었다고요? 뭐가요?”
“뭐긴요! 마지막에 B+급 아이템 강화하다가 터트리는 거요!”
……아. 그걸 말하는 거였나?
확실히. 가장 많은 댓글이 달렸던 순간이 바로 그때였다.
-아이고 저걸 왜 터트리냐 차라리 날 주지 ㅠㅠㅠㅠㅠㅠㅠ
-고인물 횽...미친거 아냐? +9강짜리를 터트렸어? 그냥 9강일 때 팔지!!!
-B+등급이면 거의 현존하는 최고 등급 아이템 아님? 그걸 +10강으로 질렀다고?
-간덩이가 붓다 못해서 싯타르타 되겠네;;;
-붓다베이비는 보고 배워라
-아니 패기가 거의 미친놈급이네ㅋㅋ저걸 어케 10강까지 스트레이트로 지르지???
-저기 죄송한데 B+급이면 어느 정도예요? 제가 아직 D~C등급 무기만 써봐서...
⤷ C등급 무기가 모닝이면 B+등급 무기는 람보르기니에요~
⤷ 실제로 9강 B+등급 무기 경매장에 팔면 람보르기니 하나는 살 듯ㅎㄷㄷㄷ
⤷ 캬, 스포츠카 한 대 정도는 그냥 꼴아박는 고인물 성님의 패기 보고 지리고 갑니다~오지고지리고알파고렛잇고아리랑고개를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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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으로 어마어마한 수의 댓글들이 달린다.
서큐버스를 잡고 얻은 B+급 아이템의 이름이 무언지, 스펙이 무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다들 그것이 엄청난 가치를 지닌 것이라는 것 정도는 인지하고 있는 상태.
그런 것을 거침없이 10강까지 강화하는 내 패기에 모든 이들이 질려 버린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전혀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건 원래 깨먹으라고 있는 아이템이거든.’
나는 피식 웃었다.
나중에 자세히 리뷰하겠지만, 인검은 사실 등급에 비해 형편없는 능력치를 가진 무기이다.
그것의 진가는 강화 도중 파괴되었을 때만 발휘되는 것.
말하자면…히든 피스랄까?
‘내가 괜히 그 고생을 하면서 용자의 무덤을 오른 게 아니지.’
단순히 능력치만 좋은 아이템을 얻을 거면 그런 곳에서 개고생 안 한다.
정말로 궁극의 히든 피스를 노릴 거면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을 것 같은 곳을 뒤져서 아무도 하지 않을 것 같은 짓을 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홍영화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나중에 시간 괜찮으시면 다음 방송도 나와 주실 수 있을까요?”
“아, 그럼요. 출연료만 빵빵하면요.”
“그럼요. 얼마를 원하시든 그 이상을 맞춰 드릴 겁니다.”
홍영화는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끝에 작은 추신 하나를 덧붙였다.
“그런데 다음 방송 때는 옷을 좀 입고 나와 주실 순 없을까요? 자꾸 선정적이라고 민원이 들어와서…….”
“음. 안 되는데. 옷을 입지 않는 것은 제 신념이라…….”
그러자, 홍영화는 고개를 갸웃한다.
“……왜 옷을 안 입으시는 건데요?”
그녀의 진심어린 질문에, 나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방어구를 입으나 안 입으나 마찬가지니까요.”
“……?”
“그 누구도 저를 때릴 수 없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지요. 어차피 한 대도 안 맞을 텐데 갑옷 좀 안 입으면 어떻습니까? 차라리 다 벗어서 몸이나 가볍게 하는 게 낫지.”
홍영화는 그 말을 듣고 감탄하는 눈치다. 그리고는 혼자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 놈이 슬라임한테 리타이어 당할 뻔했냐?”
“네? 뭐라구요?”
“아뇨. 아무런 말도 안 했어요.”
“방금 슬라임 뭐 어쩌구 하시지 않았나요? 리타이어?”
“아뇨. 슬개골이 좀 아프다고요. 한때는 타이어처럼 질겼었는데. 나이를 먹으니 이거.”
홍영화는 무릎을 톡톡 치며 슬쩍 딴청을 피웠다.
나는 그런 그녀를 향해 물었다.
“한데. 민원이 대체 얼마나 많이 들어왔길래 그래요?”
“음, 많이요. 항의 메일도 진짜 많이 들어왔는데, 최고 기록은 한 명이 3,021통을 보낸 것이네요.”
뭐? 3,021통? 한 사람이 그 많은 항의 메일을 보냈다고? 그게 가능한가?
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자, 홍영화는 정말이라며 내게 핸드폰 화면을 보내 주었다.
“여기 보세요. 이 네티즌이 특히나 악성 메일을 이렇게나 많이…….”
이내, 홍영화의 핸드폰에 항의메일을 보낸 네티즌의 닉네임이 떠올랐다.
<희야나좀바라봐너는나를좋아했잖아>
그 긴 닉네임을 보는 순간.
“푸핫!”
나는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
홍영화는 그런 나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나는 웃음을 그치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는 홍영화에게 말했다.
“걔는 항의할 자격이 있는 애네요.”
* * *
쾅!
책상이 지진이라도 난 듯 요동쳤다.
찌그러진 맥주 캔과 담뱃재들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진다.
“X발! 대체 뭐냐고!?”
유다희.
그녀는 핏발 선 눈으로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켠김에 제왕까지’ 고인물 특집! BJ고인물과 함께하는 용자의 무덤 길라잡이!>
모니터 속에서는 고인물이 연신 몬스터를 때려잡으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이내.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서큐버스 레이드를 끝으로 방송은 종료된다.
쾅!
유다희는 또다시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대체 이놈이 쓰는 아이템이 뭐야!”
유다희는 고인물이 두르고 있는 아이템들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샌드웜을 잡고 얻은 것으로 보이는 망토. 메두사를 잡고 얻은 것으로 보이는 반지.
하지만 그 외의 것들은 하나도 아는 게 없다.
겉보기에는 싸구려 D급으로 보이는 송곳.
그리고 등급 불명의, 아주 흔하게 생긴 빨간 신발.
……뭐 별 거 없다. 흔한 잡템들의 비주얼.
하지만 여태껏 발견, 식별된 아이템 목록에는 분명히 없는 것들이다. 그 점이 신경 쓰인다.
“능력도 모르겠고 등급도 모르겠다고? 젠장! 대체 이 자식의 전략이 뭐지!”
유다희는 방송을 보며 연신 씩씩거렸다.
분명 도트 데미지를 이용해서 사냥을 하는 것 같은데, 도트 데미지 메타는 효율이 구려서 아무도 쓰지 않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저놈은 그 구린 메타를 이용해 남들은 꿈도 꾸지 못할 정도의 고난이도 던전들을 연파해 나간다.
……대체 어떻게!?
“으으, 저놈은 대체 어떻게 몬스터들의 패턴을 전부 알고 있는 거지?”
유다희는 머리만 쥐어뜯을 뿐이다.
설사 게임 개발자, 운영자라고 해도 몬스터들의 개별 AI 패턴을 모두 알기란 불가능하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스스로 문제점을 해결하고 고쳐 나가는 타입의 인공지능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분명 저 녀석은 자신의 실력으로 몬스터를 상대한다는 것인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실력이 있을 리가 없다고!”
유다희는 연신 주먹으로 책상을 친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까지 A등급 이상의 몬스터를 사냥해 본 적이 없는 유저들은 ‘호칭’이 주는 특전의 존재를 아예 모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
“누나. 다 했어.”
옆에서 초췌한 표정의 유창과 부하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각자 노트북 하나씩을 들고 온 상태였다.
“LGB 방송국에 선정성 관련해서 항의 메일 넣었어. 할당량 3천 개 채웠다.”
“저는 방통위에 민원 넣었습니다.”
“저는 맘카페 40여개를 돌아다니며 저격글을…….”
그러자 유다희는 더욱 더 화를 내며 방방 뛴다.
“이딴 걸로는 ‘그 새끼’한테 직접적인 타격을 줄 수가 없어! 죽여야 해! 찾아서 죽여야 한다고! 그래야 그놈이 사망 패널티를 입을 것 아냐!”
“하지만 누나. 우리 실력으로는 그놈 못 죽여. 알잖아. 그놈은 지금 유저들 사이에서 비공식 랭킹 1위로 불린다고.”
유창이 조심스럽게 간언을 하자.
번뜩-
유다희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아니. 하나 있어.”
“……?”
“고인 물. 그 새끼를 죽일 수 있는 실력자가 있다고.”
유다희의 말에 유창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누군데?”
“……호호호. 안 그래도 ‘그’와 연락을 취할 거야. 고인물을 죽여 주기만 하면 뭐든 해 주겠다고.”
말을 마친 유다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가슴을 쭉 내밀었다.
잘록한 허리, 매끈한 다리, 아름다운 얼굴. 그녀의 미모는 아직도 건재하다.
“돈이든 미인계든, 무슨 수를 써서든 ‘그’를 회유할 거야. ‘그’라면 고인물을 죽이는 것도 가능할 게 분명해. 최근 암흑랭킹에서 초신성처럼 떠오른 ‘그’의 실력이라면 분명히…….”
“그래서 ‘그’가 누군데!?”
유창이 몸이 달은 듯 다급하게 캐묻는다.
그러자.
유다희는 유창을 향해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 마동왕이라고 들어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