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야겜 H씬 (1)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검은 해먹에서 인간형 몬스터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눈을 둘 곳에 없게 만드는 비현실적인 몸매.
한번 시선을 마주치면 눈을 뗄 수가 없는 미모.
몽마(夢魔) 서큐버스의 등장이다!
<서큐버스> -등급: B+ / 특성: 어둠, 이상성욕, 레이디 퍼스트, 양자택일, 융합
-서식지: 악의 고성, 자살 숲, 썩고 불타는 땅, 고독 못.
-크기: 1.8m.
-‘어둠 대왕’을 섬기는 시녀. 어지간한 남자는 서큐버스들로 이루어진 하렘에 들어가는 즉시 몸이 녹아내린다.
미모와 함께 전투력도 인정받아 어둠 대왕으로부터 악(惡)의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흐응.”
서큐버스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연보라색 살결은 검은색 망사 갑옷이 덮고 있다.
가슴과 허리, 골반, 대퇴부, 허벅지로 이루어지는 완만하면서도 급격한 곡선, 그것이 눈앞에서 실제로 생동감 있게 움직이는 것을 보니 VR기술의 발전이 새삼 놀라울 정도다.
[와, 진짜 말도 안 되는 몸매네요. 저런 몸매가 세상에 어딨어!]
홍영화가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틀렸다.
나는 정정해 주기로 했다.
“이 몬스터는 실제 사람의 몸매를 참조해서 만들었습니다. 옛날에 활동하던 1991년생 시호자키 아이린이라는 미국계 일본인 그라비아 배우 겸 아이돌의…….”
[으앗!? 됐어요 안 궁금해!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있는 거예요! 변태 같아!]
“변태라뇨. 오해를 하고 계시네요. 저 서큐버스는 몸의 98%가 노출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게 왜요?]
“하지만 저는 신사이기 때문에 가려져 있는 2% 부분에만 시선을 맞추고 있지요.”
[…….]
홍영화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 멍한 표정을 짓는다.
거기에 대고.
나는 가볍게 속삭여 주었다.
“인큐버스도 저런 식이에요.”
[으핫!?]
이내, 도깨비불처럼 허공에 동동 떠 있는 홍영화의 얼굴이 진짜 불꽃처럼 빨갛게 변한다.
[……그래서. 인큐버스는 몇 층에서 나오나요?]
소근소근 물어오는 홍영화.
나는 그녀를 보며 낄낄 웃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음, 사실 애초에 서큐버스를 상대로 이런 여유를 부리는 것은 사치다.
퍼펑!
나는 손가락의 반지를 문질러 소환수를 불러냈다.
칠흑의 뱀 요르문간드!
모든 독과 마법을 튕겨 내는 비늘을 가진 몬스터.
[쉬익!]
녀석은 붉은 혀를 내밀며 나의 몸을 휘감는다. 완벽한 마법 방패.
한편.
“…….”
서큐버스는 그제야 해먹에서 완전히 내려와 바닥에 섰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마 무언가를 고민하는 것 같다.
이윽고.
서큐버스는 무언가를 결정했다는 듯 손뼉을 쳤다. 그리고는 입가에 매혹적인 미소를 띤다.
홍영화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감탄한다.
[와, 예쁘긴 진짜 예쁘네요. 베이글 몬스터 중 甲인듯.]
하지만.
나는 이미 차가운 눈으로 서큐버스의 미소를 흩고 있었다.
‘슬슬 오겠군. 과연 어느 쪽일까?’
나는 알고 있었다.
서큐버스가 벌써 자신의 특성 중 하나인 ‘양자택일’을 발동했다는 것을.
서큐버스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물리 공격력 형태.
그리고 마법 공격력 형태.
물공형과 마공형은 50%의 확률로 정해지며 한번 정하면 바꿀 수 없다. 그것이 ‘양자택일’ 특성.
‘제발 마공 나와라!’
나는 속으로 애타게 빌었다.
만약 서큐버스가 마공형으로 변한다면 요르문간드와는 상성이 좋아진다.
마공형 서큐버스가 제아무리 강력한 공격을 해도, 요르문간드라면 대부분의 공격을 무효화시킬 수 있으니까.
하지만.
기이이이잉-
서큐버스는 이내 허공에 그린 마법진에서 시커먼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바로 ‘시커먼 칼’이었다.
서큐버스의 손에 들린 칼을 보는 순간.
나는 생각했다.
‘아, X됐네.’
동시에.
서큐버스가 눈부신 속도로 칼을 휘둘렀다.
허공에 길게 그어지는 참격!
댕겅!
요르문간드의 목이 순식간에 잘려 나갔다.
물공형 서큐버스!
놈은 어마어마하게 높은 물리 공격력을 가진 몬스터.
요르문간드로는 어떻게 막을 길이 없다. 상성이 아주 나빠졌다.
“호호호호!”
서큐버스는 검은 칼을 들고 엄청난 속도로 접근해 오기 시작했다.
마공형 서큐버스나, 물공형 서큐버스나 엄청나게 빠른 스피드를 지녔다는 점은 같다.
타탁!
나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도깨비불 상태인 홍영화가 부리나케 그런 내 뒤를 따라왔다.
“일단 저 스피드를 어떻게 좀 해야 하는데…….”
[맞아요! 저렇게 빠른데다가 물리공격력도 깡패라니! 어떻게 잡으라고!]
“괜찮아요. 물리방어력은 약해요.”
[그래도 그건 공격을 맞출 수 있을 때 얘기 아닌가요? 지금까지 제가 본 몬스터들 중에 제일 빠른 것 같은…으아아아! 벌써 따라잡혔다아아아!]
홍영화는 문득 정면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가 기겁했다.
생글생글 웃는 낯의 서큐버스가 이미 칼끝을 내 목젖에 거의 닿을락말락하게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빠-악!
서큐버스가 한번 칼을 뻗자, 마치 창과도 같은 참격이 날아와 방 벽에 구멍을 뚫어 놓는다.
슈우우우-
구멍에서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고 있다.
마치 철갑탄이 날아와 박힌 듯한 구멍.
저런 찌르기를 맞았다간 순식간에 배때지에 구멍이 나겠지?
키릭-
서큐버스는 방금의 찌르기를 바로 다시 회수했다.
그리고 칼날을 옆으로 비스듬히 기울인 채 다시 달려들었다.
이제는 못 피한다.
서큐버스와 나의 간격은 이제 무얼 시도하기엔 늦었을만치 좁아졌다.
‘별 수 없나?’
나는 ‘켠김에 제왕까지’의 방송 연령 제한을 조금 높이기로 했다.
“홍영화 씨.”
[네?]
“방송은 19금으로 좀 부탁드려요.”
[……?]
홍영화가 뭐라 대답할 틈도 없이, 나는 인벤토리에서 아이템 하나를 꺼내들었다.
-<슬라임 퀸의 정수> D
슬라임 퀸의 살점을 끓인 뒤 핵심 물질만 걸러낸 것이다.
그것은 유리병에 담긴 핑크색 젤이었다.
퐁!
나는 병의 코르크를 입으로 잡아 뽑은 뒤 그 안에 든 젤을 정면에 확 뿌렸다.
철퍽!
끈적끈적한 핑크색 젤이 서큐버스의 얼굴을 비롯한 전신에 끼얹어졌다.
[……호오?]
서큐버스는 공격을 멈추고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상대방의 스피드가 대폭 저하되었다.
지금 서큐버스의 몸 상태는 그야말로…그야말로…그 야~ ……말로, 표현이 안 된다 이건.
[뭐 하는 짓이야!?]
홍영화가 옆에서 버럭 소리쳤다.
하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다.
“아니, 저렇게 빠른데 그럼 어쩌라구요.”
[방송위한테 경고 먹고 싶어서 작정했어요!? 가뜩이나 선정적인 몬스터를 저 꼴로 만들어 놓으면 어떻게 내보내라고!]
“저게 어때서요? 제가 보기엔 빠른 스피드를 가진 몬스터의 발을 끈적이로 묶어 두는 걸로밖에 안 보이는데요? 음란마귀는 영화 씨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요? 당신의 상상력이 무고한 공략법을 변태 짓으로 만든 게 아닙니까?”
[오히려 나를 변태로 몰고 있잖아!? 완전 뻔뻔!?]
나와 홍영화가 티격태격 설전을 벌이고 있을 때.
[……호호호.]
서큐버스는 슬라임 퀸 젤에 범벅이 된 채로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콰-쾅!
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서큐버스의 찌르기는 앞으로 뻗어나가며 두 개의 샹들리에와 천장에 튀어나온 조각상들을 모조리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어째 아까보다 공격력이 더 올라간 것 같은데요? 화났나?]
“음, 그것은 서큐버스의 특성 중 하나인 ‘이상성욕’ 때문일 거예요.”
[무슨 특성도 그따위야!? 그게 뭔데요!?]
“마비나 독 같은 상태이상에 걸리면 공격력이 높아지는 건데…방금 슬라임 젤을 맞아서 느려졌잖아요. 그것도 상태이상이라면 상태이상이죠 뭐.”
[…그런 건 대체 어떻게 아는 거예요?]
“다 이것저것 시험해 본 터라…으앗!?”
나는 말을 끝까지 이을 수 없었다.
서큐버스가 나를 덮쳐(?)왔기 때문이다.
호다닥-
나는 고개와 허리를 푹 숙이고는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 자리를 벗어났다.
이번에는 정말 간신히 피했다. 종이 한 장 차이였다.
…….
그래서일까?
나 역시도 바닥에 뿌린 핑크색 젤에 온몸이 절여지고 말았다.
내 알몸 위에 끈적하게 끼얹어지는 핑크색 젤.
[……영상 녹화를 종료하시겠습니까? YES.]
“잠깐만요 영화 씨! 이건 제가 의도한 게 아니잖아요!”
[젊은 남녀가 핑크색 젤 속에서 끈적거리면서 육탄전을 벌이고 있는 걸 방송에 어떻게 내보내요! 우린 공중파란 말이야!]
하지만 이미 이렇게 된 것 어쩔 수가 없다.
모든 것이 끈적거리는 핑크색 젤 속에서.
서큐버스는 출렁출렁.
나는 덜렁덜렁.
나의 깎단과 서큐버스의 칼이 계속해서 불똥을 튀기고는 있지만, 별로 장엄하다거나 박진감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이건…이건 그냥…….
[야겜이잖아!]
홍영화가 눈을 질끈 감은 채 빽 소리쳤다.
나는 열심히 변명했다.
“어허, 겜에 H씬이 하나도 없으면 망겜 소리 들어요. 저도 그래서 망생 소리 꽤나 듣고 있죠.”
[당신 사생활에 H씬이 있는지 없는지 하나도 안 궁금하거든!? 진짜 우리 방송 망하는 거 보고 싶어요!?]
“그러니까 19금 딱지 달면 되잖아요.”
[급식 먹는 애들이 주 시청자들인데 19금을 달면 어떻게 하냐고!]
“아니, 누가 보면 오해하겠네. 내가 지금 진짜로 야한 짓 하는 것도 아니고! 목숨 내걸고 싸우고 있는 것 안 보여요? 이래 봬도 이거 세계 신기록 갱신 중이야!”
[이 전 단계에서 떨어진 세계 랭커들이 울겠다!]
그때.
젤 때문에 느려져서일까?
나는 그만 서큐버스의 칼에 조금 찔리고 말았다.
“응앗!”
[으아, 신음소리 이상해! 이젠 다 이상하게 들려요!]
“아, 딱히 아파서 낸 건 아니에요. 그저 거기가 제 H포인트라서.”
[안 궁금해! 안 궁금하다고! 으아아아아!]
“‘히트 포인트(Hit point)’라는 말이었는데 왜 그러시죠?”
발작하듯 괴성을 지르는 홍영화를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놀리는 재미가 있어 일부러 시간을 조금 끌어 봤는데, 생각보다 재밌었다.
‘이제 슬슬 끝을 내 볼까?’
나는 최후의 일격을 준비했다. 그것은 방금 전에 귓가에 들려온 알림음 때문이다.
-띠링!
<아이템 융합이 완료 되었습니다>
좋았어. 딱 좋은 타이밍이다.
숨겨뒀던 비장의 무기, 지금이 딱 시운전을 해 볼 적기였다.
그때.
번쩍-
서큐버스 역시 두 눈에서 붉은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호오?”
나는 융합 아이템을 꺼내다 말고 탄성을 내뱉었다.
홍영화가 고개를 갸웃한다.
[뭔데 그래요?]
“서큐버스도 비장의 무기를 쓰는가 보네요.”
그렇다.
서큐버스에게는 사실 아주 놀라운 특성 하나가 더 붙어있다.
‘레이디 퍼스트’!
지금껏 수많은 레이드를 전멸시켰던 무시무시한 특성.
이 특성 하나 때문에 공격력이 높다는 것 외에는 딱히 뭐 없는 서큐버스의 공략 난이도에 별이 두 개는 더 추가되었을 것이다.
이윽고.
확-
나는 융합 아이템을 꺼내들었다.
[오호호호!]
서큐버스 역시도 자신의 비밀 특성을 개방한다.
나와 서큐버스는 이내 깊숙이 숨겨 두었던 것들을 밖으로 훤히 드러내며 서로 격렬하게 뒤엉키기 시작했다.
…….
끈적끈적한 핑크색 젤 속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