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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67화 (67/1,000)
  • 67화 용자의 무덤 (2)

    -띠링!

    <용자의 무덤 ‘제 46번뇌층’에 입장 하셨습니다>

    .

    .

    .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석실.

    광대한 넓이의 이 석조공간에는 오로지 어둠만이 가득하다.

    천장과 바닥을 잇는 돌기둥 하나하나는 성인 몇 명이 동시에 달라붙어야 껴안을 수 있을 정도로 굵고 거대하다. 그런 기둥들이 마치 대나무 숲을 이룬 것처럼 빼곡했다.

    지독하게도 어둡다.

    손을 쫙 뻗으면 자기 손가락 개수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하게.

    똑- 똑-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탑 내부의 공간이니만큼, 분명 천장이 있을 것이라 짐작되었지만 너무 높고 어두워 보이지 않는다.

    이곳은 마치 무언가 끔찍한 것을 세상과 격리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감옥, 혹은 미궁처럼 보였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이 어둠 속을 유영하듯 허우적거리고 있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잘 가시네요?]

    옆에 있던 홍영화가 겁먹은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픽 웃으며 또다시 앞으로 한 발을 내딛었다.

    한 번쯤 눈앞에 있는 돌기둥에 부딪칠 법도 하지만, 나는 마치 어둠 너머에 뭐가 있는지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샥샥 피해간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의 공간은 총 3,200 제곱미터로 약 1,000평 남짓. 바닥과 천장을 있는 돌기둥들의 수는 약 592개…….’

    그리고 나는 이 592개의 돌기둥들이 전부 어디에 배치되어 있는지 다 외우고 있었다.

    애초에 용자의 무덤이라는 콘텐츠 자체는 내 손바닥 안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적어도 내가 직접 공략해 봤던 90층까지는 그렇다.

    ‘자, 여기에 부러진 돌기둥이 하나 있었을 것이고, 바닥에 있는 요철에 걸리면 무조건 새끼발가락 나가니 주의하고…….’

    나는 매끄럽게 전진했다.

    홍영화는 그런 내가 신기한지 연신 눈빛을 반짝거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

    “찾았다.”

    나는 밝은 목소리와 함께 발을 멈춰 섰다.

    [……?]

    홍영화는 고개를 갸웃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어둠 뿐.

    시간이 지나 눈이 어둠에 조금 익숙해졌다 해도 눈에 들어오는 것은 몇 미터 이내의 돌기둥들뿐이다.

    […뭐가 있다고 하신 거예요?]

    홍영화는 허공에 동동 뜬 채로 고개만 갸웃했다.

    하지만.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채 정면만을 뚫어져라 바라볼 뿐이다.

    “……쉿. 지금 5미터 내외에 있어요.”

    [……?]

    내 짤막한 대답에 홍영화는 더욱 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

    [아무것도 없는데?]

    정면에도 측면에도, 심지어 우리가 걸어온 후방에도 아무것도 없다.

    무덤 속 같은 정적만이 이 어두운 공간을 꽉 메우고 있을 뿐.

    하지만.

    오직 나만은 알고 있다.

    놈이 지금쯤 나를 발견했으리라는 것을.

    “이제 4미터.”

    나는 허리춤으로 손을 뻗었다.

    까락-

    깎단.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S급 무기가 내 손에 잡힌다.

    “3미터.”

    내가 눈을 감은 채 중얼거리자, 홍영화는 바짝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2미터.”

    좋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온다.”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뚝-

    무언가가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푸시시시시식-

    내가 뒤로 반 보 물러나자, 위에서 떨어진 액체에 닿은 돌바닥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녹아 버렸다.

    [꺄악!? 뭐야!]

    홍영화가 기겁하며 고개를 들었다.

    돌기둥 빽빽한 어둠 속, 천장 위에서 노오랗게 빛나는 눈알 네 개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오오오오오!]

    거대한 외뿔을 가진 근육질의 악귀.

    커다랗게 벌어진 원형의 입속에는 송곳같이 길고 뾰족한 이빨들이 믹서기의 칼처럼 수없이 돋아나 있다.

    고기조각들이 잔뜩 껴 있는 더러운 잇몸에서 흘러나온 산성의 즙이 아래로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 …! …!]

    홍영화는 그 압도적인 모습을 보며 입을 딱 벌렸다.

    너무 놀라 비명도 안 나온다.

    저런 거대한 덩치가 바로 코앞까지 접근해 올 때까지 몰랐다니!

    아무리 천장에서 갑자기 튀어나왔다고 해도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저 거구의 몸으로 이렇게까지 은밀할 수가!

    하지만.

    놀란 것은 홍영화, 그녀 하나뿐이다.

    나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나를 반기러 나온 49층의 격리 보스를 올려다보았다.

    “오랜만이네, 카이도마루.”

    그렇다.

    <카이도마루(外道丸)> -등급: B+ / 특성: 거인, 악귀, 살금살금, 지진, 융합

    -서식지: 썩고 불타는 땅, 거인국.

    -크기: 45m.

    -두 마리 이상의 악귀가 한 데 섞여 무시무시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싸움판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 만큼 호전적이다. 발을 굴러 일으키는 지진은 산을 무너트릴 수 있다고 한다.

    저 거대한 괴물의 정체는 바로 카이도우마루.

    321번째 돌기둥과 322번째 돌기둥 사이에서 젠 되는 몬스터이다.

    나는 내가 지금 신고 있는 신발을 떠올렸다.

    -<카이도마루(外道丸)의 발가죽> 신발 / B+ / (융합)

    강한 악귀의 발 가죽을 그대로 벗겨 만든 신발. 이것을 신은 자는 귀신의 힘을 빌릴 수 있게 된다고 한다.

    -공격력 +500

    -이동 속도 +50% (특수)

    -특성 ‘지진’ 사용 가능(특수)

    예전에 아카오니와 아오오니를 잡아 두 녀석의 발가죽을 융합했던 적이 있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 낸 아이템이 바로 이 카이도우마루의 발가죽!

    ‘그것으로 바실리스크를 잡았었지?’

    아카오니와 아오오니의 것이 그랬듯, 이 또한 융합 아이템이다.

    다른 카이도우마루의 몸에서 떨어진 아이템과 융합시킨다면 더욱 더 상위 등급의 아이템으로 진화할 것이다.

    ‘용자의 무덤에 오길 잘했어.’

    생각도 못한 수확이다.

    하고 많은 B+등급 몬스터 중에 이 녀석이 나와 주다니!

    ‘뭐, 원래는 이 녀석 말고 다른 몬스터를 잡으러 온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카이도마루를 만난 것은 괜찮은 성과다.

    이 녀석은 거인과 악귀 타입을 동시에 지닌 육전형 몬스터, 놈을 잡는다면 내 신발이 한층 더 업그레이드 될 수 있겠지.

    쿠웅-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돌기둥 사이를 방황하던 카이도마루.

    제 46번뇌층에 격리되어 있던 이 괴물은 나를 향해 떨어져 내렸고 이내 맹렬한 공격을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콰쾅!

    그간의 정적이 무색할 만큼 큰 굉음이 울려 퍼졌다.

    “자, 좀 안쪽으로 들어가 볼까요?”

    나는 돌기둥 사이를 슬슬 지나다니며 던전 깊숙이 들어갔다.

    [왜, 왜 여기서 안 싸우고 안으로 들어가세요?]

    홍영화가 물었다.

    “그건…….”

    내가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아하! 안쪽의 돌기둥들이 더 빽빽해서 몬스터의 움직임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군요!]

    홍영화는 빠르게 내 의도를 눈치 챘다.

    역시 나중에 크게 될 사람다운 안목이다.

    그녀의 말마따나.

    나는 카이도마루를 끌고 던전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우득- 우득- 우지직!

    카이도우마루는 흥분한 나머지 눈에 뵈는 것이 없어진 모양이다. 빽빽한 돌기둥들 사이에 끼자, 놈은 점점 운신이 어렵게 되었다.

    핏-

    나는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내었다.

    검지손가락 끝에 검은색 핏방울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것은 내가 움직이는 동산을 따라 어둠 속에 방울방울 번져들었다.

    그리고.

    그 핏방울을 밟은 카이도마루는 바로 중독된다.

    놈보다 두 등급이나 높은 상위 몬스터 바실리스크의 독이다. 효과가 없을 리가 없었다.

    [그오오오오!]

    맹독을 밟자, 카이도마루는 발바닥을 긁으며 신경질을 부렸다.

    쿵-

    이내, 놈이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한 지진파가 던전 전체를 뒤흔들었다. 돌기둥들이 두꺼비 흙집마냥 우수수 무너져 내린다.

    “크, 역시 물리공격력 하나는…….”

    나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하지만.

    아무리 크고 강력하다고 해도, 공격패턴이 단순한 이상 나의 적수가 될 순 없다.

    “애초에 기습이 실패한 이상 끝났지.”

    카이도마루의 특성 중 하나인 ‘살금살금’

    이는 플레이어에게 선공을 가할 때 움직이는 소리가 아예 나지 않게끔 하는 스킬이다.

    게다가 놈은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어두운 곳에 박쥐처럼 거꾸로 매달려 사는 습성이 있다.

    때문에 수많은 이들이 카이도마루의 접근을 알지 못하고 선공을 허락하는 경우가 많다.

    …….

    하지만, 애초에 놈이 어디쯤에 숨어 있을지 전부 알고 있는 나에게는 소용없는 특성이었다.

    푹- 푸욱!

    나는 깎단을 들어 카이도마루의 몸뚱이를 계속 찔렀다.

    바실리스크의 피가 주는 맹독 데미지, 깎단이 주는 도트 데미지가 계속해서 카이도마루의 튼튼한 몸을 갉아먹는다.

    푸확-

    가끔 불이나 얼음 폭풍이 쏟아질 때면 마법저항이 높은 요르문간드가 든든한 방패가 되어 줬다.

    이윽고.

    쿵-

    카이도우마루가 쓰러진다.

    근처 돌기둥들은 모두 부서져 평지처럼 되어 있었다. 맵의 지형을 통째로 뒤바꿔 버릴 정도의 대전투였다.

    요란한 알림음이 떴다.

    -띠링!

    <‘전 서버 최초’로 ‘용자의 무덤 제 46번뇌층’의 ‘격리 보스’ ‘카이도마루’를 처치하셨습니다!>

    동시에.

    [굉장햇! 굉장해요오오!]

    홍영화가 두 눈을 크게 뜨고 환호했다.

    마치 칭찬 매크로를 돌리는 것 같은 환호.

    하지만 충분히 그럴만 하다.

    전 세계 최초로 용자의 무덤 46층을 클리어했다!

    마의 구간이라 불리는 45층의 기록을 깬 것이다!

    [세상에! 프랑스 랭킹 1위도, 미국 랭킹 1위도, 한국 랭킹 1위도 여기서 리타이어 당했어요! 그런데 그걸 고인물 님이 클리어하신 거예요! 이 역사적인 순간을 제가 눈으로 볼 수 있다니!]

    홍영화는 눈을 반짝거리며 나를 바라본다. 내 특성과 장비가 궁금해 미치겠다는 눈빛.

    하지만 그것을 밝혔다가는 난리가 나겠지.

    뭐든 적당히 숨겨야 기대감도 커지는 법이다.

    올 누드보다 세미 누드가 더 잘 나가는 이유가 바로 그것.

    나는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뭐, 고작 108층중에 46층까지 온 건데요, 뭐. 그리고 이거 클리어했다고 랭킹 1위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다.

    용자의 무덤은 말 그대로 이벤트 던전일 뿐.

    여기서 1등을 했다고 해서 공식 랭킹이 바뀌거나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홍영화는 여전히 잔뜩 흥분해 있었다.

    [그래도 이게 어디에요! 그 랭킹 1위들이 못한 것을 해낸 거잖아요! 아마 고인물 님이 공식적으로 랭킹에 등록하신다면 1위도 가능할지 몰라요!]

    “등수놀이에는 아직 관심 없어요.”

    나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아이템을 루팅했다.

    이내.

    최초 클리어 보정을 받아, B+등급의 아이템이 내 손에 떨어졌다.

    -<카이도마루(外道丸)의 정수> 재료 / B+ / (융합)

    악귀의 원한이 담긴 구슬.

    몸과 마음이 약해져 있을 때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온다.

    아하! 재료 아이템인가?

    신발 아이템이 나왔다면 융합을 하려고 했는데, 이것도 나쁘지 않다.

    ‘정수’ 아이템은 융합재료 하나를 대신하여 쓰일 수 있는 아이템.

    즉 내가 신고 있는 카이도마루의 발가죽과도 융합하여 쓸 수 있다.

    나는 거침없이 카이도마루의 정수를 카이도마루의 발가죽에 발랐다.

    이윽고.

    꾸드득- 꾸드득- 꾸득-

    내가 신고 있는 자홍색 신발이 빛나기 시작했다.

    <…융합 중입니다. 전원을 끄지 마세요>

    그러자, 그 빛을 본 홍영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상에! 이런 것도 있나요? 융합 아이템이 있다는 거 지금 처음 알았어요! 오늘 진짜 여러모로 개안하네요.]

    “이걸로 시청률은 보장됐죠?”

    [당근빳따죠, 비바! 세계 최초로 용자의 무덤 46층 클리어에 융합 아이템에…아마 시청자님들이 기립박수를 칠 거예요!]

    나는 흥분한 홍영화를 보며 픽 웃었다. 고작 46층을 클리어한 것 가지고 이렇게 놀라다니.

    ‘이 페이스라면 한 60층 중반까지는 가겠는데?’

    현재 B+급 몬스터 중 내가 1:1로 잡지 못할 몬스터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A급 몬스터부터는 특성과 지형에 따라 변수가 생기니만큼 올클리어는 힘들 수 있다.

    지금 이 상태로 최선을 다한다면 한 65층 정도까지는 돌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노 히트 런으로 말이다.

    …….

    하지만.

    오늘 내가 가진 밑천을 모두 드러낼 생각은 없다.

    당분간은 홍영화의 놀란 심장을 지켜 줄 생각이다.

    ‘가급적 ‘그 녀석’이 빨리 나와 줬으면 좋겠는데…….’

    내가 애타게 찾고 있는 ‘그’ 몬스터.

    3신기 중 마지막 아이템의 열쇠가 되는 그 녀석만 잡는다면 용자의 무덤에 올라온 보람이 여실히 있겠다.

    나는 제발 다음 층에서 그 목적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소망했다.

    끼긱-

    계단을 올라가 ‘제 47번뇌층’의 문을 여는 순간.

    “……!”

    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우아하게 꾸며진 넓은 방.

    젊은 아가씨의 취향으로 장식되어 있는 이 인테리어.

    그리고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검은 해먹을 보는 순간, 나는 바로 알았다.

    ‘왔구나!’

    무릎을 탁 쳤다.

    그토록 찾던 몬스터가 바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윽고.

    허공에 떠 있는 검은 해먹에서 매끈한 다리 하나가 뻗어 나왔다.

    검은색 망사 스타킹.

    군데군데 찢어진 자국이 보이는.

    동시에.

    [호호호호-]

    고혹적인 웃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듣는 것만으로도 귀가 달콤해지는 목소리.

    이내. 검은 해먹에서 한 여자가 몸을 일으킨다.

    [오우야…….]

    홍영화가 절로 헛바람을 집어삼킬 정도로 아름다운 미녀였다.

    조막만 한 얼굴.

    머리보다 큰 가슴.

    모래시계 같은 허리와 골반.

    젓가락처럼 쭉 뻗은 다리.

    9등신의 비율.

    <서큐버스> -등급: B+ / 특성: 어둠, 이상성욕, 레이디 퍼스트, 양자택일, 융합

    드디어 만났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이 몬스터를 말이다!

    검은 해먹 위에 비스듬히 누워 나를 내려다보는 서큐버스.

    그녀의 글래머러스한 몸을 감싸고 있는 검은 망사와 해먹의 그물코.

    그것들을 보고 있자니 어째 낯이 좀 뜨거워진다.

    “…….”

    동시에 좀 묵직해지는 것도 같다.

    ….

    …….

    아. 물론 세계 신기록을 세우고 있다는 것에 대한 심적 부담감, 그리고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선 한국인 랭커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범국가적 책임감을 말하는 겁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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