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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66화 (66/1,000)
  • 66화 용자의 무덤 (1)

    퍼억-

    흔들리는 시야.

    나는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커헉!”

    입에서 뜨거운 핏물이 올라온다.

    전신이 녹아내리는 듯한 고통!

    “……크윽!”

    이를 꽉 깨물었다. 그리고 말을 듣지 않는 다리를 다그쳤다.

    빨간 색으로 보이는 에너지 바, HP칸은 이제 바닥을 보이고 있다. 위험신호다.

    ‘일어나야 해, 이대로 가면 죽는다!’

    나는 필사적으로 바닥을 더듬어 짚었다.

    용자의 무덤.

    총 108층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시련의 탑에 들어온 지 꽤나 오랜 시간이 흘렀다.

    각 층마다 강력한 보스가 랜덤으로 출연해 침입자와 겨루는 시스템.

    그리고.

    지금 내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보스 몬스터!

    놈은 이 층을 지키는 파수꾼.

    침입자를 절대로 뒤로 넘어가게 할 수 없다는 신념을 가진 고고한 용사.

    이내, 보스 몬스터가 나를 향해 사악한 마수를 뻗어오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나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도무지 놈을 이길 수 있는 편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게임 폐인으로 살아왔던 지난 15년의 세월.

    모든 랭커들의 공략집과 자서전을 외우다시피 독파했으나 이럴 때 어떻게 대비해야 한다는 말은 없었다.

    “으아아아아! 나는 질 수 없어! 질 수 없단 말이다!”

    나는 꽉 다문 이빨 사이로 불거져 나오는 핏물을 토해 내며 일어났다.

    후들거리는 다리, 흐려지는 시야.

    하지만 여기서 무릎 꿇을 순 없다!

    내 앞을 스쳐간 수많은 랭커들! 이번 생에서는 그들을 모두 젖혀야 한단 말이다!

    “흐아아아아압!”

    나는 초인과도 같은 정신력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쩔 수 없다.

    ‘정공법(正攻法)!’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정면으로 오는 공격에 당당히 몸으로 맞서는 것.

    그것이 내가 택한 최후의 승부수였다.

    그리고.

    이 층을 지배하는 보스 몬스터는 그런 내 육체에 최후의 필살기를 꽂아 넣었다.

    퐁!

    핑크색 액체 한 방울이 내 배에 와 닿았다.

    치이이익-

    “끄아아아아!”

    나는 배에서 느껴지는 화끈한 감각에 발버둥 쳤다.

    너무 따갑다!

    마치 입안 상처에 알보찰 소독액을 바른 것 같은 느낌.

    데굴데굴-

    나는 결국 바닥에 쓰러져 뒹굴고 말았다.

    그러자.

    [……저기, 지금 뭐 하세요?]

    내 옆에 있던 홍영화의 도깨비불이 묻는다.

    그녀는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와 내 앞에 있는 보스 몬스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용자의 무덤 ‘제 1층’>

    <출현 몬스터: 슬라임 퀸>

    그렇다.

    지금 내가 상대 하고 있는 녀석은 던전 1층의 보스 슬라임 퀸이다.

    <슬라임 퀸> -등급: C / 특성: 재생하는 피부

    -서식지: 전 대륙

    -크기: ?m.

    -젤리 타입의 몬스터.

    딸기맛 푸딩 같아 보이지만 먹으면 배탈이 나고 말 것이다.

    나는 홍영화를 향해 퉁명스럽게 물었다.

    “보면 몰라요? 슬라임 잡잖아요.”

    […….]

    홍영화는 입을 반쯤 벌린 채 말이 없다.

    슬라임 퀸. C급 몬스터. 너무 허약해서 유저들이 잘 잡지도 않는 몬스터다.

    템도 안 주고, 경험치도 안 주고, 너무 약해서 데미지 확인용이나 샌드백으로도 못 쓴다.

    맞으면 아프지는 않지만, 그래도 끈적거리는 느낌이 들어서 별로다.

    하지만.

    이 녀석의 범위공격만은 진짜다!

    슬라임 퀸은 의외로 ‘뎀’ 세계관 속에서 가장 넓은 범위공격을 하는 몬스터였다.

    녀석의 필살기인 ‘푸딩 범벅’은 피할 수 있는 공략이 존재하지 않는다.

    일단 맞닥뜨리면 무조건 맞을 수밖에 없는 공격이다.

    ‘그 다음으로 넓은 범위공격이……. S+급 몬스터 불사조의 ‘멸망주의보’ 정도려나?’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의외로, 나에게는 이런 슬라임 퀸 같은 잡몹이 치명적이다.

    실내전에서 녀석의 광역기를 맞으면 나 같은 물몸은 그냥 고스란히 데미지를 입을 수밖에 없다.

    다른 몬스터들의 강력한 공격이야 안 맞고 피해 버리면 그만인데……. 이렇게 무조건 맞아야 하는 공격은 참 고역이다.

    퐁! 퐁! 퐁! 퐁!

    슬라임 퀸은 계속해서 넓은 범위에 푸딩을 뿌렸다. 맞으면 상당히 따갑고 아프다.

    퐁! 퐁! 퐁! 퐁!

    그 와중에. 내 몸을 국소적으로 덮고 있는 바실리스크의 갑옷도 열심히 반사 데미지를 뿌린다.

    때문에 슬라임 퀸 역시도 착실하게 데미지를 입고 있었다.

    “으아아아아! 승부를 내자!”

    나는 깎단을 움켜쥐고 슬라임 퀸에게 달려들었다.

    생사결(生死決)!

    퐁! 퐁! 퐁! 퐁! 퐁! 퐁! 퐁! 퐁!

    이내, 나는 이 끈적한 핑크 점액과 맞붙어 싸우기 시작했다.

    뼈와 살, 점액이 맞부딪치는 치열하고 끈적끈적한(?) 전투.

    살 떨리는 박력!

    소름 끼치는 전율!

    그것이 우리 사이를 온통 휘감아 감싸고 있었다.

    아득해지는 정신, 날카로운 투지.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최후의 승자는 나였다.

    주륵- 퐁!

    결국.

    슬라임 퀸은 핑크색 물이 되어 바닥에 넓게 퍼져 버렸다. 전사의 장엄한 최후였다.

    “후우…….”

    나는 얼마 남지 않은 HP를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까딱하면 리타이어 당할 뻔했네.”

    […….]

    “……왜요?”

    홍영화는 아까부터 내 시선을 회피하고 있다.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고생하셨어요.]

    “고마워요. 그런데 왜 아까부터 계속 시선을 안 마주치려 하시죠?”

    [음…알몸에 핑크색 젤이 끈적끈적하게 묻어 있으시니……. 보기가 조금…뭐랄까……민망하네요.]

    “네? 무슨 문제라도?”

    […좀, 음, 좀 외설적이라고나 할까? 방송 심의에 걸리지 않을지…….]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슬라임은 1953년, 미국 작가인 조셉 페인 브레넌의 작품 『슬라임(Slime)』에 처음 등장한 이후로 꾸준히 많은 게이머들의 사랑을 받아온 판타지의 단골 몬스터입니다. 결코 외설적인 존재가 아니란 말입니다.”

    [네에……. 뭐, 슬라임이 문제라기보다는 다른 쪽이 문제이긴 한데…아무튼 편집부에 전달할 때 말은 해 볼게요.]

    홍영화의 떨떠름한 표정을 뒤로 한 채, 나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이거 생각보다 1층에서 시간을 너무 많이 허비해 버렸다.

    앞으로 저런 허약하되 공략이 따로 없는 몬스터만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       *       *

    그리고 몇 시간 뒤.

    슬라임 퀸의 반란은 확실히 예상 못한 것이었지만, 그 뒤로는 같은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다.

    콰쾅!

    층 전체가 무너질 듯 진동한다.

    쿵!

    거대한 악귀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죽어 버렸다.

    붉은 악귀 아카오니!

    나는 29층의 보스인 놈을 손쉽게 사냥한 것이다.

    “자주 보네, 우리.”

    나는 아카오니의 뿔을 슬슬 쓰다듬으며 픽 웃었다.

    노 히트 런(No Hit Run)!

    나는 1층에서 슬라임에게 리타이어 당할 뻔한 이래, 29층까지 올라오는 동안 단 1의 데미지도 입지 않았다.

    [와아아아아! 대단해! 대단해! 역시 대단해요오오!]

    옆에서는 홍영화의 도깨비불이 내 주위를 뱅글뱅글 돌고 있다.

    잔뜩 흥분한 기색으로 환호하는 그녀.

    슬라임 전 당시 나를 쓰레기처럼 바라보던 시선은 간 곳이 없다.

    홍영화의 불신을 씻은 듯 사라지게 한 뒤, 나는 29층까지 올라오며 챙긴 아이템들을 살펴보았다.

    이곳에서는 첫 공략 특전을 받을 수 없기에, 떨어지는 아이템들은 대게 몬스터들의 등급보다 1~2단계 아래의 잡템들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잡템들을 버리지 않고 꼼꼼하게 수거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민첩’ 스텟이 붙은 아이템들만.

    홍영화가 물었다.

    [왜 민첩 스텟이 붙은 잡템만 수거하시나요?]

    “아 네. 제가 민첩 성애자라서요. 별 이유는 없어요.”

    나는 민첩템들을 인벤토리에 갈무리하며 대충 얼버무렸다.

    ‘10년 뒤의 대격변을 준비하고 있어요’ 라고 하면 미친 사람 취급 받을 테니까.

    뭐 아무튼.

    이제 다음 층부터는 B급 몬스터들이 나온다.

    게임 출시 후 10개월. 인간이 1:1로 잡을 수 있는 마지노선 등급인 B.

    이제 다음 층부터는 그 구간에 정면으로 도전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뭐, 왕년에 A+급 몬스터와 1:1로 싸웠던 적도 있는 내 입장에서는 별로 긴장되지 않는 일이다.

    애꿎은 홍영화만 옆에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후- 후- 후아- 으으……괜히 제 심장이 다 터질 것 같아요!]

    “뭘 고작 B급 몬스터 상대로 그러세요.”

    [탑 티어 급 랭커들만 진입 가능한 구간이잖아요! 아아, 너무 기대된다. 고인물 님은 그런 거 없으세요?]

    “네. B+ 등급 구간이었다면 몰라도 B 등급 구간을 앞두고는 그다지 떨리지는 않네요.”

    [와, 정말 대단하세요! 역시 유저들이 투표한 비공식 랭킹 1위!]

    또 호들갑스럽게 칭찬을 늘어놓던 홍영화는 이내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고인물 님은 참 약자에게 약하고 강자에게 강하신 분 같아요.]

    ……?

    조금 의미가 다른 것 같은데.

    물론.

    내가 슬라임에게는 약하고 거구의 악귀들에겐 강하긴 하지.

    하지만 그건 내 아이템 트리 때문이지 성격 탓이 아니다.

    ‘에이, 모르겠다.’

    나는 옆에서 부끄러워하고 있는 이상한 여자를 무시하기로 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민첩 옵션이 붙은 잡템을 최대한 많이 주워 먹는 것.

    그리고 ‘3신기’를 위한 단서를 찾는 것.

    …또 뭐, 겸사겸사 세계 신기록도 깨는 것?

    “자 그럼, 또 출발해 볼까요? 다음 층부터가 진짜입니다.”

    내가 이미 샌드웜, 바실리스크, 메두사 등 고등급 몬스터를 잡기는 했지만, 그것은 철저히 잡을 수 있는 녀석들만 픽(pick)해 찾아 갔기 때문이다.

    이렇게 랜덤으로 떨어지는 몬스터들은 어떻게 습격해 올지 예측불가다.

    심지어 원래 녀석들이 살던 곳도 아닌, 좁은 실내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보니 예측 불가능한 변수들이 너무 많다.

    이 모든 무시할 수 없는 불안들을 향해.

    쿵-

    나는 거침없이 한 발을 내딛었다.

    세계 정상으로 가는 행보. 전설 급 탑 티어들이 모두 거쳐 갔던 그 구간.

    고지가 바로 코앞에 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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