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64화 (64/1,000)
  • 64화 공중파 진출 (2)

    강남 테헤란로에 있는 한 카페.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의 시선이 한 쪽으로 힐끗힐끗 향한다.

    “…….”

    그곳에는 이목을 확 끌 정도의 미녀 하나가 커피 잔을 만지작거리며 앉아 있었다.

    사슴같이 커다란 눈. 오똑한 코. 통통한 볼살. 하얀 피부에 긴 생머리.

    청자켓 안으로 쫙 달라붙은 티셔츠와 스키니진 때문에 불륨감 있는 몸매와 건강미가 잘 드러난다.

    바로 홍영화였다.

    그녀가 컨택 장소에 오기 전, 조태호 부장을 비롯한 모든 직원들이 그녀에게 몰려들었다.

    ‘네 협상에 우리 부서의 사활이 걸려 있다, 영화야! 네 상사 좀 살려줘라!’

    ‘야, 예쁘게 하고 가! 무조건 잘 보여야 해! 앞머리가 그게 뭐냐! 이리 와 봐! 누구 고데기 있는 사람!?’

    ‘그 펑퍼짐한 가디건 당장 벗어! 폐의류 수거함에 넣고 와! 내 청자켓 입고 가!’

    ‘향수 뿌려 향수! 저기 차장님 것 갖고 와! 야, 비싼 거니까 팍팍 뿌려!’

    ‘법인카드 잘 챙겼지? 비싼 거 먹어, 비싼 거!’

    ‘야무지게 하고 가란 말야! 야무지게! 파이팅! 파이팅!’

    이 모든 사태는 얼마 전.

    자신이 별 기대 없이 보낸 컨택 쪽지에 답장이 오면서 시작되었다.

    ‘켠김에 제왕까지’에 출연할 게스트를 찾던 중, 홍영화는 한 인물을 보게 되었다.

    ‘BJ 고인물’

    수많은 방송 플랫폼에서 조회수 1위 타이틀을 싹쓸이하고 있는 남자.

    그의 미친 듯한 컨트롤 실력은 이미 전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을 정도였다.

    올린 영상의 수가 몇 되지도 않는데 벌써 메이저급 스트리머로 군림하게 되었으니까.

    채널에는 벌써 유명 브랜드의 광고들이 쭉 걸려 있다.

    주 단위로 광고판이 바뀌는 것을 보니 아마 광고주들 사이에서도 대기줄이 있는 모양.

    소문으로 듣기에는 쏟아지는 후원금도 장난이 아니란다. 미국과 중국의 큰손들이 미친 듯이 후원금을 쏘고 있다나?

    매일 엄청나게 많은 팬들이 그의 방명록에 글을 남긴다.

    (이 경우 상당수가 변태라고 욕을 하는 안티들이었지만)

    어지간한 톱스타 급 인기를 구사하고 있는 존재가 바로 이 ‘BJ 고인물’이다.

    ‘에휴, 이런 사람이 내 쪽지에 반응이나 보이겠어?’

    홍영화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일이니까 어떻게 하나? 되든 안 되든 부딪쳐서 나쁠 것은 없다.

    타닥타닥-

    홍영화는 고인물에게 쪽지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스트리머님. 저는 LGB 방송국의 홍영화 사원으로 ‘켠김에 제왕까지’의 PD를 맡고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고인물 님의 플레이를 보고 너무 감동을 받아 이렇게 게스트 출연 의사를 여쭙게……..]

    당연히 씹힐 것이라 생각했다.

    저렇게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한낱 한국의 영세 방송국인 LGB, 그것도 시청률도 별로 안 나오는 케이블 방송인 ‘켠김에 제왕까지’에 관심을 보일 리가 없다.

    그렇게 생각했다.

    …….

    한데?

    세상 일은 언제나 세렌디피티(serendipity)라 했던가?

    정말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출연하겠습니다]

    -From 고인물-

    답장이 온 것이다!

    “……말도 안 돼.”

    홍영화는 가슴을 부여잡고 몸을 한번 떨었다.

    뜻밖의 초대형 거물 게스트를 낚은 것은 둘째쳐도…

    게임 ‘뎀’의 열혈 유저로서 광팬이었던 스트리머를 직접 만나볼 수 있다니!

    신비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BJ 고인물’을 직접 볼 수 있는 것은 게임광으로서 무한한 영광이기도 했다.

    문득.

    홍영화는 이 직업을 선택하길 잘했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근데…초면에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너무 떨려서 말이 나올지나 모르겠다. 이러다 말이 헛 나오거나 발음이 새면 어쩌지?

    “아…에…의…오……우….”

    홍영화는 커피 빨대를 입에 물고 발음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첫 만남에 야무지게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짤랑-

    카페 문에 달린 종이 한번 울렸다.

    문이 벌컥 열리며 도로의 차가운 바람이 실내로 들어왔다.

    깊게 눌러쓴 모자.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낀 젊은 남자 하나가 카페 안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를 본 순간.

    “……!”

    홍영화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찌나 놀랐는지 아까 발음 연습할 때 썼던 빨대를 그대로 입에 물고 있을 정도였다.

    고인물 등장이다!

    *       *       *

    나는 카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너무 일찍 왔나?’

    시계 설정을 잘못 해 놓는 바람에 두 시간이나 일찍 와 버렸다.

    ‘두 시간이면 던전을 한 바퀴는 도는데.’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일단 이렇게 된 거 두 시간 동안 앞으로 어떻게 게임을 공략할지나 생각해 볼까?

    ‘이번에 도플갱어 카이저에게서 얻은 아이템 분석도 하고…….’

    내가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아, 여브베버!(아, 여기에요!)”

    웬 이상한 여자 하나가 입에 빨대를 물고 이쪽을 보며 허우적거린다.

    ‘……뭐지? 여기 앉으라는 건가?’

    내가 미간을 찡그리며 뒤로 물러나자, 그녀는 황급히 나에게 명함을 건넸다.

    아, 이 사람이었나?

    ‘아니 근데 무슨 두 시간이나 일찍 왔어? 나야 시간을 착각했다고 쳐도…….’

    나는 황당함 반 놀라움 반으로 자리에 앉았다.

    이내.

    나는 눈앞의 홍영화라는 여자를 찬찬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어도 웃는 듯한 얼굴, 볼에 남은 통통한 젖살.

    ‘오랜만에 보네.’

    나는 그녀를 이미 알고 있었다.

    5년 뒤, ‘켠김에 제왕까지’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고 그녀는 LGB의 ‘뎀걸’로 뽑혀 일약 유명세를 타게 된다.

    ‘예쁜 외모+백치미+게임에 대한 열정과 전문지식 = 초인기’

    이건 뭐 거의 공식과도 같다.

    평소엔 어리버리하다가도 게임에 관련된 내용만 나오면 엄격, 근엄, 진지, 빠삭해지는 홍영화.

    그녀는 그 특유의 ‘갭 모에’ 때문인지 장차 수많은 팬덤을 거느리게 되는 것이다.

    나중에는 유명 해설 겸 게임 잡지 에디터로도 승승장구하게 되는 인생이다.

    ‘15년 뒤에도 게임이랑 일만 하느라 남자친구 한번 못 사귀어 봤다고 했었지 아마? 그건 좀 불행할지도…….’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뭐 그것도 앞으로 5~6년 뒤인가.’

    앞으로 5년 뒤, LGB는 경영난 때문에 결국 중국자본에 먹히게 된다.

    그 와중에 ‘켠김에 제왕까지’가 중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는 것이다.

    그 뒤로.

    중국 자본에 의해 점점 자극적으로 변한 ‘켠김에 제왕까지’는 반짝 뜬 유명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다행스럽게도 개국공신 직원들은 몸값이 많이 올라가 다른 곳으로 이적하는데 무리는 없었지만, 그래도 좋아하던 게임 프로그램이 허무하게 조각난 것은 좀 슬프다.

    한국인인 입장에서도 꽤 씁쓸한 뉴스였다.

    ‘이번에는 그렇게 되지 마라.’

    나는 1세대부터 가상현실 게임 방송에 대한 장인정신을 보여줬던 이 방송국을 가슴속 깊이 사랑했다.

    그래서 이 방송국이 한국 내에서도 잘 되었으면 하는 개인적인 소망도 있었다.

    뭐 어쨌든.

    나는 오늘 이곳에 출연하기로 한 이유를 솔직하게 밝혔다.

    “지금 기획하고 있는 방송 콘텐츠가 있거든요. 그런데 그게 제 방송 장비들로는 영상 송출이 고화질로 안 될 것 같아서요. 전문가들의 도움을 좀 구하고 싶었달까?”

    그러자, 홍영화는 무조건적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이거 내가 방송 나가서 드러누운 채 코만 파도 좋다고 할 것 같은 기세.

    “그래서 여차저차 해서. 보다 고화질 영상으로 보다 많은 시청자들에게 이번 프로젝트를 보여 주고 싶어서요.”

    내가 동의를 구하듯 입을 열자.

    “메! 흐그 시프싱 그 드 흐스요(네! 하고 싶으신 것 다 하세요!)”

    홍영화는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외치며 고개를 빠르게 끄덕인다.

    그 와중에 표정과 눈빛만은 참 야무지다.

    “저, 입에 문 빨대는 왜……?”

    내가 묻자.

    “아차차!”

    홍영화는 빨개진 얼굴로 재빨리 빨대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방금 전의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서둘러 계약서를 꺼내들었다. 가능한 야무지게 보이려는 손놀림이었다.

    나는 바로 출연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내가 서류에 지장을 찍자, 물티슈를 준비하던 홍영화는 슬쩍 내 눈치를 본다.

    “…왜요?”

    내가 묻자, 그녀는 살짝 붉어진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아뇨. 옷을 입고 계신 모습이 조금 낯설어서.”

    “…현실이니까요.”

    “아는데……히.”

    홍영화는 머리카락을 긁적이며 수줍게 웃는다. 그리고는 한 마디를 이었다.

    “저는 당연히 벗고 오실 것이라 생각했어요.”

    …….

    이상한 여자 아냐, 이거.

    나는 물티슈로 엄지손가락의 인주를 닦으며 대답했다.

    “뭐……. 가상현실의 몬스터는 피할 수 있어도…현실의 경찰은 못 피하니까요.”

    “그렇네요. 당연한 건데 왜 몰랐을까. 헤헤.”

    자기 머리를 통 때리는 홍영화. 이 사람은 진짜구나 싶다.

    ‘제에발 현실을 살아주세요!’

    이내, 홍영화는 조금 개인적인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한데, 나이가?”

    “올해 스물하나요.”

    “에엑? 저보다 4살이나 어리셨어요?”

    홍영화는 내 나이를 듣고는 깜짝 놀라워했다.

    액면가 때문이 아니라 그냥 단순히 위명세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그럴 것이다.

    “헤에…스물 한 살이셨구나. ……그런데 말씀하시는 게 되게 어른스러우시네요.”

    그녀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여러 가지 말들을 늘어놓았다.

    “저희 조 부장님이 고인물 님 광팬이세요. 이번에 너무 만나 뵙고 싶어 하셨는데…….”

    “에이, 비행기 태우지 마세요. 정말 그랬으면 직접 나오셨겠죠.”

    “진짜예요. 고인물 님이 출연 오케이하신 쪽지 보자마자 일시적으로 심장마비가 오는 바람에 지금 응급실에 계세요.”

    “……?”

    나는 약간 부담스러운 마음으로 계약서 작성을 마쳤다.

    그제서야, 홍영화가 급한 불은 껐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 생각하고 계시다는 콘텐츠가 어떤 거예요?”

    “……빨리도 물어보시네요.”

    보통은 한 콘텐츠를 여러 방면으로 검토해 본 뒤 영상 제작을 결정한다.

    자금, 인력, 당위성, 개연성, 흥행성 등 여러 요소들을 검토해야 하고 그것은 꽤나 많은 통과 절차를 요하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 홍영화, 아니 LGB의 태도는 내가 정말 뭘 요구하든 죄다 들어줄 기세다.

    아예 콘텐츠를 듣지도 않고 영상 제작을 결정해 버릴 줄이야.

    “실망스러운 콘텐츠면 어쩌시려구요?”

    내가 묻자, 홍영화는 생긋 웃으며 눈을 반짝였다.

    “고인물 님이 하시는 거면 실망스러울 수가 없죠. 뭘 하셔도 흥행보장 수표이시니까요.”

    그 말을 듣자, 어쩐지 웃음이 났다.

    ‘어떻게 믿음을 줄까 고민하면서 왔는데, 그럴 필요도 없었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들의 신뢰에 아예 초장부터 콘크리트를 들이부어 버렸다.

    “‘용자의 무덤’을 공략할 생각입니다.”

    그러자.

    정면에 있는 홍영화의 얼굴이 또다시 확 달아오른다.

    극도의 흥분으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