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짭 (3)
레플리카(replica).
[명사] (실물을 모방하여 만든) 복제품, 모형(模型).
[미술] 그림이나 조각 따위에서, 원작자가 손수 만든 사본.
* * *
쿵-
크게 내딛는 한 걸음.
발자국 하나가 찍히자 지면이 물처럼 출렁인다.
<도플갱어 카이저> -등급: A+ / 특성: 3/3, 연쇄살인
-크기: 1.83m
-서식지: 도리안 그레이의 숲 심층부
-이중배회자(二重徘徊者). 본체를 향한 살의로 가득 차 있다.
마동왕(魔霘王)!
과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전설의 암흑랭커.
99.9%의 싱크로율을 자랑하는 도플갱어 카이저가 그 모습을 완벽하게 재현해 냈다.
놈이 변신을 끝마친 것을 보고, 드레이크가 내게 물었다.
“왜 변신 도중일 때 공격하지 않았지? 그때가 기회 같았는데?”
나는 태연하게 대꾸해 주었다.
“변신 도중에는 공격하지 않는 게 매너잖아.”
“……마법소녀냐.”
드레이크는 황당한 표정으로 입을 반쯤 벌린다.
이내,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눈앞의 적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쩔 수 없지. 변신이 끝났으니. 이제 저것은 ‘마동왕 카이저’가 되었군.”
“마동왕 카이저는 무슨, 그냥 짭동왕이지.”
그러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사실 놈은 마동왕 카이저라고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내 특성과 무기, 갑옷의 힘을 모두 그대로 재현하고 있으니 말이다.
스스스스-
검은자위로만 되어 있는 눈에서는 짙은 흑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일반 도플갱어가 변신을 끝마치는 즉시 미친 듯이 공격해 오는 것과 달리,
후우욱-
놈은 깊은 심호흡으로 몸을 가다듬는다.
마치 겨우 얻은 소중한 육체를 헛되이 망가트리지 않겠다는 듯.
[…이것은, 좋은 몸이로군.]
놀랍게도, 녀석은 입을 열어 말도 했다.
목소리는 나와 전혀 다른, 굵은 중저음의 목소리였다. 마치 동굴 속에서 웅웅 울리는 것처럼 듣기 좋다.
‘하긴, 마왕 역 전문 성우의 목소리니까 뭐.’
도플갱어의 목소리는 딱 두 개다. 남자 성우가 녹음한 버전과 여자 성우가 녹음한 버전.
…….
하지만 뭐,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철컥! 철커덕!
나는 서둘러 마동왕의 장비들을 회수했다.
그리고, 손에는 깎단을 든다. 이제 다시 고인물 모드다.
저벅- 저벅- 저벅-
도플갱어 카이저는 내게로 발걸음을 옮겨 왔다.
“…….”
[…….]
나와 내가 마주 서서 대치한다. 꽤 재미있는 구도다.
옆에 있던 드레이크가 건조하게 웃었다.
“인물로만 따지면 저쪽이 낫군 그래?”
“쟤나 나나 마스크 쓰고 있는데 왜 이래? 뭐가 보인다고.”
내 핀잔처럼, 도플갱어 카이저는 지금 얼굴의 절반을 가리는 마스크를 쓰고 있다.
왜냐하면 내가 도플갱어 카이저에게 발견되기 직전, 얼굴에 마스크를 착용했기 때문이지.
팔락-
나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마스크를 벗어 버렸다.
“자, 보자고. 누가 더 잘생겼는지.”
내가 맨얼굴을 드러내며 이죽이자.
꾸득-
도플갱어 카이저는 나를 따라 마스크를 벗는다.
아니.
벗어 버리려 했다.
그러나 마스크는 놈의 얼굴에 단단히 달라붙어 있어서 벗겨지지 않았다.
그저 살점이 손톱에 푹 파여 찢어졌을 뿐이다.
뿌드드득-
도플갱어 카이저가 마스크를 벗자, 그의 입이 드러났다.
툭-
바닥에 떨어진 마스크는 사실상 놈의 살점이나 다름없었다.
그게 사라지자 얼굴의 절반은 그저 뻥 뚫린 어둠만이 고여 있다.
츠츠츠츠-
놈의 상처에 다시 새 살이 차오른다. 새 살점은 다시 마스크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정말 그 순간의 외형만을 복사하는 것이었군.”
드레이크는 섬뜩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한편.
[…….]
도플갱어 카이저는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본다.
그리고.
후욱!
이내 본격적으로 마수를 뻗어 오기 시작했다.
“우왓!? 뭐 이렇게 빨라!”
나는 기겁을 하며 뒤로 내뺐다.
과연, 도플갱어 카이저는 무시무시하게 빨랐다.
마치 상체와 하체 컨트롤이 각각 따로 되는 듯한 몸놀림. 발을 빠르게 움직이는 도중에도 손이 자유롭다.
“캬, 엄청난 컨트롤 능력!”
나는 그걸 보며 감탄했다.
콰쾅!
도플갱어 카이저의 주먹이 닿자, 벽면이 모래처럼 바스라진다.
나는 또 경악하여 외쳤다.
“키야, 엄청난 공격력이다! 믿을 수가 없다구!”
이내.
도플갱어 카이저가 나를 향해 묵직한 미들킥을 날려 왔다.
우지직-
굵은 나뭇등걸이 놈의 발길질에 맞아 두 동강이 나 버렸다.
나는 이번에도 그걸 보며 외쳤다.
“퍄, 정말 기가 막힌 피지컬이군! 공포스러울 정도야!”
그러자.
“……저기.”
드레이크가 나를 향해 눈을 가늘게 뜬다.
“너 아까부터 자뻑이 너무 심한 것 같다.”
…그랬나?
나는 머쓱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었다.
하기야, 눈앞의 도플갱어 카이저는 내 부캐릭터인 마동왕을 99.9% 재현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지금 저 공격력, 저 움직임은 전부 나의 것이라는 말씀!
‘상대 눈에는 내가 이렇게 보이겠구나.’
새삼스럽게 예전에 맞붙었던 랭커 서초패왕 커제가 가엾어진다.
자식, 얼마나 무서웠을까.
하지만.
생각을 길게 할 틈이 없었다.
후욱-
도플갱어 카이저가 또다시 솥뚜껑만 한 오른쪽 손바닥을 펼쳐온다.
‘저기 잡히면 죽는다.’
내 스타일의 전투법이라서 빠삭하게 알고 있다.
저 손아귀 안에는 지금 온 세상천지를 날뛰게 만들 정도의 지진파가 담겨 있다.
슬쩍 스치기만 해도 살점이 터지고 뼈가 부러질 것이다.
‘내가 쓸 때는 그냥 통쾌하고 시원했는데, 남이 쓰는 걸 보니 겁나 무섭네.’
나는 몸을 낮게 숙이고 바닥을 기듯 뛰쳐나갔다.
스팟-
현재 나는 몸에 아무런 갑옷도 걸치고 있지 않았기에 몸무게가 거의 제로에 가깝다.
도플갱어 카이저도 빠르긴 했지만 빤스런 중인 나에 비할 수는 없는 일이지.
일부러 대면 전에 온갖 무거운 아이템들을 죄다 껴입은 보람이 있다.
삭- 사삭-
나는 도플갱어 카이저의 손길을 피해 잘도 빠져나간다.
아무래도 놈은 내 마동왕 모드의 플레이 스타일을 카피하고 있는 듯하니…….
“자, 와류 건틀릿이 좀 무겁지? 자꾸 휘두르다보면 팔이 아파.”
“조금 쉴 때 되지 않았어? 그렇지! 와류 쓴 뒤에 0.02초 마비 걸리구요~”
“응, 그 타이밍에 오른손 후려치기~ 그런거 안 맞죠.”
“아, 와류 한 번 더 쓰려고? 동작이 너무 크네. 거의 광고하는 수준~애드블록 감사합니다.”
“슬슬 또 지진이 나올 때 됐는데…아, 그래. 이제 쓰는구나.”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도플갱어 카이저의 모든 공격을 피해 낸다.
이건 미래의 지식을 쓸 필요도 없다. 그냥 저 상황에서 ‘나라면 어땠을까?’를 생각하면 그만이니까.
공격이 하나도 맞질 않자.
[죽여 버리겠다!]
도플갱어 카이저는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로 버럭 소리친다.
…….
AI라는 걸 아는데, 순간 쫄았다.
내가 멈칫하자.
[압도적인 힘으로!]
도플갱어 카이저는 고유 대사를 내뱉으며 허공으로 펄쩍 뛰어올랐다.
그리고.
쾅!
땅으로 떨어져 내림과 동시에, 지진과 와류를 동시에 시전했다.
꿀렁- 꿀렁-
땅이 마치 바다처럼 출렁거리기 시작한다.
오? 이런 것도 가능했던가?
그와 동시에.
콰콰콰콰콰콰-
거센 토류(土流)의 소용돌이가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으아앗!?”
드레이크가 크게 휘청거렸다. 나 역시도 디딜 땅이 사라진 마당인지라 균형을 잃을 수밖에 없다.
“젠장!”
일단 급한대로 저 동시 컨트롤부터 막아야겠다.
번쩍-
나는 메두사의 특성을 끌어올렸다.
마나 번!
내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빛이 도플갱어 카이저를 덮쳤다.
그러나.
츠팟!
붉은 빛은 이내 칠흑의 장벽에 가로막힌다.
요르문간드!
시커먼 비늘을 지닌 이 뱀이 마치 커다란 벽처럼 나를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아차, 놈이 요르문간드도 카피했나?’
나는 입술을 깨물며 뒤로 물러났다.
[쉬잇! 푸스스스…….]
소환된 요르문간드는 시커먼 눈을 빛내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네 공격패턴은 전부 간파하고 있다.]
그 뒤에서 도플갱어 카이저가 걸어 나온다.
시커먼 눈이 가늘게 좁아져 있는 걸로 봐서는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심지어 저런 건방진 대사라니.
턱- 차라라락-
놈은 요르문간드의 머리에 올라타고는 뱀을 조종해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드레이크는 그것을 보며 감탄했다.
“뱀 컨트롤은 너보다 잘 하는 것 같다.”
“…인정. 뱀을 저렇게 쓰는 건 보고 배워야겠다.”
나는 쿨하게 대답해 주고는 손에 쥔 깎단을 더욱 더 단단히 말아 쥔다.
나는 아직까지 도플갱어 카이저의 공격을 단 한 대도 맞지 않았다.
…….
다만 나 역시도 녀석에게 한 대의 유효타도 먹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숲 심층부는 이미 쑥대밭이 되었다. 지형이 통째로 변했고 지금도 계속 변하고 있다.
드레이크는 한 손에는 쇠뇌, 다른 한 손에는 마름쇠를 들었다.
“어진. 이제는 어떻게 할 건가?”
그는 꽤나 난색을 보이고 있었다.
하긴, 마동왕 모드의 나를 거의 완벽하게 카피하는 도플갱어 카이저가 아닌가.
상대하기 까다로운 적일 수밖에 없다.
그 점은 나도 인정한다.
…….
고로.
“튀어야지 뭐.”
나는 현실에 빠르게 순응하기로 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라고 하는데……사실 이건 잘못된 말이다.
‘즐길 수 없으면 피해라!’
그래, 이게 맞지.
마동왕 스타일은 내가 할 때는 재밌어도 적이 할 때는 재미가 없다. 오히려 무섭고 짜증나기만 할 뿐이다.
나는 드레이크에게 말했다.
“어차피 저 녀석은 잡으러 온 게 아냐.”
“……? 그럼 왜 왔나?”
“일단 저놈을 ‘만들어 놓았다는 것’에 의의가 있지.”
그러자 드레이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음, 이거 설명하기가 조금 귀찮은데?
나는 또 다른 이유를 대기로 했다.
“아이템 얻으러 온 것이기도 하고.”
그러자 드레이크는 점점 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아니, 저 녀석을 죽여야 아이템이 떨어질 게 아닌가?”
“도플갱어는 잡아도 아이템 안 떨궈. 경험치만 줄 뿐이지. 너도 봤잖아?”
그렇다.
도플갱어는 경험치만 줄 뿐 아이템은 주지 않는 몬스터.
아이템만 줄 뿐 경험치는 주지 않는 골렘과는 안티테제에 있는 몬스터라고 할 수 있다.
드레이크는 미간을 찌푸렸다.
“죽여도 아이템을 안 주는 몬스터라면서? 그럼 아이템을 어떻게 얻지?”
“이미 얻어 냈어.”
내 짧은 대답에, 드레이크는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죽어도 안 준다면, 산 채로 뜯어내야지.”
동시에.
나는 아까의 난전에서 슬쩍 주웠던 것을 드레이크에게 내밀어 보였다.
A+급 아이템을 알리는 붉은 빛기둥.
그것은 입마개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얼굴 절반을 가릴 정도의 크기.
“……!”
아이템의 정체를 알아본 드레이크가 두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은 전투 시작 전.
도플갱어 카이저가 마스크와 함께 뜯어냈던 입가의 살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