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55화 (55/1,000)
  • 55화 E스포츠 불법토토 (3)

    9번. ‘마티오스’

    VS

    21번. ‘고인 물’

    대진표는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고인 물? 그 자도 여기에 나온 건가?’

    마태강은 흔들리는 동공으로 대진표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참가번호 21번, ‘고인 물’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펄럭-

    알몸.

    어깨에 두른 검은 망토.

    빨간 신발.

    거기에 손에는 길고 가는 꼬챙이를 들었다.

    얼굴은 커다란 마스크로 가린 상태였다.

    [오오오! 고인 물!]

    [얄미운 강자! 너도 참가한 거냐!]

    관중들은 고인물을 향해 환호한다.

    하지만.

    마태강은 바로 알 수 있었다.

    ‘가짜로군.’

    뭐 굳이 눈썰미가 좋지 않아도 바로 알 수 있다.

    일단 체격부터가 너무 달랐으니까.

    눈앞에 있는 사내는 키가 거의 2미터에 육박하고 있었다. 마태강이 직접 맞붙었을 때보다 20cm 이상 크다.

    ‘그새 잘 먹어서 자랐을 리는 없겠고.’

    찜찜한 표정을 짓고 있는 마태강의 앞으로, 가짜 고인물이 다가온다.

    “잘 싸워 보자고.”

    그는 다소 성조가 있는 듯한 말로 입을 열었다. 중국인의 특징이다.

    ‘중국은 고인물도 가짜를 만드나?’

    마태강은 인상을 찌푸렸지만 딱히 대꾸를 하지는 않았다.

    이윽고.

    매치가 시작되었다.

    “…….”

    마태강은 조심스럽게 상대방과의 거리를 좁혔다.

    알몸에 무기 하나만 덜렁 든 것으로 봐서는 어느 정도 컨트롤에 자신이 있는 편 같다.

    ‘한 대도 맞지 않고 나를 잡겠다, 이건가?’

    너무나도 오만한 생각이다.

    진짜 ‘고인물’도 자신을 상대로는 저런 태도를 취하지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마태강은 메두사 레이드, 샌드웜 레이드 당시 고인물에게 몇 번인가 일격을 먹인 적이 있었을 정도.

    근접 전투의 대가인 마태강을 상대로 알몸 러쉬는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하지만.

    ‘가짜’ 고인물이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덤벼 봐. 나는 한 대도 맞지 않는다.”

    그는 으쓱거리는 태도로 마태강을 도발했다.

    그리고.

    천성이 싸움꾼인 마태강은 기꺼이 그 도발에 넘어가 주었다.

    쾅!

    마태강이 폭발했다!

    그가 도약하자 땅이 푹 꺼지며 깊은 발자국이 남았다.

    엄청난 속도로 거리를 좁힌 마태강은 대뜸 상대방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뻑-

    건들거리는 태도로 서 있던 상대는 마태강의 주먹을 전혀 피하지 못했다.

    “억!?”

    피하기는커녕 정타를 허용한 가짜 고인물.

    이내, 마태강의 주먹이 폭풍처럼 몰아치기 시작했다.

    주먹이 마치 수천 개로 보이는 듯한 잔상.

    이내 주변은 이글거리는 불길에 뒤덮였다.

    마태강의 건틀릿이 가진 화염 데미지 효과 때문이다.

    [화권(火拳)! 대단해!]

    [오오, 저 녀석! 진짜 프로게이머 아냐!?]

    도박꾼들이 열광한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무명의 다크호스가 치고 나갈 때만큼 도박판이 요동칠 때가 또 없다.

    “……큭!?”

    가짜 고인물은 당황했다. 상대방의 실력이 생각보다 까다롭다.

    스팟!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레이피어를 빠르게 휘둘렀다.

    동시에.

    칼에서 뿜어낸 아우라가 채찍처럼 휘둘러져 지면을 온통 휩쓸어 버린다.

    -<던전 고슴도치의 세밀한 가시> 한손무기 / C+

    깊은 던전 속에 살고 있는 고슴도치에게서 뽑아낸 가시.

    어렸을 적부터 부모에게 함함하다는 말을 듣고 자란지라 자기의 가시가 가까이 있는 이들에게 얼마나 큰 피해를 끼치는지 모르는 것 같다.

    -공격력 +250

    -독 속성 공력력 +50

    -특성 ‘함함’ 사용 가능(특수)

    고인물이 들고 있는 레이피어는 ‘함함’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는 일정 거리 안에 있는 적에게 25%의 추가 피해를 입히는 특성.

    ‘근접딜러이기는 하나 아웃복서 스타일, 분명 HP가 약할 것이다.’

    강력한 공격으로 기선을 제압하면 알아서 멀찍이 떨어질 것이라 판단한 듯싶었다.

    하지만, 마태강은 근접전에는 이골이 난 이.

    찰싹 달라붙듯 한 거리에서 피 튀기는 난투전을 즐기던 타입이다.

    그렇게 키워 온 캐릭터인지라, HP통이라면 넘칠 듯이 남았다.

    마태강은 거리를 벌리려는 칼질을 모조리 씹으며 돌진했다.

    퍼억-

    칼에 맞았지만 HP가 조금 깎일 뿐 공격에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마태강은 한쪽 팔뚝을 내주는 셈 치고 돌격했다.

    콱!

    결국. 가짜 고인물은 마태강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뒈져 버려라.”

    마태강은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아까부터 기다렸던 한방기가 지금 작렬하려 한다.

    쿠르륵-

    그의 손에서 용암과도 같은 불길이 끓었다.

    이 주먹이 상대방의 배에 꽂히는 순간, 승부는 난다.

    펑! 소리와 함께 상대방의 배는 찢어지고 그 속에 든 내장들이 죄다 뽑혀 나올 것이다.

    그러나.

    승부에서 이기기 바로 직전의 순간.

    귓가에 들려온 관중의 목소리 하나가 마태강의 몸을 멈칫하게 만들었다.

    [아, 뭐야! 고인물 저거 별 거 없네!]

    순간.

    마태강은 속으로 울컥했다.

    고인 물. 그는 진정코 대단한 플레이어다.

    1:1로는 적수가 없다고 생각했던 자신을 몇 번이나 꺾은 괴물.

    그리고 일반인들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프로들조차 불가능하다고 말했던 레이드를 몇 번이나 단신으로 성공시켰다.

    그런데 그런 존재가 별것 없다고?

    ‘이 자식은 가짜란 말이다!’

    마태강의 이마에 핏줄이 돋아났다.

    왠지 고인물이 모욕당하는 게 자신이 모욕당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고인물이 별게 없다면 그에게 몇 번이나 죽은 자신은 뭐란 말인가?

    결국.

    까락-

    마태강은 주먹의 방향을 틀었다.

    상대방을 100% 죽일 수 있는 바디 블로우.

    그것을 턱을 노린 어퍼컷으로 바꾼 것이다.

    ‘네 진짜 얼굴을 공개해 주마. 이 가짜 녀석!’

    가짜 고인물을 이겨 놓고 관중들에게 승리자로 인식되고 싶지 않았다.

    치기 반, 오기 반.

    마태강은 주먹의 궤도를 돌려 가짜 고인물의 턱을 후려쳤다.

    하지만.

    틱-

    마태강의 주먹은 빗나가고 말았다.

    애초에 배와 턱은 그 넓이부터가 다르다.

    “히익!?”

    가짜 고인물은 재빨리 고개를 뒤로 틀었고 데굴데굴 구르다시피 하여 위협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마스크는 결국 부서지고 말았다.

    와작-

    아무런 옵션도 없는 D등급 마스크인지라 쉽게 부서진다.

    그리고, 가짜 고인물의 정체가 잠깐이지만 만천하에 드러났다.

    [헉!?]

    [어! 저 사람!?]

    관중석 곳곳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짙은 눈썹, 굵은 턱선, 부리부리한 눈매.

    ‘서초패왕(西楚覇王)’ 커제(柯洁)!

    중국 랭킹 3위이자 아시아 랭킹 6위의 초고수. 현재 프로게이머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존재였다!

    “……끙.”

    서초패왕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커제.

    그는 앓는 소리를 내며 재빨리 다른 마스크를 꺼내 뒤집어썼다.

    프로게이머가 불법 사설 토토리그에 참가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좋을 게 없다.

    최악의 경우에는 프로리그에서 퇴출당할 수도 있었다.

    물론 개인방송이나 사설 대회 등, 점점 이런저런 규제들이 완화되고 있는 추세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대중들이 불법까지 용인해 주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젠장! 일부러 본캐 스타일을 싹 지우고 출전했는데.”

    서초패왕. 그는 투덜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어차피 들킨 바이다. 지금 진다면 죽도 밥도 안 된다.

    상금을 날리는 것도 모자라 배팅자들에게 욕까지 옴팡지게 먹게 될 게 분명했다.

    결국.

    서초패왕은 본캐릭터로 활동할 때의 아이템과 장비들을 꺼내 들었다.

    쿵- 쿵- 쿵-

    거구의 알몸 사내가 순식간에 중무장한 철갑의 기사로 변신했다.

    “…….”

    마태강은 인상을 찡그렸다.

    보아하니 모르는 아이템들이 많다.

    특히나 상대가 들고 있는 저 거대한 참마도는 C+급 아이템 목록에서는 본 적이 없던 것.

    “자. 다시 와 봐라. 아까처럼은 안 될 거다.”

    본신의 힘을 여지없이 드러낸 서초패왕을 상대로.

    쾅-

    투신이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또다시 불벼락처럼 뛰쳐나가는 투신.

    하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다.

    부웅-

    서초패왕은 양손에 든 거대한 참마도를 가로로 휘둘렀다.

    콰쾅!

    투신은 그 공격을 받아 내며 전진하려고 했으나,

    “……!”

    들어오는 데미지가 생각보다 묵직하다.

    우지직-

    분명 가드를 했는데 HP바가 부서질 듯 요동쳤다.

    순식간에 주황색으로 바뀌어 버리는 HP바.

    ‘……이런!’

    마태강은 할 수 없이 거리를 벌렸다. 이런 공격을 한 번 더 맞는다면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힐끔 시선을 돌려 장비창을 확인했다.

    HP뿐만이 아니라 방어구들의 내구도도 대폭 감소했다.

    ‘접근전은 불리한데…….’

    마태강은 멀찍이 떨어진 채로 생각했다.

    상대방 무기가 가진 특성을 모르니 이거 원 전략을 세울 수가 없다.

    다만 한방 공격력이 무시무시한 걸로 보아 어지간한 상대는 원킬로 끝, 자신 같은 탱커형 근접 딜러도 두세 방이 고작인 듯싶었다.

    거리를 벌리는 것이 일단은 임시방편인 듯싶었지만…….

    콰쾅!

    서초패왕은 마태강이 거리를 두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참마도에서 뻗어나간 아우라가 폭풍처럼 휘몰아쳐 원거리에 있는 마태강을 노린다.

    퍼펑! 퍼퍼펑! 콰쾅! 우르릉! 우지지직!

    마치 칼에서 대포를 쏘아 내는 것 같았다.

    검기가 날아 경기장의 돌바닥은 온통 헤집어 놓는 동안, 투신은 이리저리 피하고만 있었다.

    “크하하하! 내가 무섭나 한국인!? 왜 가까이 오질 못하지!?”

    과연 서초패왕이라는 이름이 붙을 만한 위력이다.

    그는 맞붙어 싸우기를 열렬히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강력한 물리공격력을 가진 저 거대한 참마도는 도저히 맞붙어 싸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것이 대국(大國)의 힘이다!”

    서초패왕은 거대한 참마도를 붕붕 휘두르다가 그대로 바닥에 내리찍었다.

    콰쾅!

    또 한 번, 아우라의 폭풍이 온 사방을 뒤집어 놓았다.

    결국.

    퍼억-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짧은 순간, 투신은 서초패왕이 휘두른 참격에 베이고 말았다.

    콰쾅!

    HP가 순식간에 바닥을 쳤다.

    시뻘건 HP가 바닥에 얕게 고여 찰랑거린다.

    이대로 가다간 죽는다.

    결국.

    “그만. 항복하겠다.”

    마태강은 기권을 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PK를 포기하자, 서초패왕은 콧방귀를 뀌며 참마도를 거두었다.

    “흥. 근성도 없는 한국 놈.”

    서초패왕은 기권의사를 표시한 투신을 굳이 죽이지 않았다.

    다만 몹시 불쾌한 표정으로 참마도를 거두었을 뿐이다.

    *       *       *

    관중들은 난리가 났다.

    [크아! 세상에 서초패왕 커제가 출전했을 줄이야!]

    [프로리그에서 연봉도 수억대로 받는 놈이 뭐가 아쉬워서 이런 사설 사이트까지 왕림하셨을까?]

    [그게 뭐가 문제야! 통쾌했잖아! 그 한국 놈 기권할 때 표정 봤어?]

    [커제가 참가번호 21번이지? 다음에는 몇 번이랑 붙는대?]

    [어, 다음에는 참가번호 3번이랑 붙네. 3번은 누구야? 아는 놈이야?]

    [아니, 무명이야. 전 판에도 무명끼리 붙어서 겨우 올라온 놈이지.]

    [그러면 무조건 21에 걸어! 이번 리그에서 커제를 이길 놈은 없다구!]

    짭짤한 이득을 본 토토쟁이들이 자기들끼리 시끄럽게 떠든다.

    “…….”

    투신 마태강.

    그는 구석에 팔짱을 끼고 선 채 찜찜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결국 본선 1차에서 떨어졌다.

    당연히 상금도 한 푼 건지지 못했다.

    ‘빌어먹을. 시간만 낭비했군.’

    마태강은 이를 뿌득 갈았다.

    분명 이길 수 있었다. 복부가 텅 비는 순간, 온 힘을 다해 주먹을 날렸으면 그 승부를 가져올 수 있었다.

    하지만.

    관중의 도발에 발끈해 주먹을 틀었고, 그 결과는 천금 같은 기회를 날리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번 기회에 배운 셈 쳐야겠군.’

    마태강은 자신의 마음을 조금 더 갈고닦을 필요성을 느꼈다.

    …….

    그래도 수확이 없지는 않았다.

    중국 프로리그의 수준을 몸으로 겪어 봤다는 것은 꽤 큰 수확이다.

    타성에 젖은 한국 프로게이머들과는 그 수준이 확실히 다르다.

    서초패왕 커제.

    그는 확실히 대단했다.

    압도적인 물리 공격력으로 펼치는 접근전. 마치 태산도 뽑아 부숴 버릴 듯한 기개.

    고인물을 사칭한 것도 회피 캐릭터라는 완전 딴판인 공격 스타일을 잘 흉내 낼 자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거였다.

    ‘과연 진짜 고인물과 붙었다면 누가 이겼을까?’

    투신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압도적인 힘으로 자신을 경기 내내 몰아붙였던 서초패왕.

    그리고 자신을 두 번 죽였던 고인 물.

    둘 중 누가 더 강할지,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하긴. 지금의 나한테는 상관없는 일이지.’

    이내, 마태강은 어깨를 으쓱했다.

    자신은 결국 이번 기회에 한 푼도 건져 가지 못했다.

    당장 급전이 필요한 마당에 꽤나 치명적인 시간낭비였다.

    눈앞에 아픈 여동생의 얼굴, 일에 지쳐 피곤한 부모님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마태강이 양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돌아가려는 찰나.

    턱-

    누군가 그의 어깨를 짚었다.

    마태강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

    웬 특이한 행색의 플레이어 하나가 마태강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투박한 갑옷, 허름한 건틀릿. 꼬질꼬질한 마스크.

    생전 처음 보는 유저였다.

    그의 손에는 3번이라고 적힌 공이 들려 있다. 리그 참가 번호 3번인가 보다.

    “안녕?”

    뜬금없는 3번 참가자의 인사.

    하지만.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

    마태강의 전신이 빳빳하게 굳는다.

    이 목소리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고인 물!?’

    진짜다!

    진짜가 나타났다!

    “…….”

    너무 놀라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마태강에게,

    3번 참가자는 악마처럼 속삭였다.

    “다음 배팅. 나한테 전부 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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