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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52화 (52/1,000)

52화 커서 뭐 될래? (3)

홍산.

부릉-

카드도 받지 않는 시골 터미널.

심지어 구멍가게 주인이 터미널 운영을 겸하고 있다.

불친절한 할머니가 툭 끊어 내던져주는 차표를 손에 쥐고, 나는 터미널을 나섰다.

터미널에서 내려서 40분 이상을 걸어가야 저 멀리, 산 아래에 큰아버지의 집이 나온다.

넓은 저수지와 높은 산 중간에 있는 집.

이렇게만 놓고 보면 참 아름답고 평화로워 보이는 풍경이다.

하지만 이 집의 문을 열기만 하면.

삐걱-

내가 큰아버지의 집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거짓말처럼 전원의 평화는 사라졌다.

“어, 어진이 왔냐. 너 거기 앉아라.”

모 부대 전역모를 쓰고 있던 큰아버지는 끙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 옆에는 작은아버지와 큰고모, 작은고모가 불편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

사촌형 둘과 사촌동생 셋은 그저 뚱한 표정으로 좁은 거실에 모여앉아 저마다의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아버지 선산을 어떻게 나누겠다는 건데?”

“이거 지금 우리끼리만 얘기하고 끝낼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작은아버지와 고모들은 짜증스러운 어조로 대화를 미뤘다. 뭐가 잘 안 풀리는 모양이다.

그때.

스트레스를 꽤나 받은 듯한 큰아버지가 막 자리에 앉은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 어진이 서울에서 내려온 거냐?”

“네.”

“전역한 지 얼마나 됐지? 지난 주에 했던가?”

“아뇨. 세 달 좀 넘었습니다.”

그러자.

큰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유산 문제로 받은 스트레스를 나에게 여과 없이 풀기 시작했다.

“야, 어진이 이놈아. 너는 너무하다고 생각 안 하냐?”

“……네?”

“너는 이놈아. 남자가 돼서. 알바도 하고, 대학도 가고. 자기 밥줄은 알아서 찾아야지! 언제까지 어른들이 이놈아, 너 챙겨 주고 걱정해주고 해 줘야 하냐?”

???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내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자, 큰아버지는 내가 부끄러워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안 듯싶다.

“이놈아! 어른들이 걱정 안 하게 하는 것도 효도야! 네 형들을 봐라!”

큰아버지는 고개를 돌려 저 뒤 거실 중앙에 앉아 있는 두 명의 자식들을 돌아보았다.

의대와 법대에 다니고 있는 두 명의 사촌형.

그들은 짐짓 이쪽을 돌아보지 않은 채 으쓱한 표정을 짓고 있다.

큰아버지는 어엿하게 큰 두 아들이 자랑스러운지 큰 소리로 외쳤다.

“네 형들 봐라 응? 학교 다닐 때부터 부모 속 한 번 안 썩이고. 공부 얼마나 열심히 하고 또 잘 했냐? 응? 너는 맨날 게임이나 해 쌌고 그러더니 봐, 형들하고 네 격차가 지금 얼마나 벌어졌어? 그거 메꾸려면 지금부터라도 이놈아. 열심히 살아야 할 것 아냐!”

누가 보면 그동안 내 후견인이었던 줄 알겠다.

나도 몰랐던 내 키다리 아저씨인가?

“…….”

내가 뚱한 표정을 짓고 있자, 사촌동생들이 슬슬 눈치를 본다.

이때쯤 해서, 작은아버지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나와 큰아버지 사이를 말렸다.

“형님. 어진이도 다 생각이 있겠지요.”

“에잉! 제깟 놈이 무슨 생각이란 게 있겠어! 허구헌 날 인생을 낭비하고만 있겠지 뭐. 안 봐도 비디오야, 비디오!”

“자자, 선산 문제나 다시 논의하십시다.”

작은아버지는 큰아버지를 달랜 뒤 나에게도 손짓했다.

“어진이도 다음부터는 이런 얘기 할 때 같이 하자. 할아버지 유산 관련한 문제인데, 이제는 아버지가 안 계시니까 네가 알아야지.”

그렇군. 드디어 나올 게 나왔다.

“혹시 금액적으로 따지면, 어느 정도나 되나요?”

내가 묻자, 작은아버지는 눈을 동그랗게 뜬다. 내가 관심을 보일 줄 몰랐다는 표정.

실제로, 과거의 나는 이런 쪽으로는 영 무지했다.

관심도 없었고 의지도 없었다.

귀찮은 일은 다 어른들에게 떠넘기고 그저 결과만 얼른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그 결과는 결국 큰아버지가 내 재산을 알음알음 죄다 까먹어 버리는 쪽으로 나 버렸다. 이번 생에서는 그렇게 둘 수는 없지.

작은아버지는 내가 유산 문제에 관심을 보이자 꽤나 반가워하는 기색이었다.

“네 몫으로 큰 것 두 장은 나올 것 같구나.”

큰 것 두 장?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2억이요?”

그러자, 옆에 있던 큰아버지가 픽 웃는다.

“야, 이놈아. 억이 뉘 집 개 이름이냐? 요즘 것들은 하여간 돈 귀한 것도 모르고 겉멋만 들어서는…….”

아, 2천만 원이었나.

나는 큰아버지의 핀잔을 받고 입을 다물었다.

한편.

‘2천만 원이라…….’

나는 내내 생각하고 있던 아버지의 유산을 자세히 알게 되자 어쩐지 김이 빠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2천? 마음만 먹으면 반나절 만에 벌 수 있다.

새삼 내가 이곳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얼마나 소모적인 일인지 확 와 닿았다.

‘내가 3달 만에 4억 번 것을 들으면 다들 뭐라고 할까?’

그것도 별로 돈 벌 생각도 없이 슬슬 움직인 결과이다. 앞으로는 더욱 더 많은 금액이 들어올 것이다.

‘그래도 아버지의 몫이니 받기는 해야겠지.’

2천만 원은 적은 돈이 아니다. 또한 각별한 의미가 있는 돈이니 만큼 받을 것은 받아야 한다.

이번에는 큰아버지에게 야금야금 흘러 들어가는 일 없게, 쐐기를 박아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등기를….분할…신청을 해서……그러면 어진이 명의로도…이거 서류가 꽤 복잡할 텐데…어찌 해야 하나…….”

나는 큰아버지와 다른 친적들이 논의하는 곳으로 머리를 쑥 들이밀었다.

그리고 헛기침을 했다.

“저도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

그러자, 큰아버지를 비롯한 친척들이 이쪽을 돌아본다.

다들 이제 갓 전역한 새파란 놈이 뭘 안다고 끼어드냐는 듯한 표정.

하지만 나의 실제 나이는 35살이다. 알 것은 다 알지.

“제가 관할 구청 지적부스에 가서 지적측량 견적서랑 토지분할 공문서 가져다 낼게요.”

그러자, 분위기가 갑자기 조용해진다.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보아하니 아직 법원등기소에 분할 촉탁도 안 된 것 같은데 1주일 정도 걸릴 거예요. 나중에 법원등기소에서 모번지 등기 떼어 보시면 옆에 신번지 분할 지번이 생겨나 있을 테니 확인해 보세요. 그 뒤에야 소유권이전등기 절차를 밟아야 하는데 토지 이동 신청서랑 제 인감은 미리 준비해 둘게요. 종중회의록이랑 직인, 대표자 인감만 차질 없게 잘 준비해 주세요.”

그러자,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큰아버지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야, 이, 이놈아! 어디서 어른들 이야기하시는데 끼어들어서는……!”

“에이, 어른들이 언제까지고 챙겨 주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이제 걱정은 그만 끼쳐 드려야죠.”

내가 싱긋 웃으며 대답하자, 아까 호통 친 게 있는 큰아버지로서는 딱히 할 말이 없다.

내 재산을 관리해 준다는 명목으로 야금야금 팔아 치울 계획은 무산된 것이다.

“그래도 이놈아. 네가 뭘 안다고 벌써 부동산을 다루겠다는 거냐? 다 그 나이에 맞는 삶이 있는 거야. 너는 어서 일 구해서 사람구실할 궁리나…….”

“제가 큰아버지보다 잘 알 걸요?”

나는 싱글싱글 웃으며 부동산 상속과 분할에 대해 본격적으로 입을 털기 시작했다. 다 전생에서 큰아버지 본인에게 욕을 먹어 가며 배운 것들이다.

그러자.

“……이야, 우리가 오히려 어진이한테 배워야겠는데?”

“어진이가 우리 이거 분할 상속 전담 좀 해 줘야겠다, 얘.”

작은아버지와 고모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신기해했다.

큰아버지만이 인상을 찌푸리고 담배만 뻐끔뻐끔 피울 뿐이다.

그때.

아버지가 수세에 몰리자, 아들들이 나선다.

“야, 어진아. 너 요즘 뭐 하냐?”

“너 대학은 안 가?”

의대, 법대에 간 사촌형들이 넌지시 물어왔다.

그들은 은연중 뿜어져 나오는 거들먹거림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21살이면 좀 늦기는 했는데, 그래도 지금부터 하면 인서울 하위권은 갈 수 있을 거야.”

“자식, 못 하겠으면 형한테 말해. 과외 해 줄게. 요즘 세상에 대학은 가야지.”

그러자.

“…….”

거실 구석에 있는 초등학생, 중학생 동생들은 입을 꾹 다문 채 말이 없다. 다들 핸드폰으로 동영상만 보고 있을 뿐이다.

‘어그로가 이상한 데로 튀네.’

나는 한창 공부에 시달리고 있을 동생들을 바라보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15년 뒤의 미래를 봐서 안다. 고모들이 이 아이들을 얼마나 쥐 잡듯이 닦달하는지.

‘네 사촌형들은 의대가고 법대가고 하는데!’

‘너도 사촌형들처럼 의사 되고 변호사 되고 해야지!’

그 때문에 스트레스 받은 동생들은 나중에 나이를 먹어서도 부모와 서먹할 정도였다. 개중에는 의절하는 녀석들도 있었다.

‘나중에 저 사촌형들의 인생이 얼마나 고달프게 꼬이는지 안다면 고모들이 그렇게 못할 텐데…….’

15년 뒤.

페이닥터로 일하던 큰형은 빼도박도 못할 의료사고를 쳐 병원에서 짤린 뒤 알콜중독자가 된다.

변호사로 일하던 작은형은 특유의 오만한 성격 탓에 장사가 안 돼 파리만 날리다가 망하고 이혼 당한다.

그때 큰아버지의 퇴직금이고 노후자금이고 죄다 끌어 쓰다가 결국 내 돈에까지 손을 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는 얄짤 없는 일이지.’

나는 과일을 우물거리며 그저 묵묵히 있을 뿐이다.

그 동안에도, 큰아버지의 공격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 녀석들아! 언제까지 핸드폰만 보고 있을 거야!”

큰아버지는 사촌동생들을 향해 핀잔을 주었다.

“너희들 맨날 핸드폰만 보고 게임만 하다가는 여기 어진이 형처럼 된다?”

큰아버지는 나름 개그를 친답시고 씩 웃으면서 한마디를 했다.

바로 그때.

빵- 빵-

집 밖에서 요란한 클락션 소리가 울렸다.

“뭐야? 누가 왔나? 올 사람 다 왔는데?”

큰아버지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거실 베란다의 커튼을 젖혔다.

그 순간.

“으왓!? 뭐여 저게!”

큰아버지는 버럭 소리쳤다.

거실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베란다 밖 마당으로 향했다.

거대한 트레일러 차량 한 대가 마당으로 들어서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런 망할! 저것들이 지금 누구 집에 들어오려는 거야! 땅 돋은 거 다 꺼지잖아!”

큰아버지는 버선발로 확 뛰쳐나간다.

작은 아버지와 고모, 사촌형들도 그런 큰아버지의 뒤를 쫓아 우르르 마당으로 나갔다.

“아니. 남의 집 마당에 함부로 차를 대면 어떻게 해요!”

큰아버지가 트레일러에 대고 버럭버럭 소리 지르자.

이내 트레일러에서 한 정장 사내가 내린다.

바로 딜러였다.

“이어진 사장님. 배송 완료입니다.”

그는 뒤에 팔짱을 끼고 서 있는 나를 향해 밝게 웃어 보였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나를 향했을 때.

푸슉-

트레일러 위의 거대한 컨테이너 박스가 열리기 시작했다.

츠츠츠츠츠-

자욱한 드라이아이스가 뿜어져 나온다. 와우, 요즘은 서비스 되게 잘 나오네.

“리스에는 제공되지 않는 서비스죠.”

딜러는 나를 향해 슬쩍 귀뜸했다.

이내.

트레일러 박스의 5면이 완전히 펼쳐지자, 안에서 차 한 대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포르쉐 크로커다일 L-3021!

얼마 전 내가 구입한 차량이다.

“…….”

모두가 입을 반쯤 열고 멍하니 있을 때.

뚜벅- 뚜벅- 뚜벅-

나는 뚜벅이처럼 앞으로 걸어가 차에 탔다.

크르릉-

시동을 걸자, 묵직한 엔진음이 울려 퍼졌다.

“상속 문제는 대략적으로 논의된 것 같으니, 추가로 결정된 사항 있으시면 연락 주세요. 저는 바빠서 바로 들어가 봐야 해서요.”

나는 작은아버지에게만 인사를 하며 말했다.

한편.

“…….”

그냥 바쁘다고 했으면 ‘백수새끼가 뭐 하느라 바빠!’라고 호통 쳤을 큰아버지지만…

비싼 스포츠카에 앉아서 바쁘다고 하니 딱히 말씀이 없으시다.

붕-

나는 그대로 차를 몰고 떠나 버렸다. 곧 레이드 돌 시간이니 바쁘다.

충남에서 서울까지라.

길 안 막히면 30분이면 가겠네.

*       *       *

한편.

어진이 차를 몰고 떠나 버리자.

“멋있다…….”

동생들의 입에서는 기함이 흘러나온다.

녀석들은 집으로 들어가며 아까 미처 다 보지 못했던 유튜뷰 동영상을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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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창 핫한 BJ 고인물 방송.

아이들이 그것을 보고 있자니, 큰아버지는 또다시 무의식적으로 한마디 내뱉는다.

“너희들 공부 안 하고 그런 거만 보면 나중에 어진이 형처럼 된…….”

무의식적으로 어진을 평가절하하는 개그를 치던 그는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동생들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큰아버지를 올려다본다.

“저희도 어진이 형처럼 되고 싶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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