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49화 (49/1,000)
  • 49화 샌드웜 (3)

    ‘이세돌이 패한 것일 뿐, 인간이 패한 것은 아냐.’

    2016년 3월 12일.

    바둑 세계랭킹 1위 이세돌이 알파고에게 패한 뒤에 했던 말이다.

    …….

    지금 내 의견이 바로 이와 비슷하다.

    “플레이어들이 이긴 게 아냐, 내가 이긴 거지.”

    나는 샌드웜이 쓰러지자마자 잽싸게 시체를 향해 달렸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템을 노리고 부나방처럼 달려드는 것들이 많다.

    ‘어차피 기여도가 없어서 루팅도 못할 것들이.’

    나는 카이도우의 발가죽으로 지진을 일으켜 나방들을 저 멀리 날려버렸다.

    이대로 A+등급 아이템이 시장에 풀리게 둘 수는 없지.

    현재 시장에 풀려 있는 아이템들 중 가장 고등급은 C+ 등급.

    그 이상 가는 아이템들은 전부 내가 소유하고 있다.

    물론 한동안 독점을 풀어 줄 생각은 없다.

    한편.

    “으악! 샌드웜이 아직 살아 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삼겹살 보고도 놀란다던가?

    플레이어들은 내가 일으킨 지진을 보고 샌드웜이 재림한 줄 안 모양이다.

    호다닥 도망가는 이들을 보며, 나는 샌드웜이 떨군 아이템을 여유롭게 수거했다.

    샌드웜은 거대한 덩치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떨구는 아이템까지 거대한 것은 아니었다.

    찢어진 가죽과 으깨진 내장 속에서 빛나고 있는 아이템!

    나는 그것을 수거하며 생각했다.

    ‘내가 샌드웜을 홀로 잡는 날이 다 오다니!’

    물론 나를 다구리하기 위해 몰려든 뉴비들의 인해전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 친구들이 열심히 길막을 해 주지 않았더라면 레이드는 요원했겠지.

    원래 생에서 샌드웜이 공략 당했던 시기는 게임 출시 후 약 5년이 지났을 무렵.

    그것도 수없이 많은 랭커들이 수백 단위로 몰려들어 대규모 레이드를 펼쳤던 결과였다.

    ‘지금이 게임 출시 후 약 6개월 남짓 되었으니…10배는 빠르네.’

    나는 혀를 내둘렀다.

    가까이서 본 샌드웜의 위용은 과연 엄청난 것이었다. 수없이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갔다.

    사실, 전생의 샌드웜은 그리 인기가 없는 몬스터였다.

    잡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많은 인원과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기껏 보상을 받아 봤자 그것을 수백분의 일로 쪼개면 개인에게 떨어지는 몫은 그리 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경우에는 오로지 나 혼자만 보상을 받았다.

    방금 말했던 바와 같이, 지금까지 샌드웜에게 딜을 넣던 이들이 모두 죽어 나갔기 때문이다.

    모두가 사망해서 기여도가 0%, 오직 내가 먹인 도트 데미지만이 착실하게 기여도를 쌓았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모든 특전이 나에게만 집중될 수밖에.

    -이어진

    LV: 37

    호칭: 바실리스크 사냥꾼(특전: 맹독) / 메두사 사냥꾼(특전: 마나 번) / 샌드웜 샤낭꾼(특전: 가뭄)

    HP: 370/370

    일단 레벨이 2 올랐다.

    그리고 호칭 란에 샌드웜을 잡았다는 표시가 생겨났다.

    패시브로 ‘가뭄’ 특성을 얻게 되었다.

    가뭄 특성은 암석, 땅, 물, 불, 나무 등등의 특성을 가진 적에게 강력한 저항력을 갖게 되는 특성.

    거의 모든 종류의 몬스터나 플레이어에게 적용 가능한 것으로 공격과 방어를 모두 올려 주는 밸런스 좋은 특성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좋은 성과는 바로 아이템이었다.

    번쩍-

    나는 내 손아귀 안에서 빛을 뿜고 있는 아이템을 내려다보았다.

    A+급 아이템!

    바실리스크의 심장과 더불어 ‘3신기’라고 불리던 것 중 하나가 내 손에 들어왔다!

    그것은 한 자루의 천조각이었다.

    -샌드웜의 가죽 / 망토/ A+ / (앙버팀)

    쭈글쭈글한 모래색의 망토. 두텁고 무거운 데다가 멋도 없다.

    펄럭-

    하지만 나는 그것을 거침없이 몸에 둘렀다.

    ‘드디어!’

    나는 희열로 인해 두 주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A+급 아이템 중 가장 좋은 아이템 중 두 개를 손에 넣었다.

    물론.

    바실리스크를 잡고 얻은 ‘패륜아의 심장’ 갑옷이나 샌드웜을 잡고 얻은 ‘샌드웜의 가죽’ 망토가 스탯 면에서 우월하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스텟만으로 따지면 A+급 아이템 중 하위 5% 안에 들만큼 나쁠지도.

    아이템 각각의 개별적인 성능으로 보자면 이것들보다 좋은 것이 훨씬 많다.

    …….

    그러나.

    아이템들이 하나로 모여 어우러졌을 때, 이것들만큼 시너지 효과가 증폭되는 것이 또 없다.

    패륜아의 심장과 샌드웜의 가죽, 거기에 다른 아이템 하나가 덧붙여진다면, 게임 내에서 ‘신’이라 불리는 S+등급의 몬스터도 잡을 수 있는 것이다!

    ‘괜히 신살자(神殺者) 세트라고 불렸던 게 아니지.’

    나는 전생의 랭커들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약 13년 쯤 뒤, 한 랭커가 S+등급의 몬스터와 1:1로 맞붙은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간발의 차이로 레이드에 실패했다.

    이후 어떤 게임 잡지 인터뷰에서, 그가 침통한 표정으로 그 당시를 회상하며 했던 말이 기억난다.

    ‘그때 ‘샌드웜의 가죽’ 망토만 있었어도 레이드는 성공했을 것이다.’

    그래.

    그래서 오늘 나는 이 자리에 섰다.

    바로 그 ‘샌드웜의 가죽’ 망토를 두르고서!

    ‘좋아, 어디 아이템 효과를 한번 확인해 볼까?’

    내가 막 상태창을 켜서 분량을 잡아먹으려 할 때.

    탁-

    시야의 사각지대. 좌측 하단에서 무언가 위화감이 느껴졌다.

    뭔가 싶어 고개를 돌리자.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다!”

    투지 넘치는 함성이 들려왔다.

    내 쪽으로 빠르게 가까워지는 붉은 형체.

    바로 투신 마태강이었다!

    그는 일부러 샌드웜 레이드에 참가하지 않은 채 멀리 떨어져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저따위 모래순대에는 관심 없다. 내 목표는 오직 너!”

    우는 천사와 메두사 때도 그랬다.

    녀석은 한번 목표로 정한 것 외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 성격.

    이번에도 역시 나의 몸만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스팟!

    샌드웜의 시체를 밟고 눈 깜짝할 사이에 허공으로 뛰어오르는 투신!

    하지만.

    “안 되지.”

    그런 투신을 가로막는 존재가 있었다.

    나의 그림자에 녹아들 듯 숨어있던 이. 궁수 드레이크가 투신을 막아선 것이다.

    과거 PK랭킹에서 부동의 1위를 지켰던 드레이크.

    그리고 전 아시아 통합 랭킹 1위였던 투신.

    그 둘이 허공에서 맞닥뜨렸다.

    그러나.

    휘릭-

    세기의 빅매치도 양측 중 어느 한쪽이 의지가 없으면 성사되지 못한다.

    투신, 그는 드레이크와 맞붙을 듯 하다가 그 직전에 외발을 꼬아 턴을 했다.

    그리고 마치 미식축구의 러닝백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드레이크를 제껴 뒤를 돌파했다.

    퍽-

    심지어 그 와중에 드레이크의 등을 밟고 도약하는 도발까지!

    “……허어?”

    등에서 느껴지는 발바닥의 충격!

    드레이크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심 상대를 얕잡아 봤던 것이 패인이었다.

    투지는 인정할 만하지만 아직 어려 보이는데다가 레벨도 낮은 것 같기에 슬슬 밀어내려고 했는데, 아뿔싸!

    상대는 호랑이 새끼가 아니라 이미 다 큰 울버린이었다.

    “뒈져라!”

    투신은 나를 향해 달려들며 두 주먹을 장전했다.

    쿠르륵-

    이내, 그의 두 주먹이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아하, 저 기술 알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투신이 게임 출시 6개월쯤에 쓰던 기술.

    무통증 협곡에서 골렘을 수없이 파괴하던 그는 우연히 히든 몬스터인 ‘불타는 강철 골렘’을 잡게 되고 그 보상으로 지금 끼고 있는 붉은 건틀릿을 얻는다.

    ‘단조(鍛造’) 특성을 이용해 두 주먹에 막강한 화염 데미지와 관통 데미지를 실어 때리는 기술.

    엄청난 데미지를 가졌기에 어지간한 몬스터는 한 방에 죽여 버릴 수 있다.

    단점은 특성을 발동하기까지 시간이 꽤 오래 걸린다는 점?

    한 마디로 기를 모아야 쓸 수 있는 한방기라는 것이다.

    그동안 투신은 나를 죽이기 위해 기운을 모으고 또 모아 놓은 것이다.

    마치 수백 명의 척살대에게 포위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알고 있었어! 믿고 있었다! 네가 그 정도로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걸!’

    투신은 뜨거운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수백의 척살대에게 둘러싸였을 때도, 거대한 필드보스 샌드웜이 나타났을 때도, 그의 눈은 오로지 나만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성과가 작렬한다!

    쇄애애애액-

    투신의 두 주먹이 허공에 붉은 궤적을 그렸다.

    열공(熱空)의 궤적이 뜨겁게 그려진다.

    불길에 달아오른 쇠붙이가 내는 시뻘건 빛!

    두 개의 주먹은 정확히 내 양 가슴을 강타했던 것이다!

    콰쾅!

    내 가슴에서 요란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무시무시한 화염 데미지가 방어구를 무시한 채 나의 심장을 바로 강타했다.

    “커헉!?”

    나는 피를 토할 수밖에 없었다.

    즉사(卽死).

    방어구도 없는 알몸인데다가 HP도 고작 370인 나로서는 살아남을 길이 없는 것이다.

    …….

    하지만.

    내가 투신의 주먹에 맞아 뒤로 나가떨어짐과 동시에,

    “!?”

    투신의 표정이 확 변했다.

    주먹에 맞은 내 가슴팍이 시커멓게 물들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흑철(黑鐵)로 뒤덮인 듯한 피부, 이내 칼날 같은 비늘이 내 가슴 부분을 뒤덮었다.

    퍼퍼퍼퍼펑!

    시커먼 벼락줄기 같은 것이 내 몸에서 뿜어져 나와 투신을 강타했다. 바로 반사 데미지다.

    패륜아의 심장!

    바실리스크를 죽이고 얻은 갑옷이 내 체내에서 잠자고 있다가 외부 충격에 반응한 것이다!

    우직- 우지직!

    전신이 박살나는 충격 속에서, 투신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이것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나는 죽는다.’

    감히 인지하지도 못할 만큼 짧은 순간.

    반격을 당했고 1천이 넘는 HP가 단숨에 0이 될 정도의 데미지를 입었다.

    …….

    하지만.

    그 순간에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하나 더 있었다.

    ‘왜 너는 죽지 않지?’

    투신은 터져나가는 내장을 움켜쥐면서도 내 쪽을 똑똑히 노려보고 있었다.

    분명 수없이 실험을 해 봤었다.

    이 기술을 쓰면 어지간한 C급 몬스터도 한 방에 죽는다.

    강력한 C+급 몬스터 아카오니조차도 이 기술을 두 방 이상 버티지 못했다.

    ‘대체 어째서?’

    수많은 의문을 품은 채 천천히 낙하하는 투신.

    하지만.

    “…….”

    나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나기는 했을지언정 쓰러지지는 않았다.

    투신의 주먹을 처음 맞았을 그때처럼 그 자리에 곧게 서 있다.

    펄럭-

    내 몸을 뒤덮고 있는 망토.

    -샌드웜의 가죽 / 망토/ A+ / (앙버팀)

    그것이 허공에 오연하게 휘날리고 있었다.

    콰쾅!

    나는 샌드웜의 시체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투신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인생은 템빨이야.’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