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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43화 (43/1,000)
  • 43화 척살령(擲殺令) (1)

    24시간.

    파괴된 지형이 원래대로 돌아가는 데 걸리는 시간.

    나는 지하 1층부터 8층까지 뻥 뚫려 있는 거대한 녹색 구멍을 바라보았다.

    부글…부글…부글….

    너무 깊어서 밑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가끔 독액이 끓는 소리만이 간헐적으로 들려올 뿐이었다.

    이윽고.

    드드드드드득-

    주변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맵이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박살난 벽면과 바닥이 다시 재생된다.

    부서진 조각상도 원래 자리로 돌아왔고. 무너진 천장과 바닥도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몬스터들이 리스폰되는 시간은 조금 다른 개념이라서 아직 던전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럼 이제 가 볼까?”

    나는 칠흑의 뱀, 요르문간드의 등에 올라탄 채 천천히 던전 내부로 들어갔다. 혹시나 남아 있을지 모르는 여독을 조심하면서.

    *       *       *

    이윽고.

    내가 지하 7층에 도달했을 때.

    귓가에 익숙한 알림음이 들려왔다.

    -띠링!

    <세계 최초로 ‘바실리스크’ 레이드에 성공하셨습니다!>

    <‘패륜아의 둥지’를 최초로 올 클리어하셨습니다!>

    <히든 퀘스트 ‘메두사의 모정’을 클리어하셨습니다>

    <‘아들 사냥’ 1/1>

    <보상이 지급됩니다!>

    <이름을 남기시겠습니까?>

    .

    .

    고르곤이 젠 되던 제단 밑, 지하 8층으로 내려가는 입구가 보인다.

    지하통로를 내려가자, 던전 최심부에 숨겨져 있는 ‘비밀의 방’이 나타났다.

    아무것도 없이 텅 빈 방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바실리스크의 시체.

    놈은 지독한 맹독에 절여져 죽은 듯했다.

    결국 위로 기어 올라오지 못하고, 자기가 토해 낸 늪 같은 분노에 빠져 목숨을 잃은 존재.

    아비도, 어미도 알아보지 못한 패륜아.

    바실리스크 사냥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자.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이어진

    LV: 35

    호칭: 메두사 킬러(특전: 마나 번) / 바실리스크 사냥꾼(특전: 맹독)

    HP: 350/350

    <아이템>

    -깎아내는 단말마 / 한손무기/ S / (능지처참)

    -똬리를 튼 사념(巳念) / 반지 / A / (요르문간드 소환)

    -카이도우(外道)의 발가죽 / 신발 / B+ / (지진)(융합)

    오랜만에 열어 보는 상태창이다.

    레벨이 2 올랐고 새로운 호칭 ‘바실리스크 사냥꾼’이 생겼다.

    이에 따른 특전은 ‘맹독’

    “대박이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은 했지만 막상 얻으니 입꼬리가 째지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

    맹독 특성은 바실리스크가 가진 몇 안 되는 특성 중 하나다.

    내용은 간단했다.

    몸속에 흐르는 피에 지독한 독성을 깃들게 하는 것이다.

    전투 중 수세에 몰렸을 때, 상처 난 곳에서 나온 피를 뿌린다면 그 일대는 맹독지대가 된다.

    맹독에 중독된 적은 일반 독에 중독되었을 경우보다 최대 4배의 추가 도트 데미지를 입을 수 있다.

    “깎단과 궁합이 잘 맞겠어.”

    나는 허리춤에 매달린 송곳 자루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이제는 바실리스크가 떨군 아이템을 확인할 차례다.

    나는 바실리스크를 맨 처음으로 잡았고 이 때문에 메두사의 축복도 받은 상태이다.

    따라서 떨어지는 아이템은 무조건 바실리스크와 동급인 A+등급의 아이템일 것이다.

    나는 바실리스크의 시체 중앙, 가슴 부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뻘건 빛기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내 눈을 휘둥그렇게 만들 정도로 좋은 아이템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패륜아의 심장> 갑옷 / A+

    바실리스크의 심장 가죽을 도려내어 잘 말린 것.

    세상 그 모든 것들을 증오하고 저주할 준비가 되어 있다.

    -방어력 +500

    -특성 ‘패륜아’ 사용 가능 (특수)

    시커먼 칼날들을 용접으로 이어 붙여놓은 것 같이 생긴 갑옷.

    내가 그 갑옷을 입자.

    스르르륵-

    검은 갑옷은 이내 내 피부 밑으로 파고 들어가 사라진다.

    겉보기에는 아무런 옷도 걸치지 않은 알몸 그대로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조금의 충격이라도 받으면 내 몸은 검게 물든다.

    그리고 그 부분에서 칼날 같은 검은 가시들이 불쑥 튀어나오는 것이다.

    외부로부터의 충격에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았다.

    “그렇군. 이 아이템이 여기서 떨어지는 거였나?”

    나는 내 몸속에 내장된 검은 갑옷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먼 미래, A+등급의 ‘3신기(三神器)’라 불리는 히든 피스들.

    그 셋을 모으면 강남 테헤란로의 건물 하나는 너끈히 살 수 있다던가?

    패륜아의 심장은 그 3신기 중 하나였다. 아무래도 첫 공략에 대한 특급 보상인 것 같다.

    그때.

    “저, 이런 말 하면 실례일지도 모르지만…….”

    드레이크가 뒤에서 말을 걸어왔다. 그는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그 갑옷. 별로 좋아 보이지는 않는데. 내가 잘 몰라서 그런 것이겠지?”

    드레이크는 바실리스크의 갑옷을 보며 말했다.

    그렇다.

    언뜻 보기에 이 갑옷의 능력치는 매우 구려 보인다.

    어지간한 B등급 대의 아이템도 좋은 것을 찾아보면 방어력이 500이상인 것이 많다.

    A+등급 갑옷의 방어력이 500이라면 정말 터무니없이 낮은 수치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갑옷의 진가는 바로 특성에서 발휘된다.

    ‘패륜아’

    자신이 입는 데미지의 90% 이상을 상대방에게 반사한다.

    자기보다 상위 등급의 적에게는 +9%가 보너스로 적용되어 총 99%의 데미지를 반사하는 특수 효과까지 있었다.

    하지만.

    “탱커형 캐릭터가 아니라면 그 갑옷을 제대로 쓰기 어려울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자네는 탱커가 아니란 말이지.”

    드레이크는 나를 위아래로 살펴보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이거 하나로는 의미가 없지.”

    아까도 말했지만, ‘패륜아의 심장’은 A+등급 아이템 중 ‘3신기’라고 불리는 것 중에 하나이다.

    이 갑옷 하나로도 충분히 대단하지만, 다른 두 개의 아이템이 더해졌을 때. 이것은 ‘신(神)’이라는 단어가 붙을 만큼의 값어치를 충분히 해낸다.

    ‘왜냐하면, 정말로 신을 잡을 수도 있기 때문이지.’

    이 세계관의 신으로 군림하는 S+급 몬스터 17마리.

    나는 먼 미래를 생각하며 턱을 긁적였다.

    …….

    아니.

    어쩌면 별로 먼 미래가 아닐 수도…….

    한편.

    드레이크는 내 몸이 신기한지 자꾸만 기웃거린다.

    알몸으로 다른 남자의 시선을 뚫어져라 받고 있으니 이거 기분이 참 미묘하구먼.

    “한번 만져 보지 않겠어?”

    내가 나직한 목소리로 묻자.

    끄덕-

    드레이크는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움직였다.

    “그럼 실례하지.”

    “……살살 부탁해.”

    내 입이 열림과 동시에.

    드레이크가 번개 같은 손동작으로 화살 하나를 들어 내 어깨죽지에 꽂아 버렸다!

    그러나.

    따-앙!

    화살촉에 닿은 내 피부가 순간 시커멓게 물들었다.

    동시에.

    불똥과 함께 번개 모양의 투명한 기류가 드레이크를 향해 쏘아져 나간다!

    퍼퍽!

    반사 데미지에 적중당한 드레이크는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그렇군. 데미지의 90%를 이런 식으로 되돌려 받는 건가. 피하는 것은 꽤 힘들겠어.”

    이봐, ‘꽤’ 힘들다니. 그럼 꽤 힘을 주면 피할 수 있다는 건가?

    뭐 드레이크의 신기에 가까운 컨트롤 능력이라면 피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일반인들에게는 무리겠지.

    드레이크는 한 번 더 화살을 내 몸에 찔러 보았다.

    따앙-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나며, 반사 데미지가 벼락처럼 퉁겨나온다.

    퍼퍽-

    드레이크는 반사 데미지의 일부를 다시 후려쳐 흘려보냈다.

    팅팅팅팅팅-

    반사 데미지는 반투명한 벼락처럼 뻗어 나가 수많은 돌기둥 사이를 튀며 저 멀리 사라져 버렸다.

    “…이거 대단하군. 잘 하면 대단위 학살도 가능하겠어.”

    드레이크는 꽤나 멀리까지 뻗어나가는 반사 데미지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뭐 어쨌든.

    나는 멋지게 바실리스크 레이드에 성공했다.

    이번 레이드에서 거둔 가장 큰 성과는 뭐니뭐니해도 바실리스크를 잡고 나온 아이템과 호칭이었다.

    특히나 ‘패륜아’ 특성과 ‘맹독’ 특성을 동시에 얻은 것이 아주 마음에 든다.

    요르문간드가 의외로 펫으로서 쓸 만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놈이 아니었다면 바실리스크의 독 데미지에 몇 번을 당했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PK랭킹 1위가 될 드레이크에게 여벌의 목숨 두 개를 맡겨 놨다는 것 역시도 큰 수확이었다.

    그는 내게 호기심을 보이고 있었고 우리는 꽤나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한 것도 없는데 바실리스크 처치에 가담한 것처럼 되어서 면목이 없군.”

    드레이크는 내게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그는 기여도가 낮은 탓에 아이템을 얻지 못했지만 바실리스크 사냥에 따른 호칭 특전은 가까스로 받았다.

    드레이크에게는 ‘땅’ 특성이 주어졌는데 이는 지면에 발을 딛고 있을 때의 공격력이 150%가 되는 것으로 제법 매력적인 특전이다.

    고르곤의 꼬리 때부터 해서, 그는 계속 나에게 빚만 지고 있었다. 적어도 그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는 듯하다.

    꽤나 경우가 있는 사람이었기에, 나는 그에게 이것저것 임무를 분담시키기로 했다.

    “네가 이 던전 지리를 잘 알 테니 아이템 수거하는 것을 좀 도와주지 않겠어?”

    “여부가 있겠나. 그 외에도 시킬 것이 있으면 마음껏 시켜라. 최선을 다해 돕겠다.”

    드레이크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그는 던전의 1~7층을 돌며 수많은 아이템들을 수거해 오기 시작했다.

    아오오니, 뿔도마뱀, 카멜레킹, 긴칼비늘 킹코브라 등등…….

    바실리스크의 맹독에 절여진 수많은 몬스터들이 던전 곳곳에 아이템을 떨궈 놓은 채 죽어 있었다.

    거의 대부분이 C+등급의 아이템, 아주 간혹 B등급의 아이템도 보인다.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챙겼다.

    나는 드레이크에게 몇몇 궁수용 아이템을 넘겨 준 뒤 나머지는 싸그리 다 경매소에 올려 버렸다.

    ‘이걸로 현금 자산이 한층 더 두툼해지겠군.’

    곧 E스포츠 토토가 열릴 날이 다가온다.

    총알은 착착 준비되고 있었다.

    내가 속으로 이런저런 미래 계획을 짜고 있을 때.

    “이봐.”

    아이템을 정비하고 있던 드레이크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아까 바실리스크 레이드 랭킹에 이름을 남길 때, ‘고인 물’이라고 했었지?”

    “왜?”

    내가 되묻자, 드레이크는 잠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그는 나에게 꽤나 놀라운 사실 하나를 말해 주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몇 개의 대형 길드가 너에게 척살령을 내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

    척살령?

    뭔 소린가 싶어 눈을 몇 번 끔뻑거리자, 드레이크는 자신이 받은 메신저 쪽지를 보여 주었다.

    <‘고인 물’이라는 닉네임으로 비매너 활동을 하는 유저를 공개수배합니다>

    <죄목: 고의 트롤링, 몬스터 스틸, 아이템 절도, 무단 PK, 알몸 복장 공연음란죄……등등>

    <재야에 은거하고 계시는 수많은 랭커분들의 도움을 기다립니다>

    <현상금은…….>

    길드 차원에서 돌리는 ‘현상수배’

    “허…….”

    나는 어이가 없어 입을 반쯤 벌렸다. 저 중에 내가 동의할 수 있는 죄목은 한 가지도 없다.

    공연음란죄만 빼고.

    내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자, 드레이크는 말했다.

    “나에게도 현상금 수배서가 오긴 했었다. 관심이 있으면 오라더군. 꽤나 많은 이들이 모여드는 것 같았는데…….”

    그는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 주고 있었다. 당분간은 숨어 다니는 것이 어떻겠냐는 듯한 어조.

    그러나.

    나는 오히려 눈을 빛내고 있었다.

    ‘나를 잡아 보겠다고?’

    귀여워서 웃음이 난다.

    쪼꼬미 병아리 뉴비들이 아장아장 모여 나에게 몰려오는 모습을 상상하자 벌써 흥분이 되네.

    하지만 귀여운 것은 귀여운 것이고, 괘씸한 것은 괘씸한 것이다.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척살령까지나 내린단 말인가?

    “흠…….”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이 병아리 뉴비들이 자라서 싸움닭이 되기 전에 빨리 해치워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순간!

    내 머릿속에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내게 척살령을 내린 머저리들을 한꺼번에 쓸어버림과 동시에, A+ 등급의 ‘3신기’ 중 두 번째 아이템을 바로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나는 드레이크를 돌아보며 물었다.

    “너에게도 의뢰 요청이 왔었다고 했지?”

    내가 묻자 드레이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우르르 몰려다니는 것에는 딱히 관심이 없어서 읽고 씹었다만…….”

    “그러지 말고, 그 쪽지에 답장 한번 해 주지 그래?”

    “……? 그야 어렵지 않지만. 뭐라고 답장을 하나?”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제보하는 거지.”

    “음? 적들에게 네 위치를 알려 주라는 건가?”

    내 말에 드레이크는 고개를 갸웃한다. 내 의중을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다는 듯한 표정.

    그는 다시 물었다.

    “……어디에 있다고 하면 되지?”

    나는 음흉한 미소를 지은 채 대답했다.

    “서대륙, 사막마을 ‘케투스’와 던전 ‘잊혀진 고대문명의 유적’ 사이 ‘가혹한 사막 B구역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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