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39화 (39/1,000)
  • 39화 패륜아의 둥지 (4)

    <고르곤의 ‘꼬리’> -등급: B / 특성: 독

    -크기: 80cm.

    -서식지: 패륜아의 둥지

    -‘머리’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것을 평생에 걸쳐 후회하며 살아온 존재.

    이제 그를 막아서는 방해꾼은 없다.

    고르곤의 꼬리.

    놈은 오로지 패륜아의 둥지에서만 서식하는 이벤트 몬스터이다.

    따로 만날 수는 없고 고르곤을 잡은 뒤에 추가로 등장할 때만 잠깐 만날 수 있기에 딱히 임팩트는 없다.

    등급도 고작 B에 불과하고 특성 역시 ‘맹독’이 아닌 그냥 ‘독’ 이다.

    어떻게 보아도 그리 대단한 몬스터는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 드레이크에게는 가장 무시무시한 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놈이 가지고 있는 맹독은 빈사상태에 있는 드레이크 정도는 순식간에 끔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약하다고 해도 무려 B급 몬스터이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드레이크 대신 고르곤의 꼬리를 가로막고 있는 존재가 있다.

    <요르문간드> -등급: B / 특성: 백전노장, 독 면역, 마법면역

    -서식지: 은밀한 꼭두각시 회동, 거인국, 똬리를 튼 사념(巳念)

    -크기: 15m.

    -신화의 말석을 차지하고 있는 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촘촘히 덮인 칠흑의 비늘은 모든 독, 마법 데미지에 면역을 가진다.

    칠흑의 비늘을 지닌 뱀.

    요르문간드는 지금 뚜렷한 적의를 가진 채 고르곤의 꼬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푸-스스스°°!]

    이내, 요르문간드는 입을 쩍 벌린 채 달려들어 고르곤의 꼬리를 한 입에 집어 삼켰다.

    [캬아아악!]

    꼬리는 맹렬하게 저항했지만 엄청난 체급 차이 앞에서는 그다지 큰 효과가 없어 보였다.

    고르곤의 꼬리와 요르문간드는 둘 다 B등급의 몬스터, 하지만 특성의 상성 때문인지 전투의 결과는 압도적이었다.

    꼬리는 입에서 맹독성 안개를 뿜어내며 저항했지만, 요르문간드에게는 독도 마법도 먹혀들지 않는다.

    이 거대한 뱀은 몸에 닿는 독, 마법 데미지를 거의 100% 방어하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적- 우적-

    요르문간드는 눈 깜짝할 사이에 고르곤의 꼬리를 씹어 삼켜 버렸다.

    전에도 말했지만, 뎀의 몬스터들은 이런 식으로 서로를 포식하며 HP를 채우고 또 성장해 나가는 것이다.

    “…….”

    드레이크는 멍한 표정으로 눈앞에 나타난 몬스터를 바라보았다.

    이 거대한 몬스터는 또 어디서 나타난 것인가?

    [푸스스스……꺼억!]

    요르문간드는 고르곤의 꼬리를 집어삼킨 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트림을 했다. 그리고는 그 거대한 몸을 돌돌 말아 똥 모양을 만든 채 혀만 낼름거리고 있었다.

    적의라고는 전혀 없는, 얌전한 태도였다.

    그때.

    “이거 본의 아니게 막타를 먹었네.”

    드레이크의 귓가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하나.

    이내, 죄다 부서지고 박살난 잔해들 사이로 누군가 걸어 나온다.

    …….

    바로 나다.

    *       *       *

    -<똬리를 튼 사념(巳念)> 반지 / A

    마계에 서식하는 거대한 뱀 요르문간드는 어느 날 살기 좋은 인간계로 통하는 작은 틈을 발견했다.

    혼자서는 그 구멍을 비집고 나올 수 없기에, 이 교활한 뱀은 구멍 너머에 있는 인간의 욕심을 이용하기로 했다.

    -마력 +300

    -요르문간드 소환(최대 1마리) (특수)

    나는 손가락에 채워진 뱀 모양의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생각보다 이 소환 반지의 능력이 나쁘지 않다.

    요르문간드는 덩치가 클 뿐만 아니라 무척이나 빠르다.

    물리 공격력도 꽤나 강한 편. 독, 마법 방어력은 거의 완벽할 정도다.

    AI 인공지능 역시도 상당히 정교하고 뛰어난 편이었다.

    물리 방어력이 형편없이 약한 것만 아니라면 훨씬 더 높은 랭크가 먹여졌을 몬스터이니 사용하기에 따라서는 꽤나 편리한 펫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

    [푸스스스…….]

    요르문간드는 거대한 머리를 들이밀어 내 몸에 부비적거렸다.

    나는 녀석의 머리를 몇 번 툭툭 쳐 주고는 놈을 반지 속으로 역소환했다.

    한편.

    나는 주변 광경을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다.

    곳곳에 박혀 있는 화살, 마름쇠들, 그리고 고르곤의 이마에 박혀 있는 단검.

    전부 B+급 이상의 아이템들이다.

    상대방의 방어력에 상관없이 데미지를 입히는 특성들.

    이것들을 드랍하는 몬스터는 동서남북 대륙에 걸쳐 흩어져 있는데, 설마 그것들을 다 잡고 여기까지 온 것일까?

    ‘그렇다면 정말…대단하다는 말밖에는 할 수가 없네.’

    아마 비공식랭킹 1위는 분명 이 사람일 것이다.

    한국 랭킹 1위는 감히 비벼 보지도 못할 만큼 엄청난 성과다.

    나는 눈길을 힐끗 돌려 던전의 각 코너를 살폈다.

    -<슬라임의 정수> D

    슬라임의 살점 1천 개를 모아 끓인 뒤 핵심 물질만 걸러낸 것이다.

    -<해골 달팽이의 젤> D

    해골 달팽이가 교미를 할 때 내뿜는 윤활유. 사랑이 담뿍 담겨 있어 매우 미끌거리기 그지없다. 어지간한 속박 정도는 무시하고 미끄러진다.

    온갖 액체들이 널브러져 있다.

    나 외에 이것들을 쓰는 사람이 있을 거라곤 생각 못했다.

    나야 십 수 년 앞의 공략법을 미리 알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드레이크는 ‘진짜’다. 그야말로 천재 중의 천재였다.

    ‘이거 어째 좀 미안한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원래 드레이크 캣의 메타는 ‘지진 궁수’.

    멀리서 활을 쏘며 지진을 일으키는, 압도적인 전투를 하는 존재였다.

    만약 그가 원래의 역사대로 아카오니를 제일 먼저 잡았다면, 그래서 지진 메타를 얻었다면.

    아마 그는 고르곤을 이렇게까지 힘들게 잡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패륜아의 둥지를 내려오는 길에 아오오니를 잡아 상위의 지진 아이템을 얻었을 것이고 그것으로 고르곤의 돌진기를 견제해 더욱 더 빨리, 안전하게 레이드를 성공시켰겠지.

    하지만 내가 드레이크에게서 지진 메타를 빼앗았기에.

    그는 이렇게 ‘개무시’ 메타, 즉 방어구 관통 메타로 성장하게 된 듯싶었다.

    ‘확실히, 지진 같은 광역기가 없는 궁수에게는 ‘방어구 관통’이나 ‘즉사’ 특성이 좋지. 까마득한 고렙 몬스터들 상대로 컨트롤을 위시한 1:1 솔로 플레이만 할 거라면 말이야.’

    나는 드레이크의 선택에 찬사를 보냈다.

    초반 기연을 나에게 빼앗겼지만 그 즉시 가장 차선책을 고른 그의 안목에는 절로 박수가 나온다.

    이로 인해, 드레이크의 성장 메타는 앞으로 전혀 달라지게 되겠지. 아마 엄청나게 하드코어적으로 바뀔 것이다.

    …….

    바로 그때.

    “빚졌군.”

    번역기를 통해 딱딱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고개를 돌리자 지친 표정의 드레이크가 나를 향해 서 있는 것이 보인다.

    내가 말없이 포션 한 병을 건네자, 그는 그것을 마시며 말을 이었다.

    “이 게임의 사망 패널티는 너무 치명적이야. 겨우겨우 고르곤을 잡았는데 여기서 죽었다면 아마 원통해서 접속불가 기간 동안 잠도 못 잤을 거다.”

    드레이크는 매우 피곤해 보였다.

    하긴 그럴 법도 하다. 내가 지켜본 것만 해도 거진 60시간은 넘었으니까. 내가 보기 전부터 계속 고르곤에 매달려 왔다면 지금쯤 분명 쓰러지기 직전이겠지.

    “숙련도를 보니, 한 일주일 정도는 꼬박 매달린 모양이지?”

    내가 묻자, 드레이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일주일 동안 이 던전 전체를 거의 완벽하게 파악했지. 그 전에도 몇 번이나 죽었지만 고르곤만 잡을 수 있다면 그간의 보상을 모두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맞는 말이다. 아무리 죽는다고 해도 A급 몬스터를 잡을 수만 있다면 그간의 패널티 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윽고.

    익숙한 알림음이 떴다.

    -띠링!

    <세계 최초로 ‘고르곤’ 레이드에 성공하셨습니다!>

    <세계 최초의 ‘고르곤’ 솔로 레이드입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이름을 남기시겠습니까?>

    <솔로 레이드 랭킹 집계 중...>

    <1위. 드레이크 캣 / 7데스 82기브업 / 162시간 3분 21초 >

    .

    .

    땅그랑!

    아이템도 떨어졌다.

    -<고르곤의 뿔 파편 마름쇠> 한손무기 / A

    고르곤의 뿔은 산산조각난 뒤에도 여전히 위험하다.

    만약 이것의 파편이 살 속으로 파고든다면, 그 부분을 속히 잘라 낼 것을 권한다. 돌이 되기 싫다면 말이다.

    -공격력 +1,000

    -독 공격력 +500

    -특성 ‘마나 번’ 사용 가능 (특수)

    마치 드레이크를 위해 만들어진 듯한 아이템이 뚝 떨어졌다. ‘마름쇠’ 계열 무기는 서로 융합해 특성을 3개까지 중첩시키는 게 가능하니 아마 ‘개무시’ 특성이 더해져 더더욱 완벽해질 것이다.

    호칭 역시도 주어졌을 게 분명하다. 아마 고르곤의 ‘야수’ 특성이 부여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뽀족-

    드레이크는 마름쇠를 한번 만져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가시에 찔린 자는 돌이 된다’라는 특성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바닥에 깔아도 되고, 투척해도 되고. 용도는 다양할 것이다.

    이내. 아이템을 수거한 드레이크는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네겐 빚을 졌으니 갚고 싶다. 내가 무엇을 해 줄 수 있겠나?”

    다소 뜻밖의 대사였다.

    내가 고르곤의 꼬리를 처치해 준 것에 대한 보답인가?

    “…….”

    내가 잠시 말이 없자, 드레이크는 이내 알아서 뭔가를 판단한 듯싶었다.

    “우리 가문에는 격언이 몇 가지 전해져 내려온다. 그 중 하나는 ‘은혜는 두 배, 복수는 열 배’ 이지.”

    거 참 살벌한 격언이로군.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드레이크는 선언했다.

    “네가 내 목숨 한 번을 구해 주었으니, 나 역시 네 목숨을 구해 주겠다. 두 번에 걸쳐서.”

    호오. 이거 꽤 괜찮은 조건 같은데?

    전 세계 PK랭킹 1위가 내 목숨을 두 번 지켜 준다고?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좋은 조건이다.

    고르곤 따위를 잡고 얻은 보상에 비할 바가 아닌 것이다.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그러면 한 번은 지금 써야 할지도 모르겠군.”

    “……?”

    내 말을 들은 드레이크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백번 설명하는 것보다는 한번 보는 게 더 효과적이다.

    드레이크 정도의 피지컬과 컨트롤 능력을 가진 존재라면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도 잘 따라와 주겠지 뭐.

    나는 거침없이 움직여 던전의 최심층부로 향했다.

    “어딜 가나? 이 던전은 여기가 끝…….”

    드레이크는 미처 말을 끝맺지 못했다.

    던전 보스 고르곤이 젠 되는 곳.

    그곳은 ‘패륜아의 둥지’ 7층의 제일 끝 쪽 구석에 있는 ‘제단’이다.

    그 제단은 정사각형의 거대한 돌덩어리였는데 그 위로는 아치형의 다리 같은 것이 붙어있었다.

    멀리서 보면 마치 거대한 자물쇠 같은 모양새다.

    나는 고르곤이 태어나는 제단의 가장 밑부분을 더듬어 보았다.

    있다.

    손가락이 움푹 들어가는 곳.

    구멍이 있다.

    나는 구멍을 확인한 즉시 인벤토리를 뒤졌다.

    -<검은 열쇠> D (1), (2)

    이 물건에 손대서 좋을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자물쇠를 열 시간이 왔다.

    까락-

    검은 열쇠 두 조각을 하나로 합쳐 제단의 밑 부분 구멍에 밀어 넣자.

    쿠-드드드드드득!

    엄청난 지진이 몰아닥치기 시작했다.

    “뭐, 뭐지!?”

    드레이크는 당황한 표정으로 포션 병을 꽉 움켜쥐었다.

    콰지지지직! 콰콰쾅!

    제단이 있는 곳부터 시작해서, 바닥이 무너져 내린다.

    그리고.

    [오-오오오오오!]

    아주 먼, 극도로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절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기다리고 있던 알림음들이 뜬다.

    -띠링!

    <히든 던전 ‘패륜아의 둥지 8층’에 입장하셨습니다>

    <최초 방문자의 이름이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됩니다>

    <진(眞) 보스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메두사의 ‘아들’

    내가 지금껏 벼르고 또 벼르고 있던 최후의 몬스터.

    지루하게 이어지던 연계 퀘스트에 종지부를 찍을 때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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