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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37화 (37/1,000)
  • 37화 패륜아의 둥지 (2)

    <……융합 중입니다. 전원을 끄지 마세요>

    내 눈앞에 기묘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악귀의 발바닥 가죽을 벗겨 만든 두 개의 아이템이 지금 하나로 합쳐지고 있었다.

    꾸드득- 꾸드득-

    붉은 가죽과 푸른 가죽은 서로를 잡아먹으려는 듯 격렬하게 뒤섞인다.

    빨간 힘줄과 파란 핏줄이 마치 힘겨루기를 하는 것처럼 서로를 휘감고 있는 모습.

    마치 뱀들의 싸움을 보는 것 같다.

    나는 두 아이템이 하나로 섞이는 과정을 눈앞에 둔 채 생각에 잠겼다.

    오래 전의 기억.

    지금 내 회상 속에서는 13년 전에 사냥했던 거대한 악귀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쾅- 우르르릉-

    웬만한 고층빌딩만큼 큰 덩치로 필드를 휘젓던 거대 악귀.

    놈이 근육질의 두 팔을 땅에 박아 넣고 지층을 움켜쥔 채 흔들면 온 세상천지가 뒤집어질 정도의 지진이 몰아치곤 했었다.

    <카이도우(外道)> -등급: B+ / 특성: 거인, 악귀, 바위, 땅, 자연재해, 융합

    -크기: 30m.

    -서식지: 악(惡)의 고성, 썩고 불타는 땅, 오즈 랜드(Odd’s Land)

    -어느 날 깊은 구덩이에 두 마리의 악귀가 빠졌다. 구덩이는 너무 깊어서 두 악귀의 거대한 덩치로도 기어 올라올 수 없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 한 용감한 모험가가 두 악귀가 빠진 구덩이 속을 들여다 본 일이 있었다.

    구덩이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도저히 두 악귀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발자국 하나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카이도우’

    B+급 몬스터 중에서도 최상위의 피지컬을 가지고 있었던 괴물 같은 악귀.

    ‘악귀’ 타입과 ‘바위’, ‘땅’ 타입, 거기에 ‘거인’ 타입까지 가지고 있어서 아주 공략하기 까다롭던 엘리트 몬스터였다.

    특성치와 종족값만 따지자면 거의 A급 몬스터에 가까웠지만…….

    안타깝게도 지능이 너무 낮아 공격 패턴이 단순하다.

    이 때문에 더 고위 랭크에 안치되지 못한 비운의 보스였다.

    악귀 카이도우.

    이 녀석이 태어나게 되는 과정은 상당히 독특하다.

    뎀 안에서도 몇 없는 ‘융합’ 특성.

    그렇다. 이 악귀는 야생에서도 드물게 자연 발생하지만 아카오니와 아오오니가 융합 진화를 하는 쪽으로도 만들어질 수 있다.

    그리고 아카오니와 아오오니가 드랍하는 아이템 역시도 이런 과정을 똑같이 거친다.

    몬스터가 드랍하는 아이템은 그 몬스터가 가진 특성 중 하나를 그대로 가지게 되니까.

    “카이도우를 잡은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네.”

    나는 아카오니와 아오오니를 잡고 나온 두 아이템이 섞이는 것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카이도우를 잡고 떨어진 아이템도 이것과 스텟이 똑같을 것이다.

    왜 예전에 유명했던 스타X래프트에서도 이런 장면이 있지 않은가.

    고위 템플러와 고위 템플러가 융합하여 집정관이라는 전혀 새로운 유닛이 되는 것. 이것은 그와 무척이나 닮았다.

    “융합이 완료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까지 닮았네. 이런 건 좀 봐 주지.”

    나는 뒤엉키고 있는 두 개의 아이템을 다시 인벤토리로 밀어 넣었다. 이로 인해 당분간 지진 스킬은 쓸 수가 없게 되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이 던전에서 C+급 몬스터인 아카오니의 지진 스킬은 먹혀들지도 않는다. 이동속도가 감소되는 것이 조금 아쉬울 뿐.

    그 외에는 전혀 주춤할 이유가 없다.

    나는 바로 던전의 심층부를 향해 내려갔다.

    *       *       *

    어느덧, 나는 지하 6층을 지났다.

    지하 1층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몬스터들은 멀쩡히 살아 있었다. 아무래도 이곳에 먼저 들어온 플레이어는 대부분의 몬스터를 쌩까고 곧장 지하로 내려간 듯싶다.

    “필요 없는 전투는 최소한만이라. 어딘가 낯익은 스타일인데?”

    나는 먼저 들어간 플레이어의 흔적을 쫓으며 천천히 움직였다.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피해간 독 웅덩이, 엄청난 반사신경으로 피한 깜짝 길로틴, 날쌘 도약으로 파훼한 부비트랩.

    거기에 아오오니의 몸에 잔뜩 박혀 있던 화살들.

    “……흐음.”

    머릿속에 얼추 그림이 그려진다.

    궁수는 비인기종목, 궁수 클래스를 선택했던 존재들 중 이 정도 컨트롤과 피지컬을 가진 게이머는 몇 없었다. 용의자가 단숨에 좁혀졌다.

    이윽고.

    나는 귀찮게 달라붙는 몬스터들과 함정들을 모두 피해 도망쳐 던전 최하층에 도달했다.

    지하 7층!

    패륜아의 둥지 최심부. 일반적인 방법으로 접근할 수 있는 구역 중에서는 가장 깊은 곳이다.

    끼긱-

    둔탁한 철문을 밀고 들어가자, 이내 구불구불 휘어진 지하계단이 보인다.

    나는 천천히, 가능한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주의하며 아래로 내려갔다.

    맨발바닥에 와 닿는 차가운 돌바닥. 곳곳에 고인 맑은 물웅덩이에 발가락 사이사이가 시려 왔다.

    이윽고.

    어슴푸레한 빛 너머로 지하 7층의 광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콰쾅!

    지하 7층에 내려오자마자 나를 반긴 것은 굉음과 함께 날아온 바위 조각들이었다.

    “으악!?”

    나는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예상치 못한 사태, 파편 몇 개가 몸에 맞았다.

    퍼퍽!

    가뜩이나 방어력도 없는 알몸인지라 HP가 꽤 닳아 버렸다.

    -이어진

    LV: 33

    호칭: 메두사 사냥꾼(특전: 마나 번)

    HP: 99/320

    “허어……까딱하면 어이없게 죽었겠구만.”

    실로 오랜만에 켠 상태창이다. 고작 바위 조각 몇 대 맞고 빨피라니, 이런 굴욕적인 일이!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 고개를 들었다.

    쾅! 콰쾅! 우지지직!

    지금 눈앞에서는 무시무시한 혈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쒸익- 쒸이익-

    거대한 몬스터가 뿜어내는 콧김, 증기기관에서 분출되는 것 같은 그 뜨거운 콧김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온다.

    거대한 뿔이 달린 황소 한 마리가 던전의 중앙에 떡 버티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황소는 흉하게 드러난 잇몸에 송곳처럼 날카로운 이빨들을 가졌다.

    눈알도 안면 중앙에 하나밖에 없었는데 시뻘건 핏줄들이 눈두덩이 주위로 펄떡펄떡 뛰고 있는 것이 실로 섬뜩하다.

    근육으로 꽉 찬 몸뚱이는 검은 독털로 뒤덮였다.

    꼬리에는 커다란 뱀이 달린 채 꿈틀대고 있었다.

    <고르곤> -등급: A / 특성: 어둠. 야수, 독, 마나 번

    -서식지: 패륜아의 둥지

    -크기: 3m.

    -거대한 황소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사실 그 속엔 무시무시한 태고의 악마가 봉인되어 있다고 한다.

    침과 피, 털, 꼬리에는 맹독이 있고 머리 중앙에는 커다란 외눈이 달렸다.

    머리가 무거워 평소에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만약 고개를 들었을 때 고르곤의 눈을 본다면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이다.

    겉보기와는 달리 발이 상당히 빠르며 둔중한 뿔에 들이받힌다면 어떤 갑옷이라도 금세 상하고 만다.

    보스 몬스터 ‘고르곤(Gorgon)!’

    힘과 스피드, 체력, 종족값, 특성치가 모두 고루 분배되어 있는 벨런스형 몬스터.

    희귀한 특성인 ‘마나 번’까지 붙어있다.

    내가 전생에 한 번도 상대해 본 적이 없던 몬스터이기도 했다.

    ‘나라고 해서 모든 보스 몬스터를 잡아 본 것은 아니니까…….’

    사냥해 본 적이 없는 몬스터라서 정확한 패턴 같은 것은 모른다.

    그렇지만 남들이 찍은 공략 영상을 몇 번 보긴 했었다.

    랭커들이 개인방송에서 푸는 썰도 많이 들어봤고.

    트리위키나 인펜 같은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관련 문서나 사진 등도 많이 본지라 어떻게 상대해야 하고 뭘 조심해야 하는지 대충은 알고 있었다.

    …….

    뭐, 군데군데 기억이 나지 않는 패턴들도 있었지만 그 정도야 뭐 짬밥과 실력으로 비벼 볼 수 있는 수준일 것이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고르곤이 아니었다.

    파팟-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빠르기로 움직이며 고르곤의 몸통에 화살을 박아 넣고 있는 존재.

    빨간 망토로 전신을 가리고 있는 궁수!

    그는 실로 놀라운 빠르기로 돌기둥과 돌기둥 사이를 넘나들며 고르곤을 상대하고 있었다.

    피피픽-

    그의 손에서 쏘아져 나온 화살들은 고르곤의 몸통에 맞고는 힘없이 튕겨져 나온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미지는 꾸준하게 들어가고 있었다.

    미세하지만 꾸준하다.

    바위를 뚫는 낙숫물처럼, 짧고 가는 화살들은 꾸준히 고르곤의 몸통 한 구석을 때리고 있다. 고르곤의 HP는 느리지만 분명히 줄어들고 있었다.

    나는 그 궁수의 얼굴을 보고 내 짐작이 맞았다는 것을 확신했다.

    지진 궁수 ‘드레이크 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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