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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36화 (36/1,000)
  • 36화 패륜아의 둥지 (1)

    -띠링!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당신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

    .

    .

    동대륙 최외곽에 있는 한 버려진 땅.

    지면에서 솟구치는 독기 때문에 아직 어떤 여행자도 들어오지 못한 구역.

    나는 오늘 홀로 이곳에 섰다.

    푸식- 펑!

    검은 땅에 난 균열에서 녹색 독기가 올라온다.

    스치기만 해도 바로 중독, 막대한 HP가 깎여 나갈 것이다.

    하지만.

    어디쯤에서 독기가 뿜어져 나올지 미리 알고 있는 내 입장에서는 그다지 무서울 게 없다.

    나는 최대한 안전한 지대만을 골라 디디며 검은 땅의 심층부로 깊숙하게 들어갔다.

    이내.

    모든 것이 다 말라 죽고 불타 버린 땅, 그 시커먼 대지에 홀로 우뚝 서 있는 던전이 보였다.

    <패륜아의 둥지> -등급: A

    던전의 평균 등급은 A.

    이곳은 동대륙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던전 중 가장 난이도가 높은 구역이다.

    츠츠츠츠…….

    깊은 지하로 이어지는 던전 입구에서는 연신 시커먼 기운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지하굴이다.

    그리고.

    오늘 나는 이 던전을 클리어하려 한다.

    청동 골렘 (C+) - 이름 없는 여왕 (B) - 우는 천사 (B+) - 메두사 (A) - ???

    더 상위 단계의 몬스터로 나아가는 연계 퀘스트. 나는 앞을 가로막는 메두사마저 쓰러트리고 결국 이곳의 최종 보스만을 목전에 남겨 두고 있는 상태.

    -띠링!

    <히든 퀘스트 ‘메두사의 모정’을 발견하셨습니다>

    <‘아들 사냥’ 0/1>

    <보상-?>

    바로 메두사의 ‘아들’을 말이다!

    그러나.

    나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흠. 이 근처에 있을 텐데?”

    나는 던전으로 바로 다이브하지 않았다.

    대신 던전 주변을 신중하게 살피며 돌아다녔다.

    푸쉬익-

    검은 균열 아래에서 녹색의 독기운이 간헐천처럼 터져 나온다.

    뜨겁고 역한 독안개가 허공에 자욱하게 번지고 있었다.

    일반적인 뉴비라면 발밑에서 터져 나오는 독기에 당하는 즉시 중독되어 도트 데미지를 입다가 죽어 버리겠지만…….

    나는 다르다.

    푸쉬익-

    귀가 절로 쫑긋했다.

    사방이 독 수증기 뿜어져 나오는 소리로 가득한 가운데서도, 나는 내 근처에서 뿜어지는 독기 소리에만 반응했다.

    “내 주변이 아닌 곳에서 들리는 독가스 배출음은 BGM 넘버 L91#3021, 2옥타브 솔. 내 주변에서 뿜어지는 독가스 배출음은 넘버 L91#3022, 2옥타브 라. 엄청난 차이가 있는데 이걸 왜 못 듣지?”

    나는 단순 배경음과 내 앞에서 뭔가가 터지기 직전인 소리를 칼 같이 구분한 뒤 그것들을 피해 움직인다.

    소리만 잘 구분할 수 있으면 이렇게 친절한 게임이 또 없다.

    그리고 애초에 독 웅덩이가 거의 없는 루트만 골라서 걷고 있기 때문에 중독될 걱정이 별로 없는 것이다.

    그때.

    “아, 찾았다!”

    나는 찾던 대상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내 시야의 끝에 큰 키를 가진 한 남자가 들어왔다.

    시커먼 망토로 몸을 감싼 존재, 얼굴에는 붉은 뿔이 돋았고 등에는 시커먼 날개 두 장이 붙어있다.

    <중급악마 하우레스>

    NPC 하우레스.

    그는 이곳 ‘패륜아의 둥지’ 근처를 랜덤으로 배회하는 히든 NPC로 조금만 신경을 써 주변을 뒤진다면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다.

    물론 땅에서 뿜어져 나오는 독 수증기를 잘 피해 다녀야 하겠지만.

    내가 다가가 말을 걸자, 그는 예정된 대사를 내뱉기 시작했다.

    [반갑다. 나는 중급악마 하우레스. 이 던전에 갇힌 ‘죄수’를 감시하고 있지.]

    죄수.

    그렇다. 나는 이 던전 최심층에 갇혀 있는 존재에게 볼일이 있다.

    “맨 아래층으로 내려갔으면 하는데…….”

    내가 말을 하자, 하우레스는 ‘어쩌라고?’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말을 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패륜아의 둥지는 지하 7층으로 이루어진 던전.

    하지만 일반적인 플레이어는 지형 전체에 뿌려져 있는 독 데미지 탓에 들어가기는커녕 근처에 접근할 수도 없다.

    설령 들어갔다고 해도 7층까지만 진입이 허락되고 히든 공간인 8층은 특별한 조건이 있어야만 들어갈 수 있도록 되어있다.

    7층의 중간 보스를 쓰러트린 뒤 히든 던전 ‘8층’의 문을 열기 위해선 특별한 아이템이 필요하다.

    -<검은 열쇠> D (1)

    이 물건에 손대서 좋을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메두사를 잡고 얻은 이 아이템. 이것이 바로 그 열쇠인 셈.

    내가 그 열쇠를 보여 주자, 하우레스는 잠시 눈을 크게 뜨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런가. 과연. 어미의 사랑은 깊은 법이지.]

    그러자, 귓가에 알림음이 떴다.

    -띠링!

    <중급악마 하우레스가 검은 열쇠 (1)에 반응합니다>

    <히든 퀘스트에 한 발자국 더 깊게 얽혀들었습니다>

    <하우레스가 아이템을 건네줍니다>

    이내. 나는 하우레스에게서 아이템 하나를 더 넘겨받을 수 있었다.

    -<검은 열쇠> D (2)

    이 물건에 손대서 좋을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어딘가 부실한 모양새를 하고 있던 검은 열쇠는 사실 절반뿐이었던 것이다.

    하우레스가 준 파편을 더하자, 검은 열쇠는 비로소 완전한 모양을 되찾았다.

    [아주 잠시의 면회만 허용하는 거야. 우리의 ‘계획’에 지장 주면 안 돼.]

    하우레스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대사를 쳤다.

    하지만 이걸 어쩌나? 나는 잠시 얼굴만 보는 게 아니라 아예 잡아 버릴 생각인데.

    나는 그런 하우레스를 뒤로하고 그 자리를 떴다.

    이제는 진짜 레이드 시간!

    -띠링!

    <영상 녹화를 시작합니다>

    레이드 영상을 남겨 놓는 것도 잊지 않도록 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지금은 현금을 최대한 모아둬야 하니까.

    *       *       *

    -띠링!

    <던전 ‘패륜아의 둥지’에 입장하셨습니다>

    막 던전의 어둠 속으로 몸을 던져 넣었을 때.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라? 메시지가 안 뜨네?’

    늘 떠 왔던 메시지가 이번에는 안 뜬다.

    <최초 방문자의 이름이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됩니다>

    던전의 최초 입장자를 기록하는 안내음.

    그것이 이번에는 뜨지 않았다.

    ‘오류가 났나?’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던전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나는 내가 잘못 인지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긴칼비늘 킹코브라> -등급: C+ / 특성: 변온, 독, 백전노장

    -크기: 13m.

    -서식지: 숨죽이는 평원, 자살 숲, 패륜아의 둥지

    -이 변덕스러운 파충류는 자신의 영역을 부모보다도 소중히 한다고 알려져 있다.

    ‘숨죽이는 평원’의 히든 보스 몬스터.

    언젠가 젖거미와 일전을 겨루던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다. 그 녀석이 이곳에서는 일반 몬스터로 등장한다.

    이놈만이 다가 아니다.

    <뿔도마뱀> -등급: C+ / 특성: 변온, 독, 벌레, 반전

    -크기: 10m.

    -서식지: 패륜아의 둥지, 자살 숲, 썩고 불타는 땅

    -독과 악으로 가득 차 있는 도마뱀.

    전신에 있는 뿔은 비늘이 아니라 비늘에 붙어사는 기생충들이 변화한 모습이다.

    <카멜레킬> -등급: C+ / 특성: 변온, 독, 흉내, 백전노장

    -크기: 7m.

    -서식지: 패륜아의 둥지

    -주변 환경에 맞춰 위장색을 띤 채 숨어 있다.

    길게 늘어나는 혀는 끈적끈적해서 한번 휘감기면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다.

    .

    .

    수많은 파충류 계열 몬스터들이 이곳에 드글거린다.

    하나같이 차갑고 흉폭하며 맹독을 갖고 있는 몬스터들.

    문제는.

    이 모든 몬스터들이 죄다 죽어 있다는 것이다!

    “흐음…….”

    나는 시체 사이로 줄줄 흐르고 있는 독의 시냇물을 피해 던전 안으로 들어갔다.

    거대 파충류들이 죽어 있는 사이로 역한 피가 졸졸 흐르고 그것들이 흘러들고 있는 깊은 곳에는 이미 붉은 못이 생겨나 있었다.

    “이상하다. 지금 시점에서 이 던전을 공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텐데?”

    현 한국 랭킹 최상위권인 임요셉도, 머지않아 아시아 랭킹 1위가 될 투신 마태강도, 아직은 레벨 20대 중후반에 불과하다.

    절대로 이곳에서 놀 수 있는 레벨이 아닌 것이다.

    한데? 대체 누가 나보다도 먼저 이 던전에 방문했단 말인가?

    하나도 만만치 않은 C+급 몬스터들을 이렇게 죽여 가면서.

    ‘얼마 전에 투신이 C+급 몬스터를 겨우 겨우 혼자 잡는 영상이 올라왔었는데…….’

    마태강이 흔들귀의 미궁을 공략하며 보스 아카오니를 쓰러트리는 영상이 얼마 전에 커뮤니티에서 한번 화제가 된 바 있었다.

    하지만 이곳엔 그 정도 수준의 C+급 몬스터 사체가 우글우글하다. 대체 어떻게 된 걸까?

    “레이드 군단이라도 몰려온 건가? 아니면 다른 나라의 랭커들이?”

    수백 명의 길드원들이 한꺼번에 들어왔다면 가능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랬다면 내가 몰랐을 리 없는데?

    내가 막 시체들을 넘어 지하로 내려갔을 때.

    “음?”

    나는 묘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쾅!

    발밑으로 전해져 오는 지진파.

    패륜아의 둥지 지하 4층을 지키고 있는 몬스터가 하나 있었다.

    어지간한 고층 빌딩만큼 커다란 덩치. 우락부락한 근육에 외눈, 툭 튀어나온 송곳니.

    <아오오니(靑鬼)> -등급: C+ / 특성: 거인. 악귀, 자연재해, 융합

    -서식지: 패륜아의 둥지, 썩고 불타는 땅

    -크기: 12m.

    -7대 악마 중 하나인 벨페골의 부하.

    지상을 침공하라는 명을 받아 지옥에서 올라왔지만 머리가 나빠 여지껏 미궁에 갇혀 있다. 오래도록 주인의 명령을 수행하지 못했지만 괜찮다.

    그에게 지령을 내렸던 벨페골도 꽤나 나태한 편이었기에 그의 존재를 잊어버린 지 오래니까.

    전신이 푸른빛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악귀 한 마리가 화가 잔뜩 난 채로 발을 쿵쿵 구르고 있는 것이 보인다.

    일전에 잡았던 아카오니와 완전히 비슷한 스텟을 가진 몬스터. 아오오니다.

    이 몬스터를 본 순간,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잘 됐네. 딴 놈에게 잡히지 않아서.”

    뭐, 엄밀히 말하면 ‘잡힐 뻔’ 한 것 같기는 하다.

    아오오니의 상태는 한눈에 보기에도 정상이 아니었다.

    몸의 이곳저곳에는 잔가시같은 것들이 빽빽하게 박혀 있었는데 그것들은 전부 화살이다.

    그 외에도 바닥, 돌기둥들에 화살들이 박혀 있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이곳에 온 존재는 궁수 같았다.

    ……문제는 궁수 단 한 명의 흔적만이 존재한다는 것.

    ‘미친! 패륜아의 둥지를 솔로 레이드로 깬다고!? 그것도 궁수가!?’

    나는 남겨진 흔적들을 보며 경악했다.

    어떤 괴물이길래 이 시점에서 A급 던전에 혼자 덤벼들 수가 있는 것이지?

    전 세계 통합 공식 랭킹에 집계된 바로는 1위의 레벨이 이제 고작 30정도이거늘…….

    내가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오-니이이이익!]

    화살 박힌 아오오니가 이빨과 뿔을 앞세우고 이쪽을 향해 달려온다.

    “이 녀석은 왜 쌩까고 간 거지 근데? 피통이 쓸데없이 커서 그런가?”

    나는 아오오니의 몸에 박힌 화살들을 보며 생각했다.

    아마 이곳에 들어온 이는 아오오니를 잡다가 귀찮아서 그냥 가버렸을 확률이 높다.

    아오오니는 워낙에 HP가 높은 몬스터니까.

    잡아도 별로 생산성이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나는 달려드는 아오오니의 주먹을 피해 빠르게 움직였다.

    이미 아카오니를 사냥한 경험이 있는 내게 아오오니는 쉬운 상대였다.

    푹- 푸푹- 뿍-

    깎단이 아오오니에게 몇 번인가 데미지를 입혔다.

    놈의 지진은 아카오니의 발가죽으로 상쇄했다.

    [후욱!]

    놈은 입에서 얼음을 토해 내며 내게 맞섰지만,

    [쉬익!]

    내 반지에서 소환된 요르문간드는 마법저항 100%의 몸뚱이로 아오오니의 얼음 브레스를 막아 냈다.

    쉬익-

    녀석은 아오오니의 마법 공격을 막아 내고는 마치 뽐내기라도 하는 듯 나를 돌아보며 몸을 덩실덩실 흔들었다. ……물론 시간이 별로 없는 나는 그냥 무시해 버렸지만.

    번쩍-

    내가 메두사의 눈을 부릅뜨자, 이내 내 마나 번 특성에 당한 아오오니는 뒤로 비틀비틀 물러난다.

    쩌저적!

    거대한 귀신 석상이 세워졌다. 도트 데미지에 의해 약해진 아오오니는 쉽게 돌이 되어 버렸다.

    나는 이곳을 지나쳐 지하 5층으로 내려가기 전, 아오오니의 시체를 한번 주의 깊게 살폈다.

    번쩍-

    아니나 다를까, 아오오니는 아이템을 드랍했다.

    -<아오오니의 발가죽> 신발 / C+

    푸른 귀신의 발 가죽을 벗겨 재단한 워커.

    이것을 신은 자는 귀신의 힘을 빌릴 수 있게 된다고 한다.

    -방어력 +50

    -얼음 속성 공격력 +30

    -이동 속도 +30% (특수)

    -특성 지진 사용 가능 (특수)

    -융합 (특수)

    내가 신고 있는 아카오니의 발가죽과 비교해 큰 차이는 없다. 불 속성 공격력이 그대로 얼음 속성 공격력으로 치환되었을 뿐.

    하지만.

    겸사겸사이긴 해도 내가 이 아이템을 얻으러 이 깊은 던전까지 내려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융합 (특수)

    바로 이 특성 때문이다.

    이름이 거의 같은 두 몬스터, 떨어트리는 아이템도 거의 똑같다.

    아이템의 스텟 역시도 비슷하다.

    더군다나 두 아이템에 붙어 있는 공통적인 특성 ‘융합’

    이것이 과연 우연일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한 손에는 빨간 발가죽, 다른 한 손에는 파란 발가죽.

    나는 이내 두 개의 발가죽을 한 데로 겹쳤다.

    그러자.

    꾸드드드득-

    귀신의 발가죽 두 장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서로 뒤엉킨다.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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