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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30화 (30/1,000)
  • 30화 눈 감고도 잡는다 (2)

    투신(鬪神) 마태강.

    15년 뒤, 한국 랭킹 1위에 빛나는, 아니 빛나게 될 영웅.

    놀랍게도 그는 마나 번 효과를 받지 않았다.

    돌이 되기는커녕 지금 당장 폭발할 듯 생동감 넘치는 몸 상태로 나를 노려보고 있다.

    그는 나를 향해 짤막하게 말했다.

    “붙자.”

    순간.

    오싹-

    소름 한 가닥이 목덜미를 타고 기어 올라와 머리털을 쭈뼛하게 세워 놓았다.

    ‘붙자.’

    이것은 15년 뒤 수많은 게이머들의 심장에 불을 당겨 놓을 불후의 명대사.

    투신의 상징과도 같은 멘트가 아니던가?

    그가 단신으로 어둠의 대왕을 무릎 꿇렸을 때,

    용족의 기린아를 패퇴시켰을 때,

    악마군단장을 꺾어 추락시켰을 때,

    지하종 최강이라 불리는 거대 괴수를 찢어발겼을 때.

    그 어떠한 불리한 상황과 무모한 도전을 앞두고서도.

    투신은 기죽지 않았다.

    물러나지도 않았다.

    오로지 한 마디를 내뱉었을 뿐이다.

    ‘붙자’ 라고.

    나는 새삼스러운 감격에 몸을 떨었다. 설마 투신의 명대사를 다시 듣게 될 줄이야. 그것도 나에게 하는 말을!

    아마 미래의 게이머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 나를 미치도록 부러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원래 살던 것보다 15년 전의 과거.

    아니, 과거가 아니지.

    지금은 지금이지.

    아무튼 지금 내 심경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아마 그 누구도 지금의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지. 심지어 투신 본인조차도.

    …….

    하지만.

    지금의 투신은 아직 햇병아리일 뿐이다.

    ‘침착하자.’

    나는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냉정한 시선으로 현재 상황을 파악했다.

    왜 투신은 돌이 되지 않았을까?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유는 간단하다.

    ‘…그새 나를 따라 눈을 감았단 말이지?’

    모두가 새로운 보스의 출현에 겁먹고, 욕심을 부리고, 신기해하는 동안.

    투신만은 나를 철저하게 벤치마킹하고 있었던 것이다.

    메두사의 등장과 함께 내가 눈을 감자, 그 역시 나를 따라 눈을 감고 메두사의 시선을 피했다.

    모두가 한 곳에 시선에 팔려 있을 때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전체를 볼 줄 아는 시선, 그것이 투신에게는 있었다.

    과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절대자답다.

    그리고 지금.

    그는 내게 반기(反旗)를 들었다.

    더이상 나에게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듯, 그는 자신의 페이스를 나에게 강요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주 사납게, 종래의 투신(鬪神)다운 방법으로!

    쾅!

    투신은 발을 박차고 내게로 달려들었다.

    붕-

    그의 두 주먹이 반 박자 차이로 서로 엇갈리며 공간을 아득히 메운다.

    실로 놀라운 빠르기.

    콰콰콰콰쾅!

    주먹에 닿은 기둥과 벽이 순두부처럼 으깨진다.

    부서진 파편이 또 부서지고 또 부서지며 자욱한 돌가루가 되었다.

    하지만 투신의 공격은 밀물처럼 몰려 들어온다.

    결코 멈추지 않고. 계속. 계속. 목표에 닿을 때까지 몰아친다! 수많은 타격의 궤도가 상하좌우로 폭풍처럼 나부끼고 있었다.

    “……흠.”

    나는 아카오니의 발가죽의 이동속도 증가 옵션을 이용해 계속해서 뒤로 물러났다.

    속도도 속도지만 공격성 하나는 정말 경악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같은 시간 동안 게임을 했는데 혼자서 이렇게 강해질 수 있지?

    이 정도라면 어지간한 C+급 몬스터 정도는 솔로 레이드가 가능하겠는데?

    그야말로 괴물. 싸우기 위해 태어난 악귀를 보는 것 같다.

    ‘…안 되겠군.’

    나는 표정을 찌푸린 채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투신은 바로 발을 놀려 그런 나를 바싹 추격해 왔다.

    투신 마태강의 직업은 격투가. 그중에서도 주먹을 주로 쓰는 권사 타입이다.

    “내 108계단 콤보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놈은 없어. 넌 끝났다.”

    거리를 좁힌 투신은 승리를 확신한 모양이다.

    나는 변변찮은 방어구조차 없었으니까.

    그러나.

    붕-

    나는 휘둘러지는 투신의 주먹을 종이 한 장 차이로 모조리 피해 냈다.

    “……!?”

    투신은 거리를 좁혔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공격을 퍼부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게 유효타를 한 방도 맞추지 못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

    하지만 그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어디 보자, 이때의 투신이 낀 아이템 트리가 뭐였더라?’

    아마 ‘방랑자의 건틀릿(양손무기)’ ‘필승의 헬름(투구)’ ‘도박꾼의 잰걸음(신발)’ ‘깎음바위 갑주(갑옷)’였지?

    15년간의 숙련도는 잠시 차치해도 된다.

    나는 한때 투신 마태강의 광팬이었다.

    그가 숱한 강자들을 꺾고 한국 랭킹 1위에 올라섰을 때 그 누구보다 열광했던 사람이 나였다.

    당시 나보다 어린 그를 형이라고 부르며 얼마나 환호했던가?

    나중에는 형을 넘어서 신이라고까지 불렀었다. 어려서 교회 한 번 안 가 본 내가 말이다.

    투신의 플레이 일거수일투족에 울고 웃고 떨며 부르짖던, 그렇게 까먹던 날밤들이 머릿속에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왼쪽 훅 다음으로 이어지는 오른쪽 미들킥, 그리고 외발 턴! 쏟아지는 잽 잽 스트레이트! 와우! 이거 정말 오랜만인데!?’

    머릿속에서 투신 전성기의 피지컬이 완벽하게 재현된다.

    수도 없이 따라하고 또 따라했던 콤보! 그래, 이걸 어떻게 잊겠어!

    퍼퍼퍼퍽!

    나는 투신의 주먹과 킥을 모조리 피하고 또 흘려 냈다.

    전성기에 비하면 미진하지만, 각종 패치 덕에 흘러간 유행이 되었지만.

    그래도 틀림없는 투신의 초창기 스킬 조합! 격투 콤보다!

    한편.

    “허어…….”

    투신 마태강은 믿을 수가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눈앞의 이 알몸 변태는 마치 자신과 수백, 수천, 수만 번 대련해봤던 것처럼 능숙하게 공격을 받아낸다.

    아무리 때려도 형체가 없으니 닿지를 않는다.

    미리 그곳을 때릴 줄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모조리 피하고 모조리 흘려 보낸다.

    심지어.

    퍽!

    “오오? 이거야!”

    빡!

    “앗, 아아! 좋아! 조금 더! 깊게!”

    콱!

    “그래! 이거거든!”

    부웅-

    “캬, 이 맛이지!”

    한 방 한 방 공격에 맞을(?) 때마다 입에서 괴상한 감탄사를 내뱉는다.

    마치 혼자서 추억에 젖어 흐뭇(?)해하는, 동경과 우수, 기쁨과 환희, 뭐 아무튼 그런 것들이 복잡하게 뒤섞인 그런…….

    아무튼 기분 나쁜 표정.

    공격을 받으면 받을수록 좋아하는 알몸의 사내.

    투신은 싸우면 싸울수록 점점 불쾌함을 느끼고 있었다.

    ‘……여유가 넘친다 이거냐? 대체 뭐냐 넌!’

    투신은 두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변태 같은 것은 둘째 치더라도, 공격이 하나도 맞질 않는다.

    마치 거대한 산, 아니 거대한 해파리를 상대하는 것 같은 느낌.

    지금껏 이렇게 막막한 느낌이 드는 상대와 싸워 본 적이 없었다.

    현실에서조차 느껴 본 적 없는 감정.

    그때.

    “자 이제 슬슬 끝을 내 볼까?”

    추억팔이는 여기까지만.

    이제 정말 시간이 없다.

    “……!”

    내가 한 말에, 투신은 움찔한다.

    동시에-

    파팟!

    나는 깎단을 손에 든 채 앞으로 내달렸다.

    “헛!?”

    투신은 순간 자리에 멈춰 섰다.

    정면으로 찔러 들어오는 송곳. 투신은 잽싸게 고개를 뒤로 젖혀 그것을 피해 내려 했다.

    하지만.

    턱-

    나는 잽싸게 깎단의 궤도를 아래로 틀었다.

    ‘이 시기의 투신은 하체가 부실했지?’

    투신 마태강이 탑 티어 랭커가 되는 것은 앞으로 1년쯤 뒤, 그 전까지 투신은 치명적인 단점을 하나 안고 있었다.

    복싱.

    마태강은 현실에서도 꽤나 이름을 날리던 복서 출신이었다.

    천재라고 불리며 나름 승승장구했었지만 어느 날 상대방에서 턱을 맞고 쓰러져 그대로 은퇴했다.

    특유의 약점인 유리턱 때문이었다.

    그 때문일까. 투신은 정면에서 턱을 노리고 들어오는 공격에 과민 반응하는 경향이 있었다.

    또한 복서의 특성상 하체를 이용한 공격 방어에는 상대적으로 조금 어설펐다.

    핏-

    내 깎단은 결국 투신의 턱을 살짝 스쳤다.

    하지만 진짜 목표는 그곳이 아니었다.

    뿍-

    온 방어가 턱으로 쏠린 틈을 타, 나는 송곳의 궤도를 틀어 그의 허벅다리에 송곳 구멍을 내 놓았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

    일단 데미지가 들어간 시점에서 승부는 났다.

    ‘헉!?’

    투신은 전신에서 피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도트 데미지!

    독에 중독되지도 않았는데 HP가 계속 빠져나간다.

    “뭐, 뭐지? 내게 무슨 짓을 한 거냐?”

    투신은 당황해 물었지만 내가 그것을 알려 줄 이유는 딱히 없다.

    깎단.

    깎아내는 단말마.

    한번이라도 공격이 들어간 상대를 죽을 때까지 괴롭히는 집요한 무기.

    나는 눈부신 플레이를 보여 줬던 투신에게 경의와 함께 작별 인사를 표했다.

    이제는 내가 앞서 나갈 차례다.

    그의 그림자를 넘어서, 더 먼 곳으로.

    “잘 가.”

    깎단에 당했으니 끝이다. 나는 투신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내가 송곳을 휘두르는 바로 그 순간.

    퍼퍽-

    투신 마태강.

    그는 그냥 당하지만은 않았다.

    동귀어진!

    투신은 내 송곳에 심장을 내주는 대가로 나의 왼팔을 가격한 것이다.

    하지만 고작 킥 한 번으로 내 HP가 0이 될 리 없다. 내 레벨은 무려 32나 되니까.

    “소용없는……음?”

    순간.

    나는 투신의 표정을 보았다.

    그는 웃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곧 투신의 웃음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깨닫고 말았다.

    쨍강-

    내 왼팔에 붙어 있던 청동 방패. 시선을 무효화해 주는 아이템.

    그것이 지금 투신의 발길질에 당해 깨져 버린 것이다!

    그는 내가 청동 방패에 의지해 우는 갈라테이아를 잡았던 것을 눈치챈 모양이다.

    그리고 앞으로 메두사 역시 같은 방법으로 사냥하려 한다는 것 역시도.

    “내가 못 잡는 몬스터는……아무도 못 잡아.”

    투신은 마지막 대사를 힘겹게 내뱉었다.

    실로 광오한 말이었지만 어쩐지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실제로 미래에서 메두사를 가장 먼저 솔로 레이드로 잡았던 존재는 바로 그였으니까.

    “방패가 없으니……너도 레이드를 포기해야겠지……. 두고 보자, 나도 그 청동 방패를 구해서……. 너보다 먼저…메두사를 잡을 거다.”

    HP가 한계에 이르러 비틀거리는 투신.

    수많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우뚝 서 있는, 마치 산군(山君)을 연상케 하는 위엄이다.

    그런 위대한 존재, 한 시대의 영웅에게.

    나는 경외감과 애틋함을 담아 입을 열었다.

    “어쩌나, 난 눈 감고도 잡을 수 있는데?”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