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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14화 (14/1,000)
  • 14화 고대문명의 수문장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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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란한 경고음과 함께 지면 밑에서 융기해 오른 것.

    그것은 너무나도 거대해서 마치 땅이 하늘로 치솟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오-오오오오!]

    거대 괴수는 듣기 싫은 포효를 내질렀다.

    놈의 전신에서 진흙과 썩은 나무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리자, 비로소 몸의 윤곽이 드러나 보이기 시작했다.

    <잊혀진 고대문명의 수문장> -등급: B / 특성: 암석, 팔랑귀. 하수인

    -서식지: 무통증 협곡 폐광지대

    -크기: ?m.

    -지금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고대 왕조의 충신. 여왕의 의지가 깃들어 있는 청동 주먹으로 침입자를 격퇴한다.

    지금은 황무지로 변해 버린 옛 왕궁의 성터를 지키고 있다.

    골렘 특유의 뚱뚱하고 둔해 보이는 외형과는 다르게, 이 골렘은 날씬한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골렘이라기보다는 ‘거신병’에 더 가까운 외형.

    놈의 몸은 푸르딩딩한 청동으로 만들어져 있었기에 움직일 때마다 부딪친 바위에서 땅! 소리와 함께 불똥이 튀었다.

    아무것도 없는 민둥민둥한 머리통에는 커다란 눈알 하나만이 퀭하게 번들거리고 있다.

    B등급.

    회귀 후 만났던 몬스터들 중에서는 가장 등급이 높은 몬스터.

    “이 녀석이 앞으로 이어질 대박 행진의 첫 열쇠로군.”

    나는 눈앞에 있는 청동 골렘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한데?

    나보다 먼저 움직이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금은동 자매들이었다.

    “히든 보스다! 당연히 잡아야지!”

    리더 격인 이금비가 대뜸 허리춤의 칼을 뽑아 들었다.

    동생인 이은비, 이동비 역시 마법과 화살을 준비한다.

    ‘……호오?’

    나는 흥미로운 광경에 슬쩍 뒤로 물러났다.

    기껏 찾은 사냥감을 남에게 넘겨줄 순 없지만, 그렇다고 그녀들을 방해할 생각은 전혀 없다.

    어차피 잡지도 못할 거고, 여차하면 막타를 먹은 뒤 튀면 되니까.

    이윽고.

    레이드가 시작되었다.

    [오-오오오!]

    청동 골렘은 눈앞의 세 자매를 향해 주먹을 날려 왔다.

    콰쾅!

    골렘답지 않은 스피드에 자매들은 조금 당황했다.

    “플레어!”

    이은비가 화염계열 마법을 캐스팅해 던지는 것이 보인다.

    이런, 아주 안 좋은 선택이다.

    쿠르륵-

    불길에 휘감긴 청동 골렘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으악! 이게 뭐야!? 저놈에게서 불 데미지가 들어온다!?”

    칼잡이인 이금비가 화들짝 놀라 뒤로 떨어졌다.

    열로 인해 붉게 달아오른 청동 골렘은 이은비의 화염 마법에 휘감겼기 때문에 불 속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금속 재질의 골렘이 패시브로 가지고 있는 특성 ‘팔랑귀’. 남에게 영향을 잘 받는 특성이다.

    이는 공격해 오는 이의 속성을 그대로 복사해 가지게 되는 특성으로 마법사들에게 있어서는 아주 까다로운 카운터 특성이라 할 수 있겠다.

    “으윽! 저놈, 불 속성을 갖게 되었어. 이렇게 되면 나와 동일 속성이라 화염 데미지가 반감되겠는데?”

    이은비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지팡이를 회수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나쁘지 않은데?”

    궁수인 이동비는 언니인 이은비를 멋지게 어시스트했다.

    퍼억- 퍽- 퍼억-

    단단했던 청동 골렘의 몸이 화염 때문에 물러진 사이, 이동비는 물렁물렁해진 청동 골렘의 몸뚱이에 화살을 퍽퍽 박아 넣었다. 칼, 마법, 화살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서로를 보완해 주고 있었다. 꽤 밸런스가 좋은 파티였다.

    [오-오오오!]

    청동 골렘이 본격적으로 날뛰기 시작했다.

    쾅! 콰쾅! 우직! 따앙!

    주변의 지형이 초토화되었다. 협곡이 무너져 내리고 바위들이 사방팔방으로 날아다닌다.

    어차피 24시간 뒤에 리셋 될 지형이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격변하는 걸 보니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

    “으윽! 저놈, 광폭 상태에 빠진 건가?”

    “이렇게 되면 패턴을 공략하기가 힘들어지는데? 너무 난해해!”

    “공격도 그냥 랜덤, 무작위로 하는 것 같아!”

    세 자매는 난색을 표했다. 골렘의 공격 패턴이 무작위로 변했으니 이제 상대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하지만…….

    공격 패턴이 무작위라는 건 뉴비들의 의견이고.

    나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거기서 오른쪽 주먹, 그렇지! 그 뒤에 왼쪽 발길질. 그 뒤에 회전하면서 광역기. 그리고 그 뒤에 점프! 그 뒤에 41% 확률로 돌진, 32% 확률로 앞구르기, 17% 확률로 바위 던지기, 10% 확률로 박치기.’

    공격패턴이야 이미 꿰고 있다. 아니, 설사 공격 패턴을 몰랐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피할 수 있다.

    15년 뒤 청동 골렘의 공격 패턴 난이도는 ★☆☆☆☆ 수준으로 평가된다.

    ‘저 정도를 가지고 난해하다고 하면 안 되지.’

    대형 몬스터를 한 번도 상대해본 적 없는 뉴비들 입장에서야 어렵겠지만, 나라면 저 정도는 사타구니 긁으면서도 피할 수 있다.

    “에이잉, 요오오즘 늒비들은 그저 어렵다 어렵다. 패턴 익히려는 노오오오오오오오력도 안 하고 말이야. 나 때는~”

    뉴비를 훈계하는 꼰대 고인물의 입장은 대략 이렇다.

    내가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자.

    “도, 도와줘!”

    금은동 시스터즈 중 하나가 나를 쳐다보며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자 이은비가 나를 보며 절박하게 손을 흔드는 것이 보인다.

    “야 변태! 우리 좀 도와달라고!”

    “변태 아닙니다만?”

    “네 복장을 봐! 변태 맞잖아!”

    “원래 진짜 고수는 알몸으로 다니는 거야.”

    “이, 일단 알겠어! 도와주면 사례할게! 진짜 급해서 그래!”

    이은비는 절박한 표정으로 외쳤다.

    나는 턱을 한번 쓸었다.

    저 여자들이 몇 년 뒤엔 탑 티어 랭커 반열에 드는 것은 맞지만, 지금은 그저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 뉴비일 뿐이다.

    빚을 지워 놓는다고 해도, 나중에 신경이나 쓰려나?

    그래도 집은 잘 사는 모양이니 잘 하면 돈을 좀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이 게임에서 죽음 패널티는 상당히 센 편이니 꽤 비싸게 받을 수 있을지도…….

    그렇다면 과연 얼마를 줄까?

    “뭐 줄 건데?”

    내가 묻자.

    이은비는 청동 골렘의 공격을 피하는 와중에도 급하게 입을 열어 대답했다.

    “99026584!”

    ...?

    뭐임?

    목숨 값으로 구천 구백 이만 육천 오백 팔십 사원을 주겠다는 건가?

    내가 고개만 갸웃하고 있자, 이은비는 황급히 다시 외쳤다.

    “내 전화번호야! 연락하면 누나가 데이트 해 줄게!”

    …….

    나는 웃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라 청동골렘! 저 여자들을 해치워 버려!’

    나는 이미 여자도 골렘도 돌 같이 보기로 마음먹은 몸.

    이번 생에서까지 이성관계 때문에 인생관계 종치고 싶지 않다.

    저 눈앞의 청동 골렘보다도 단단한 철벽남이 되리라.

    ‘그리고 새삼 이 나이(?)에 이십 대 초반의 여자를 만나는 것도 양심에 찔리고.’

    나는 버섯바위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 주저앉았다. 그리고 주점에서 사 온 팝콘을 씹기 시작했다.

    “야 이 변태 놈아! 네가 감히 날 무시해!?”

    이은비가 그런 날 보며 빽 소리친다. 지금까지 한 번도 남자에게 퇴짜 맞은 적이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아아, 어차피 스쳐 지나갈 인연. 미타찰에서나 다시 봅시다.

    그러나.

    [오오오오-!]

    나와 달리, 청동 골렘은 이은비가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게 꽤나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고개를 돌린 청동 골렘은 이내 나를 발견했다. 생각보다 플레이어 감지 AI가 뛰어난 모양.

    “허억……허억…….”

    금은동 시스터즈는 한숨 돌렸다는 듯 버섯 바위 뒤로 돌아가 숨는다. 지금까지 봤던 몬스터들 중 가장 등급이 높은 몬스터이다 보니 레이드를 완주할 엄두가 나지 않는 모양이다.

    콰쾅!

    청동 골렘은 나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이런. 어그로 튀었네.”

    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카오니의 신발을 신은 채 허공으로 펄쩍 뛰어내렸다.

    따앙-

    나의 깎단이 청동골렘의 주먹을 스치며 작은 생채기를 내 놓았다. 됐다. 먹혔어.

    이제 2시간 46분 40초 뒤에 저 골렘은 죽는다.

    금은동 시스터즈가 HP도 상당히 깎아 뒀을 테지만 어차피 깎단의 데미지는 %로 들어가니까 상관없겠지.

    그러니까 지금부터 들어가는 데미지부터가 진짜다. 금은동 시스터즈가 깎아 둔 HP 덕분에 일이 약간 수월해졌다.

    [오-오오오오!]

    청동골렘이 나를 향해 난투전을 벌여 왔다.

    저 멀리서 나를 바라보던 이은비가 다급하게 외쳤다.

    “변태! 조심해! 그 녀석 정해진 공격 패턴이 딱히 없어! 랜덤이야!”

    응 아니야.

    나는 피식 웃고는 깎단을 역수로 말아 쥐었다.

    그리고.

    이내 나의 화려한 고인 물 플레이가 시작되었다.

    탱커도 필요 없고 힐러도 필요 없다.

    왜냐하면 안 맞으니까.

    →↓↘앞구르기.

    ↓↘→왼쪽 턴.

    →바닥에 누움↓↘→바닥에 누움↓↘→뒷구르기↓↘.

    ←←↘ 큰발 슬라이딩.

    눈 감고도 피할 수 있다.

    청동 골렘의 주먹질과 발길질, 박치기, 바디 슬라이딩이 미친 듯이 이어졌지만, 나는 단 한 대도 맞지 않았다.

    부들부들……

    기분 탓일까? 화염 마법에 맞아 시뻘겋게 물든 청동골렘이 어째 몸을 파르르 떠는 것 같다.

    콰쾅!

    녀석은 나를 향해 온몸을 던져 몸통박치기를 해 왔다.

    딸피에 이르렀을 때 감행하는 이 최후 공격 패턴을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당황했겠지만, 나는 15년 전에 유튜뷰 영상으로 이 장면을 100번은 넘게 봤다.

    “안 맞지, 그런 거.”

    나는 청동골렘의 다리와 다리 사이에 낮잠 자듯 벌렁 드러누워 공격을 피했다.

    콰쾅!

    절벽이 무너져 내렸지만, 파편들은 내가 누워 있는 곳만 절묘하게 피해 간다.

    한편.

    저 멀리 버섯 바위 뒤에서는…….

    “세, 세상에. 저런 게 가능해?”

    이은비가 입을 딱 벌린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 옆에 있는 이금비와 이동비 역시 마찬가지였다.

    “천재다! 인간의 수준을 넘었어! 저 저 저 동체시력 봐, 반응 속도 미쳤잖아 진짜! 최소 사람은 아니다! 다들 지금 영상 녹화 잘 하고 있어!?”

    “응응! 준비할 시간이 없어서 우선 저화질로 하고 있긴 한데……대체 누구지? 저 정도 실력자가 왜 알려지지 않았을까?”

    “랭킹 확인해 봤는데 없어! 100위권까지 뒤졌는데 비슷한 사람도 없다고! 다들 장비 풀 세팅하고 랭킹 사진 찍어 놔서……저 사람은 아마 랭킹 등록 자체를 안 했나 봐!”

    금은동 자매는 경악한 채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때 문득.

    그녀들의 뇌리를 스쳐가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얼마 전에 들었던 소문, 하지만 너무 신빙성이 없어서 잊고 있었던 것.

    전 세계 최초로 튜토리얼의 최고 난이도 보스를 때려잡고 마의 1시간 기록을 깨 신기록을 경신한 플레이어.

    세 자매의 입에서 동시에 같은 말이 나왔다.

    “……고인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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