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510화 (509/510)
  • 00510  ending no.00  =========================================================================

    ※ 후기에 종이책 출간공지가 있습니다. 부디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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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달음은 너무나 늦었다.

    파이몬은 이미 죽었다. 그것도 루크 스스로 자신의 칼로 죽였다. 돌이킬 수 없는 회한을 품고서, 루크는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마왕이라는 이유만으로 한 여자의 순수한 사랑을 의심했다는 것. 심지어 의심한 끝에 그녀를 살해하고 말았다는 것. 이것은 루크에게 영원히 상처로 각인되었다…….

    “…….”

    엘리자베트는 묵묵히 루크가 자신의 후회를 고백하는 것을 들었다. 30분쯤 흘렀을까. 루크가 머리를 아래로 푹 숙였으며, 엘리자베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그래서 그대가 바타비아 공화국의 독립을 보장해달라 강력하게 요구했던 것이로군.”

    “……맞아.”

    바타비아 공화국은 대륙에서 유일하게 인간과 마족이 공존하는 국가였다. 비록 엘프와 난쟁이가 다른 종족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켄타우로스나 은랑족 같은 소수종족도 더불어 살았다.

    합스부르크 제국이 대륙을 재패하자 자연스럽게 바타비아 공화국이 논쟁의 도마에 올랐다. 마왕은 절멸했다. 마왕군도 전멸했다. 이제 마족들의 권익을 보장해줄 어떠한 세력도 없었다. 엘리자베트 여제의 한마디에 의해 바타비아 공화국은 언제든지 해체될 수 있었다.

    그때,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공화국 독립을 지지한 남자가 있었다. 루크였다. 누구보다도 마족들을 없애는 데 노력한 강경파 중의 강경파인 용사가 어째서인지 이번만큼은 마족의 편을 들어준 것이었다.

    강경파의 수장인 용사가 그리 나오자 다른 신료들은 할 말이 사라졌다. 엘리자베트 여제는 ‘그리 하도록 하여라’ 하고, 루크의 의견에 어떠한 토도 달지 않았다. 바타비아 공화국은 루크 덕분에 존속하게 되었다…….

    왜 원수나 다름없는 마족을 용사가 두둔하였을까.

    엘리자베트는 여태껏 그 이유를 질문하지 않았다. 이쪽에서 물어보기 전에 루크가 먼저 대답해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몇 년이 지난 끝에 루크는 여제한테 속마음을 고백하고 있었다.

    “죄책감 때문인가.”

    “그래.”

    절반은 포도주의 술기운에 기대어서. 나머지 절반은 애인에 대한 신뢰감에 의지하여, 루크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는 짓이라는 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어. 수없이 많은 마족을 도륙한 나에게 이제 와서 속죄할 방법 따위 없다는 것도……하지만 나는 더 이상 마족들을 ‘적’으로만 볼 수 없게 되어버렸어. 그들이 대륙에서 사라지는 것을 진심으로 바랄 수 없게 되었어…….”

    무의미한 속죄.

    순수했던 여인, 마왕 파이몬을 살해한 것에 대한 죄과.

    루크는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최소한 그렇게라도 짊어지고자 했다.

    루크가 힘없이 피식 웃었다.

    “엘리제. 나는 정말로 형편없는 남자야. 에피메테우스도 나에 비해서는 현명한 축에 들어갈 거야. 제멋대로 날뛰고, 나중에 가서 깨닫고, 이미 깨져버린 그릇을 두고 단념하지 못해서 발버둥치고 있어.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어. 달리 어떻게 해야 좋을지 나는 모르겠는 거야…….”

    “아아.”

    엘리자베트가 루크의 오른손을 감쌌다.

    그녀는 미소를 머금은 채 루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리석고 또 어리석은 남자로다. 부서진 유리를 긁어 모으더라도, 이미 한번 유리를 깨버렸다는 사실 자체는 변치 않고 남는다. 그걸 알면서도 후회하고 더 나아가 속죄하려 들다니…….”

    “…….”

    “하지만, 짐은 그대의 어리석음이 싫지 않구나.”

    엘리자베트가 루크의 어깨에 몸을 기대었다.

    “사람의 정체성은 무엇을 후회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루크. 그것이 그대의 후회라면 나는 기쁘게 받아들이겠다. 일찍이 그대가 내 후회를 위로해주었듯이, 이번에는 짐이 그대를 지탱해줄 차례이겠지.”

    “엘리제…….”

    두 사람이 조용히 시선을 마주쳤다.

    마치 당연한 것처럼 엘리자베트와 루크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아주 잠깐의 시간이 지났을 때, 두 사람은 이미 입술을 맞추고 있었다. 대륙은 여제의 것이었지만 여제는 용사의 것이었다.

    눈앞에 새하얀 살결이 펼쳐지자 루크는 그곳에 몸을 겹쳤다. 들뜬 숨결이 곧이어 침실을 메웠다. 남녀의 땀이 뒤섞여서 철퍽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제 더 이상 루크의 머릿속에는 파이몬이 떠오르지 않았다…….

    *  *  *

    “……정말로. 마지막까지, 무서운 표정만 짓는 분.”

    파이몬이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용사가 내찌른 칼날은 정확히 파이몬의 심장을 꿰뚫었다. 아마도 자신은 이곳에서 죽겠지. 파이몬은 죽음을 예감할 수 있었다. 하기사 애당초 용사를 막으려는 생각조차 안 했지만.

    파이몬이 합스부르크 제국의 위험성을 깨달은 것은 수년 전이었다.

    그때 이미 72명의 마왕 중 절반 가량이 죽었다. 마왕군은 아직 건재하긴 했어도 확실히 수세에 몰렸다. 아직 살아남은 마왕들이 용사를 죽이자며 울부짖었을 때, 파이몬은 전혀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설령 용사를 죽이더라도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한테는 당하지 못해요.’

    바로 엘리자베트 여제에 대한 경계심이었다.

    파이몬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진정한 괴물이 누구인지 정확히 간파했다. 분명히 용사는 대단했다. 하지만 단신의 능력만 두고 보자면 바르바토스, 마르바스, 바알보다 못했다. 용사에게 승리를 거두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엘리자베트였다.

    ‘용사가 유능한 장군에 무사라면,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는 실로 천재지변과 같은 지략을 가진 군주. 그녀에게 있어 용사는 하나의 정치적 장기말에 불과해요.’

    파이몬이 숙고했다.

    만에 하나, 용사를 죽이는 데 성공하면 어떻게 될까?

    인간군이 전적으로 용사 한 명에게 의지하고 있다면야 아무런 문제가 없으리라. 인간군은 정신적인 지주를 잃어버리고 간단히 붕괴할 것이다. 그러나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가 존재하는 이상 그런 결과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용사의 죽음을 비극으로 포장해서 장병들의 사기를 복돋울 거예요. 살아 있는 영웅보다 죽은 영웅이 활용하기에는 훨씬 더 간단……그 여자라면, 실로 능숙하게 모든 일을 해내겠지요.’

    파이몬은 판단했다.

    마왕군의 적은 용사 따위가 아니라고.

    진정한 적은 용사의 배후에서 모든 것을 조종하고 있는 군주임을――다른 마왕들이 루크한테 시선이 빼앗겼을 무렵, 파이몬만은 냉철하게 간파해낸 것이었다.

    그렇기에 파이몬은 용사가 아니라 엘리자베트를 직접 공격했다.

    브르타뉴의 여왕을 몰래 부추겨서 군대를 일으키게 만들었다. 방법은 단순했다. 브르타뉴가 프랑크 제국을 침공하면 바타비아 공화국도 도와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자 브르타뉴의 여왕은 단숨에 프랑크를 집어삼켰다.

    파이몬이 계획한 대로, 대륙의 정세는 순식간에 오리무중으로 빠져들었다. 서쪽에는 브르타뉴 왕국이 기세를 날렸다. 동쪽에선 합스부르크 제국이 패자를 자처했다. 비록 브르타뉴의 국력이 합스부르크에 미치지는 못했으나, 훌륭한 한판 승부 정도는 노려봄직했다.

    ‘됐어요!’

    파이몬이 쾌재를 불렀다.

    ‘브르타뉴를 이끄는 대장군은 라우라 데 파르네세! 그녀라면 엘리자베트가 상대일지라도 쉽사리 패배하지 않을 터. 이로써 우리 마왕군은 시간의 여유를 벌었어요.’

    하지만.

    그녀의 예상과 달리, 브르타뉴 왕국은 너무나 빠르게 무너지고 말았다.

    이번에도 문제는 엘리자베트였다. 엘리자베트는 단지 모략과 전쟁의 천재만이 아니었다. 외교적으로도 자신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었다.

    엘리자베트는 순식간에 카스티야 왕국, 사르데냐 왕국, 버니시아 왕국, 튜튼 왕국을 끌어들여 대(對) 브르타뉴 전선을 만들었다. 사방이 포위되자 라우라 데 파르네세도 손 쓸 도리가 없었다. 브르타뉴의 여왕과 대장군은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다…….

    ‘…….’

    그때 파이몬이 느낀 절망은 차마 말로 표현하기 어렵겠지.

    전쟁에서도 이길 수 없다. 모략에서도 이길 수 없다. 심지어 외교무대에서도 이길 수 없다. 대체 어쩌라는 것인가? 어떻게 해야 저 시대의 괴물을 없앨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 마왕군이 전멸하는 사태를 막을 수 있는가.

    파이몬은 직감했다.

    ‘……거역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라는 걸까요.’

    마왕군의 멸망을.

    단순하며 명료한 진실이 그녀의 눈앞에 놓여 있었다.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는 유능했다.」

    「그녀만큼 유능한 인재가 마왕군에는 없었다.」

    문장으로 나타내면 불과 두 줄에 불과했지만.

    그 문장들이 현실에 가져오는 결과는 지나치게 가혹했다.

    ‘……아직 백기를 들기에는 일러요.’

    파이몬은 포기하지 않았다.

    ‘마왕군이 멸망한다 할지라도, 마족이 멸망하는 사태만은 막을 수 있을지 몰라요. 적어도 바타비아 공화국과 헬베티카 연방의 존속을……두 국가만 온전히 남는다면, 마족의 절멸만큼은 막을 수 있사와요!’

    파이몬이 고민에 들어갔다.

    마왕들이 전원 사망했을 경우, 바타비아 공화국과 헬베티카 연방을 지지해줄 세력은 대륙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해당 국가들의 자치권을 인정해주느냐 마느냐는 전적으로 엘리자베트. 대륙의 패권을 휘어잡을 그녀에게 달렸다.

    안타깝게도 파이몬은 엘리자베트를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엘리자베트보다 무능하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용사라면……?’

    용사라면.

    용사 정도는 어떻게든 함락시킬 수 있지 않을까.

    ‘……아무것도 못하고 당할 바에야, 시도할 가치는 있겠지요.’

    결단은 신속했으며 행동은 더욱 재빨랐다.

    파이몬은 우연을 가장하여 용사 루크와 접촉했다. 그녀는 루크와 마주칠 때마다 인간과 마족의 공존을 노래했다. 바타비아 공화국이 이상적인 상태에 제일 가깝다 주장했고, 시도 때도 없이 서큐버스 여왕의 능력을 동원하여 용사를 공략했다.

    과연 용사답게 정신적인 방벽이 단단하긴 했어도.

    ‘제가 함락시키지 못할 정도는 아니에요……!’

    파이몬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확실하게 연심을 얻어내기 위해, 파이몬은 일부러 용사를 위기에서 구해주었다. 어차피 용사가 죽어봤자 엘리자베트한테 마왕군이 당하리라는 미래는 거의 확정되어 있었다. 용사를 죽임으로써 얻을 이익. 용사의 환심을 삼으로써 얻을 이익. 두 가지 선택지 중에서, 파이몬은 후자가 압도적으로 높다고 생각했다.

    교묘하게.

    절대로 눈치 채지 못하게.

    차근차근, 파이몬은 용사 루크의 마음을 잠식해갔다.

    ――마침내.

    “정말로. 마지막까지, 무서운 표정만 짓는 분.”

    루크의 칼날에 심장이 뚫린 순간.

    파이몬은 힘겹지만 아슬아슬하게 미소를 지었다.

    서큐버스인 그녀는 알 수 있었다. 루크는 그녀에게 연심을 품게 되었다. 정작 본인은 자신의 감정을 의식하지 못한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마지막 입맞춤을 건네주면 아무리 용사가 둔감할지라도 연심을 알아채겠지.

    ‘아아.’

    이 어찌나 서큐버스의 여왕인 그녀에게 어울리는 최후인지.

    사랑을 농락하여 목적을 이루어낸다. 그야말로 서큐버스다운 방식이었다. 아무래도 자신은 마왕보다는 한낱 서큐버스에나 어울리는 재목이었던 모양이라고, 파이몬이 뒤늦게 깨달았다.

    괜찮다.

    결국 마왕군의 전멸을 막을 순 없었어도, 바타비아 공화국과 헬베티카 연방의 자치권은 지켜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파이몬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자아, 하고 그녀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 미래를 이루어내기 위해서 용사한테 ‘마지막 저주’를 선물하자.

    한 명의 첫사랑이자 하나의 악몽으로 영원히 각인시키자.

    모든 것은 마족을 위하여.

    모든 것은, 마왕으로서 책무를 다하기 위하여.

    파이몬이 입술을 열었다.

    “죽는 순간인데……소녀에게 입맞춤 정도는 하사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그것이 마지막.

    유혹에 빠져서 자신에게 입술을 겹쳐오는 용사를 바라보며 파이몬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첫 번째 입맞춤이라서 그런 걸까. 용사의 실력은 정말이지 형편이 없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서투른 입맞춤이지만 자신의 최후에는 제법 잘 어울렸다…….

    후회는 없었다.

    ‘하지만…….’

    파이몬은 의식이 까마득한 어둠에 뒤덮이는 것을 느꼈다.

    ‘하다못해, 엘리자베트의 위험성을 조금이라도 더 일찍 알았더라면.’

    ‘아주 조금이라도 더 빨리 그녀를 짓밟아두었다면…….’

    ‘그랬더라면…….’

    최후의 회한조차 끝맺지 못한 채.

    파이몬은 숨결을 거두었다.

    인간들에게는 마왕이라 증오받았으며, 같은 마왕들에게는 매국노라 경멸받은 여인은 그렇게 죽었다.

    그녀의 가슴에는 외로운 진실이 숨어 있었으나 그것이 밝혀질 날은 오지 않았다.

    영원히.

    ─ Ending no.00(True Ending): <이 세계의 결말>

    ─ 엔딩 앨범이 추가되었습니다.

    ─ 게임을…….

    ─ 게임을 다시 시작하겠습니까?

    ============================ 작품 후기 ============================

    출간공지만 올리기에는 뭔가 아쉬워서 외전을 들고 왔습니다.

    안녕하세요, 독자 여러분! 드디어 던전 디펜스가 새로운 종이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_<)!

    현재 던전 디펜스 01권은 각종 서점 및 인터넷 서점에서 판매되고 있습니다.

    알라딘, 인터파크, YES24 등등, 기타 인터넷 서점에서 손쉽게 던전 디펜스 01권을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광고에 나왔듯이 던전 디펜스 01권은 아예 새롭게 쓰였습니다. 줄거리의 기본적인 뼈대는 유지됩니다만 등장인물들의 성격, 세계관, 세부적인 스토리는 모조리 바뀌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새로 작성되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던전 디펜스를 웹에서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만약 이번에 새로이 개정되어 출판된 종이책까지 구매해주신다면 저에게 있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 되겠습니다.

    ※ 공지사항에 던전 디펜스 광고를 올려두었습니다. 책표지와 일러스트를 보실 수 있습니다. 공지사항을 통해 던전 디펜스가 어떤 모습으로 새로이 단장했는지 확인해주세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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