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509화 (508/510)
  • 00509  ending no.00  =========================================================================

    “……정말로.”

    “마지막까지, 무서운 표정만 짓는 분.”

    …….

    “하지만 이제 소녀를 보는 것도 마지막 순간.”

    “죽는 순간인데……소녀에게 입맞춤 정도는 하사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

    ………….

    …………………악몽을 꾸었다.

    “허억!”

    용사 루크가 침대에서 벌떡 상반신을 일으켰다.

    루크는 허겁지겁 주변을 둘러보았다. 화려하지만 깊은 밤의 어둠에 잠긴 실내.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아무것도 없지는 않았다. 침대의 바로 옆자리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이 잠들고 있었으니까.

    “흐읍, 헉……후우우…….”

    루크가 숨을 거칠게 몰아 쉬었다.

    잠옷이 축축했다. 식은땀으로 흥건하게 젖은 것이겠지. 루크는 등줄기의 감촉이 몹시 불쾌했으나, 무엇보다도 식은땀을 흘렸다는 사실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째서인가. 어차피 자신은 수없이 많은 마족을 정벌한 용사일 터이다. 72명에 이르는 마왕들을 모조리 참수했으며, 수만 명, 어쩌면 수십만 명에 이르는 마족들을 직접 토벌했다. 그들을 떠올릴 때 루크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떳떳했다.

    마족은 인류의 적. 저쪽을 섬멸하지 않으면 이쪽이 전멸당할 뿐인, 지극히 간단하고도 무미건조한 관계에 불과했다. 괴물을 없애는 데 양심의 가책을 느낄 여유 따위는 용사 루크에게 없었다. 그렇다. 없어야만 했다…….

    ‘그런데 어째서.’

    루크가 주먹으로 이불을 꾸욱 쥐었다.

    ‘왜, 마왕 파이몬을 떠올릴 때만 이렇게…….’

    루크는 말없이 자신의 마음에 찾아든 죄책감을 감당했다.

    “……루크? 또 잠자리를 설치고 있는가.”

    함께 이불을 쓰는지라 파트너의 이상한 징후를 감지했겠지. 루크의 연인이 부스스 일어났다. 방안이 어두운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은발은 찬란함을 잃기는커녕, 오히려 방안의 어둠마저 받아들여 연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루크가 애써 미소를 지었다.

    “으응, 엘리제.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기는. 세상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지 않은가.”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

    한때 고귀한 황녀였다가 지금에 이르러서는 제국의 여제가 된 그녀는, 황급히 등잔에 불을 켰다. 바깥에선 만인에게 두려움과 존경을 한몸으로 받는 엘리자베트였으나, 침실에서는 자신의 애인을 걱정하는 여인에 지나지 않았다.

    “괜찮은가. 물이라도 마실 텐가?”

    “정말로 괜찮아. 아무 일도 아니야.”

    “그대는 팔이 한짝 잘려도 괜찮다고 대꾸할 양반이다.”

    엘리자베트가 침대에서 일어나 몸소 물병을 가져왔다. 루크가 괜찮다며 자꾸 사양했지만 엘리자베트는 막무가내였다. 별 수 없이 루크가 생수를 몇 모금 마셨다. 살며시 장미향이 감도는 생수가 입안에 들어오자, 정말로 머리가 조금 산뜻해졌다.

    엘리자베트가 고양이처럼 우쭐거렸다.

    “어떤가. 나의 말에 따르는 편이 좋았지?”

    “……예에, 황제 폐하. 폐하께서는 언제나 올바르십니다.”

    “음. 알면 되었느니라. 나의 기사여.”

    엘리자베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만일 제국의 신민이 지금 이 광경을 보았다면 너무 놀라서 입을 떠억 벌린 나머지 턱뼈까지 부러졌겠지. ‘황제 폐하께서 아양을 부리시다니! 주변의 왕국들을 모조리 정벌하고, 마왕군마저 쓸어버린 다음, 사실상 대륙을 일통해버린 그 황제 폐하께서!’ 하고.

    엘리자베트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하지만 그대 때문에 나까지 잠이 깨버렸다. 이거야 원, 내일 정무를 보는 데 심각한 위험이 생겨버렸군. 나를 보필해도 모자랄 판국에 방해하다니. 그대의 죄가 몹시 크다.”

    “하아.”

    루크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눈동자가 불길하게 번들거리는 것이 또 못된 장난을 떠올린 게 분명했다. 루크는 반쯤 어이없는 심정으로, 나머지 반절은 애인의 장난에 알면서도 넘어가주는 심정으로 대꾸했다.

    “그렇군요. 소인이 대죄를 범하고 말았나이다, 폐하. 어찌해야 소인의 죄를 씻고 폐하께 용서를 구할 수 있을까요?”

    “무슨 악몽을 꾸었기에 그리 황망히 일어났는지 솔직히 고하거라.”

    “…….”

    루크가 침묵했다.

    이걸 말해도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제대로 판단이 서지 않았다. 엘리자베트는 애인이 고민에 잠긴 것을 느끼고 아예 포도주를 가져왔다. 그녀는 은잔에 포도주를 또르르 따라서 루크한테 건네주었다.

    루크는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시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엘리제. 내가 사랑한 사람은 너가 처음이고, 또 마지막이 될 거야.”

    “시작이 거창하군.”

    엘리자베트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음. 좋다. 나는 마음의 준비를 전부 끝냈다.”

    “……마음의 준비라니?”

    “그대가 죽을 병에 걸렸다는 얘기 아닌가. 그토록 마계를 싸돌아다녔으니 정체 모를 질병에 걸릴 만도 하지. 괜찮다. 짐은 이미 모든 각오를…….”

    “그런 게 아니야!”

    루크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엘리자베트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불치병에 걸린 것이 아닌가?”

    “당연하지. 난 아직 팔팔하다고! 아무리 적어도 앞으로 백 년은 더 살 건데 뭐 벌써부터 병이야, 병은!?”

    “그렇다면……혹시 고자가 되어버렸는가.”

    엘리자베트가 측은한 표정을 지었다.

    “가엽고 딱하구나. 대륙에 평화가 찾아온 이상, 용사인 그대에게 그나마 쓸모가 있는 부분이라면 그 경악스러울 정도로 절륜한 정력밖에 없었거늘. 뭐. 안심해도 좋다. 짐은 성기가 불능이 되어버렸다는 이유로 애인을 버리는 그런 여자가 아니다.”

    “나의 성기능은 완전히 정상이야!”

    루크가 엘리자베트의 볼살을 잡아서 쭈욱쭈욱 당겼다.

    “어제도 신나게 즐겼으면서 도대체 무슨 연유로 소신의 성기능을 의심하시는 것일까요, 폐하-? 그거입니까? 오늘도 한판 격렬하게 뛰어보자는 제안이 몰래 담겨 있는 것입니까? 폐하께서 바라신다면 소신은 언제든지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만-.”

    “으어, 으어어어…….”

    엘리자베트가 웅얼거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루크는 엘리자베트를 풀어주었다. 엘리자베트가 자신의 볼살을 매만지며 툴툴거렸다.

    “무엄한지고. 대륙의 유일무이한 여제를 희롱하다니. 백 번 죽여도 그 죄값을 다 물을 수 없을 정도이다. 불치병에 걸린 것도 아니다. 성불구자가 된 것도 아니다. 그럼 무엇이 문제이길래 잔뜩 무게를 잡는 것인가.”

    “예에, 예에. 그런 일이 있습니다. 소인이 저지른 불충에 대해서는 거 삶아 죽이든 굶겨 죽이든 마음대로 선택하시지요.”

    “――아니면 혹시, 나에게 숨겨둔 애인이라도 있는가?”

    한없이 기습적인 질문이었다.

    일부러 장난스러운 발언들을 늘여놓았다가 상대방이 방심하기를 기다린 것일까. 엘리자베트는 돌연히 질문을 찔러넣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루크는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시간은 2초, 3초 흘러버렸다.

    “아니, 엘리제. 그게 아니라…….”

    “…….”

    루크는 서둘러 변명하려 했으나 다시 입을 닫았다. 엘리자베트의 눈동자가 너무나 투명하기 때문이었다. 서투른 변명을 용서하지 않는 눈초리. 그러면서도 진지하게 해명하고 설명하면 얼마든지 받아주겠다는 너그러움이 엘리자베트의 눈매에 머물고 있었다.

    “포도주를 한 잔 비우거라.”

    엘리자베트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나에게 말하는 것도 조금은 편해질 것이다.”

    “……응. 알겠어.”

    정말로 황제 폐하께는 당하지 못했다.

    루크가 쓴웃음을 지으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5분이 흐르고 10분이 흘렀다. 비로소 루크는 엘리자베트한테 모든 것을 얘기할 준비가 되었다. 루크가 엘리자베트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엘리제. 나는 분명히 너가 첫 번째 연인이지만…….”

    “음.”

    “……어쩌면, 첫사랑은 아닐지도 몰라.”

    말했다.

    말하고 말았다.

    루크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것은 여태까지 루크가 단 한 번도 입밖으로 꺼내본 적 없는 말이었다. 심지어 마음속에서 독백으로라도 중얼거려본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은 한평생 마왕과 마족에 맞서 싸운 사람이었으므로.

    ――그런 남자의 첫사랑이 어쩌면 마왕일지도 모른다는 사실 따위, 루크 본인조차 쉬이 인정할 수 없으리라.

    “호오. 짐이 첫사랑이 아닐지도 모른다라. 그렇다면 누가 그대의 마음에 미리 발자국을 찍어두었을고?”

    엘리자베트는 도리어 짓궂게 싱글거렸다. 아마 루크의 마음을 편히 덜어주려고 일부러 미소를 짓는 것이겠지. 저래 봬도 엘리자베트는 연인을 생각하는 마음이 상당했다. 첫사랑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말에 상처를 입었을 텐데, 전혀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마음이 강한 여자.

    자신 같은 남자에게 과분하리 만치 강한 여자였다. 적어도 그녀의 배려를 쓸모없게 만들지 않기 위해 성실하게 얘기하자. 루크는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마왕이야. 마왕 파이몬……처음에는 그녀가 마왕인 줄도 몰랐어. 그냥 브란덴부르크를 걷고 있는데 우연히 마주치고 나중에 가서야 마왕이란 걸 알아차렸지.”

    “과연.”

    엘리자베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래서 짐한테도 말하기 꺼려했던 것이로군.”

    “응.”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했는가?”

    “……모르겠어.”

    용사는 생각했다. 붉은 머리칼이 아름다웠던 한 명의 여인을.

    처음에는 단순히 이상한 마왕이라고 생각했다. 서큐버스의 여왕인 만큼, 어쩌면 자신을 유혹해서 마왕군으로 끌어들이려는 책략이 아닐까 의심했다. 당연했다. 마왕이 용사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믿을 바에야 그쪽이 훨씬 더 그럴듯했다.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사랑과 비슷한 감정을 느껴보지 못했어. 하지만…….”

    하지만 어째서인지 파이몬은 용사인 그를 구해주었다.

    언젠가 루크는 마왕군의 함정에 빠져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다. 그때 루크는 파이몬이 도와준 덕분에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파이몬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면 루크는 십중팔구 죽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루크는 혼란스러웠다.

    정말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일지 모른다, 라고.

    “……거짓말인 게 분명하다. 그렇게 판단했어. 서큐버스의 여왕 따위는 믿을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파이몬의 심장에 칼날을 찔러넣었을 때, 그 순간만큼은 파이몬이 진심을 드러낼 거라고 생각했어. 자신을 죽인 날 원망하고 저주할 것이 틀림없다고.”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맞이하던 순간마저, 파이몬은 변하지 않았다.

    루크가 힘겹게 말했다.

    “죽는 순간이니 마지막만큼은 입맞춤을 허락해달라……그게 파이몬의 유언이었어.”

    “…….”

    “그 말을 들으니까, 머리가 이상해져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게 되었다. 그리 표현해야 올바르겠지.

    깨닫고 나니 이미 루크는 파이몬에게 입술을 맞추고 있었다. 엄밀히 말해 그것은 입맞춤이라 부르기에는 적이 부족한 무언가였다. 입술과 입술의 단순한 스침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는 듯, 파이몬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 고마워요. 루크.

    파이몬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는 눈을 뜨지 않았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파이몬은 루크의 첫 번째 입맞춤을 훔치고서 그대로 떠나버렸다.

    그날 이후 루크는 때때로 악몽에 시달렸다. 꿈의 내용 자체는 별달리 공포스러운 구석이 없었다. 단지 파이몬이 죽어가는 광경이. 입술에서 한 가닥 피를 흘리며 부드럽게 미소를 짓는 모습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이것이야말로 희극이라 불러야 하리라.

    루크는 어리석게도 파이몬을 죽인 다음에야――어쩌면 자신이 그녀를 좋아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었다.

    ============================ 작품 후기 ============================

    공지사항을 확인해주시고, 다음편의 후기를 읽어주세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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