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507화 (506/510)

<-- Acta est Fabula --> 『507』

한겨울에 아침이 찾아왔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이 여태껏 기다려온 그 하루임을 느꼈다. 어떠한 말이 오가거나 그러지 않았다. 아침의 햇살이 눈꺼풀을 장난스럽게 쿡쿡 찔렀다.

나는 눈을 뜨고 옆을 바라보았다. 우연일까. 아니면 줄곧 기다린 것일까. 마침 바르바토스도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침대에 나란히 누워서, 나란히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 바로 오늘이었다.

“먹고 싶은 거 있어?”

“맛있는 포도주나 한잔 하고 싶은데.”

“그건 내가 싫어. 이런 날에는 맨정신으로 있고 싶은걸.”

우리는 한동안 침대에서 빠져나가지 않고 미지근하게 뒹굴거렸다. 따스한 시간. 햇빛이 우리를 침대째로 하얗게 감싸안고 있었다. 나는 바르바토스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바르바토스가 징그럽다며 기겁했다. 복수해주마, 하고 바르바토스가 내 귓등을 깨물었다. 조금 아팠다. 가만히 있으면 내 성격이 울었으므로 겨드랑이를 간지럽혔다. 입가에서 웃음이 끊기지 않았다.

“후아아.”

우리 둘 다 기진맥진해져서 드러누웠다. 겨울날인데도 복날의 강아지마냥 헉헉거렸다.

“너무 놀았잖아, 밥팅아. 이런 날에도 장난칠 마음이 들어?”

“그럼 뭐하냐. 그림 그리거나 바이올린 연주하는 건 더 말도 안 되잖아.”

“음, 그건 그렇지.”

바르바토스와 내가 고민에 잠겼다. 오늘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참으로 어려운 문제였다. 끄으응, 끄응, 하고 신음을 흘리면서 이십 분 가량 머리를 싸맸다. 그때 바르바토스가 문득 떠올랐다는 어조로 말했다.

“야. 너 이 저택 가만히 내버려둘 거야?”

“응?”

“여기에 네가 그린 그림 졸라게 널려 있잖아. 다른 사람이 보면 곤란하지 않겠어?”

아차. 그걸 생각하지 못했다.

특히 파이몬이나 라우라의 초상화가 위험했다. 두 사람은 마인과 인간종을 불문하고 아직까지도 최고의 인지도를 자랑했으니까. 만일 안목이 높은 누군가가 발견한다면, 만에 하나의 가능성일지라도, 이상한 추론을 해버릴지도 몰랐다.

내가 진지하게 눈썹을 지그시 찡그렸다.

“그러게. 이야깃거리가 되어서 나도는 것 자체가 꽤 위험하지…….”

“응. 아예 화끈하게 불이라도 질러버리는 편이 좋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정말로 너답구나.”

“왜? 마을이나 도시 같은 거 불지르면 왠지 기분이 좋아지지 않냐. 막 흥분되고.”

“…….”

실제로 인간종의 도시를 열댓 개쯤 태워버린 경력이 있었기에 장난으로 들리지 않았다. 본인의 뻔뻔한 표정을 보건대 농담이 아니었다. 바르바토스는 언제까지나 바르바토스였다.

그렇게 오늘 일과가 정해졌다.

우리는 화실에 쌓여 있던 그림들을 전부 정원으로 옮겼다. 자그마치 수백 점의 그림을 옮겨야 했는지라 어마어마한 대작업이었다. 한 점을 그릴 때마다 온갖 정성을 다하여, 수십 일, 몇 달에 거쳐 완성했건만 지금은 아무렇게나 수레에 처박혀서 운반되는 신세. 나는 어쩐지 감상에 젖어서 한탄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더니만 다 거짓말이었어.”

“맞아. 인생도 짧고 예술도 짧은 게 진실이지.”

“삼천 년 넘게 살아온 분께서 그리 말씀하시면 조금 양심이 없는 것 아닐지.”

“아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오천 년만 더 살면 좋겠다.”

천하제일의 욕심쟁이가 여기 있었다.

바르바토스가 자신의 초상화를 양손으로 붙잡은 채 귀엽게 윙크했다.

“당연히 너랑 같이 살고 싶다는 뜻이야.”

“지나치게 부끄러운 말은 법적으로 금지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안 됐네. 제국의 법무상에서 물러나서 지금 너한테는 아무런 권한이 없걸랑.”

바르바토스가 깔깔 웃었다.

대낮이 다 되어서야 그림을 전부 옮겼다. 천 점에 가까운 그림이 마당에 꽉 들이찼다. 장관이 따로 없었다. 그중에는 특별히 마무리가 훌륭하게 되어서 애착이 깊은 그림도 있었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제는 나를 떠나라고 말해주고 싶었고, 다만 축하해주고 싶었다.

“자아. 점화!”

“……어째 좀 너무 신나게 즐긴다, 너?”

바르바토스가 춤을 추듯 흥얼거리며 이곳저곳에 불을 지폈다. 그림들 둘레를 빙 순례하고 바르바토스가 내 곁에 다가왔다. 행여나 산불로 옮지 않도록 주위에 마법적인 처리를 해두었다.

불길이 조금씩 치솟았다.

그때였다.

초상화들이 불꽃에 구멍이 뚫리면서 비명을 토해냈다. 처음에는 한 줄기에 불과했던 비명이 두 가락, 세 가락으로 늘어나더니 이윽고 수십수백 개의 갈래로 나뉘어졌다. 라우라의 목소리가. 라피스의 목소리가. 파이몬의 목소리가 대기를 날카롭게 찢었다.

“…….”

비명은 공기를 찢으면서 내 살결에 닿았으며, 순식간에 천 갈래로 찢어져서 신체를 관통했다. 가슴에서 끈적거리는 것이 흘렀다. 마음이 흘리는 피였다. 마음도 피를 흘릴 수 있었다.

“아…….”

눈시울이 붉어졌다.

사람의 마음이 담을 수 있는 용량의 한계를 간단히 뛰어넘었다.

저 앞에 환영들이 보였다. 끊임없이 아우성이 일렁거렸다. 그림자들은 살갗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물감이 진득하게 눌러붙었고, 구멍들이 그림을 잠식했으며, 연기가 모든 것을 뒤덮었다.

아, 라고 환영이 뭐라고 말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입술이 타버려서 발음이 안 되었다. 나는 숨을 쉬기가 벅찼다. 환영들은 나를 향해 다가오려고 했지만 이미 다리와 발이 전부 사라져서 불가능했다.

그들이 손길을 뻗었다. 손길을 들어올린 채로 몸뚱어리가 불살라졌다. 눈썹이 타닥거리고 눈동자가 허물어졌다. 그들은 계속해서 소리를 냈다. 그러나 단지 아무도 알아듣지 못할 진동음만이 아, 아, 하고 허공에 메아리쳤다.

나는 발걸음을 앞으로 내디뎠다. 내가 가야만 했다. 저들이 오지 못한다면 내가 그녀들을 구해야 했다. 그렇지 않은가. 당연한 귀결이지 않은가.

하지만 무언가가 내 손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

바르바토스였다. 바르바토스는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말없이 고개를 두어 번 저었다. 나는 더 이상 발걸음을 내딛을 수 없었다. 그저 나에게 가능한 행위란 무릎을 꿇고 쓰러지는 것뿐이었다.

“으, 아아……아아아…….”

마음이 녹았다.

녹아서, 흘러내렸다.

가슴에 쌓인 부패물이. 밑바닥까지 들러붙은 그을음이 쓸려서 흘러나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불길은 모든 것을 불태우며 한참이나 샛붉은 혓바닥을 공중에다 내밀었다. 나는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 혼이 빠져나간 인형마냥 불길을 올려다보았다.

저녁이 되어서야 불이 잠잠해졌다.

검은 잿더미가 남아서 바람에 탄내를 실어 보냈다. 마음의 일부분이 죽었다. 나는 그걸 느낄 수 있었다. 사람에게는 결코 청소될 수 없는 그을음이 한 군데 정도 있었다. 그렇지만 씻을 수 없는 곳이라도 삭제될 수는 있었다. 아마도 나는 슬픔이라는 감정을 다시는 느낄 수 없겠지.

“단탈리안.”

“……그래.”

내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팔다리가 무거웠다. 바르바토스를 바라보자 그녀도 지쳐 보였다. 언제나 밝았던 미소에 숨길 수 없는 그늘이 드리웠다. 나도 조금 힘들었지만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

“아니. 될 수 있으면 높은 곳이 좋아. 내려다볼 수 있잖아.”

“높은 곳이라.”

내가 고개를 들었다. 뒷산 정도면 올라갈 수 있을지 몰랐다. 과연 신체가 우리의 의지에 따라줄지, 그것만이 걱정되었다. 아마도 괜찮겠지. 바르바토스와 17년 동안 살면서 수도 없이 올라가본 산책로였다. 문제는 없었다.

“갈까.”

“응.”

우리는 산길에 올랐다. 빠르게 오를 수는 없었다. 체력은 이미 바닥을 드러냈다. 찌꺼기처럼 남은 체력을 조정하면서, 발자국 하나하나에 모든 신경을 기울여야만 했다. 호흡도 제멋대로 내버려둘 수 없었다. 천천히. 어디까지나 천천히.

“…….”

“…….”

겨울의 산길은 험난했다. 며칠 전에 내린 눈이 아직까지도 수북하게 쌓였다. 들짐승조차 지나다니지 않은 눈밭에 우리의 발자국이 남았다. 태양이 저물고 있었다. 황금색의 저녁 노을이 설원에 아득하게 내려앉았다.

바르바토스는 몇 번이고 넘어질 뻔했다. 내가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바르바토스는 비밀스러운 장난을 들킨 아이처럼 멋쩍게 웃었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미안해.”

미안하다.

무엇이 미안하다는 것일까.

바르바토스는 몸이 기우뚱거릴 때마다 나한테 미안하다고 말했다. 나는 대답해줄 수 없었다. 그녀의 미안함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바르바토스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후우, 후욱……하아아.”

눈앞이 침침해졌다.

해가 저물었다.

우리는 수시간에 걸쳐서 마침내 산꼭대기 부근에 도착했다. 거기에는 나뭇잎이 다 벗겨진 벚나무가 한 그루 구부정하게 서 있었다. 봄이 와서 꽃놀이를 할 때면 이곳에 와서 종일토록 술을 마셨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나무에 기대어 앉았다.

“……꽃놀이.”

바르바토스가 입술을 열었다. 겨울이었다. 그녀가 내쉬는 숨이 하얀 증기가 되어 공중에 흩날렸다. 작은 목소리. 그렇지만 나에게는 그 어느 비명과 목소리보다 그녀의 숨결이 뚜렷했다.

“이번에도, 하고 싶었는데…….”

“술통을 잔뜩 들고와서.”

“응. 잔뜩……벚꽃도 무장무장, 흘러내리고.”

“작년에 네가 술통에 빠진 거 웃겼어.”

“바보야. 그건 작년이 아니라 재작년이야…….”

그랬나.

바르바토스가 그렇게 말한다면 틀림이 없겠지.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었다. 어깨를 맡기고 머리를 맞대었다. 바르바토스의 무게가 온전히 전달되었다. 얼마 남지 않은 체온도. 나는 내 호흡이 잘 느껴지지 않았지만 상관이 없었다. 바르바토스의 숨은 충분하리 만치 느껴졌다. 조금씩 가빠지고, 아주 조금씩 길어졌다.

“……바르바토스.”

“응.”

“너는 내가 가장 사랑한 여자야.”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 팔뚝을 꾸욱 눌렀다. 이따금 대답이 필요하지 않은 고백이 있었다. 바르바토스와 나는 그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

시야가 완전히 어두워졌다. 어쩌면 내 탓이 아닐 거다. 밤이 깊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둔탁하고 어수룩한 손길로 바르바토스의 외투를 매만졌다. 날씨가 추웠다. 그러니까 바르바토스가 걱정되었다.

그걸 마지막으로 내 동작은 멈추었다. 가끔 바르바토스나 내가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하지만 중얼거렸다는 진동만이 느껴져서, 제대로 된 대답을 듣거나 돌려줄 수 없었다. 그래도 충분했다. 진동만으로도 충분했다.

바르바토스, 그렇지?

…….

정말로 바보 같은 삶을 살았다.

이런 곳에 떨어져버리고.

이런 곳까지 와버리고.

하지만, 그래도 필사적으로 걸어왔다는 사실 하나만은 남아 있었다.

외면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그걸로 괜찮은 거지, 바르바토스.

………….

내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눈꺼풀을 전부 들어올릴 힘이 없었다.

햇살이. 산 아래 풍경에 햇살이 투명하게 비추고 있었다. 대낮의 빛은 모든 사물을 온전하게 드러냈지만 빛 그 자체는 드러나지 않았다. 나는 될 수 있으면 먼눈으로 지평선을 응시했다. 착각일까. 시력이 지쳐서일까. 지평선이 환한 빛에 감싸여 흐릿해지고 있었다.

눈꺼풀이 닫혔다. 나뭇가지가 쏴아아 울었다.

미안할 필요가 없다.

바르바토스.

아주 조금 더 먼저 떠난다고 해서, 미안할 필요는 없어.

왜냐하면 아주 정말로 조금 먼저니까.

오히려 다행이다.

바르바토스보다 한 발자국 지각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제법이지 않는가.

약골인 주제에 제대로 버텨주었다, 내 몸.

다행이다.

……정말로.

다행이야.

“……바르바토스.”

“또 꽃놀이를 가자…….”

“이번에는, 다른 애들도 다 불러서…….”

“라우라도, 라피스도, 시트리도…….”

“너한테는 조금 미안하지만 이바르랑 데이지랑, 파이몬도.”

“아하하…….”

“……다 불러서.”

“다음 봄에는…….”

“……분명히…….”

“…….”

…….

그래.

아마도, 분명히.

그렇게 영원히.

……….

……………….

……………………………….

다음에도 찾아올 봄에는.

Dungeon Defense.

― END.

========== 작품 후기 ==========

〈던전 디펜스〉는 이것으로 완결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곧 〈후기〉로 써서 올리겠습니다.

여기까지 어울려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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