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505화 (504/510)

<-- Acta est Fabula --> 『505』

무척 오래된 꿈을 꾸었다.

어떤 꿈인지 뚜렷하게 기억할 수 없었다. 잠을 자는 것이 너무도 오랜만이었기에. 잠이 들었는데 악몽이 찾아오지 않은 것은 더욱 더 오랜만이었기에. 나는 꿈이라는 것 자체를 처음 겪어보는 것 같았다.

유일하게 떠오른 풍경은 새하얀 백색.

끝없이 백색으로 펼쳐진 한복판에 내가 앉아 있었다. 나는 무언가를 기다렸다.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백색의 공간에는 바람이 없었다. 어쩌면 공기도. 빛은 있었을지 몰라도 결코 햇빛은 아니었으며, 차라리 수은등의 창백한 빛깔에 가까웠다.

알고 있다.

이것이 죽음에 대한 나의 이미지다.

무언가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없는 것 또한 아니었다. 그저 기다림이라는 행위만이 덩그러니 주어져 있었다. 이것이 대답. 나만의 대답이었다.

―――.

―――――?

――, ―――――.

내가 입을 열어서 무언가를 말했다.

꿈속의 내가 무엇을 얘기했는지, 나는 알아듣지 못했다. 사실 알아들을 필요가 없었는지도 몰랐다. 이곳에 아무런 소리가 발성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였으니까.

이대로 사라지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은 채.

나는 단지 백색에 파묻혀서 앉아만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깊이 안심하면서.

안심하면서?

무엇에 안심하는 것일까.

아니, 그보다.

……무엇이 안심하고 있는 것일까.

“슬슬 일어나시지 그래.”

눈이 뜨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눈을 뜨고 있었는데 또 눈을 뜨다니. 눈 앞이 하얬다. 가장자리가 몹시 뿌옇게 물들었다. 겨울철 창문에 입김이 서린 것처럼 내 두개골에도 차가운 수증기가 묻어 있었다.

눈꺼풀을 몇번 깜빡였다. 좀처럼 희뿌연 서리가 사라지지 않았다. 청각마저 다소 멍했다. 둔해진 감각 너머로 한줄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목소리라기보다는 한숨이었다.

“으휴. 병신.”

병신이라니.

말이 조금 심했다.

개인적으로는 병신(病身)보다 병신(病神)을 선호했다. 악질적인 전염병의 신. 얼마나 멋진가. 뜻을 하나 바꾸었을 뿐인데도 뉘앙스가 완전히 달라졌다. 질병의 악령. 혹은 질병이라는 이름의 유령. 내 취향이었다.

그때.

촤악!

“……!?”

내가 기겁해서 상반신을 일으켰다. 겁나게 차가운 물이 안면을 정면으로 덮쳤다. 냉수가 내 콧구멍과 입구멍을 강간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었다. 두 번. 연속으로 두 번 찬물이 기습을 걸어왔다.

“차거어어어!?”

난데없이 얼음물 세례를 받은 나는 얼굴을 문지르면서 절규. 갑작스러운 온도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눈물과 콧물이 흘렀다. 온몸이 고통으로 비틀리는 와중에, 웃겨 죽겠다는 웃음소리가 옆에서 튀어나왔다.

바르바토스였다.

그녀는 배꼽을 부여잡고 나한테 삿대질을 했다. 어찌나 웃어대는지 손이 덜덜거리고 있었다. 내가 이불로 콧물을 닦아내고 소리를 질렀다.

“뭐하는 짓거리야, 만년 빈유 자식아!”

“등신이 꼴깝 떠는 거 보고 웃고 있는 중이시다. 왜. 꼽냐.”

“너와는 육체적으로 결판을 내야 할 필요가 있겠다!”

“마왕 중에서 제일 허약한 초파리 꼽추 새끼가 뭐래. 깔깔깔.”

내가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지독하게 년이 아니고 뭔가. 수백 년 만에 재회했는데 벌써 1분도 안 되어서 병신, 등신, 꼽추 새끼까지, 연달아서 욕설을 세 개나 내뱉었다. 이렇게 악랄한 여자를 나는 달리 본 적이 없었다.

어제는 부드러웠지만.

“…….”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어제 일이 떠오르자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질 것 같았다.

이유는 모르겠어도 나는 바르바토스한테 매달려서 어린애마냥 울었다. 그야말로 지쳐 쓰러질 때까지 울부짖었다. 바르바토스는 다만 미소를 지어주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만치 엉망진창으로 울어본 것은 평생 처음이었거니와, 하물며 바르바토스에게 어리광을 부린 것은 일생의 오점이었다.

“어라아?”

내가 침묵하는 걸 보고 바르바토스가 히죽거렸다.

“단탈리안? 언제 어디서건 냉철하신 단탈리안 님? 왜 갑자기 입을 다무셨어요? 어라라. 얼굴이 새색시처럼 붉어진 게 귀엽지 않은 것도 아니네요. 그런데 왜 갑자기 당황하고 계실까?”

“시끄러.”

“우쭈주, 우쮸쮸. 우리 단탈리안 어린이 화났쪄요? 막막 화가 나고 그래요? 바르바토스 누나가 찌찌 줄까, 찌찌? 우리 아가 제일 좋아하는 우유가 너무너무 고파?”

내가 홧김에 베개를 집어던졌다. 면베개가 푹신하게 바르바토스의 복부에 명중했다. 피해가 전무했다. 도리어 웃음만 키워주어서 바르바토스는 한참이나 깔깔거리며 얼레리 꼴레리니 뭐니 유치찬란한 도발을 시전했다.

문제는 이런 도발이 정말로 효과가 있다는 것이었다. 가슴이 부글부글 끓었다. 저 년은 전생에 나와 원수를 져도 단단히 진 것이 틀림없었다. 우라질 것. 되바라질 것. 궁뎅이를 8비트로 후려갈겨도 모자랄 것.

웃음에도 그러나 한도가 있었다.

과열된 공기가 서서히 식어버리자, 우리 사이에는 대화가 없어졌다. 불온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 불온함은 전적으로 나한테서 흘러나왔다.

“…….”

바르바토스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내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바르바토스는 분명히 처형당했다고 들었다. 도대체 어떤 경로를 통해서 그녀가 이곳까지 도착했는지.

왜 도착하는 데 200년 가까운 세월이 걸려야만 했는지.

상세한 내막이야 알 수 없었으나 대체로 흐릿한 윤곽을 잡아볼 수 있었다. 볼품없이 잘려나간 마왕의 뿔이 추측을 뒷받침했다. 그런 추측. 그와 같은 가설을 받아들인 상태에서……나는 그녀한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내가 입을 열었다.

“여기 왜 왔어.”

질문이 아니었다. 하나의 공격이었다.

어떻게 왔느냐도 아니라 왜 왔느냐. 이 질문에는 오지 말라는 뉘앙스, 오지 않았으면 한다는 뉘앙스가 강하게 배어 있었다. 바르바토스도 분명히 그걸 알아들었을 텐데, 전혀 타격을 받지 않은 얼굴로 씨익 웃었다.

“내가 어디로 가든 내 마음이지.”

“……이바르가 실수를 저질렀군. 잘하고 있다고 여겨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터무니없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어. 하필이면 너한테 비밀을 폭로하다니. 게다가 너를 자유로운 몸으로 풀어주기까지 하다니.”

나는 이바르를 비난하는 동시에 간접적으로 바르바토스를 공격하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여기서 떠나줘. 웬만하면 멀리 도망치는 편이 좋을 거다. 네가 나가자마자 연락수단을 동원해서 이바르에게 통보할 테니까. 당장…….”

“나 곧 있으면 죽어.”

내가 입을 다물었다.

바르바토스가 평안한 어조로 말했다.

“이바르인지 뭔지 네 부하 진짜로 지독하더라. 이제 마법도 못 부려. 아니, 마법은커녕 몸 안에 마력이 얼마 안 남아서 말이지. 거의 찌꺼기에 가깝다고 표현할까. 자연적으로 마나가 돌면 좋은데 그것도 각인으로 새겨버려서.”

“…….”

“길어봤자 십 년?”

바르바토스가 웃었다.

“단탈리안. 어차피 네가 아무 지랄을 안 떨어도 곧 자빠질 여자가 한 명 있는데……여기서 조금만 더 머물다 가면, 안 될까?”

대답할 수 없었다.

단 몇 마디의 암시로 사태가 파악되었다. 이바르는 바르바토스를 질식사 시키려고 했겠지. 마법과 마력을 앗아가버리고, 부하를 통솔하는 능력조차 봉인해버려서, 단지 비천한 몸뚱어리 하나만을 남겨두었다. 당연하게도 내가 살아 있다는 정보만 주었을 뿐이지, 어디에 있으리라는 조언 따위는 일절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몸뚱어리 하나. 바르바토스는 거기에 의지해서 걸어왔다. 이백 년 동안 어떠한 정보도 없이 이 대륙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이곳에 머무르는 걸 허락해서는 안 되었다.

단탈리안은 죽었다. 이곳에 남은 사람은 비유하건대 한낱 망령에 불과했다. 이제 와서 바르바토스와 여분의 시간을 보낸다니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더군다나 나에게는 큰 문제가 있었다.

“너도 곧 죽을 거 같아서 걱정되는 거지, 단탈리안?”

“…….”

그렇다.

결코 인정하기 싫었지만 나는 정신적인 한계에 직면했다.

만약 바르바토스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그대로 벽면에 기댄 채 영원히 잠들었을지 모른다. 바르바토스가 방문을 똑똑 두드리기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정말로 죽음이 가까이 다가왔음을 느꼈다. 그 감각은 약간 멀어졌으나 지금도 등 저편에서 이쪽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바르바토스는 길어봤자 10년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아무리 길어본들 수년을 버티지 못하겠지.

정신을 잃었을 때, 잠이 들었을 때, 언젠가 무의식적으로 목을 찌르고 말 것이었다. 혹은 의식이 더 이상 가동하는 것을 거부하고 무작정 수면에 돌입할지도 몰랐다. 나는 이미 빠듯하게 한계선에 몰려 있었다…….

죽을 때는 혼자 죽는다.

다른 사람에게 최후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건 어떤 의미로 상대방한테 책임을 떠넘기는 짓이었다. 누군가의 죽음을 본 사람은 그 죽음을 기억하고 받아들여야만 했다. 나는 그런 무게를 타인에게 강요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앞으로 딱 일 년만 있을게.”

바르바토스가 이쪽의 속내를 다 짐작한다는 어투로 제안했다.

“일 년?”

“그래. 솔직히 겁나게 지쳤거든. 네가 어디 한번 이백 년 내내 대륙을 싸돌아다녀 보세요. 몸이 축나나 축나지 않나. 제발 조금만 쉬었다가 가자. 응?”

“…….”

일 년이라면 버틸 수 있을까.

바르바토스는 오로지 나를 만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이백 년을 고통받았다. 거기에 일 년의 유예를 내려주는 것. 잠시 내 곁에 머무르다가 떠나가도록 용인해주는 것. 그것은 납득할 만한 허락이지 않을까.

내가 대답을 결정하지 못해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러자 바르바토스가 어디론가 가볍게 발걸음을 돌렸다. 그녀가 향한 곳을 보고 내가 아차, 하고 깨달았다.

“저기, 단탈리안. 이거 뭐야?”

“어. 어어. 그건 그러니까…….”

“흐응? 내가 착각하는 게 아니라면 꼭 나처럼 생겼는데.”

바르바토스가 가리킨 곳에는 한 사람의 초상화와 인물화가 무수히 걸려 있었다. 웃는 얼굴, 슬퍼하는 얼굴, 무표정한 얼굴. 수천의 군대를 이끄는 모습과 홀로 평원에 서 있는 모습.

무엇을 숨기겠는가. 전부 바르바토스를 그려낸 그림이었다.

그녀 이외에도 수많은 인물화가 저택에 널려 있었지만 바르바토스의 초상화는 유독 많았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바르바토스가 제일 표정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정말이다! 다른 이유는 결단코 존재하지 않았다.

“흐응. 호오오. 흐으으음?”

그런데 저 여편네는 뭘 착각하는 것인지 우쭐거리는 표정으로 인물화를 살펴보았다. 뭐라 변명하고 싶었지만 포기했다. 무슨 소리를 해도 꼴사납게 들릴 것이 분명했다. 바르바토스가 음흉하게 웃었다.

“와아. 정말 나를 쏘옥 빼닮았다. 그림에서 다 애정이 느껴지는걸. 응, 응. 이걸 그린 화가는 어지간히도 초상화의 주인공이 많이 보고 싶었나봐?”

“……착각은 자유라지.”

“그래? 나는 너 많이 보고 싶었는데.”

허를 찔렸다.

바르바토스는 졸렬한 주제에 가끔 낯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던졌다. 나는 이번에도 말문이 막혔다. 그런 나를 향해서 바르바토스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싱글벙글거리는 면상이 심상치 않았기에 나는 무심코 뒷발을 내디뎠다.

쿵, 하고 내 등짝이 벽면에 부닥쳤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바르바토스가 바짝 다가와서 내 가슴팍을 쥐었다. 싱그러운 향기가 코에 감돌았다. 바르바토스의 향기였다. 그녀는 내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면서 히죽 미소를 지었다. 사냥감을 호시탐탐 노리는 황금색 눈동자가 그곳에 있었다.

그야말로 맹수.

“내숭도 적당히 떨어, 멍청아.”

“나, 나는 내숭을 떠는 게 아니라―――.”

바르바토스가 옷가슴을 잡아당겼다. 거부할 틈도 없이 내 얼굴이 아래로 내려갔다. 살짝, 부드러운 감촉이 입술에 닿았다. 그러더니 곧바로 그녀의 혓바닥이 과격하게 이쪽을 침범했다.

“읍……으읍, 으으으!”

용서가 없었다.

머리가 어지러워질 정도의 농락이 이어졌다. 나는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천천히 방바닥에 무너졌다. 바르바토스가 내 몸에 올라탔다. 눈동자가 짐승의 욕망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프하아.”

그제야 바르바토스가 입술을 뗐다. 잘 먹었다. 그런 기운이 얼굴에 넘실거렸다.

내가 바르바토스한테 엉덩이가 깔린 채 바둥거렸다.

“자, 잠깐만. 잠깐만, 바르바토스. 나 벌써 이백 년째 그 짓을 안 했거든? 아마도 안 설 거야. 절대로 안 서. 괜히 나 민망하게 만들지 말고 우리 오손도손하게 홍차나 마시면서 여태 풀지 못한 과거의 이야기를……!”

“닥쳐, 돼지 새끼야. 홍차는 쥐뿔.”

바르바토스가 흐흐 웃었다.

“이야기고 뭐고 일단 먹고 보자.”

“강간이다! 이건 강간이야!”

“억울하면 잘난 근위대를 불러보시든가. 크으, 이백 년만의 몸보신인가. 참느라 뒈지는 줄 알았지.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잡아 먹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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