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504화 (503/510)
  • <-- 지키는 자 --> 『504』

    바르바토스가 몸을 일으켰다.

    몸이 무거웠다. 물에 젖은 옷을 수십 겹이나 두른 것 같았다.

    그래도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바르바토스는 발을 움직였다. 이미 밤이 지나버리고 새벽이 왔지만, 울음을 터트리느라 시간이 지나가는 것을 그대로 놓쳐버리고 말았지만, 바르바토스는 걸어갔다.

    “읏.”

    수풀에서 빠져나오면서 바르바토스가 눈밭에 뒹굴었다. 경사진 면을 따라서 그녀가 미끄러졌다. 바르바토스는 눈밭에 내팽개치자마자 1초의 머뭇거림도 없이 일어났다.

    “단탈리안…….”

    발이 절뚝거렸다. 눈더미에 발이 빠지면서 몸의 균형이 깨졌다. 바르바토스가 균형을 되찾을 생각도 노력도 전혀 기울이지 않았기에 세 발자국을 내딛을 때마다 넘어졌다. 그러나 바르바토스는 곧바로 일어서서 발걸음을 이어나갔다.

    조금만 더.

    이제까지 수억수만 번의 '조금만 더'가 있어왔다. 하지만 지금의 '조금만 더'는 달랐다. 이제는 정말로 조금만 더 걸어가면 단탈리안이 있었다. 저택이 보였다. 저택의 안쪽으로 통하는 문이 보였다. 심지어 그것들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가까워질 수 있었다.

    손가락을 뻗으면 닿았다.

    바로, 지금 이렇게―――.

    “…….”

    저택의 현관문을 두들기기 직전이었다.

    바르바토스가 우뚝 멈추어 섰다. 오른손이 문의 표면을 스칠 듯한 지점에서 멈췄다. 바르바토스는 한참을 우두커니 문앞에 서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초점이 시리게 가라앉았다.

    ‘……안 돼.’

    아직 만날 수 없었다.

    바르바토스는 자기가 어떤 몰골을 하고 있는지 뒤늦게 떠올렸다. 웃으면서 단탈리안을 맞이할까, 울면서 단탈리안을 껴안을까 고민하다가 깨달은 것이었다. 현재 자신은 문둥병처럼 추악한 화상 자국을 품었노라고.

    ‘이런 모습으로 단탈리안이랑 만나기는 진짜 싫은데.’

    바르바토스가 손바닥으로 이마를 감쌌다.

    ‘그래도 만나고 싶고. 당장 만나고 싶고……으으. 이건 싫지만.’

    한숨이 나왔다.

    아까 전까지 마음이 요동쳤는데 지금은 왠지 모르게 편안해졌다. 약간 우스웠다. 단탈리안에게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적어도 화상으로 일그러진 모습은 보여주기 싫다. 자신한테 이렇게 평범한 감정이 숨어 있다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화상이 회복될 때까지 잠깐만 기다렸다가. 아니, 그 사이에 저 멍청한 새끼가 무너지면 어쩌려고.’

    고민이 깊어졌다.

    만나고 싶다. 하지만 당장 만나기는 싫다. 두 개의 상반되는 욕망이 피 터지게 다투었다. 바르바토스는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잡고 으으, 으으으, 하고 고민하기에 이르렀다.

    문득 꽃송이 여러 개가 바르바토스의 눈에 띄었다. 겨울에 피어나는 노란색의 꽃, 설연화(雪蓮花)였다. 얼음새꽃이나 빙리화라고도 불렸다. 아직 만개하지 않아 봉오리가 슬쩍 벌어진 꽃무리를, 바르바토스가 쾡한 눈초리로 내려다보았다.

    “……운에 맡기자.”

    결정적인 순간에 직감을 따르는 그녀다웠다.

    바르바토스는 무릎을 굽혀서 자그맣게 쪼그려 앉았다. 얼음새꽃 한 송이를 뚝, 하고 꺾었다. 그리고 노란 꽃잎을 하나하나씩 뜯으면서 멍하게 중얼거렸다.

    “만난다. 만나지 않는다. 만난다. 만나지 않는다……만난다, 만나지 않는다, 만난다…….”

    바르바토스의 하얀 손가락이 꽃잎을 가볍게 찢었다. 설연화는 꽃잎이 스무 장이 넘었으므로 꽃점을 치는 데 아주 제격이었다. 꽃잎이 줄어들수록 바르바토스는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마지막 한 잎.

    바르바토스가 조심스럽게 꽃잎을 뜯었다.

    “……만나지 않는다…….”

    운명의 여신은 아직 만나지 않는다는 것에 한 표를 행사했다. 바르바토스가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시발.”

    그녀는 한동안 꽃잎이 다 떨어진 설연화 줄기를 노려보았다. 계속 노려보면 줄기가 공포에 벌벌 떨어서 꽃잎을 새로 하나 더 피우기라도 할 것처럼. 그러나 바르바토스는 현명했으며, 언어가 통하지 않는 얼음새꽃을 협박하는 것 따위보다 훨씬 더 효율적인 방법을 곧바로 찾아냈다.

    “자고로 승부는 삼세판이지.”

    정말로 간단한 정당화였다.

    음음, 하고 바르바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여 설연화를 한 송이 더 꺾었다. 2분에 걸쳐서 바르바토스는 염원과 소원을 담아내서 정성스레 꽃잎을 뜯었다.

    “……아아앙?”

    만나지 않는다.

    두 번째 꽃점에서도 실패했다.

    바르바토스가 얼굴을 꽃줄기 바로 코앞까지 들이밀며 눈알을 부라렸다. 살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만일 꽃잎에 사람과 같은 감각기관이 달렸다면 틀림없이 땀을 뻘뻘 흘렸으리라.

    “나한테 뒈지고 싶냐?”

    안타깝게도 설연화에는 입이 없었다.

    아니, 애당초 꽃에는 입이 달리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바르바토스는 이미 꽃을 꺾어서 죽여버렸다. 여기서 죽어본들 어떻게 또 죽는다는 말인가. 설연화 입장에서 억울하기 그지없는 협박이었다. 바르바토스는 미물과 눈싸움을 벌이다가 또다시 명안을 고안해냈다.

    ‘아니지. 삼세판은 세 번을 먼저 이기는 사람이 승리하는 거니까.’

    바르바토스가 자신의 천재성에 감탄하며 세 번째 꽃송이를 꺾었다. 설마 세 번이나 연속으로 꽝이 당첨되지는 않겠지. 이래 봬도 바르바토스는 자기가 제법 운이 좋은 축에 속한다고 자신했다.

    “만난다, 만나지 않는다, 만난다…….”

    꽝이었다.

    “…….”

    설마 하던 삼연속 실패.

    세상은 그녀를 버렸다. 바르바토스가 저주의 욕설을 작게 내뱉었다. 언제부터 삶이 꼬이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하다못해 꽃들까지 운명에 딴죽을 걸었다.

    “오냐, 염병에 전을 부쳐 지져먹을 것들아. 조금 있다가 만나주마. 젠장할.”

    바르바토스가 툴툴거리며 도시로 돌아가 여관을 잡았다. 막상 발걸음을 움직이고 나니까 또 가슴속이 시원해졌다. 당장 단탈리안이 다른 곳으로 실종될 위험이 없는 이상, 아주 약간의 연기는 괜찮을 듯싶었다.

    그날부터 바르바토스는 회복에 전념했다.

    예전처럼 단박에 신체를 회복할 수는 없었다. 천천히. 조금씩. 얼마 남지 않은 마력을 최대한 정교하게 움직이면서 새로운 살갗을 복원했다. 그만큼 수명이 짧아졌으나 바르바토스는 일말의 망설임이 없었다.

    설령 하루를 살더라도 단탈리안의 기억에 있는 그대로 아름다운 채 살고 싶었다.

    회복하는 틈틈이 바르바토스는 남몰래 저택 가까이에 걸어갔다. 멀리 숨어서 저택을 바라보기만 해도 어쩐지 가슴이 따뜻해졌다. 저기에 단탈리안이 있었다. 그같이 단순한 사실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바르바토스는 약간 분했다.

    “아.”

    방금 단탈리안의 모습이 창가에 비추었다. 바르바토스는 저도 모르게 목을 길게 뺐다. 아쉽게도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얆은 커튼에 단탈리안의 그림자만 언뜻거렸다. 그래도 아쉬움은 잠시 뿐이었다.

    ‘이런 식으로 얼굴을 보면 더 아까우니까.’

    바르바토스가 실실 웃으면서 그림자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자기가 너무 대책 없이 좋아한다는 생각이 들어, 일부러 인상을 팍 찡그렸다. 매우 기괴하고 오묘한 표정이 완성되었다. 눈썹은 찡그리고 눈동자도 심각했거늘 오직 입가만 헤벌레 늘어졌다.

    시간이 온화하게 흐르고 있었다.

    일주일 뒤.

    “…….”

    바르바토스가 손거울로 자기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무심코 속삭였다.

    “나, 이런 얼굴을 갖고 있었구나.”

    이백 년 가까이 흉측한 몰골로 살았더니 그만 자신의 외모조차 까먹었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눈동자. 깔끔하게 다듬어진, 새하얀 머릿결. 살결은 막 내려앉은 눈처럼 부드러웠다. 오똑하게 돋아난 콧등에는 바르바토스의 자존심이 감도는 것 같았다.

    “……이히.”

    바르바토스가 활짝 웃어보았다.

    이빨이 드러나며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그녀는 이후로도 이런저런 표정을 시험했다. 단탈리안과 만났을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가장 좋을지 고민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바르바토스는 가장 자신답게. 단탈리안이 가장 좋아하는 바르바토스답게 웃기로 결심했다.

    바르바토스가 여관방에서 내려왔다.

    “잘 지내셨수, 손……님?”

    여관 주인이 계단에서 내려오는 바르바토스를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우울하게 로브를 뒤집어쓰고 다니는 그 손님이 아니었다. 맹세하건대 여관 주인은 한 명의 요정이 내려오는 줄 알았다. 황금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자 여관 주인은 심장이 벅차게 뛰었다.

    바르바토스가 돈주머니를 탁상에 던졌다.

    “편하게 잘 머물렀어. 장사 잘해.”

    게다가 목소리.

    사람의 신경을 의도적으로 긁는 탁음이 어디론가 증발해버렸다. 대신에 장난스러운 듯하면서도 위엄과 자신감이 들이찬 목소리가.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뼈대가 흐르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관 주인이 돈주머니를 헤아려볼 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바르바토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런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바르바토스가 도시를 빠져나갔다.

    ─ 뽀드득.

    신발이 눈을 가볍게 눌렀다. 바르바토스는 몸이 한없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천천히 걸어가던 발걸음은 어느새 속도가 붙어, 거의 반쯤 뛰어가다시피 되었다.

    ‘단탈리안.’

    바르바토스는 미소를 주체할 수 없었다.

    ‘나 정말로 많이 힘들었어.’

    발바닥이 닳아 없어질 만큼.

    닳아도 다시 새살이 돋고 수천 번 돋을 만큼 헤맸다.

    오로지 당신을 한 번만 더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세상을 떠돌았다.

    ‘단탈리안.’

    너무 서두른 탓에 바르바토스는 발이 꼬여서 넘어질 뻔했다. 하지만 가뿐하게 다리를 비틀어서 땅바닥을 되쳤다. 그녀는 속도를 줄이기는커녕 더욱 더 빠르게 달렸다. 더운 숨결이 바르바토스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단탈리안!’

    어떻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그 남자를 위로해줄 수 있을까.

    그녀는 단숨에 저택까지 뛰어왔다. 숨이 가빴다. 무릎에 손바닥을 대고 잠시간 호흡을 가다듬었다. 여관방에서 나와 여기까지 올 때까지 바르바토스는 한 순간이라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바르바토스가 오른손을 뻗었고.

    ―――조금 주저했으며.

    다시 움직여서, 똑똑, 하고 문을 두들겼다.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하지만 바르바토스는 그저 조용히 문을 한 번 더 두드렸다.

    저 너머에서 뒤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르바토스는 어쩐지 참을 수가 없어서, 마지막으로 한 번, 문을 두들겼다.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아.

    그 남자의 발소리였다.

    바르바토스는 눈물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여기서 울어서야 생때를 부리는 것밖에 되지 않으니까. 나는 당신을 위로해주기 위해 179년의 시간을 건너 이곳에 왔다. 그러니까, 위로받는 것은 내가 아니어도 괜찮았다.

    바르바토스의 가슴속에 무수한 말과 문장이 교차했다.

    이윽고 경첩이 삐걱거리며―――비록 삐걱거렸다고 한들, 문이 열렸다.

    문의 틈새로 단탈리안이 보였다.

    그러자 여태까지 바르바토스가 생각해오고 고민해온 모든 인삿말이, 깔끔하게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안녕.”

    사라지고 남은 곳에 서 있는 것 역시 바르바토스였으므로.

    이 남자 앞에서 그녀는 언제나 자기 자신으로서 웃을 수 있었으니까.

    “뭐라고 인사를 건넬까 나 나름대로 고민했는데 말이지. 이게 생각보다 난이도가 높더라고. 음. 가장 간단한 게 가장 어렵다는 진리를 뼈저리게 체감하는 중이야. 그러니까 이럴 때일수록 간단하게 가는 수밖에 없겠구나 싶더라.”

    “아, 아아…….”

    상대방이 눈물을 흘렸다.

    벌써부터 울어버리면 어떡하냐고, 바르바토스는 핀잔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바르바토스는 그를 질책하는 대신에 활짝 웃어주었다.

    “여전히 빌어처먹을 정도로 재수 없는 낯짝이구나.”

    그녀가 생각했다.

    마왕으로 태어나서.

    전사로 살고자 했고.

    누구보다 앞서서 걸어가려고 했던.

    “단탈리안.”

    나는.

    역시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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