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503화 (502/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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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이 흘렀다.

    75년째.

    바르바토스의 여행은 바뀌지 않았다.

    다만 도시에 들릴 때 그녀는 반드시 갖가지 공방에 들렸다. 화방. 조각실. 악기 제작소. 예술가들과 작업가들이 일하는 아틀리에에 들려서 이렇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혹시 말수가 적고…….”

    “음침하고.”

    “재수없는데다, 눈빛이 쓸데없이 어두운데.”

    그런 남자가 있었다.

    “자기가 세상에서 모든 불행이랑 고뇌를 짊어진 것처럼 보이는…….”

    “아니, 그렇다고 아예 우중충하기만 한 건 전혀 아니라서.”

    “그 녀석 나름대로 잘 웃기도 하고.”

    분명히 있었다.

    “시답잖은 농담도 자주 던지고.”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게 취미인, 그야말로 못된 자식인데.”

    “……그게. 녀석만의 의사소통 방식입니다.”

    조금, 표현하기 어려웠다.

    바르바토스는 공방 주인들에게 단탈리안에 대해 묘사하면 묘사할수록, 설명하려면 설명할수록, 자주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단탈리안을 지나치게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지나친 이해가 설명을 방해했다. 예컨대 한 명의 인간이 방문을 열고 단순히 지나치는 데에도 얼마나 많은 물리적인 조건과 해설이 필요한가.

    그는 공기의 저항을 뚫고 나아가야 했다. 1초에 30킬로미터의 속도로 태양 둘레를 도는 방바닥 위에 안전하게 착륙해야 했다. 일초의 단 몇분의 일이라도 일찍 혹은 늦게 내려섰다면, 방바닥은 순식간에 몇 킬로미터나 멀어져 버리게 될 것이었다.

    심지어 방바닥은 단단하지조차 못했다. 그곳을 밟고 지나친다는 것은 차라리 파리떼 속에 발을 내디디는 것과 똑같았다.

    그는 모험을 감행하여 발자국을 내딛었다. 그러자 파리떼 가운데 한 마리가 그에게 부딪쳐 왔다. 다음 발자국에서는 또 다른 파리 한 마리가 그를 위로 올려쳤다. 그는 무수하게 넘어졌으며 그때마다 파리가 그를 되밀었다.

    우연과 우연이 합쳐져 이루어진, 단지 이상한 조건들의 연속선상에서―――한 남자가 방문을 열고 걸어갔다.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좋은가. 어떻게 말해야 '단탈리안'이라는 남자를. 하나의 제스처를 설명할 수 있을까.

    “어떤 남자요?”

    공방 주인들은 대체로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항상 그들은 어떤 남자를 찾는 거냐고 재차 물었다. 바르바토스는 멋쩍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우울해도 웃어주는 남자요.”

    더 이상 설명할 수 없었다.

    “검은색이 어울리는 남자예요.”

    이상한 남자가 있었다.

    바르바토스는 그 남자를 좋아했다.

    이상한 남자를 좋아하게 되어버렸다.

    “모르겠군.”

    바르바토스의 설명을 다 듣고 난 뒤에 공방 주인들은 한결같이 고개를 저었다. 본 적이 없다가 아니라 모르겠다. 이 대답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런 남자에 대해 모르겠다는 의미. 그리고 당신의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의미.

    “알겠습니다. 얘기를 들어줘서 고마워요.”

    바르바토스는 고개를 숙였다.

    한 마디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천 마디를 쏟아내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바르바토스는 그걸 잘 알았다. 어차피 그런 것이었으므로, 바르바토스는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다음 도시로 향했다.

    시간이 흘렀다.

    89년째.

    ‘단탈리안은 음악에 전혀 재능이 없으니까.’

    이제 너덜너덜해진 양피지 지도를 바라보며 바르바토스가 생각했다.

    아나톨리아 제국은 이제 다 돌았다. 혹시나 몰라서 섬마을까지 일일이 확인했다. 하지만 너무 동떨어진 벽지에서 취미 생활을 이어나가기란 어려웠다. 외딴 섬마을에 머무를 확률은 높지 않았다.

    혹시 몰라서.

    오직 이런 이유 하나만으로 바르바토스는 수백 개의 섬을 돌아다녔다.

    ‘음악에 몰두할 가능성은 적지. 노래도 마찬가지야. 그림이나 조각일 것 같은데……으응. 양쪽 전부에 심취했을 수도 있고.’

    바르바토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89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그녀의 의지에는 변함이 없었다. 도리어 날카롭게 벼려졌다. 바르바토스는 어느 때보다 단탈리안을 잘 이해하게 되었다.

    그를 조금씩 이해할수록 바르바토스는 자신도 알아갔다.

    깊은 바다에 들어가는 잠수부가 심해를 바라보는 동시에 자신의 한계를 보았다. 꼭 그처럼 바르바토스는 단탈리안을 바라보았고 또 거기에 그녀가 비추어져 있음을 알았다. 바르바토스는 그에 대해 생각하면 차가운 바닷물에 잠기는 기분이 들었다.

    “…….”

    여기는 숨을 놓는 곳.

    천천히 떨어지는 꽃잎에는 방향이 없었다.

    떠밀려 오는 시간도, 떠밀려 가는 시간도 아니었지만, 지금 막 멈춘 첼로의 선율이 아무것도 연주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여분의 시간을 길게 연장하듯이. 바르바토스는 시간이 자신의 몸을 관통하여 잦아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응. 괜찮아.”

    바르바토스가 눈을 떴다.

    손바닥에 떨어져 있는 벚꽃 한 잎을 내려다보며 그녀가 옅게 미소를 지었다.

    “이제 겨우 반밖에 안 왔는걸.”

    시간이 흘렀다.

    120년째.

    바르바토스는 아나톨리아 제국에서 모스크바 왕국으로 건너왔다. 남방에 사막이 펼쳐진 아나톨리아와 정반대로, 모스크바는 북방으로 올라갈수록 한없이 넓게 설원이 이어졌다.

    어느 겨울날. 바르바토스는 지평선까지 새하얗게 뒤덮인 풍경을 바라보며 자기가 헛되이 여정을 소비했다는 걸 깨달았다. 사막이나 설원. 단탈리안은 분명히 두 장소 중 하나를 애호할 거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잘못된 판단이었는가.

    “……바보 같았어.”

    단탈리안은 틀림없이 설원에 기거한다.

    사막은 그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곳엔 오아시스가 있었다. 경쾌한 태양의 유목민들이 있었다. 단탈리안은 뜨겁게 작렬하는 햇볕과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으며, 오아시스 옆에서 춤추는 소녀들과는 더더욱 어울리지 않았다.

    이곳이다.

    바르바토스는 느낄 수 있었다. 여기에 단탈리안이 있다. 다른 어디도 아니라 바로 이곳에.

    바르바토스는 때때로 설원의 늑대떼에 습격당하여 온몸이 갈가리 찢겼다. 호신용 장검을 휘둘렀지만 들짐승 무리를 한꺼번에 감당하기란 어려웠다. 바르바토스의 샛붉은 피가 하얀 눈밭에 떨어졌다.

    도적들에게 습격받는 날도 제법 많았다. 바르바토스가 어린 소녀인 걸 알아보고 도적들은 음침한 미소를 흘렸다. 하지만 바르바토스는 웃음에 웃음으로 맞이하면서, 두꺼운 털옷을 벗어서 자신의 맨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자.”

    도적들은 얼굴이 구겨졌다.

    “범하려면 어디 범해보시던가.”

    핏빛과 보랏빛의 화상으로 흉측하게 일그러진 신체.

    살덩이가 뭉개져서 보기만 해도 혐오감이 치솟았다. 문둥병 환자도 이보다는 덜 기괴한 살결을 가지고 있으리라. 여자를 보지 못한 지 수개월이 지난 산적들조차 바르바토스의 몸을 보고는 침을 뱉었다.

    도적들은 재수가 없다며 소지금마저 빼앗지 않았다. 전염병이나 저주가 걸려 있을까봐 꺼리는 것이었다. 바르바토스는 도적들이 뒤꽁무니를 빼는 걸 보며 크게 웃었다. 겨울의 차가운 바람이 전신을 씻었다.

    “단탈리안, 이 병신아!”

    설원 한가운데.

    바르바토스는 나신으로 양팔을 벌렸다.

    “조금만 더 기다려―――내가 면상에 주먹을 후려갈겨 줄 테니까!”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광활한 눈밭에 울렸다. 그러고도 바르바토스는 분이 풀리지 않아서 괴성을 토해냈다. 아아아, 아아아아, 의미가 없고 형태가 없는 외침이 끝없이 터져나왔다. 그것은 웃음소리였다.

    “…….”

    바르바토스가 고개를 떨어트렸다.

    한창 이어지던 메아리가 서서히 끊겼다. 설원에는 이제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설원이 받아들여야 할 만큼 요란스러운 소리가 전무했다.

    “……윽…….”

    단지 미처 눈에 가닿지도 못할 정도로 나약한 소리가 있었다.

    소리를 대신하여, 뜨거운 물이 눈바닥에 한 방울씩 떨어졌다. 바르바토스는 팔이 떨렸다. 어깨가 떨렸다. 이빨을 꾹 물었는데도 입술이 떨리는 것이 멈추지 않았다. 백 년이 넘도록 억눌러온 둑이 무너져 내렸다.

    “으……으윽, 아으으…….”

    단탈리안.

    “진짜. 뭐야, 싫게……으읏…….”

    단탈리안.

    “……아, 으윽……나쁜 새끼…….”

    눈물이 흘렀다.

    바르바토스가 자신의 양팔을 끌어안았다. 입술에서 새하얀 숨결이 불안정한 리듬으로 새어나갔다. 이곳은 너무 추웠다. 일년일년이 흘러갈수록, 이 형편없는 몸뚱어리가 망가져 갔다.

    이백 년은 단탈리안에게 허락된 유예뿐만이 아니었다.

    바르바토스, 그녀에게도 기껏해야 이백 년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체내에 남은 마력이 점점 더 고갈되는 것이 느껴졌다. 존재가 덧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이 바닥에 고인 물마저 떨어지기 전까지 바르바토스는 그와 만나고 싶었다. 단탈리안에게 자신을 보여주고 싶었다.

    “단탈리안…….”

    내 눈앞에 나타나줘.

    나한테 목소리를 들려줘.

    네가 벌써 죽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내 머릿속에 더 이상 울리지 않도록.

    그런 생각에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도록.

    바르바토스는 당장이라도 흘러나올 것 같은 애원을 참아내며, 단탈리안의 이름을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단탈리안은 이미 죽었을 수도 있다. 그걸 소리 내어서 말해버리면 정말로 모든 것이 무너질 것 같았다.

    살아 있을 거야.

    ―――그런데 왜 눈앞에 없는 것인가.

    간단히 죽어버리지 않을 거야.

    ―――그런데 왜 내 목소리에 대답하지 않는 것인가.

    만약 단탈리안이 죽을 때까지 내가 찾지 못한다면.

    만약, 내가 죽을 때까지 단탈리안을 찾지 못한다면.

    “…….”

    바르바토스가 눈물이 맺힌 눈동자로 정면을 노려보았다. 어느새 설원에는 붉은 노을이 내려앉았다. 그 눈부심에도 불구하고 바르바토스는 똑바로 태양을 직시했다.

    아직이다.

    아직 조금 더 버틸 수 있다.

    바르바토스는 망토를 두르고 다시 발걸음을 움직였다. 그녀가 내딛은 자리에 발자국이 남았다. 다시 눈이 내리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만 그 전까지는 뚜렷하게 남을 발자국이. 바로 그 잠깐의 흔적을 믿으면서 바르바토스는 계속해서 걸어나갔다.

    시간이 흘렀다.

    “……검은색이 어울리는 남자요?”

    “네. 혹시 보지 못했나 싶어서요.”

    바르바토스는 노브고르드라는 이름의 도시에 도착했다.

    여행 초반에는 도시에 있는 집을 하나하나 몰래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지금은 요령이 생겨 이렇게 도시에 위치한 공방부터 순례했다. 술집과 양조장을 돌아다니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단탈리안이라면 반드시 주기적으로 양조장을 털어먹을 것이었다.

    화방의 주인이라는 여인이 조심스레 물었다.

    “……어떤 볼일이 있으신 건데요?”

    그 순간.

    바르바토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여인이 방금 말한 뉘앙스. 목소리의 어조. 이쪽을 살피는 듯한 기색까지. 바르바토스의 예민한 감각이 모든 것을 감지했다. 그러나 바르바토스는 흥분하지 않았다. 이런 경우가 지금까지 64번이나 있었다. 64번 모두 꽝이었다.

    “예전에 빌린 물건이 있어요.”

    바르바토스가 멋쩍은 미소를 연기했다.

    “제가 아니라 저의 선조님이 가져간 물건인데 집안 대대로 내려왔거든요. 아버님이 이걸 어떻게 해서라도 본래 주인한테 돌려달라고 유언을 남겨서, 지금 홀로 여행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이 정도 변명이 적당하겠지.

    바르바토스는 순수한 성격을 흉내 내며 냉철하게 여인의 태도를 살폈다. 여인은 고민하고 있었다. 머뭇거림은 1초. 혹은 그보다 더 짧은 시간에 불과했지만 바르바토스에게는 너무나도 뚜렷하게 느껴졌다.

    여인이 머리를 숙였다.

    “죄송해요. 저희 가게에 그런 손님은 오신 적이 없네요.”

    거짓말.

    “아, 역시 그런가요. 하아. 언제쯤 찾을 수 있을련지…….”

    “혹시 이 도시에 머무르실 생각인가요? 제가 다른 손님들한테도 여쭤보겠습니다.”

    “아니요.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요. 내일 바로 떠날 생각입니다.”

    당신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

    바르바토스가 확신을 품고 화방에서 나갔다. 그녀는 곧바로 건너편의 골목에 숨어 들었다. 비좁고 차가운 골목으로 고양이들이나 쏘다닐 법한 곳이었다. 바르바토스는 거적데기로 몸을 숨긴 채 골목에 잠복했다.

    다음 날, 여인이 수레를 끌고 어디론가 향했다.

    “…….”

    바르바토스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여인을 미행했다. 거리를 지나치고 성벽을 지나, 여인은 점차 으슥한 숲길로 접어들었다. 이따금 여인이 뒤를 돌아보았지만 괜찮았다. 평범한 아낙네한테 미행이 들킬 정도로, 바르바토스는 쇠락하지 않았다.

    그 끝에 저택이 있었다.

    여인이 문을 두들기자 잠시 뒤에 누군가가 나왔다. 바르바토스가 나무 뒤에 숨어 저 멀리 문의 틈을 바라보았다. 여인이 가린 바람에 상대방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여인은 조금씩 몸을 움직였고, 그때마다 상대방도 드문드문 보였다.

    이윽고 여인이 허리를 깊이 숙였을 때.

    “―――――.”

    바르바토스는 보았다.

    검은색 망토로 온몸을 감춘 한 명의 사람을.

    씁쓸하게 웃고 있는 한 남자를.

    기억 속의 누군가와 닮은 미소를.

    “아…….”

    아주 잠깐뿐이었다.

    여인은 떠났으며 문은 닫혔다.

    거짓말과 같이 짧은 순간이었다.

    정신을 차리자, 바르바토스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언제부터 눈물이 나왔는지는 바르바토스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자기가 울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자신의 안에는, 이토록 울음이 많이 있었던 것이다.

    “찾았, 다…….”

    “찾았어…….”

    “……죽지 않았어…….”

    “다행이야……응, 다행이야…….”

    “죽지 않아서……정말 다행이야…….”

    바르바토스는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밤새도록 울음을 토해냈다.

    여행이 시작된 지 179년째.

    소녀는 한 명의 남자를 만나고 싶어 했고.

    그래서,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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