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키는 자 --> 『502』
‘서쪽에 있다는 얘기는 거짓말이겠지.’
바르바토스가 지팡이에 의지하며 걸어갔다. 세 번을 연달아서 넘어진 이후 그녀는 별 수 없이 적당한 나뭇가지를 집었다. 그러나 서른 발자국쯤 걸어갔을 때, 바르바토스는 온몸이 넝마짝이 되어 더 무리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하아, 후우……후우우.”
바르바토스가 나무에 기대어 앉아 머리를 숙였다. 조금 과장을 보태서 아가레스와 반나절이 넘도록 일기토를 벌였을 때보다 힘겨웠다. 잘 생각해보니 과장도 아니었다. 그때보다 최소한 서너 배는 힘이 없었다.
‘나를 그만큼 증오하는데도 제대로 된 위치를 가르쳐줬을 가능성은 일절 없어. 내가 조언을 무시하고 정반대 방향으로 찾으리라는 사실까지 계산하고 건넨 속임수겠지만. 서쪽이라는 낱말 자체에 집착하게 하는 것이 목적…….’
바르바토스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땅바닥에 대륙의 지도를 그렸다. 자세하지 않고 각 나라만 대충 그린 그림이었으나, 의외로 도시의 위치 같은 것이 정확했다.
‘서쪽이라면 프랑크, 바타비아, 버니시아, 브르타뉴 그리고 카스티야인가. 썅. 오질나게도 넓은걸.’
바르바토스는 열세 개의 국가 중 다섯 개국에 X를 그었다. 숨 고르기가 조금 편해졌다. 착각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넓은 대륙에서 1/3 가까이를 지우게 되었으니.
‘합스부르크도 아니야. 단탈리안 녀석은 자신의 존재를 흔적도 없이 지우고 싶어서 사라진 거니까. 합스부르크에는 추억이 너무 많지. 너의 정체성을 규정해주는 요소가 지나치게 득실거려. ……그렇지, 단탈리안?’
합스부르크 제국과 합스부르크 공화국에 X자가 그려졌다.
열세 개의 나라 중에서 이제 남은 곳은 여섯 곳.
바르바토스가 간이 지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눈앞이 가물가물했다. 격렬한 피로가 바르바토스를 억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기쁨. 처형식에서 최후를 맞이할 운명에서 벗어나 단탈리안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이 모든 피로를 압도했다.
‘확신하긴 어려워도……튜튼이나 사르데냐, 폴리투니아도 아닐 거야. 합스부르크랑 너무 가까워. 멀리. 마왕 단탈리안이라는 이름이 거의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았던 곳. 분명히 그런 곳으로 갔을 거야.’
바르바토스가 몇몇 국가를 지웠다.
그러자 지도에는 오직 세 곳만이 남았다.
칼마르 연맹국. 모스크바 왕국. 아나톨리아 제국.
“…….”
바르바토스가 묵묵하게 지도를 바라보았다.
열세 나라에서 세 군데.
숫자만 중얼거려 본다면 확실히 적게 느껴졌다. 문제는 영토의 넓이였다. 아나톨리아 제국만 하더라도 대륙에서 삼분의 일을 홀로 차지하는 대국. 그중 많은 부분이 사막이지만 그렇기에 방심할 수 없었다.
‘단탈리안은 분명히 사막이나 설원처럼 삭막한 곳에서 지내려 들 거야.’
그게 단탈리안이었다.
바르바토스가 확신을 품은 채 눈가를 문질렀다. 얼굴에 붙어서 딱지처럼 굳어버린 핏가루가 떨어졌다.
‘넌 지금까지 가져온 인연을 전부 자르고 은거했어. 사회성이란 거. 인간관계라는 거. 전부 버리고 들어간 셈이야. 거기서 다시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장소로 간다? 그리고 조금씩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간다?’
바르바토스가 작게 웃었다. 식도와 폐, 입과 이빨이 동시에 아팠다. 작은 웃음조차 견디기 어려운 상태였다. 그렇지만 바르바토스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절대로 불가능해.’
왜냐하면, 단탈리안은 하나의 생각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릴 만한 가치가 자신에게 있는가?
소중하다고 생각한 인연을 전부 버렸다. 잘랐다. 끊어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또다시 새로운 누군가를 만난다면, 무엇보다도 자기가 버린 인연들을 모욕하는 일이 되어버린다.
‘그러니까 불가능해.’
단탈리안은 아예 시간이 멈추어지기를 원하겠지.
더 이상 생명이 자라나지 않는 사막.
발자국이 찍혀도 금세 눈발에 묻히고 마는 설원.
자기 자신한테 미래를 허락하지 않고 현재를 앚어버리게 만든 채, 단탈리안은 그저 과거를 끝없이 추억하며 살아가고자 할 것이다.
‘자살도 안 해. 녀석이 자살할 리가 없어. 숨만 쉬는 시체마냥 지낼걸.’
다만 걱정되는 지점은 단탈리안의 증세였다. 환각과 환청에 시달리면서 언제까지 정신이 버틸 수 있을까. 본인이 의도하지 않더라도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자살을 열망하는 수준에 이르지 않을까.
아니, 반드시 그렇게 된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 고독을 일 년도 감당하지 못한다. 바르바토스는 단탈리안이 괴물과 같은 이성을 품고 있음을 알았다. 십 년. 백 년까지도 어찌어찌 버티리라. 하지만 이백 년은 어떠할까. 삼백 년. 과연 사백 년을 버틸까.
‘백 년 안에. 아무리 늦어도 이백 년 안에 찾아야 해.’
이백 년을 초과해버리면 단탈리안의 정신이 망가져버린다.
설령 죽지 않고 살아 있다 하더라도 그건 단탈리안이 아니라, 단지 단탈리안이었던 무언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바르바토스는 그런 결말을 원하지 않았다.
‘단탈리안과 만나고 싶어.’
똑똑한 주제에 멍청한 그 녀석을 보고 싶었다.
뻔뻔하면서도 끝없이 자신을 책망하는 그 남자가 그리웠다.
그렇기에 이백 년의 기한.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바르바토스에게 건 금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반드시 혼자서 단탈리안을 찾을 것, 같은 금제도 걸려 있었다. 바르바토스는 오직 두 발과 두 손에 의지하여 그를 찾아야만 했다.
“…….”
어느새 바르바토스는 일어서 있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몸이 천근처럼 무거웠다. 알고 있었다. 지금은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조금이라도 건강한 몸상태로 출발하는 것이 현명했다. 하지만 아무리 이성적으로 다독인다 하더라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날, 바르바토스는 숲을 벗어나지 못하고 쓰러졌다.
눈을 뜨자 일주일이 지나 있었다. 환한 대낮. 나뭇잎과 흙먼지가 바르바토스의 몸을 덮었다. 새가 얼굴을 건드리는 바람에 바르바토스는 퍼득 일어났다. 며칠이 지났는지 정확하게는 몰랐다. 하지만 몸에 붙은 나뭇잎의 숫자를 보고 바르바토스가 분노했다.
“이, 병신 같은 몸뚱어리가……!”
그녀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덜덜 떨었다.
아무리 적어도 사흘은 공으로 날려먹은 게 분명했다. 사흘이라니! 지금 까먹은 사흘 때문에 단탈리안은 부서질지도 몰랐다. 바르바토스는 이빨을 갈고 서둘러 일어섰다. 낭비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조금이라도.
조금이라도 빨리, 단탈리안을.
1년째.
바르바토스는 얼굴과 하복부를 불길로 지졌다. 이미 잘려나간 뿔은 더욱 더 아래로 잘라, 머리카락에 가려지게끔 만들었다. 이제 누가 봐도 그녀를 바르바토스로 알아보지 못했다.
안면이 화상을 심각하게 입었다. 하지만 이게 최선이었다. 약해빠진 여자아이가 혼자서 돌아다녀도 무사할 정도로 이 세상은 상냥하지 않았다. 절대로 범하고 싶은 욕망이 들지 않을 정도로 흉측하게. 사람들이 저절로 따돌릴 만큼 기괴하게.
“문둥병 환자야…….”
“아니, 틀림없이 마녀…….”
바르바토스의 외모를 본 인간들은 누구나 다 수군거렸다. 때로는 돌멩이가 날아왔다. 자신들의 마을과 거리에서 꺼지라고 욕하면서. 어느 날인가 바르바토스는 아나톨리아 제국의 안토키아 지방을 지나치면서, 머리에 돌을 강하게 맞아버렸다.
예전이었다면 코웃음을 치고 거뜬하게 넘겼을 타격. 하지만 바르바토스는 돌을 맞자마자 정신을 잃고 고꾸라졌다. 하루 반나절. 바르바토스는 피를 흘리며 기절했다.
“…….”
의식을 되찾았을 때 바르바토스가 가볍게 혀를 찼다. 짜증이 났다. 돌을 던진 누군가보다 거기에 반나절이나 기력을 못 찾은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바르바토스는 머리카락에 젖은 핏물을 대충 털어냈다.
“……이쪽은 바쁘단 말이다.”
그녀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걸음을 재촉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2년째.
바르바토스는 긴 후드로 얼굴을 감추었다. 한여름이 몰아닥쳐도 결코 후드를 벗지 않았다. 어쩔 때는 무더위 탓에 의식이 아득해졌다. 그녀는 '평범한 신체'가 생각보다 많이 불편하다는 걸 깨달았다.
여전히 먹지도 자지도 않아도 괜찮다는 사실만큼은 좋았다. 식사와 수면은 시간을 어마어마하게 잡아먹었다. 거기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만큼 단탈리안을 찾으러 돌아다니는 시간이 늘어났다. 고마운 일이었다…….
3년째.
세상에는 별에 별 미친 놈이 다 있었다.
바르바토스는 현재 자신의 외모가 삼 년 동안 성욕을 참은 사춘기 남자애가 봐도 저절로 성기가 쪼그라들 정도로 흉악하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런데도 자기를 덮친 남자가 있었다. 외모가 아니라 오직 목소리만으로 발정하는 놈이었다.
으쓱한 뒷골목에서 덮쳐진 바르바토스는 얌전히 따르는 척하며 기회만을 노렸다. 비명도 지르지 않았다. 그렇게 남자가 안심하며 바리춤을 내린 순간, 바르바토스는 펠라티오를 해주려는 척하면서 성기를 물어뜯었다.
“크아아아아악!”
골목에 남자의 비명이 울렸다.
이대로 원한을 남겨두면 골치 아프기에, 바르바토스는 호신용 단검으로 남자의 불알을 찍어버렸다. 비명이 거세졌다. 바르바토스는 코웃음을 흘리며 남자의 목줄기를 그었다.
“날 강간하려면 적어도 제국 하나는 정벌하고 와라. 쓰레기 새끼.”
기분 나쁜 피가 묻어버린 단검을 땅바닥에 버리고, 바르바토스는 유유히 골목을 벗어났다. 그날 이후로 바르바토스는 성대까지 의도적으로 손상시켰다. 아름다운 목소리가 걸걸하고 불쾌한 음색으로 변했다.
5년째.
7년째.
15년째.
작은 마을에서 큰 마을을.
산골짜기에서 바닷가를.
인간이 사는 곳과 고블린이 사는 곳, 마물이 지내는 곳과 정령이 배회하는 곳. 아무도 살지 못할 것 같은 오지에서 절벽의 귀퉁이까지.
바르바토스는 단 한 시간도 쉬지 않고 걸었다. 그녀가 쓰러지는 경우는 오직 몸이 더 견디지 못해 무너질 때뿐이었다. 무모하고 어리석었다. 그러나 바르바토스는 하나의 일념을 도저히 버릴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단탈리안을.
62년째.
“젠장. 여기도 아닌가.”
바르바토스가 양피지 지도에 연필로 X자를 그렸다.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아나톨리아의 지역을 대부분 뒤졌다. 아직 탐색하지 않은 부분도 많았으나, 바르바토스 나름대로 찾을 곳과 찾지 않을 곳을 구분하고 있었다.
예컨대 술을 구하기 어려운 지방은 탈락이었다. 바르바토스는 단탈리안이 술도 없이 맨정신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놈은 뼛속부터 술에 중독되었다. 따라서 사막 한복판이나 산맥의 동굴과 같은 곳은 후보에서 지워졌다.
“섬마을 같은 곳에 있을 확률도 높단 말이지…….”
으으, 하고 바르바토스가 머리를 긁었다.
마침 시내 한복판에서 연주자들이 음악을 하고 있었다. 축제일이 가까워짐에 따라 도시에 고용된 연주자였다. 바르바토스는 눈썹을 찡그린 채 연주자들을 바라보다, 문득 어떤 생각이 들었다.
‘……음악?’
아, 하고 바르바토스가 입을 벌렸다.
단탈리안은 분명히 천 년이고 만 년이고 영원토록 버틸 속셈일 거다. 아마 자신의 정신을 최대한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어떤 방책을 마련해두지 않았을까?
제일 좋은 방법은 사회생활을 하는 것. 하지만 이건 불가능하니 각하되었다. 허면, 사회생활을 제외하고도 자신의 정신을 유지하기에 가장 적절한 수단은 무엇인가.
‘취미!’
바르바토스는 머리에 뇌우가 스쳤다.
‘음악이라거나 공예, 그림, 아무거나 취미를 하나 잡아서 하고 있을 거야!’
바르바토스가 자기도 모르게 환하게 웃었다.
기나긴 여행에 방향성이 정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