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501화 (500/510)
  • <-- 지키는 자 --> 『501』

    * * *

    바르바토스가 죽음의 고비를 넘긴 바로 그날 밤.

    아직 절대적으로 안정을 취해야만 하는 시점에서 두 번째 시험이 내려졌다.

    “심장과 내장에 각인을 새기겠습니다.”

    바르바토스가 슬그머니 눈꺼풀을 들었다. 그녀는 자기가 밤새도록 바닥에 기절해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단탈리안을 위해 준비되었던 막사이기에 고급스러운 카펫이 깔려 있기는 했다. 그런데도 온몸이, 내장이, 뼈까지 차가웠다.

    “왜 대답이 없습니까.”

    바르바토스의 상태를 빤히 알면서도 이바르가 구태여 물었다.

    “혹시 이제야 시험을 포기하실 생각이 드셨습니까? 잘 되었군요. 어차피 도중에 실패하리라 생각했습니다. 자력으로 마나를 흐트린 것만으로도 대단하다 평가해드리지요. 그럼, 이번 일은 없던 것으로…….”

    “괜찮습니다.”

    바르바토스가 일어섰다.

    지나치게 무거운 짐을 짊어든 말의 다리처럼 바르바토스는 팔이 후들거렸다. 그녀가 얼굴을 들어서 이바르 로드브로크를 올려다보았다. 병자의 눈. 눈밑에 기미가 지다 못해서 까맣게 파였다. 안색이 창백하여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했다.

    “다음 시험, 할 수 있어요.”

    눈동자의 깊은 저편에는 형형한 의지가 빛나고 있었다.

    이바르가 작게 코웃음을 흘렸다.

    “다시 말씀드리지요. 저는 당신의 진심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단탈리안 전하를 찾아가겠다, 만나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입으로는 그럴듯하게 말하고 있습니다만 어차피 당신은 야욕에 집어삼켜진 마왕에 불과합니다. 여건이 된다면 언제 참회했냐는 듯 다시 권력을 움켜쥐려고 할거하겠지요.”

    “아니에요. 맹세하건대…….”

    “그러니까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선언하십시오.”

    이바르가 품에서 마법서를 꺼내었다.

    이바르는 마법서를 펼쳐서 상대에게 보였다. 비록 바르바토스가 마법사로서 폐품이 되어버렸으나 지식만은 온전히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단번에 마법진의 형태를 알아보았다.

    “금제(禁制)와 맹세의 마법…….”

    “예. 계약자가 약속을 어기지 못하도록 강제하는 도구이지요. 당신에게는 어떤 의미로 반가운 마법이지 않습니까.”

    역시 마왕 파이몬이 당했던 수법과 동일했다.

    파이몬은 인간군의 성녀 그라시아와 밀약을 나누었다. 약속의 내용은 산악파와 인류군이 연합하여 단탈리안을 공격할 것. 파이몬은 막바지에 가서 약속을 어겼다. 그 대가로 죽음의 위기를 맞닥트렸다…….

    ‘파이몬 년이랑 똑같은 전철을 밟는 건가. 아니, 순서만 거꾸로 되었네.’

    바르바토스는 왠지 웃음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가장 닮기 싫어하는 여자였다. 어떻게 살더라도 그 여인처럼 살지는 말자. 그녀처럼 되지만 말자고 다짐하며 수천 년을 대립했다.

    하지만 같은 남자를 좋아했다.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똑같이, 남자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기이한 인연이라고 감탄해야 할까. 아니면 치가 떨릴 정도로 끔찍한 우연이라고 욕해야 할까.

    “저는 맹세로 당신의 야망을 속박시킬 계획입니다.”

    “네. 현명하고 올바른 조처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불멸의 바르바토스라고 자부하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일개 시녀한테 맞장구를 치며 아부하는 것인가요. 마왕이란 결국 그 정도 종자로군요. 혐오스럽기 그지없습니다.”

    “…….”

    바르바토스는 고개를 숙였다.

    치욕을 겪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파이몬을 떠올리니 바르바토스의 의지는 더욱 날카로워졌다. 라피스 라줄리라는 반인반마도 죽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실질적으로 단탈리안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다…….

    “저는 안전을 추구합니다. 마나의 고리가 붕괴되었다고는 해도 아직도 당신은 위협스러운 인물입니다. 위험성을 뿌리부터 박멸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바르가 막사의 벽에 장식된 장검을 가져왔다.

    “금제의 마법을 걸기에 앞서 당신의 심장을 파괴하겠습니다.”

    “…….”

    “고리가 마법의 근원이라면 심장은 마력의 근원. 마력이 옅어질수록 마왕의 지배력은 약해지지요. 저는 당신의 지배력이 거의 없어지는 지점까지 심장을 없앨 것입니다.”

    바르바토스가 눈을 질끈 감았다.

    어제는 마법사로서의 모든 것이 뭉개졌다. 오늘은 마왕으로서의 모든 것이 빼앗기게 되었다.

    상대방의 말인즉슨, 바르바토스한테 더 이상 마력이 남지 않을 때까지 계속해서 심장을 제거하겠다는 얘기였다. 신체가 파손되면 체내의 마력이 자연스럽게 복구작업에 들어간다. 그런 복구작업이 불가능해지도록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심장을 파괴한다…….

    수십 번이 될지도 몰랐다. 수백 번이 될지도 몰랐다.

    “알겠습니다.”

    ‘작업’은 즉시 거행되었다.

    단순한 동작으로 이루어진 작업이었다. 이바르는 장검을 들어서 바르바토스를 찔렀다. 바르바토스의 심장이 파괴되면 몸안에서 마력이 일어나 어떻게든 부위를 치료했다. 심장이 다 낫기까지 여유롭게 기다렸다가, 이바르는 다시 장검을 내리찍었다.

    생살이 베이며 심장이 찢기는 고통에 바르바토스는 끝없이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악! 흐악, 아, 아아아아악!”

    찌르고, 회복되고, 찌르고, 회복되고. 그것이 하루 동안 반복되었다.

    마왕이 제아무리 불사의 몸을 갖고 있다지만 심장은 특별했다. 예전에 바알이 바르바토스의 심장을 부서트렸을 때 그녀는 힘을 잃고 쓰러졌다. 한 번 파괴되는 것까진 버틸 수 있었다. 두 번 연속으로 파괴되는 것도, 어쩌면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세 번은.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쉴 새 없이 열두 번이나 파괴되는 것은―――바르바토스의 마력을 송두리째 들어내는 짓거리였다.

    처음에는 심장이 재생되는 데 15분이 걸렸다.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바르바토스의 몸치고는 매우 분발했다. 두 번째로 심장이 파괴되고 재생하는 데 또다시 15분이 걸렸다. 세 번째에도 15분. 그러나 네 번째부터는 급격하게 속도가 떨어져서 30분이 소요되었다.

    다섯 번째에 60분. 여섯 번째에 90분. 일곱 번째에 다소 급락이 둔중해지고 110분. 여덟 번째에 120분. 다시 무시무시하게 속도가 떨어져 아홉 번째에는 240분이 걸렸다.

    마지막 열두 번째에 걸린 시간은.

    자그마치, 여섯 시간이었다.

    “……읏, 흐아……아…….”

    바르바토스가 지나친 고통으로 인해 떨었다.

    말 그대로 혹사.

    몸에 남은 마력이 바닥까지 긁어졌다. 수십 번을 쥐어짜낸 걸레처럼 이제 바르바토스에겐 한 방울의 마력조차 머무르지 않았다. 마력으로 강화되던 근육마저 흐물해졌다. 마법도 마나도 모조리 잃어버린 바르바토스는, 한낱 평범한 여자아이 수준으로 근력이 몰락하였다.

    “어떻습니까. 천하를 호령하던 위치에서 순식간에 약자로 전락한 기분은.”

    도합 스물세 시간이 작업에 소요됐다.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지친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게 평범한 마인입니다. 모두가 거기서부터 시작합니다. 당신처럼 태어날 때부터 마나의 축복을 받고 태어난 사람은 결코 이해하지 못했겠지요. 강자로 태어나 강자로 군림하는 것이 당연했을 터입니다.”

    이바르가 바르바토스의 머리카락을 잡고 억지로 들었다. 바르바토스가 신음했다.

    “당신들은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단탈리안 전하를 만나는 것은 절대로 허락받아서는 안 되는 일. 하지만 당신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겠지요. 이만큼이나 고통을 겪었으면 되지 않았을까, 하고.”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머리를 바르바토스의 코앞까지 숙였다.

    “이제 충분하지 않을까? 나 정도나 되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고통을 자처했으니 이제 충분하지 않을까. 원래는 허락되지 않을 일도, 내가 이만큼씩이나 했으니까, 당연히 허락받아야 하는 것 아닐까.”

    이바르가 속삭였다.

    “―――오만한 것.”

    흡혈귀 소녀의 송곳니가 살기로 번들거렸다.

    “단탈리안 전하를 다시 한 번 만날 수만 있다면 나도 얼마든지 고통을 받아도 좋아. 백 년이 넘도록 심장이 파괴되고 재생될지라도, 단탈리안 전하를 위해서라면 주저하지 않을 거야. 유일한 예외로 취급받는 것이 당신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겠지.”

    이바르가 비아냥거리면서 바르바토스의 뺨을 툭툭 때렸다.

    “단탈리안 전하가 아무와도 만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으면서도, 당신은 여전히 계속해서 재회를 포기하지 않았어. 그게 당신의 죄야. 오만이지. 당신에게는 단탈리안 전하보다 자기 자신이 소중한 거야…….”

    짜악, 하고 이바르의 손찌검이 멈추지 않았다. 바르바토스는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하지만 당신을 놓아줄게.”

    “감사합니다……감사합니다…….”

    “아니. 감사할 이유가 없어. 나는 단지 당신이 자신의 오만을 스스로 깨닫기를 바랄 뿐이거든. 어디 평범한 몸뚱어리로 세계에 버려져봐. 다른 사람에게 아무것도 명령할 수 없고, 오로지 자신만의 힘으로 모든 걸 해결해봐.”

    “…….”

    “사람은 누구나 다 그래.”

    이바르가 머리카락째로 바르바토스를 내팽개쳤다.

    이후, 바르바토스에게는 갖가지 금제의 각인이 새겨졌다. 체내에 마력이 조금이라도 쌓이면 오장육부가 찢어지는 고통이 느껴지도록 조처했다. 바르바토스가 자연적으로 마나를 회복하지 못하게끔.

    마나가 거의 텅 빈 상태에 영원히 갇히는 것이었다.

    자기 자신이 바르바토스임을 단탈리안 이외의 인물한테 폭로하거나 발각될 경우, 심장이 터졌다. 마나가 없어진 현 상황에서 다시 한 번 심장이 파괴된다는 것은 틀림없이 죽음을 의미했다.

    철두철미한 감옥.

    그녀에게는 풀리지 않을 족쇄가 채워졌다.

    ─ 풀썩.

    아직 어둑한 밤.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몰래 군중에서 빠져나왔다. 그녀는 숲속에서 포대를 풀어, 바르바토스를 아무렇게나 내다버렸다.

    “…….”

    바르바토스가 땅바닥에 뒹굴었다. 그녀는 목소리를 낼 힘조차 없었다. 그저 살갗이 돌멩이에 걸려 찢어지는 걸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옛날이었다면 금세 새살이 돋아났을 상처에서 짙은 피가 흘러내렸다.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주저 없이 등을 돌렸다. 이틀에 걸쳐서 바르바토스의 외형을 완벽하게 메모리아 아티펙트로 저장했다. 공개처형식에는 바르바토스의 인형을 올리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사형수한테 마력 봉인구가 덕지덕지 붙은 것이니, 마왕인지 인형인지 알아볼 수단은 없었다.

    “참.”

    이바르가 고개를 돌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바르바토스를 내려다보았다.

    “저도 잔혹하기만 한 악마가 아닙니다. 당신의 의지에 감탄한 부분도 더러 있습니다. 그걸 보아서 아주 약간. 아주 약간의 단서만 넘겨드리지요. 단탈리안 전하께서는 '서쪽'에 계십니다.”

    “…….”

    “부디 모래밭에서 한 알의 모래를 발견해보시기를.”

    그리고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떠났다.

    단탈리안이 대륙의 서쪽에 머무른다는 정보는 물론 거짓.

    이바르는 모스크바 왕국의 설원에 오두막을 지어두었다. 단탈리안 전하가 일단 그곳으로 이동했으니 한동안 북쪽에 기거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정확히 말해서 대륙의 북동쪽에 가까웠다. 서쪽과는 정반대로 떨어져 있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마지막까지 마왕 바르바토스를 농락한 것이었다.

    “…….”

    한참이 지났다.

    이바르가 떠나고서 한 시간이 넘게 흐른 다음에야 바르바토스가 꿈틀거렸다. 그녀는 땅을 짚고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잘 안 되었다. 무릎이 꺾여서 넘어지고 말았다. 다시 거친 땅바닥에 살결이 쓸렸다.

    바르바토스는 걸음마를 떼는 아기처럼, 하지만 그보다 아득하게 고집스러운 몸짓으로, 재차 땅을 짚었다. 그때 바르바토스는 허리가 굽어지긴 했어도 두 발로 대지를 디뎠다.

    “……조금만, 기다려. 바보 자식아.”

    바르바토스가 한 발자국을 내딛었다.

    무릎에서 힘이 풀려서 거꾸러졌다.

    바르바토스가 일어나서, 다시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었다.

    “바로……만나서. 응. 바로 만나서…….”

    그렇게 그녀는 나아가고 있었다.

    최후의 용군주를 토벌했을 때 그러했듯이.

    월맹군을 이끌고 진군할 때 그러했듯이.

    불멸의 이름이 삼천 년 동안 언제나 그러했듯.

    “한방, 세게 때려줄 테니까…….”

    바르바토스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리리플 작성 중]

    으으으, 오늘도 지각해서 죄송합니다... 이렇게 한동안 늦게 업로드하는 날이 이어질 것 같습니다. 빨리 써본다고 써보려고 하는데 시간이 걸리네요. ;ㅅ;

    편안한 하루 되시길...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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