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99화 (498/510)

<-- 지키는 자 --> 『499』

“………….”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뒤편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도 바르바토스가 있었다. 언제나처럼 무표정하고 싸늘한 표정의 바르바토스가. 다시 문앞을 쳐다보자, 바르바토스가 눈썹을 찡그리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뭐야, 왜 뒤를 쳐다봐? 혹시 떡치고 있었어? 그새를 못 참아서 또 애인 만들었냐. 발정난 개자식 같으니라고. 내가 나중에 다시 찾아와줄까?”

달랐다.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었다.

환영의 바르바토스는 머리에 뿔이 솟아나 있었다. 마왕의 증거. 강대한 마왕일수록 거대하여 긍지를 드높여주는 그 물건이, 문앞에 선 바르바토스에게는 없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깔끔하게 잘라져 있었다.

“……아. 이거?”

내 시선을 눈치채고 바르바토스가 뿔의 단면을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부끄러운 듯 멋쩍게 웃었다. 꿈에도 그리던 소리. 바르바토스의 웃음소리였다.

“아니, 뭐. 웬만해 가지고서는 자유가 허락되지 않아서.”

“…….”

“그렇게 됐어.”

그렇게 되었다.

짧은 한마디.

요약이라 할 수도 없는 하나의 문장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지. 바르바토스가 사형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을 얼마나 포기해야만 했을지, 나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어?”

바르바토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느새 나는 양손으로 바르바토스의 얼굴을 만지고 있었다. 느껴졌다. 맨살의 부드러움이 손바닥을 통해 따스하게 전달되었다. 그 감촉이 가슴속의 무언가를 두들겼다. 연약하고 가느다란 실과 같은 것이 반쯤 끊어지고 말았다.

“바르바토스.”

내가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바르바……토스…….”

“…….”

바르바토스가 멍하게 이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끊임없이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한 가지 소리밖에 내지 못하는 오르골처럼 망가진 것 같았다. 머릿속에서 다른 생각을 떠올리려고 해도, 다른 의문을 제기하려고 해도, 그것들은 어떤 격류에 휩쓸려서 가라앉고 말았다.

“바르바토스…….”

그녀가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응.”

“……바르바토스…….”

“응, 단탈리안.”

바르바토스가 두 손으로 나의 오른손을 감쌌다.

그녀는 내 오른손에 살짝 볼을 파묻었다. 자신의 살결이 어떤 감촉인지 내게 알려주려는 것처럼. 느릿하게, 부드럽게, 도리질을 쳤다.

“나 여기 있어.”

“…….”

가슴속의 실이 완전히 끊어졌다.

나는 무릎이 무너졌다. 온몸을 뒤덮은 망토가 겨울바람에 휩쓸려 미끄러져 내렸다. 칼자국 투성이가 된 살갗에 바람이 불어오자 너무도 아팠다. 한없이 차가운 대기. 그러나 머리를 감싸주는 무언가가 있었다.

“멍청이.”

바르바토스가 양팔로 내 머리를 그녀의 몸으로 꾸욱 눌렀다.

“또 무슨 짓을 하다가 넝마짝이 되어버린 거야. 고생한 건 이쪽인데. 너 하나 찾으려고 대륙을 전부 뒤졌는데, 왜 나보다 네가 더 엉망이야……?”

착각이 아니라면, 바르바토스의 몸도 떨리고 있었다.

“숨기는 왜 또 그렇게 잘 숨었어. 덕분에 쓸데없이 고생했잖아. 내가 얼마나 돌아다녔는지 알기나 해? 아무리 찾아도 안 보여서. 응. 아무리 헤매도 안 나와서. 정말로……정말로…….”

나는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바르바토스는 여전히 가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웃으면서 동시에 울었다.

“……정말로……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그렇게 말했다.

살아줘서 고맙다고.

바르바토스는 그렇게 말했다.

“힘껏 견뎠구나, 단탈리안.”

“…….”

그리고 나는, 울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 막 태어난 아이처럼.

* * *

단탈리안이 죽었다.

이바르의 폭언을 듣고, 바르바토스는 한동안 말을 잃어버렸다. 말만이 아니라 표정마저 잃었다.

이바르는 숨을 씩씩거리며, 어딘지 상쾌해진 얼굴로 바르바토스를 내려보았다. 당신도 라우라 데 파르네세와 마찬가지였다. 단탈리안 전하가 몰락하는 데에는 당신 역시 데 파르네세 군무상서큼이나, 어쩌면 군무상서보다 더욱 크게 일조했다.

상처를 받아 마땅했다.

자기 자신을 저주하는 것이 당연했다.

‘어차피 처형당할 운명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데 파르네세 군무상서는 살아 있는 한 계속해서 고통받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바르 로드브로크 본인이 그녀에게 교묘한 언동을 속삭일 것이므로. 군무상서가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찬란한 업적을 거두어도,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결코 그녀를 온전히 칭찬해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꼭 그처럼 마왕 바르바토스에게도 고통을 안겨주리라.

‘단탈리안 전하께서 죽었다는 사실이야말로 그대에게 제일 격심한 아픔이 되겠지!’

이바르의 생각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 바르바토스의 얼굴은 까마득한 절망에 물들었다. 그녀는 이윽고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떨었다. 십 분의 시간이. 이십 분의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도 이바르는 고개 숙인 마왕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전혀 지겹지 않았다.

“……없어.”

바르바토스가 불쑥 중얼거렸다.

이바르가 미간을 좁혔다.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단탈리안이 죽었을 리가 없어.”

이바르의 입가에 가학적인 비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현상을 부정하는 것인가. 갑작스러운 충격을 받았을 때 곧잘 나타나는 반응이었다. 결국 긍지 높은 마왕이라고 자부하던 바르바토스도, 연인의 죽음에 앞에서는 평범한 여자처럼 흐느적거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요. 단탈리안 전하는 죽었습니다. 다름 아니라 당신과 같은 작자에 의해서.”

어차피 살아 있다 하더라도 그건 산 목숨이 아니었다.

단탈리안 전하는 앞으로 영원토록 고통에 빠져 살게 되리라. 탈출구도 없이, 희망 따위도 없이. 세상에서 조용히 사라짐으로써 연옥의 한복판에서 머무르는 것. 그것이 전하의 의지였다.

이바르는 견딜 수 없었다.

단탈리안 전하와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 이건 괴로웠다. 틀림없이 괴로웠다. 하지만 단탈리안의 계획에 찬동한 이래, 이바르는 또다른 사실에 의해서 더 큰 쓰라림을 맛보았다.

왜 단탈리안 전하만이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불합리했다.

부조리했다.

불공평했다.

단탈리안 전하는 모든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 선언했다. 그렇지만 틀렸다.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책임지는 것은 어디를 어떻게 보아도 이상했다. 그건 단지 의지의 표명, 하나의 의지를 표현하는 데 동원된 수사학이 아닌가.

“마음껏 후회하십시오. 부디 절망해주십시오. 자기가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당신의 얄팍한 간계가 누구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는지, 조금이라도 깨닫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저주를 내리는 심정으로 뇌까렸다.

고통을 받아야 하는 사람에게 고통을.

모두에게 공평한 연옥을.

어떤 경과로 단탈리안이 죽었는가. 왜 단탈리안이 데이지와 함께 자살하고 말았는가. 무엇이 그를 파멸로 이끌었는가.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첫 번째 죄인은 라우라 데 파르네세다. 그러나 두 번째 죄인은 바로 당신이다. 이바르는 이 점을 잊지 않고 강조했다.

얼마든지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었음에도 무지로 인하여, 혹은 편견으로 인하여 하필이면 이 길을 선택해버린 자들 전원에게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기꺼이 저주를 퍼부었다.

“바르바토스. 당신은 추악한 존재입니다.”

“…….”

침묵이 있었다.

바르바토스는 더 이상 어깨가 떨리지 않았다. 이바르는 설마 상대방이 현실을 인지해서 떨림을 멈추었다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건 지나치게 긍정적인 해석이었다. 오히려 정반대. 현실을 수용하는 것을 완벽하게 거부했기에 움직임이 끊어졌으리라.

“아니.”

하지만 바르바토스가 고개를 들어서 자신을 바라보았을 때.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그녀의 황금색 눈동자가 오롯하게 이쪽을 직시하는 것을 보았다.

“단탈리안이 죽었을 리 없어.”

“…….”

무슨 소리인가.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이해할 수 없었다. 현실을 거부하다못해 아예 정신을 놓아버렸을까. 그 정도까지 연약한 여자였는가. 이바르가 싸늘하게 말했다.

“당신이 뭐라고 부정한들 전하께서는 이미 안 계십니다. 적당히 당신의 죄과를 인정하십시오. 당신이 사형되는 그날까지 짊어지고 가야 할 멍에입니다.”

“나를 우습게 보지 마라, 인형술사.”

바르바토스가 이바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양녀와 함께 자살해? 라우라를 내버려두고, 나를 내팽개치고, 녀석이 제멋대로 '먼저' 죽었다고? 하아. 거짓말을 치려면 제대로 쳐. 너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어.”

“……벌써 자기정당화에 들어갔습니까. 어찌할 도리가 없는 우인이군요. 좋습니다. 그렇게 평생 자신을 속인 채 살아가십시오. 어쩌면 그쪽이야말로 당신에게 어울리는 최후이겠습니다.”

이바르가 막사에서 나가려고 방향을 틀었을 때였다.

“단탈리안은 절대로 자살 따위는 하지 않아.”

이바르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양녀를 오해해서 죽음으로 내세웠다. 슬프지. 녀석에게는 무지에서 기인한 오해만큼 뼈저리게 고통스러운 게 없을 테니까. 쓸데없이 머리가 좋은 놈은, 착각 때문에 일어난 과오를 견디지 못하는 법이거든.”

바르바토스가 이죽거렸다.

“하지만 그건 단탈리안의 절반밖에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야.”

“…….”

“양녀를 죽였어? 그럼 오히려 더 가열차게 자기 자신을 탓할 새끼가 단탈리안이라는 이름의 개자식이야. 다시 한 번 말해주마, 시녀여. 단탈리안은 절대로―――절대로 자살을 선택하지 않아.”

이바르가 무표정하게 바르바토스를 오시했다.

“무슨 근거로 당신의 망상을 정당화하고 있습니까.”

바르바토스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왜냐하면 그 녀석, 자살하려면 이미 진즉에 자살하고도 남았으니까.”

바르바토스는 알고 있었다. 유일하게 바르바토스만이 단탈리안의 이상성을 알아차렸다.

단탈리안이 끝없는 환영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

바르바토스가 울면서 자신과 함께 도망치자고 부탁했을 때 단탈리안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런 건 책임에서 도망치는 것에 불과하다며 단언했다. 평안 따위는 개먹이로 던져버려라. 단탈리안이 그때 내뱉은 한마디 한마디를, 바르바토스는 똑똑히 빠짐없이 기억했다.

그렇기에 바르바토스 역시 단언할 수 있었다.

“녀석한테는 죽음마저 평화로운 사치야. 게다가 사랑하는 양녀와 함께 죽는다니. 그만치 호화스러운 말로를 스스로 허락할 리 만무하지.”

“당신의 허언에 어울려줄 틈은…….”

“살아 있구나, 단탈리안.”

바르바토스가 확신을 담아서 말했다.

그녀의 눈가에서 한 줄기 눈물이 조용히 흘렀다.

“아직 살아 있어.”

“…….”

바르바토스는 머리를 굽혀서 이바르의 발등에 입술을 맞추었다.

“간청을 드립니다.”

자존심을 버리고, 한 문장을 말할 때마다 정성스럽게 이바르의 발에 키스했다. 일생 동안 누구에게도, 심지어 바알에게조차 존댓말을 쓰지 않았던 바르바토스가 말을 높였다.

“어디에 있는지 말씀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살아 있다는 걸 알았으니, 벌써 충분해요. 개가 되라면 개가 되겠습니다. 노예가 되라면 노예가 되겠습니다. 제 마왕의 뿔을 영원히 자라지 않도록 저주하셔도, 괜찮아요.”

“…….”

“제 심장을 파괴하시면, 열여섯 번 정도 파괴하시면, 마력도 보잘것없이 줄어들 것입니다. 마력의 근원을 파괴하셔도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마법사로서의 증거도 필요 없습니다.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뭐든지 빼앗아도 괜찮으니까. 그러니까…….”

바르바토스가 말했다.

눈물이 섞인 목소리로 간절히 애원하며.

“그러니까, 제발……제가 그 녀석을 찾을 수 있게 허락해주세요.”

========== 작품 후기 ==========

[리리플]

NineBreaker// 예, 강림했습니다.

Nstarcity// 저도 정말 500 화까지 쓰게 될 줄 몰랐습니다. 설마 1년이 넘게 쓸 줄 몰랐습니다. 인생이란 참으로... 참으로 알 수 없군요... 외전은 아마도 안 쓸 것 같습니다.

xusaku// 이렇게 되었습니다.

mightnmagic// 얍얍.

asd메이지// 단탈리안을 M의 세계로 이끌어들인 장본인은 바르바토스지만요. 〈-

오룔리// 그렇습니다.

수천천사// 비너스빤스: 나 덕분에 경국지색의 미인들과도 살을 섞어보고 권력의 정점에 올라섰는데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

Omicron//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ㅅ;

호박호박// 예, 가끔은 바라셔도 괜찮습니다.

숮랑// 차기작은 지금도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아라가 아니라 다른 사이트에 연재하는지라, 여기서 언급하기에는 조금 죄송하네요.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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