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97화 (496/510)
  • <-- 지키는 자 --> 『497』

    “아니. 별로 사과받을 일도 없다네.”

    “본래 시나리오의 대행자를 고르는 것은 철저히 계약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계약자에게 모든 사항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고, 동의를 구하고, 재차 동의를 구한 다음에야 일이 진행됩니다.”

    이건 내 예상과 합치했다.

    저들이 제멋대로 나를 끝장낼 수 없다면 마찬가지로 제멋대로 시작을 시키지 못하는 것이 도리에 맞았다. 눈앞의 청년이 그걸 구태여 말로 꺼낸 까닭은 아마도…….

    내가 슬쩍 여인의 표정을 확인했다. 여자는 다소 불만족스러운 눈초리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눈치 채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무의식 중에 그런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인가. 어느 쪽이든 딱한 이야기였다.

    “나와는 이른바 불공정한 계약을 맺은 셈이로군.”

    “송구하게도 그렇습니다. 저기 계신 분. 개인적으로 제 상사가 됩니다만, 편법에 편법을 동원하여 억지로 계약을 밀어붙였지요. 그 사유도 유치하기 짝이 없는 자존심 대결……저희로서는 입이 열 개라도 변명할 말이 없습니다.”

    이제야 여인도 불길한 낌새를 알아챘다. 표정이 시시각각 어두워졌다. 그녀는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내가 내린 명령 때문에 입술을 뻐끔거릴 따름이었다.

    “계속 말하게.”

    “저는 모든 전말을 상부에 보고했습니다. 단탈리안 님……아니, 실례했습니다. 쟈코모 스크루타 님께서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셨습니다. 그런 분을 교묘한 말장난으로 속여넘긴 사람에게는 마땅히 벌이 주어져야 한다고, 상부에선 판단했습니다.”

    “너……!?”

    여자가 헛숨을 들이키고 콜록거렸다. 그녀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디선가 운명이 결정되었다. 거기에 굴욕을 느끼고 있으리라.

    “처우는 잠정적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청년은 여인을 무시했다.

    “영원히 고립된 세계에 유배되어서 무미건조한 연옥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피해의 당사자이신 분께 결정권을 드리는 것이 도리 아닌가, 하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나에게 처우를 맡기겠다?”

    “다소 억지스러운 처벌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털썩, 하고 여인이 주저앉았다. 그녀의 낯빛은 절망으로 물들어 있었다. 드디어 조직에서 자신을 구해주러 오는가 기뻐했더니 결과는 이 모양 이 꼴이었다.

    여인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아, 아, 하고 떨었다. 유심히 살펴보면 가엽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무얼. 나는 인간적인 동정심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인격을 조작할 수도 있고, 신체를 왜곡할 수도 있습니다. 끝없는 고통과 절망도 간단히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소원이 아니라 단순한 처벌이라는 점에 유의해주십시오. 염려하실 필요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

    내가 손가락으로 탁자를 툭툭 두들겼다.

    “거창한 처벌은 별로 바라지 않네. 그보다 의미가 있는 결과가 당기는군.”

    “의미 있는 결과라고 말씀하시면?”

    “저 여자의 본체를 없애주게.”

    여인이 퍼득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무슨 망발을 지껄이느냐. 그런 표정이었다.

    “본체를 없애라는 얘기는……죽음을 선고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다. 단지 이곳에서 죽는다 하더라도 '돌아갈 장소'가 없도록 만들어달라는 뜻이다. 본체가 사라지면 저 여자에게는 이곳의 삶이 전부가 되어버리겠지.”

    “……과연. 이해했습니다.”

    청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청년이 얘기를 더 이어나가려다 잠시 멈추었다. 그는 두세 번 침을 삼킨 다음에 입을 열었다.

    “이해했습니다. 그러니까, 그걸로 충분하다는 말씀이군요.”

    “아. 이쪽을 외부에서 관찰하는 것도 당장 중단해주면 고맙겠네. 나도 바르바토스나 시트리와 지내면서 성적인 취향이 상당히 관대해졌다마는, 노출 플레이만큼은 어떻게 해도 익숙해지지 않더군.”

    “……데 파르네세 양과는 꽤나 즐기신 것처럼 보였는데요.”

    “저런. 파트너를 노출시키는 것과 나 자신이 노출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안 그런가.”

    내가 작게 웃었다.

    “여러모로 송구할 따름입니다.”

    청년이 멋쩍게 웃었다. 이쪽의 사생활을 멋대로 훔쳐본 것에 대해 사과하는 것이었다. 서로 성격이 제법 잘 맞았다. 다른 형태로 만났다면 쉽게 친구가 되었을지 모르겠다.

    나는 청년을 현관까지 배웅했다. 달리 표현하자면 전혀 배웅하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나는 이 세계에 불청객들이 연이어 찾아오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고, 솔직히 말해 얼른 나가주었으면 싶었다.

    “제 말은 아무런 위안이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금발의 청년이 나가기 전에 나를 돌아보았다. 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걱정하지 말게. 자네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위안도 똑같이 무의미하니까.”

    “당신께서는 실로 놀라운 일을 해내셨습니다. 단지 외형적인 업적을 거론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께서 보여주신 윤리의 방정식……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데 있어 끝까지 지키신 미학은, 저의 기억에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청년이 허리를 천천히 숙였다. 최대한 경의를 표하려는 듯이.

    “일생의 영광이었습니다.”

    그리고 청년은 저택에서 나갔다.

    “으으음.”

    골치 아픈 일이 일단락되었다는 생각에 시원하게 기지개를 폈다. 문득 여인을 살피니, 망연자실하게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동자에 초점이 사라졌다. 차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이제 말해도 된다.”

    금구의 명령을 풀어주었다. 금기가 해제되었는데 여자는 아무런 말을 내뱉지 못했다. 내가 부드럽게 웃었다.

    “지금부터는 언제든지 자살을 해도 괜찮다.”

    “…….”

    “조금은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겠지.”

    절대로 자살을 하지 말라는 명령도 해제해주었다. 죽느냐 사느냐는 이제 온전히 여인의 선택에 달렸다. 삶에 절망하여 자살하는 것, 이를 악 물고 여생을 이어나가는 것. 나는 어느 쪽도 즐겁게 지켜볼 자신이 있었다.

    그날 이후로 여인은 항상 문가에 있었다.

    그녀는 방바닥에 주저앉은 채 멍한 눈길, 의식이 희미해진 눈동자로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가끔 내가 질문을 던져도 대답하지 않았다. 망가진 인형처럼 되어버린 여인은 그 나름대로 감상할 구석이 있었으므로, 나는 별달리 불만스럽지 않았다. 원래 애완동물은 인간의 언어로 떠들지 못하는 법이지 않은가.

    어느 날. 여인이 사라졌다.

    나는 아침에 눈을 뜨고 여자가 가출했구나, 하고 납득했다. 나에게 위해를 끼치는 것을 제외하고 여인은 대부분의 행동에서 자유로웠다. 몇 년은 물론이고 수십 년, 수백 년 동안 바깥 세상을 떠돌아다녀도 무방했다.

    도중에 생뚱맞은 인간에게 살해당해도 괜찮았다.

    그것 역시 인생의 우연에 해당하리라.

    그리고 내가 아침 공기를 마시기 위해 문을 열고 바깥에 나온 순간, 마치 원래부터 그곳에 있었다는 것처럼, 여인이 버드나무에 목을 매단 채 죽어 있었다.

    “…….”

    내가 멈칫했다.

    교살한 시체답게 여인의 외양은 적이 흉측했다. 밧줄이 단단하게 목을 옥죄었으며, 혓바닥이 길게 기어나왔다. 여인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하체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편이 낫겠지. 볼썽사나운 결말이 그곳에 매달려 있었다.

    “그렇게 나왔는가…….”

    내 마음은 놀라우리 만치 평안했다.

    사실 이게 정상적인 해결책임을 알고 있었다. 나 또한 자살을 생각해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수백수천 번. 어쩌면 수만 번 머릿속으로 자살을 그렸다. 이 충동은 그대로 환각에 반영되어, 지금도 그림자들은 내 팔다리를 이빨로 자근자근 물어뜯고 있었다.

    나는 충동을 받아들였고, 여인은 패배했다.

    그뿐이었다.

    “교살보다는 그냥 화끈하게 목을 따는 편이 치우는 입장에서 편한데.”

    내가 투덜거리며 나뭇가지에 걸린 밧줄을 잘랐다. 시체가 요란하게 떨어졌다. 수레를 가져와서 시체를 실었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 무덤까지 만들어줄 이유가 없었기에 충 야산에다 시신을 버렸다.

    “들짐승이나 마물한테 양분이 되려나―.”

    제아무리 외모가 예쁘장하더라도 정신의 근본적인 부분이 허약하면 이렇게 되었다. 썩 안타까웠다. 나는 그렇게 장사를 지내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귀가했다. 나중에 봄이 되었을 무렵 똑같은 장소를 한번 들려봤는데, 유난히 그 부근에만 산벚꽃이 풍성하게 개화해서 조금 흥미로웠다.

    시간이 흘렀다.

    말상대가 없어졌기 때문일까. 나는 혼잣말을 주고받는 간격이 점점 짧아졌다. 그런 현상과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그린 초상화들에서 점차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평범한 환영과 비슷했다.

    ─ 개 같은 놈.

    중얼거림이 들렸다. 바르바토스의 그림이었다. 내가 잠깐이라도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면 초상화들이 기다렸다는 듯 욕설이나 잡담을 지껄였다. 이 착란증상에 나는 여느 때마냥 적당히 대답해주었다.

    “나는 정말 개새끼지.”

    ─ 얼굴에 철판을 깐 새끼.

    “그것도 올바른 지적이야. 그런데 자기혐오로 자위하기에는 우리 둘 다 너무 늙지 않았냐. 조금 새로운 레퍼토리를 들고 와주었으면 고맙겠다.”

    주변이 고요해졌다. 그래봤자 잠시 얌전해지는 것에 불과했다. 캔버스에 집중해서 그림을 그리다보면 어느새 수많은 목소리가 중얼거렸다. 때로는 목소리가 겹치고 또 겹쳐서 어마어마한 소음이 되어 이쪽을 괴롭혔다.

    회화에 입문한 지 1년이 지난 시점에서, 나는 이게 별로 유익한 취미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죽인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린다는 것은 정신건강에 결코 좋지 않았다. 여태까지 환영들이 뚜렷하긴 해도 얼마간 흐물거렸다면, 이제는 초상화에 깃들기라도 한 것처럼 예전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존재감을 과시했다.

    시끌벅적해서 좋았지만.

    시끌벅적하기에 상처가 되는 부분도 틀림없이 있었다.

    시간이 흘렀다.

    노브고로드 화방의 손녀딸이 본격적으로 내 그림들에 눈독을 들였다. 처음 봤을 떄는 분명히 한참 어렸는데 어느새 중학생 나이 정도가 되었다. 얼굴은 전혀 달랐지만, 그 나이대의 데이지가 떠올라서 조금 껄끄러웠다.

    ‘그냥 창고에 박아둬서는 안 돼요!’라고 화방 손녀딸이 강력하게 주장했다. 반드시 역사에 남겨야 한다느니, 인류의 보물이라느니, 사춘기 소녀답게 휘황찬란한 어휘를 총동원했다. 녀석은 보름마다 한 번씩 찾아와서 지치지도 않고 열변을 토했다. 당연히 무시했다.

    시간이 흘렀다.

    유별나게 환청이 시끄러웠다. 나는 그림들을 향해 소리를 질러보기도 했다. 그러면 목소리가 잠시간 잦아들었으나, 또다시 기세를 살려서 내게 온갖 저주를 쏟아부었다. 어느 날인가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칼로 파이몬의 초상화를 부욱 찢었다.

    그 순간, 귀청이 찢어질 듯한 비명이 울렸다.

    나는 귀를 틀어막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비명은 한동안 계속 이어졌다. 목소리에 피가 맺힌 비명, 처절한 저주가 묻어나오는 비명이었다. 나는 한참이 지나서야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아, 아아.”

    내가 파이몬의 초상화를 끌어안았다. 정중앙이 날카롭게 찢어발겨진 그림에서는 당장이라도 핏물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내 몸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어느 날은 아침에 일어나보니 라피스의 초상화가, 라우라의 초상화가, 바르바토스의 초상화가 갈가리 찢겨져 있었다.

    나는 내가 잠든 시간을 통제할 수 없었다. 이 사실이 분명해졌다. 따라서 나는 영원히 잠이 들지 않기로 결정했다. 괜찮았다. 이 신체는 견딜 수 있었다. 나의 의식도, 아마 참을 수 있었다.

    시간이 흘렀다.

    시간이 흘렀다.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리리플]

    라쉬나르// 얍얍.

    물고기인간// 어찌할 도리가 없는 남자입니다.

    NineBreaker// 예, 그렇습니다.

    울반// 껄껄껄.

    바람귀공자// 그런 무서운 단어를 쓰시다니... 저는 두렵습니다 ;ㅅ;

    heybro// 욥욥.

    no name// 결국 다시는 계약서를 작성할 일이 없어졌습니다.

    asd메이지// 속지 마십시오. 함정일지도 모릅...

    수천천사// 단탈리안도 어떤 의미로든 최악이지요.

    바람귀공자// 캐피탈리즘,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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