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96화 (495/510)
  • <-- 지키는 자 --> 『496』

    * * *

    한동안 내 캔버스에는 한 명의 소녀만 등장했다.

    하얀 백발. 이제 막 땅에 내려앉은 것처럼 새하얀…….

    그녀의 죽음을 인식했기 때문일까. 어느 순간부터 바르바토스도 환영이 되어 서 있었다. 바르바토스는 언제나 나한테서 멀찍이 떨어진 채 나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무표정하기도, 무언가 불만족스러운 것 같기도 했다.

    설마 파이몬 때문일까.

    파이몬이 내 등에 딱 달라 붙어 있어서 바르바토스가 다가오지 않는다는 상상을 하자,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정말이지 환각이 되어서도 사이가 나쁜 녀석들이었다. 결국 두 사람의 불화가 나를 나락으로 떨어트렸다. 하지만 이제는 그걸 갖고서도 농담을 할 수 있었다.

    여전히 심장이 죄여오긴 했지만.

    이건 내가 앞으로 계속 가져가야 할 자국이었다.

    “또라이 새끼. 너 지금 일주일 내내 그림만 그리고 있는 거 알아?”

    여인이 말했다. 그녀는 화실 저편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이 공간에서 가장 작은 부피만 차지함으로써, 자기가 본래 이런 장소에 있어야 할 사람이 아님을 주장하는 것 같았다. 철저히 방관자가 되고 싶은 심정이겠지.

    “그래봤자 허구의 인물이라고. 아니, 그래. 좋아. 네 미친 주장에 동의해서 진짜라고 치자. 그러면 뇌수를 변기물로 채운 새끼야. 오히려 더욱 더 소원을 빌어야 하는 거 아니야?”

    “아서라. 허벅지에 구멍 한번 더 뚫리겠다.”

    “……진짜로 의문이 들어서 그래. 그 아이들이 진짜처럼 소중하다면 되살리는 게 좋잖아.”

    협박이 통했는지 목소리에서 날카로운 감이 사라졌다.

    내가 남아일언중천금의 격언을 반드시 지키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슬슬 알아준 듯했다. 나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밑그림에 색채를 더했다. 바르바토스는 표정이 다양해서 좋았다. 화난 얼굴, 무뚝뚝한 얼굴, 웃는 얼굴. 모두 바르바토스다웠다.

    일주일은커녕 백 년이 넘도록 주구장창 바르바토스만 그려도 질리지 않으리라. 확신이 들었다.

    “되살려서 뭐 어쩌자고. 그런다고 내 잘못이 사라지나.”

    “어차피 너한테 쪽도 못 쓰는 것들 아니야? 네 곁에 머무르는 게 허락되기만 해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좋아할 것 같은데. 야. 이러지 말고 내 말에 귀 좀 기울여줘. 정말 아무것도 복수하지 않을게. 나만 풀어주면…….”

    붓을 멈추었다.

    동시에 여인도 입을 다물었다.

    내가 고개를 돌려 여자를 쳐다보니, 그녀가 침을 삼켰다. 이쪽이 그림 그리는 걸 멈추고 사냥용 창을 가지러 오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었다. 좋은 현상이었다. 생명체가 경계심을 품고 자숙하는 것은 극히 올바랐다.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말해두지. 나는 딱히 그녀들한테 용서를 구할 생각이 없어.”

    “……그럼 왜.”

    “우리 사이에 의견의 차이가 꽤 심하군. 다른 사람한테 사과해야 하는 일을 구태여 왜 하는가?”

    여인이 고운 이마에 눈썹을 찡그렸다. 내 얘기를 알아듣지 못한 기색이 역력했다.

    “생각해봐라. 누군가가 고의로 살인을 범했다. 그런데 나중에 가서 유족에게 사과하는 것이다. 죄송합니다. 당신의 소중한 아이를 죽여서 죄송합니다……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뭐가?”

    “마치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처럼 들리거든.”

    내가 싱긋 웃었다.

    “죽여서 죄송합니다. 후회하고 있습니다. 다시는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겠습니다. 만약 그때로 되돌아간다면, 절대로 살인 따위는 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충 뉘앙스가 그렇지. 한 마디로 말하자면 실수였다는 얘기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게 이해되지 않았다.

    “자네는 자기 자신이 누군가의 실수로 인해 죽는 것을 납득할 수 있는가.”

    “…….”

    “납득할 수 없겠지. 거기에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을 자기가 칼로 찌른다……대체 여기의 어디에 실수라는 게 있나? 고의밖에 없다. 나는 살인과 같이 중대한 행위에 대해 사과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네.”

    탁자에 놓인 포도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참고로 수레를 엎은 바로 다음날에 양조장을 다시 순회했다. 알코올 없이 버티기에는 하루가 잔인하리 만치 길었다. 나는 그런 놈이었다. 음식물 쓰레기라고 불러도 무방했다.

    “나는 실수로 그녀들을 죽이지 않았어. 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 있어서 똑같은 상황에 처하더라도, 나는 똑같이 행동할 것이다. 한 번, 두 번, 세 번, 몇 번이고. 똑같은 의도와 똑같은 목적을 가지고 끊임없이 되풀이할 것이야.”

    당연했다.

    나는 결코 충동적으로 살인과 학살을 행하지 않았다. 상황을 이해하고. 위험을 인지하고. 가장 효과적인 해결책으로서 살인과 학살을 선택했다. 순수하게, 정말로 순수하게 의도된 행위였다.

    '다른 선택도 가능했다'라는 가정 따위는 불필요.

    설마하니 내가 실수로 파이몬을 죽였겠는가. ‘파이몬이 실수로 살해당했다’라는 문장을 감히 내가 허락할 것 같은가. 절대로 용납하지 못했다.

    “자네는 내가 왜 파이몬을 손수 죽였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군.”

    “……당신, 계속 후회하고 있잖아.”

    “회한이야 남지. 사라지지 않을 것일다. 그러나 사죄는 없다.”

    지금까지 걸어온 모든 선택이 나를 의미했다.

    나는 나 자신을 받아들였다.

    이제 와서 시간을 되돌리거나 나의 선택을 번복하는 것은, 자기기만 이외에 다른 무엇도 아니었다. '참회하는 단탈리안'이라니. 이게 대체 무엇인가. 형용모순에도 이만한 말장난이 따로 없었다.

    “지금 와서 털어놓는 말이다만, 나는 자네를 별로 원망하지도 않는다. 어차피 소시민으로 빌빌거리며 살다가 끝날 인생이었지. 이곳에 와서야 나는 아름다운 사람들과 만났다. 솔직히 감사를 표하고 싶을 정도다.”

    “그, 그런데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조금 마음에 안 들어서.”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전부 모니터링을 했다면서 여인은 허구라느니 가상이라느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지껄였다. 근성이 썩었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이래 봬도 나는 세상에서 제일 윤리적인 남자였다. 여인과 같이 비윤리적인 인격 미달자를 볼 때마다 훈육하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렸다. 그래. 말하자면 나는 손수 수고를 들여가며 악동을 교육하는 교사. 이 시대의 참된 스승이었다…….

    “자네도 허벅지에 창을 쑤시면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지 않나. 그 아픔이 가짜라면 왜 비명을 지르고 제발 그만하라고 애원하는가?”

    “나는…….”

    “여기 있는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일세. 쑤시면 아파하고, 잃으면 슬퍼하고, 되돌이키면 후회하며, 바라보면 웃어주지. 나는 그런 것을 진실이라고 부른다네. 외부의 실재성 따위는 편견에 사로잡힌 구도야.”

    내가 혀를 찼다.

    “그런데 가짜라고 매도하다니. 배려심이 부족해도 너무 부족했지. 부디 인격 수양하러 외딴 곳에 왔다 생각하고 천천히 살아보게나.”

    “……후회할 거야. 내 부하들이 당신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어. 당신이 자신만만하게 떠들어댈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어.”

    내가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 던졌다.

    단검이 방바닥에 챙, 하고 떨어지자 여인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내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 뭐야?”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직접 단검으로 손가락을 하나 자를 것인지, 아니면 나한테 창에 찔릴 것인지. 시간은 여유롭게 1분을 주도록 하지.”

    여인이 멍하게 이쪽을 쳐다보았다.

    이제는 헛소리를 그만하라는 둥의 얘기가 나오지 않았다. 내가 언제나 성실하게 진심을 다해서 살아가는 남자임을 여자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다만 으, 아, 하고 단검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빙그레 웃었다.

    “30초 남았네.”

    “…….”

    여인이 부들거리는 손으로 단검을 쥐었다. 아직 검을 들었을 뿐이지 차마 내리찍지는 못했다.

    “10초,”

    10초를 부르고서 나는 친절하게 9초, 8초, 하고 카운트 다운을 알려주었다. 여자가 마침내 단검을 찍은 것은 4초가 남은 시점이었다. 살덩이가 썰리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읍……!”

    놀랍게도 여인은 비명을 참아냈다. 고통이란 결코 익숙해질 수 없었는데, 저건 나에게 비명소리를 들려주고 싶지 않다는 일념 아래 극복한 것이었다. 내가 손뼉을 두들겼다.

    “멋지군. 나도 모르게 감탄했어.”

    “하, 흐아……흐윽…….”

    여인의 뺨에 눈물이 한 줄기 흘렀다. 비명은 참았지만 격통에 의한 눈물은 억제하지 못했는가. 마무리가 다소 아쉬웠다. 나는 박수를 멈추고 화실 구석으로 걸어갔다. 사냥용 창이 걸려 있는 벽면으로.

    “왜, 왜 그래……?”

    여인이 왼손을 감싸며 나를 바라보았다.

    “뭐야. 왜 그래. 나 잘랐어. 잘랐다구. 봐봐, 잘 보라니까……!”

    여자가 왼손을 보여주며 울먹거렸다. 확실히 새끼 손가락이 절단되어 있었다. 검은 핏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여인은 내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덜덜 떨면서 잘려나간 새끼 손가락까지 내밀었다.

    내가 사냥용 창을 들고 어깨를 으쓱했다.

    “1분이 지났다.”

    “어?”

    “미리 약속한 1분이 지나버렸다. 안타깝지만 약속을 지키지 못했으니 대가를 치르는 수밖에 없다.”

    “무슨 소리야! 4초, 적어도 3초가 남았을 때 잘랐어! 분명히 잘랐어!”

    내가 미소를 지었다.

    “거짓말이었네.”

    여자의 표정이 굳었다.

    “사실 10초 느리게 시간을 세고 있었다. 내가 10초를 불렀을 때 벌써 1분이 전부 지났지. 약간의 장난이라고 해야 할까.”

    “거짓, 말…….”

    “자네의 소중한 손가락이 달린 문제였는데 시간 정도는 자네가 스스로 세었어야지. 쯔쯧. 이런 일에서 타인을 믿는다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지 모르는가. 아직 인생을 헛살았구만, 헛살았어.”

    나는 창을 날카롭게 세웠다.

    여자가 바닥에 엉덩이를 끌면서 뒷걸음질을 쳤다.

    “그, 그만……제발 그만…….”

    “안타까워. 딱 5초 정도만 일찍 결단했으면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았을 터이거늘.”

    “제발…….”

    여자의 등이 건물벽에 걸리고 말았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여인이 안색을 창백하게 물들었을 때, 창날이 공기를 날카롭게 갈랐다. 내 화실에는 오늘도 고음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나흘쯤 흘렀을까.

    누군가가 화실의 문을 노크했다. 화방의 노인이 손녀를 보냈나, 하고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생전 본 적이 없는 청년이 양복을 말끔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금발의 청년이 나를 보자마자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예 직각으로 허리를 숙인 채 미동하지 않았다.

    이렇게 정중한 인사는 마왕이었을 때 말고 받아본 기억이 없었다.

    “누구요? 일단 허리를 드시구랴.”

    “그쪽에 감금되어 있는 사람의 부하 직원이 되는 사람입니다.”

    미청년이 난감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상대의 정체를 파악하고 내가 말투를 바꾸었다.

    “아아. 왠지 그런 사람이 온다는 소식은 익히 들었다.”

    “예, 약간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저는 마음대로 들락거릴 수 있을 만큼 권한이 높지 않아서, 상부에 허락을 받느라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쪽도 골치 아픈 일들이 있는 모양이로군.”

    청년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세상이 다 그렇지요. 실례합니다만, 제가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이다. 어서 들어오게.”

    “감사합니다.”

    청년이 또다시 깍뜻하게 인사하고 화방에 발을 들였다.

    여인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방바닥에 누워 선잠을 자고 있었다. 청년의 얼굴을 보자마자 여인이 퍼뜩 일어났다.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희로 빛났다.

    “드디어……! 드디어!”

    여인은 거의 방방 날뛸 기세였다. 그녀가 악의에 번들거리는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았다.

    “너는 끝장이야! 감히 관리자를 무단으로 납치하고 고문하다니! 소원은 무슨 소원, 염병맞을 또라이 새끼! 영원토록 지옥과 같은 고통을 맛보면서 살아가라!”

    “조용히 해라.”

    나의 명령에 여인이 입술을 닫았다. 그녀는 노예각인에 저항하지 못했다. 하지만 표정만큼은 여전히 득의양양해서, 네깟 놈이 명령을 내려봤자 어디 계속 내릴 수 있나 보자, 하고 깔보는 느낌이었다.

    “자리에 앉게.”

    “예. 감사합니다.”

    청년도 여인을 모르쇠하며 의자에 앉았다. 내가 우유나 술을 권했지만 정중하게 사양했다. 청년이 진지한 눈으로 말했다.

    “먼저 저희는 귀하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리는 바입니다.”

    ========== 작품 후기 ==========

    [리리플]

    NineBreaker// 저는 거의 언제나 슬픈 장면을 쓰면서 눈물을 찔끔거립니다... S가 아닙니다.

    수천천사// 다음화에 드러납니다.

    망량선사// 단탈리안은 지속-가능한-고통을 신봉하는 친환경주의자입니다.

    asd메이지// 독자 여러분들이 단탈리안을 위로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저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상을 느낍...

    Omicron// 바르바토스 ;ㅅ;

    호박호박// 행복이라니 그게 뭘까요-.

    pourh// 예, 순위권입니다.

    류파// 달동네 작품이라니요 ?_? 요즘 달동네에 연재하는 글은 없습니다.

    ginrneves// 단탈리안은 개인적으로 복수가 아니라 교화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에르시리나// 지각해서 송구합니다 ;ㅅ;

    오늘도 늦어서 죄송합니다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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