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95화 (494/510)
  • <-- 지키는 자 --> 『495』

    시간은 유구하게 흘렀다.

    사람이 집안에서만 지내면 시간 감각이 이상해졌다. 하루가 나흘처럼 느껴질 때도, 일주일이 반나절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애완동물을 기르는구나 싶었다.

    “오늘은 치즈 샌드위치이다만.”

    “…….”

    애완동물을 키우면 주기적으로 밥을 주고 물을 주어야 했다. 시간에 일정한 기준이 생겨났다. 책임감이 생겼다. 하루가 하루로 정해졌고, 사흘이 사흘로 정해졌다. 진기한 역학관계가 아닌가. 겉으로 보기에는 사람이 애완동물을 돌보는 것 같아도, 사실은 애완동물이 사람을 돌봐주는 것이었다.

    “안 먹느냐? 제법 맛있는데.”

    “퉷.”

    오랜만에 만들어본 요리에 여인이 침을 뱉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마도 여자는 식사에도 물에도 입을 대지 않음으로써 자살을 꾀하는 것 같았다. 현명하다고 해야 할까. 악바리 근성을 지녔다고 칭찬할까. 이대로 어이없이 자살해버리면 곤란했다.

    그래서 노예각인을 박아버리기로 결정했다.

    “싫어! 제발, 아, 그것만은……반항하지 않을 테니까! 얌전히 있을 테니까……!”

    “나는 오래 전부터 확고한 철학을 가지고 있지.”

    탁자로 간이 수술대를 만들어서 여인을 고정시켰다.

    혹시라도 쇼크로 죽어버릴까봐 값비싼 마법 아티팩트까지 동원했다. 반마법에서 치료 및 재생과 관련된 마법만 잠시 허용한 다음, 수술대에 강력한 회복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포션까지 왕창 준비했으니 만에 하나 여인이 수술 도중 죽어버릴 가능성은 낮았다.

    이로써 초보자도 안심하고 심장에 각인을 새겨박을 수 있습니다―.

    초강력 회복 마법진, 단돈 금화 삼백 장. 단돈 금화 삼백 장에 여러분을 모시겠습니다. 질병에 대해서는 효과가 거의 없으니 주의해주십시오―.

    홈쇼핑 광고를 하는 느낌으로 흥얼거렸다.

    “바로 음식을 함부로 다루는 녀석은 짐승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이 밀빵에는 말이다. 수 개월씩이나 공을 들여 밀을 수확한 농부의 마음씨가 담겨 있고, 밀가루를 곱게 빻아서 빵으로 만들어낸 정성이 스며들어 있다.”

    “죽여버리겠어! 정말로 죽여버릴 거다, 개새끼야!”

    “인성이 덜 되었군.”

    내가 혀를 쯧쯧 찼다.

    “뭐, 걱정하지 말게. 이래 봬도 각인 수술은 완전히 초짜가 아니라서.”

    제레미가 수술하는 모습을 몇 번 옆에서 관람했다. 그러니까 한 번. 한 번도 몇 번이긴 몇 번이니 어쩌면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취급받을 수 있지 않을까? 뭐 어떤가. 내가 몇 번이라고 하면 몇 번이었다.

    생각해보니 데이지가 루크를 수술하는 장면도 꽤 자주 돌려보았다. 사실상 나는 수술에 관련해서 프로나 다름없었다. 객관적으로 그러했다. 여인이 걱정해야 할 요소는 어디에도 없었다.

    “음. 여기를 째면 되려나?”

    불에 달군 수술용 외과도(外科刀)로 여인의 살갗을 그었다. 꽤나 자연스럽게 살결이 갈라졌다. 역시 나는 재능이 있는 것일지 몰랐다. 너무 다재다능해도 세상이 시시해져서 난감했다.

    “……!”

    이제는 익숙해진 여자의 비명.

    수술대에 단단히 고정했는데도 여인은 어깨가 들썩거렸다. 비명을 지르느라 목에 힘줄이 도드라졌다. 정말로 아픈 것 같았다.

    “아.”

    마취제를 쓰는 것을 깜빡했다.

    프로로서 이런 실수를.

    무언가가 부족하다 싶었는데 마취향과 마취제가 없었다. 마치 이름을 안 쓰고 시험지를 제출한 학생마냥 부끄러웠다.

    “미안하다. 마취하는 걸 잊어버렸다.”

    “윽, 흐윽……끄으으…….”

    “잠깐만 기다리도록.”

    나는 여인을 내버려둔 채 집안을 뒤적거렸다. 등잔에 마취향을 피웠다. 곧이어 화실이 매캐한 향내로 가득 찼다. 마취제도 여인한테 적당히 투입했다. 내가 만족스럽게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완벽하군.”

    나 자신의 철두철미한 준비성에 전율했다.

    마취제 성능이 그리 뛰어나지 않아서 고통이 막 안 느껴지고 그럴 수준은 아니었다. 그래도 조금 뜨끔거리는 정도에 불과하지 않을까. 아직도 인간적인 배려심이 이만큼이나 갖추어져 있다는 사실에, 이 아저씨, 감동스러워서 찔끔 눈물이 나올 뻔했다.

    나는 흐뭇하게 여인의 생살을 찢었다.

    “크으……아아아아악!”

    음.

    분명히 마취제를 덕지덕지 발랐는데도 상당히 고통스러운 듯했다. 혹시 그거인가. 선천적으로 마취제와 체질이 맞지 않는 것인가. 안타까웠다. 모처럼 따뜻하게 배려해주었는데 소용이 없어지다니.

    물론 개인의 비극이 역사적인 변증법을 막아서기란 불가능했다. 세상이란 그렇게 생겨먹었다. 따라서 나는 혁명을 이끌어나가는 투사와 같은 심정으로, 천천히, 최대한 공을 들여서 여인의 내부를 휘저었다.

    “……이건 심장처럼 보이지 않는데. 혹시 폐인가.”

    “으, 끄으읏…….”

    아주 약간 실수도 저질렀지만.

    “이건 도대체 알아볼 수가 없는 내장 기관이로군……별로 중요하지 않을 테니 없어도 상관없겠지? 체중은 적당히 가벼운 편이 좋다는 속설도 있고 말이다.”

    “…….”

    괜찮았다.

    인간이 완벽할 수는 없었다.

    수차례의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마침내 수술이 완료되었다. 첫 경험치고는 대단히 만족스러운 성과였다. 노예각인은 확실하게 여인의 심장에 새겼다. 여자의 몸이 핏물과 포션으로 범벅이 되었다마는, 결과가 좋으므로 만사 오케이.

    그날부터 굳이 여자를 쇠사슬로 묶어두지 않았다.

    자살하지 못하도록 단단히 명령 체계를 만들었기에 염려할 까닭도 없었다. 진즉에 노예각인을 새겨두자는 내 선택은 과연 훌륭했다. 여인은 때때로 내게 강렬한 적의를 표시했지만, 허벅지와 종아리가 마흔네 번쯤 뚫리자 적의는 공포로 물들었다.

    내 일과는 극히 단순했다.

    일단 술을 마신다.

    일어나서 그림을 그린다.

    다음에 술을 마신다.

    적당히 여인과 '대화'하며 사회성을 유지한다. 사회성이 곧 사람의 인격이다. 일정한 인격을 유지하는 데 대화는 거의 필수적이다.

    그리고 술을 마신다.

    수레에 위스키를 가득 실어서 사온 게 어제 같았거늘, 벌써 동이 났다. 어쩔 수 없이 노브고로드 시내까지 수레를 몰고 갔다. 양조장을 다섯 군데 들리면서 고급스러운 술은 죄다 쓸어담았다.

    도시의 거리를 지나치는 길.

    여느 때마냥 남정네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에. 마왕 바르바토스가 처형되었다지 뭔가.”

    “네놈이 말해준 덕분에 똑같은 걸 네 번이나 듣게 되었구나.”

    “불사신의 악신도 죽는 날이 오는군. 신기한 시대야.”

    “…….”

    수레에서 위스키병을 한 개 꺼내 들었다.

    나는 한손으로 병나발을 불고, 다른 한손으로 수레를 끌었다. 중심가에서 멀어질수록 길이 울퉁불퉁해졌다. 당연히 한손에 의해 끌려가는 수레도 심하게 요동쳤다. 하지만 나는 병나발 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 앞으로 바르바토스 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 그냥 반말 써, 애송이 새끼야. 지금 내가 네보다 나이 많다고 깔보는 거야? 경로우대 따위 엿이나 처먹으라지.

    적어도.

    ─ 알겠어, 바르바토스. 나는 단탈리안이야.

    ─ 좋아. 내 이름은 바르바토스. 좋을 대로 부르라고, 애송이.

    적어도 내 손으로 직접 죽이고 싶었다.

    수레가 균형을 잃고 옆으로 엎어졌다. 술통과 술병이 와르르 땅바닥에 쏟아졌다. 무려 절반 가량의 술병이 깨져버렸다. 흙길에 투명하거나 노란 액체가 흘러내렸다. 돈이 아까운 광경이었다.

    “…….”

    내가 술병을 주우려고 무릎을 굽혔다.

    나는 약간 흐느적거리는 손으로 유리병을 들었다. 수레에 옮기려고 하는데, 그만 도중에 병을 놓치고 말았다. 병이 떨어지면서 또 깨졌다. 나는 무표정하게 땅을 내려다보았다. 이런 아까운 짓을.

    술은 비쌌다.

    병은 깨지면 되돌릴 수 없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대로 주웠어야 하는데.

    그걸 못했다.

    “…….”

    술병을 집었다.

    또 떨어트렸다.

    다시 술병을 집었다.

    떨어졌다.

    떨어졌다.

    떨어졌다―――.

    “…….”

    어느새 주변이 깨진 유리조각으로 뒤덮였다.

    어째서일까.

    왜 값비싼 물건은 쉽게 깨져버리는가.

    소중한 것일수록 단단해야 정상일 텐데.

    나에게는 오히려 정반대로, 소중할수록 간단히 망가졌다.

    “아…….”

    심장이 꾹 조여왔다.

    숨이 몹시 가쁘게 변했다. 호흡이 힘들었다. 의식적으로 숨을 내쉬고 내뱉을 때마다, 마치 철사에 꿰인 것처럼 심장이 고통스러웠다. 나는 오른손으로 가슴팍을 쥐었다. 의식할 사이도 없이 등이 저절로 굽어졌다.

    “…….”

    숨을 토한다.

    나의 호흡이 내게 헛구역질을 일으켰다.

    “……바르바토스.”

    무척이나 불안정한 목소리가, 내 입술에서 새어나갔다.

    그것은 토해내야만 하는 무언가였다. 그녀의 웃음소리. 그녀의 발소리.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를 짓는 모습. 화내는 얼굴. 한없이 장난스럽고, 그렇기에 한없이 진지했던 그녀의 모든 숨결을.

    “……바르, 바토스…….”

    토해내야만 했다.

    통제할 수 없었다.

    꼴사납게도 눈가에서 뜨거운 것이 흘러나왔다.

    “바르바토스…….”

    녀석이 보았다면 마음껏 비웃었겠지.

    이제는 나를 비웃어줄 사람조차 없었다.

    “…….”

    이윽고 온몸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단 한 번만이라도 좋았다.

    한 번만이라도, 바르바토스의 웃음을 듣고 싶었다. 그녀는 웃음으로써 모든 것을 가볍게 만들어주었다. 지금의 나는 너무나 무거웠다.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침몰해버리는 배처럼.

    나에게는 바르바토스가 필요했다.

    ─ 차라리, 나랑 도망쳐……!

    ─ 마계 어디론가……사람의 발길도 마물의 발길도 닿지 않는 곳으로 가서……수백 년을, 천 년을 지내다보면 전부 다 괜찮아질 거야.

    내가 어리석었다.

    조금 더 어리석어서 바르바토스의 제안에 넘어가야만 했다. 내가 속아 넘어가도록, 나 자신을 내버려두어야 했다. 단지 그것이 불가능했다.

    도저히 불가능했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힘없이 고개를 들어보니, 주위가 컴컴했다.

    인적 드문 흙길에서 혼자 주저앉다니. 자살을 희망하는 것에도 정도가 있었다. 들짐승이 나타나서 물어뜯지 않은 것만으로도 천운이었다. 이바르가 만들어준 몸이 간단히 당해줄 리 만무했지만.

    나는 수레를 그대로 방치하고 터덜터덜 걸어갔다.

    저 멀리서 나의 저택이 보였다.

    어쩌면, 저 안에 바르바토스가 있었을지 모른다. 내 선택에 따라 그렇게 되었을 가능성도 틀림없이 있었다. 내가 술에 취한 채 집문을 열고 들어가면―――왜 자기는 빼놓고 혼자서 맛있는 거 마시면서 다녔느냐고, 잔뜩 화를 낼 그녀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

    나는 저택에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집문에 등을 기대고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마음속에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 안에서 무언가가 죽은 것일까. 놀라웠다. 아직도 죽어야 할 무언가가 남아 있었다. 늦가을의 벌레들이 어디선가 고요하게 울어댔다.

    나는 현관에서 잠이 들었다.

    “…….”

    아침.

    따가운 햇빛에 눈이 뜨였다.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떠올렸다. 곧바로 생각이 났다. 그러자 가슴이 또다시 차가워졌다. 나는 이걸 영원히 품고 가야겠지. 계속해서 품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나는 잊어버리지 않는다.

    절대로 망각하지 않는다.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집문을 열고 들어가자, 여인이 깜짝 놀라서 이쪽을 쳐다보았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무시하고 의자에 앉았다. 문득 천장에서 술병을 꺼내올까 하다가 어제 자신이 저지른 일이 생각났다.

    “…….”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음악이 연주되다가 끊겼을 때의 공백과 같이.

    천천히.

    느리게.

    ========== 작품 후기 ==========

    [리리플]

    xusaku// 비너스빤스 히로인설이라니 독자 여러분의 생각에 저는 몸을 떱니다...

    amoeba// 얍얍.

    shuradin// 욥욥.

    호박호박// 그야말로 지옥道.

    NineBreaker// 자기가 직접 모니터링하지 않고 부하의 보고서로 보는 바람에.(...)

    물고기인간// 아마 그것과 관련한 얘기도 나올 것 같습니다.

    수천천사// 단탈리안은 의외로 여인을 증오하지 않습니다.

    오룔리// 그것 말고도 또다른 이유가 있지만, 너무나 심리적인 이유이기 때문에 작중에 서술될지 모르겠습니다.

    circle0810// 덜덜덜덜.

    에르시리나// 아마도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으으, 한참 지각해서 죄송합니다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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