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94화 (493/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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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도 안 돼. 그런 거, 가능할 리가 없어.”

    “신기하게도 나한테 당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레퍼토리를 쓴다만. 혹시 자네들끼리 미리 대사를 약속해두거나 그런 것 아닌지 의심스럽네.”

    내가 화실 구석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설산의 오두막에서 챙겨온 가방이.

    가방 속을 뒤져서 쇠사슬을 꺼내었다. 마력의 운용 자체를 방해하는 쇠사슬이었다. 그걸 챙겨서 다시 여자에게 다가섰다. 쇠사슬이 바닥에 끌리면서 날카롭고 불길한 소리를 냈다.

    “염병할 개자식. 이딴 짓거리를 저질러놓고 무사할 것 같아……?”

    “글쎄. 세상 일이란 것이 본래 태반은 도박이니 말이다. 일단 상황이 흘러가는 걸 보아하니 내가 아주 패배한 것 같지는 않아. 뭐, 성공할 확률이 조금 더 높다고 점쳤다네.”

    “내 부하들이 전부 모니터링하고 있어……지금 당장 머리를 처박고 사죄해!”

    “오호라. 그거 참 무섭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내가 잠이 들 때마다 데이지가 곧잘 불러준 노래였다. 데이지에 비하면 노래 실력이야 끔찍할 정도로 형편없었지만. 나는 음정과 박자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멜로디를 불렀다.

    “미리 경고하는데 얌전히 있어라.”

    내가 쇠사슬을 들고 여인에게 가까이 접근했다. 양손은 단검으로 찍어 내렸으니 우선 발목부터 쇠사슬로 묶을 계획이었다. 그런데 쇠사슬에 달린 수갑으로 발목을 봉쇄하려 들자, 여인이 이쪽으로 발길질을 날리는 것 아닌가.

    “어이쿠야.”

    까닥 잘못했으면 머리가 정면으로 차일 뻔했다.

    여인은 눈물이 맺힌 눈동자로 나를 쏘아보았다. 고통 때문일까, 치욕 때문일까. 그녀는 이빨을 으드득 물었다. 목소리가 씹혀서 너덜너덜해진 채로 새어나왔다.

    “내 몸을, 건드리지 마.”

    “…….”

    한숨을 쉬었다.

    이런 경우에 나는 카리스마의 부재를 실감했다. 바알이나 아가레스, 바르바토스, 심지어 파이몬조차도 목소리에 일종의 언령(言靈) 같은 것이 깃들었다. 당장이라도 심장이 날것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맥박치는 것. 위압감. 상대방으로 하여금 저절로 당신의 명령에 수긍하게 만드는, 수긍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힘이 있었다.

    나한테는 아무래도 그런 게 부족했다. 좋게 말하면 부드러운 남자였고, 나쁘게 말해서 쉬운 남자였다. 항상 상냥하게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하는 나의 이 마음을 왜 세상 사람들은 몰라주는 것일까.

    성의의 문제인가. 역시 성의를 보여야 하는 것인가.

    내가 벽면에 장식용으로 걸린 창을 빼왔다.

    “어?”

    굵기가 상당히 얇은 창이었다. 천성이 부드러운 나조차도 손쉽게 들 수 있을 만큼 가벼웠다. 대인무기라기보다 사냥에서 멧돼지를 잡을 용도로 쓰는 무기였다.

    “잠깐……잠깐만.”

    따라서 나는 동물에게 창날을 내리찍는 기분으로 여인의 허벅지에 창을 꽂았다. 푸욱, 하고 근육이 헤집어지는 감각이 창대를 타고 손바닥에 전해졌다. 질긴 근육에 가로막혔는지, 아니면 뼈에 걸렸는지, 창날은 도중에 멈추었다.

    “아아아아악―――!”

    내가 창날을 뽑았다. 검붉은 구멍에서 하수구가 역류한 것마냥 핏물이 흘러나왔다. 창이 빠질 때 다시 근육을 엉망진창으로 긁은지라, 여자의 비명은 더욱 더 격해졌다.

    방바닥에 창을 던졌다. 창대가 두어 번 튕기더니 또르르 굴러갔다. 나는 오른손으로 여인의 턱을 잡아서 이쪽으로 비틀었다. 극심한 고통으로 인해 여인의 입에서는 침물이 흐르고 있었다.

    “미리 경고하지 않았는가.”

    “으, 아으……끄윽…….”

    “나는 자네를 죽이지 않을 것이야. 내가 죽어야만 이 세계가 마무리된다고 말했지. 자네도 똑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네. 이쪽 세계에서 죽여본들 멀쩡히 저쪽에서 살아나겠지. 그건 내가 바라는 구도와 조금 거리가 멀다.”

    나는 왼손으로 그녀의 허벅지를.

    구멍이 뚫린 바로 그 근처를 손바닥으로 강하게 눌렀다. 여인이 경기에 떨었다. 안면 근육이 통제되지 못해 제멋대로 경련했으며, 당장 정신이 나갈 것마냥 눈동자가 조금 뒤집혔다. 끄윽, 꺽, 하고 신음이 쉴 새 없이 튀어나왔다.

    “딱 죽이지만 않고 고통을 안겨줄 계획이다. 하지만 나에게 얼마나 협조적으로 나오느냐에 따라 고통의 정도가 덜해질 수는 있지. 가령, 지금처럼 상처 근처를 주물럭거리는 정도에서.”

    검지를 상처 구멍에 푹 집어 넣었다.

    다시 비명.

    불쾌한 따뜻함이 손가락을 에워쌌다.

    “이것처럼 상처를 직접 헤집는 정도까지. 다양한 수준의 고통이 마련되어 있다. 태도와 반응의 문제라네. 아무리 삶이 괴롭다지만 적어도 괴로움을 경감하기 위해 뛰어다니는 것이 우리의 본분 아니겠는가.”

    “……, …….”

    여인의 뺨이 덜덜 떨렸다.

    고개를 끄덕이지 않은 것이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자존심이리라.

    나는 어느새 눈물로 흥건해진 오른손을 여자의 얼굴에서 거두었다. 한켠에 내버려둔 쇠사슬을 도로 가져와서 상대의 발목에 채웠다. 이번에는 여인도 발길질을 치지 않았다. 아까보다 얌전해진 것 같아 만족스러웠다.

    양다리와 양팔을 의자에 묶었다. 참고로 손등에서 단검은 일단 빼주었다. 단, 곧바로 의자의 팔걸이에 도로 손등을 단검으로 고정시켰다. 자리만 바꾼 것이었다. 여인은 이제 비명을 내지를 기력도 없어 게거품과 함께 신음을 간간히 내뱉었다.

    “그러게 처음부터 대화로 풀었으면 얼마나 좋았는가.”

    “……새끼가……네가, 먼저…….”

    “미안하네. 나는 내가 듣기 좋아하는 말만 듣는 습관이 있어서.”

    여인이 입을 다물었다. 눈빛이 아직 형형하게 살기를 품었다. 분위기를 환기하려고 농담을 던졌을 뿐인데 반응이 시원치 않았다. 이래서 조크를 모르는 사람은 상대하기 곤란했다. 사회성이 조금 부족했다.

    실수로라도 출혈과다 때문에 죽으면 안 되었으므로 상처에다 포션을 흘려주었다. 손등에 칼날이 찍힌 채 살갗이 재생되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뼈가 하나 더 생기는 느낌일까. 경험해보지 못해서 모르겠다.

    “으음.”

    내가 찬장에서 특별히 고급스러운 위스키를 꺼내왔다. 여기서 위스키는 최근에야 조금씩 퍼지기 시작한, 이른바 유행 상품이었다. 포도주와 맥주만 취급하는 나에게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유리잔에 따라서 한 모금 머금자 달콤한 향기가 올라왔다.

    “이건 이거 나름대로 괜찮은걸.”

    “…….”

    맞은편에 앉은 나를 여인이 노려보았다. 포션 덕분에 조금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나한테서 뭘 얻으려는 거야.”

    “음?”

    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여인이 입술을 깨물었다.

    “시치미 떼지 마. 교섭을 하고 싶으니까 나를 잡은 거잖아. 시발, 너는 지금 헛짓거리를 하는 거야. 눈 감고 자살하기만 했으면 안 그래도 네놈이 바라는 걸 전부 들어주려고…….”

    “무언가 착각을 하고 있군.”

    내가 혓바닥을 위스키로 적셨다. 확실히 포도주나 맥주보다 도수가 높았다. 앞으로는 이쪽을 애용해야겠다.

    “나는 그쪽에 바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뭐?”

    “그저 내가 아무 짓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그쪽에서 찾아오지 않을까 싶어서 대비해두었을 뿐이다.”

    술이 맛있었다.

    다만, 그렇다. 안주가 부족했다. 여기에 닭꼬치가 있었으면 정말로 어울렸을 텐데. 파까지 곁들면 더할 나위가 없는 안주가 완성될 것이었다.

    “다행히 예상이 적중했지. 이것저것 준비한 게 쓸모없어지지 않아서 마음이 놓이는군. 기뻐해도 좋네. 자네는 대접하는 맛이 있는 손님이야.”

    “무슨 소리야……아까부터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

    여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혹시 나 혼자서 고급스러운 술을 홀짝여서 기분이 상한 것일까. 미안하지만 이건 양보할 수 없었다. 나는 술에 관해서는 라피스한테도 두세 번밖에 양보하지 않았다.

    “당신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지 모르는 거야? 1위라고. 수십만 명, 수백만 명, 온갖 세계에서 고르고 골라서 뽑은 대행자들 중에서 압도적으로 1위의 기록을 세웠어! 너는 아무 소원이나, 거의 무한정에 가깝게 풀어낼 수 있어.”

    “내 자존심을 높여줘서 고맙네. 이미 높아질 대로 높아져서 별로 도움은 안 되지만.”

    “어떤 소원도 이루어질 수 있다고!”

    여인이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초면부터 알아차린 사실이다만, 이 여자는 단단히 히스테리성 인격장애에 시달리는 것 같았다. 약간 불쌍했다. 젊은 처자가 어째 저렇게 망가졌을꼬.

    “네가 사랑했던 인물들을 전부 현실에 불러들일 수 있어.”

    “흥미롭군.”

    “단순히 외형과 성격만 닮은 게 아니야. 네 자식이랑 나눈 기억도 전부 그대로 살려둔 채……그야말로 궁궐과 같은 저택에서, 보통 하등한 것들이 절대로 누리지 못할 행복과 쾌락을 만끽하면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어.”

    “꽤나 구미가 당기는구만.”

    문제는 닭꼬치였다.

    닭꼬치가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은가, 머저리. 위스키는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이대로는 아예 안주도 없이 술병을 비워버릴 확률마저 있었다. 아니다. 그런가. 그런 수가 남아 있었는가. 한 병을 더 가져오면 문제가 말끔하게 해결되었다.

    여인의 표정이 초조해졌다.

    “그, 그게 싫으면 이 세계를 네 마음대로 조작해도 돼. 과거에 돌아가고 싶어? 네가 했던 행동을 바꾸고 싶어? 전부 가능해. 상부에 보고하기만 하면 네 관리 아래로 떨어지는 건 정말로 시간문제야.”

    “참으로 고마운 제안이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위스키를 두 병 가져왔다. 그러했다. 사람에게는 놀랍게도 손이 두 개나 달려 있었고, 고로 술병을 동시에 두 개나 가져온다는 업적이 가능했다. 이 얼마나 경이로운가.

    “참. 그런데 닭꼬치를 소환하거나 그런 재주는 불가능한가?”

    “…….”

    어째서인지 여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역시 어려운 요구였나.

    여인은 나에게 개입하지 않는 것이 유익하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여인이 개입했을 경우에 그 사실이 자동으로 기록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자세한 내막이야 내가 알 도리가 없었지만, 여인은 이 세계의 시스템을 속일 권한이 없었다. 일종의 초월적인 존재처럼 행세할 수 없다는 얘기였다.

    아마도 나를 관찰하는 것만이 허락되었겠지. 혹은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서 조작하는 것만이 가능했으리라. 지금처럼 내부에 속해버린 이상, 여인은 신과 같은 권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애당초.

    내가 술에 취해서 약해진 틈을 일부러 노리고 찾아올 '필요'가 있었다는 점에서.

    여인은 자신이 가진 카드패의 절반을 이미 나에게 들켜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이런 걸 말해줄 의리는 없었다. 세상이란 신기했다. 누군가는 가볍게 일견하기만 해도 알 수 있는 사실을, 다른 사람은 전혀 모른 채 그저 상황에 따라 순응했다. 여인도 절찬리에 잘난 척을 하고 있었지만 똑같았다. 도대체 어디까지 나를 얕보는 것일까.

    “그럼, 왜 나를 잡은 거야.”

    “진즉에 말하지 않았는가. 대화 상대가 필요했다고.”

    내가 새로 개봉한 위스키를 술잔에 졸졸 따랐다. 갈빛이 감도는 황색 액체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나는 알코올 중독자가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애주가였다.

    “나는 이 세계가 끝장날 때까지 조용히 틀어박힐 셈이다. 수천 년이 될지, 수만 년이 될지, 아니면 약간 상상하기 어려워도 억이나 조 단위의 이야기가 될지 아무도 모른다.”

    단탈리안이었을 때와 하는 일은 기본적으로 똑같았다.

    마왕은 살아 있음으로써 마왕성을 지탱한다. 그게 아주 조금 더 규모가 거대해졌다고 보면 되겠지. 나는 살아 있음으로써 이 세계를, 나의 모든 흔적이 남은 이곳을 지킨다.

    언젠가 이바르는 나를 가리켜서 앙골모아의 재림이라고 과장스럽게 칭한 적이 있었다. 어쩌면 예언이란 물건이 실존할지도 모르겠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형태로, 이바르의 비유 아닌 비유는 성립하였다.

    하나의 성을 지키는 자를 만마의 왕(魔王)이라 부른다면.

    하나의 세계를 지키는 자는―――마땅히 만마의 귀신(魔神)이라 불러도 좋겠지.

    이미 나는 단탈리안이라는 자가 죽고 남긴 혼백과 다름없다는 점에서, 앙골모아의 비유는 더욱 절묘했다.

    “내가 아무리 강철과 같은 이성을 가지고 있다 해도 말일세. 억만 년은 조금 생소하지 않겠는가. 자고로 사람이 제정신을 유지하려면 최소한의 말상대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부드럽게 웃었다.

    “세계가 멸망할 때까지 나의 대화상대가 되어주게.”

    “…….”

    “아. 가끔은 유열이 필요하니 고문이 들어갈 것이야. 그 정도는 너끈히 버텨주리라고, 나는 자네에게 기대를 품고 있다. 좋은 인생 경험이라고 생각하게나.”

    침묵이 흘렀다.

    한참이 지나서야, 여인이 떨리는 입술로 말했다.

    “당신은……미쳤어.”

    내가 두 번째 위스키를 비웠다.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나한테 당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리 말하더군. 신기한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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