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93화 (492/510)

<-- 지키는 자 --> 『493』

머릿속에서 술기운이 단박에 증발했다.

다만 얼굴은 여전히 알코올에 취한 표정을 유지했다.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나는 눈을 끔뻑 감은 다음에 천천히 떴다. 정신을 차리려고 발악하는 술주정뱅이의 모습 그 자체였다.

“다른 사람을 방문하려면, 조금쯤 예의를 차려서 와야 하지 않나.”

“정말로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희도 긴급을 요하는 일이라서요.”

“긴급이라. 참 긴급하게 찾아오셨군.”

나는 비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신중하게.

신중하게 팔을 헛디뎠다.

손바닥이 미끄러지면서 몸이 기우뚱거렸다. 자칫 잘못했으면 아예 머리를 방바닥에 박았을지 몰랐다. 이 정도가 딱 좋았다. 너무 요란스럽지 않게 현재 나의 상태를 속일 수 있었다. 실제로 몸이 취해 있긴 했지만―――조금 취했다고 해서 뭐가 문제이겠는가. 나는 약물에 절여진 채로 계략을 짠 적도 수두룩했다.

“어머. 괜찮으세요?”

여자가 이쪽으로 달려와서 나를 부축하려 들었다. 나는 여자의 손등을 내쳤다.

“손대지 마라.”

“……그게 바라시는 바라면.”

여자가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 목소리에서 옅은 비웃음이 느껴지는 것은 내 착각이 아니리라. 여인은 기본적으로 나를 깔보고 있었다. 예의바른 말투 너머에서 녀석의 심리가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내 감각, 8년 동안 예리해질 대로 예리해진 감각은 아주 사소한 뉘앙스라도 놓치지 않았다.

“왜 이제 와서 온 거냐.”

“본래라면 제가 이렇게 개인적으로 찾아뵐 일이 없었어요.”

내가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여인은 이쪽의 허락을 받지도 않고 탁자 너머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하긴 아무런 통보도 없이 다짜고짜 집안에 들이닥친 것만 봐도 대충 상대방의 성향이 엿보였다.

안하무인.

오만방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쪽에 존댓말을 썼다. 두 가지 경우 중 하나였다. 첫 번째, 상대방은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도 일부러 존댓말을 쓰는 성격이다. 두 번째, 상대방이 내게 존댓말을 써야만 하는 사정이 숨어 있다.

확인해볼까.

“저는 당신께서 모든 걸 끝낼 때까지 잠자코 관망하고 싶었습니다. 자세히 설명드리긴 힘들지만, 제가 개입하지 않는 편이 훨씬 더 좋거든요.”

“배려심이 매우 깊으시군. 그깟 말싸움에서 졌다고 사람 하나를 이렇게 만들어버린 작자라고 생각하기 어려운걸.”

“그것에 관련해서는 저도 사과를 드립니다.”

여인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끄덕거림 한 번에 억만금이라도 달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확실히 어느 정도 가치는 있었다. 방금 여인이 수긍해준 덕분에 두 가지 경우 중에서 첫 번째 가능성이 흐릿해졌다. 8년 전 그날, 여인은 시종일관 내게 반말을 사용했다. 지금은 무언가 강제에 의해서 경어를 쓰고 있다고 보는 편이 그럴듯하겠지.

“단순히 사과만 해서는 성의가 없겠지요. 만족하실 만한 보상을 준비했습니다.”

“보상?”

“당신께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이든. 아마도 대부분 이뤄드릴 수 있다고, 저는 자부하고 있습니다.”

내가 물끄러미 여인을 바라보았다.

검은색 머릿결이 아름다운 여자는 자기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얼마나 큰 절망과 괴로움을 느끼셨을지, 계속 지켜본 저는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인생을 한 번 무를 수도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보지 못하는 당신의 연인도. 사랑이 빗겨나간 참극도 모두 되돌릴 수 있습니다.”

“…….”

“그것이야말로 당신께서 가장 간절히 바라시는 소원이라고 저는 감히 단언합니다.”

내가 작게 웃었다.

웃음이란 상당히 강력한 제스처였다. 이쪽의 심리를 드러내는 데 적합했다. 상대방은 지금 나를 치기에 사로잡혀 빈정거리는 인물로 받아들이고 있으리라. 최소한 술주정에 몸을 겨누지 못해서 감정이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상태로 오인할 것이었다.

더 끌려와라.

“다만 저희에게도 사정이 있습니다. 이 세계의 시나리오를 끝내주시지 않으면 공식적인 보상을 안겨드리기 힘듭니다. 제가 찾아온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간결하게.”

“계속해서 단탈리안으로 살아주십시오.”

여자의 눈매가 진지해졌다.

“이미 최고 득점을 달성하셨습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서열 제71위의 마왕 단탈리안은 이 세계에서 가장 안 좋은 입지를 갖고 있습니다. 언뜻 보면 서열 제72위인 안드로말리우스가 더 열악한 것처럼 보이지만…….”

“바로 근처에 용사가 사는 화전촌이 있지.”

“그렇습니다.”

여인이 미소를 지었다.

“역시 현명하시군요. 예, 맞아요. 안드로말리우스는 틀림없이 최약체이지만 아주 강력한 이점. 극초반에 용사를 없애버릴 수 있다는 강점을 갖고 있습니다. 안드로말리우스로 시작할지라도 용사를 제거하거나 수하로 두면 형편이 좋아집니다.”

그래서 실질적인 최하위는 서열 제71위의 마왕 단탈리안.

안드로말리우스보다 딱히 나은 점이 없는 주제에 입지 조건마저 최악에 가까웠다.

“당연히 바알이 되어서 대륙을 평정하는 것과 단탈리안이 되어 대륙을 평정하는 것 사이에는 아득한 차이가 있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단탈리안으로, 그것도 최악의 난이도를 상정하고 들어간 상황에서 대륙을 재패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만.”

여인이 눈웃음을 짓고 은근한 시선을 보내왔다.

“저로서는 감탄스러울 따름입니다. 아무도 개척하지 못한 길을 찾아내셨어요. 게다가 주요한 마왕들을 모두 숙청한 것도 상당히 좋은 한수였습니다. 제가 아직 전부 말씀드리지 못할 뿐이지…….”

“용건만.”

여인이 탁자에 손깍지를 올렸다. 탁자에는 촛불, 그리고 술을 마시다 남은 것처럼 보이는 유리잔이 올려져 있었다.

“이대로 외지에 틀어박혀만 계시면 아무런 보람이 없어집니다. 당장 자살하셔도 괜찮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끝을 내주시면, 마땅히 당신께 돌아가야 할 보상이 주어질 것입니다.”

“자살을 권유하는 방법치고는 별로 우아하지 못한데.”

“어차피 가상 속의 의식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내가 입 끝을 올렸다.

“가상이라.”

“예. 실례를 무릅쓰고 말씀드리자면, 당신께서 애정을 주신 인물들도 이 상태로는 어디까지나 허구에 머무릅니다. 그녀들에게 진정한 삶을 선물해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비로소 속죄를 완수하는 것 아닐까요.”

더 끌려와라.

“차라리 강제로 끝을 내버리지 왜 나를 설득하고 있나.”

“그건 불가능합니다. 마무리를 짓는 것은 항상 당사자의 의사결정에 따릅니다. 본인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무언가를 강제하는 것 자체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습니다.”

“흐음.”

아마도 시작을 하는 것조차 내 의지에 달려 있겠지.

하지만 상대방은 나를 교묘하게 속였다.

‘정말로 지금 당장 시작할 것이냐.’

‘당신의 시간을 모조리 빼앗을지도 모른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

의미를 알기 어려운 질문들을 던짐으로써 내 대답을 유도했다. 얕디얕은 수작. 거기에 나는 걸려들었다.

그래.

내가 손끝으로 탁자를 일정한 리듬으로 두들겼다. 재료는 충분히 모였다. 문제는, 이걸 어떻게 요리해야 하는가. 약한 불로 지질 것인가. 강한 불로 태워버릴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상대를 배려해줄 이유가 없었다.

“한 가지만 질문하겠다.”

“예. 제가 대답해드릴 수 있는 질문이라면 무엇이든지.”

“여기를.”

내가 탁자를 그만 두들기고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그리고 나를 가상의 존재라고 단언했는데. 지금 그쪽도 여기에 있잖아. 당신도 그러면 허구에 떠다니고 있는 것인가.”

“물론이지요.”

여인이 즉답했다.

“저의 본체는 엄연히 다른 곳에 있습니다. 의식만 잠깐 여기에 왔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가상이라 이 말씀이지.”

“예.”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오른손이 내려가면서 탁자에 놓여 있던 촛불을 건드렸다. 촛불은 등잔째로 아래에 떨어졌다. 쨍, 하고 쇠그릇이 부닥치는 소리가 울리자 여인이 반사적으로 시선을 그곳으로 돌렸다.

그 순간이었다.

나는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 들어 여인의 손등을 찍어내렸다. 칼날이 살갗을 뚫고 책상까지 깊숙하게 꽂혔다. 마치 못에 박힌 것처럼 여자의 오른손이 꼼짝없이 탁상에 들러붙었다.

“……!?”

여자가 고통을 자각하는 데 약 1초.

상황을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여자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아, 으, 아아아아악!?”

여자가 발버둥을 쳤다. 어떻게든 손을 빼내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심하게 움직이면 상처가 더욱 깊어질 것을 본능적으로 염려한 것일까. 오른팔만은 가만히 내버려두고 다른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가상의 존재라고 자인해주니 내 마음이 제법 편해지는군.”

“무슨, 짓을! 지금 무슨 짓을!”

“아직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가. 그럴 수도 있지. 걱정하지 말게.”

나는 유리잔을 잡아서 그 내용물을 상대방의 얼굴에 뿌렸다.

안면에 액체가 쏟아지자 여인은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똑같은 내용을 두 번 설명하는 걸 꽤나 좋아하거든.”

내가 품안에서 또다른 단검을 꺼내어 이번에는 여자의 왼손을 찍었다. 공기가 찢어질 듯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한 번이 아니었다. 두 번, 세 번, 끊임없이 연달아서 여인이 고통에 잠긴 비명을 질렀다.

“후우.”

나는 엽궐련을 꺼내서 오랜만에. 상당히 오랜만에 연초를 피웠다.

제레미가 내 전용으로 만들어준 연초는 이제 없었다. 고급스러운 담배맛에 길들어진 내 취향은 평범한 연초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일부러 담배맛이 잊힐 때까지, 그 향기가 그리워질 때까지 내버려두었다.

“흐아, 아아악……으, 으으…….”

내가 엽궐련을 절반쯤 태울 때까지 여인은 비명을 멈추지 않았다. 몸을 움직여봤자 단검이 더욱 파고들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몸짓이 점점 약해졌다. 목소리도 금세 쉬어서 보잘것없이 변했다.

마침내 비명이 잦아들었다.

내가 무심한 눈동자로 여자를 쳐다보았다.

“이제 조금 상황이 이해가 되는가.”

“죽여버릴 거야……감히 네 같은 새끼가 나를……반드시, 죽여버릴 거야…….”

“표정이랑 말투가 솔직해져서 좋군.”

내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나는 담배 끄트머리를 여자의 손등에 문질렀다. 재차 날카로운 비명이 터졌다. 그 비명소리가 끊어지지 않게 배려하는 마음으로 담배를 꾸욱, 꾹, 정성스럽게 돌렸다.

“그쪽도 나를 관음했으니 알겠지만, 이 저택에는 강력한 반마법이 형성되어 있네. 자네가 의식을 옮겨탄 육체가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지만 적어도 마법으로 탈출할 생각은 버리는 것이 좋지.”

“아, 크으읏……!”

“자네는 결정적으로 두 가지 실수를 범했어.”

여자는 눈물과 침자국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이쪽을 노려보았다. 그 얼굴이 무척이나 마음이 들었다. 예전부터 생각했는데, 자고로 미인은 괴로워할 때 제일 아름다운 표정이 나왔다.

“하나는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야. 생각해보게. 나는 여태까지 제정신으로 그 모든 걸 짊어지려고 별 난리를 친 사람이지 않는가. 그런데 이제 와서 술독에 빠져서 지낸다? 정신이 녹아내린 폐인처럼 허구한 날 뇌수에 알코올을 쏟아붓는다?”

내가 장난스레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전혀 아니지. 자네는 나를 너무 쉽게 봤어. 만약 내가 술에 져버릴 정도로 허약한 인간이었다면 애시당초 이곳까지 도달하지도 못했을 것이야.”

“무슨 소리를……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 하등한 것이…….”

“자네는 내가 술에 떡이 된 순간을 일부러 노렸을 테지. 내가 만만한 놈이 아니라는 사실은 충분히 알았으니까. 웬만하면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때 교섭에 들어가고 싶었다. 그렇지 않은가.”

여인의 얼굴이 굳었다.

“의도, 적으로……?”

내가 빙그레 웃었다.

“폐인짓은 소싯적에 많이 해봐서 그런지 연기하기가 쉽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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