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92화 (491/510)
  • <-- 지키는 자 --> 『492』

    노브고로드에는 간단하게 정착했다.

    토지관리인에게 알선받아서 적당한 저택을 구입했다. 도시 외곽. 성벽 바깥에 위치한 2층짜리 집이었다. 본래 어느 소귀족이 사냥용 별장으로 쓰다가 형편이 안 좋아져서 매물로 내놓았다고 한다.

    “손님. 그런데 이건 현찰로 팔아야만 하는 물건이라서…….”

    “이 정도면 되겠소?”

    내가 즉석에서 금화 2백 장을 내놓자 관리인이 입을 싹 다물었다.

    “하루만 여관에서 기다려주십시오. 저희가 깨끗하게 청소하고 단장시키겠습니다.”

    “잘 부탁하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상업의 도시라서 그런 걸까. 손님이 이방인이든 뭐든 돈만 주면 깍뜻하게 대접했다. 나는 청사에서 역시 거금을 들여 시민권을 얻은 다음, 이제 마이 프리티 홈이 된 저택에 안착했다.

    새로운 집.

    새로운 생활.

    새로운 나.

    그런 신선함을 만끽하며, 일주일 동안이나 집안에 틀어박혀 방바닥을 헤엄쳤다. 인형의 신체는 밥을 먹을 필요도 잠을 잘 필요도 없었다. 게다가 나는 할 일이 없었다. 금세 나는 지루함이라는 녀석에게 시달렸다.

    “이러다 심심해서 죽어버리겠다…….”

    ─ 그냥 죽어버리는 게 어때?

    “닥쳐.”

    누구인지 모를 환청에 내가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이제는 환영들을 무시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환각에 시달리든 말든 어차피 간섭할 사람도 사라졌다. 지루함을 유일하게 덜어주는 요소도 이 그림자들이었는데, 툭하면 내 살갗을 찢어발기고 내장을 물어뜯으려 든다는 점만 제외하면 녀석들도 제법 괜찮은 친구였다.

    “눈깔에 달라붙지만 마라.”

    ─ 죽어버려.

    “아. 알았으니까 눈깔은 건드리지 말라고.”

    내가 방바닥에 대 자로 누워서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내 눈알을 손톱으로 쿡쿡 찍어누르던 환영이 다행히도 눈동자를 포기했다. 대신에 귓볼을 질겅질겅 씹었다. 제법 실감나게 감촉이 느껴졌지만 어차피 환상통에 불과했다.

    ─ 어째서. 왜……거짓말이야…….

    ─ 개자식, 배신했구나…….

    내가 환영들에 대답하기 시작하자, 놈들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예전에는 그래도 반경 5미터까지 다가오는 놈이 정말로 적었는데 요즘은 기본이 반경 3미터였다. 친구도 없는 자식들. 말상대 해주니까 좋다고 들러붙는 꼬락서니가 아주 볼 만했다.

    방구석 폐인 전략은 일주일도 못 넘겨서 좌절했다.

    세상이 멸망할 때까지 집에서 꼼짝하지 않겠다고 각오를 단단히 끝마쳤거늘, 도저히 지루함을 견딜 수가 없었다. 혼자 있더라도 무언가 정신을 집중시킬 일이 필요했다. 문득, 내 머리에 떠오른 것은 이전까지 전혀 상상해보지 못한 취미였다.

    “그림을 그리는 건 어떨까.”

    모델은 말 그대로 지천에 널려 있었다.

    잭 올란드는 전방 2미터 지점에서 머리에 피딱지가 덕지덕지 묻은 채 이쪽을 가만히 노려보았으며, 호크 대장은 목구멍에서 피를 흘리며 끊임없이 뭐라고 속삭였다. 파이몬은 지금도 절찬리에 내 등에 들러붙고 있는 중.

    “너희를 그림으로 그리면 되겠네.”

    환영들이 내 말을 들은 척도 안 하고 계속해서 저주를 퍼부었다. 모름지기 대화란 쌍방의 의사소통으로 성립해야 하는데 이 녀석들은 아주 기본이 안 되었다. 시험 삼아서 주먹을 휘둘렀더니 꼭 이빨에 살결이 찢어지는 감촉이었다.

    “…….”

    무서운 놈들.

    까불지 말아야겠다.

    나는 오랜만에 도시로 외출했다. 규모가 큰 도시라서 그런지 화방(?房)이 꽤 많았다. 아무 화방이나 들어가서 연필과 종이, 물감과 캔버스를 사들였다. 화방을 운영하는 것은 나이가 지긋하게 든 노인이었다. 노인은 내가 퍽 신기하게 보였는지 시종일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귀족 나리이십니까요?”

    “아니외다.”

    “가끔 귀족 나리들이 그림에 취미를 붙일 때가 있긴 한데…….”

    노인은 이쪽의 출신성분이 의심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런 분들이 또 금방 그림에 질려버리지요. 기본기가 탄탄하지 않으면 재미를 느끼기도 힘들어서. 스케치부터 천천히 시작하는 것을 추천합니다요.”

    “질리면 질리는 대로 괜찮은 것 아니겠소, 노인장.”

    “그게 귀족의 사고방식이지요.”

    노인이 딱딱한 호밀빵을 씹는 얼굴로 말했다.

    “그림도 장인이 하는 일입니다. 좋든 싫든 신들께서 내려주신 천업이지요. 단순히 질렸다고 하여 화폭에서 떨어질 수 없습니다. 가볍게 왔다가 가볍게 떠나는 것이 귀족 나리들의 특권이겠습니다마는.”

    “걱정하지 마시오. 만에 하나라도 내가 스스로를 화가라고 자부할 일은 없을 테니. 그저 그려야겠다 싶은 대상이 있어서 재료를 준비하는 것뿐이오.”

    “그려야 할 대상입니까?”

    노인이 눈을 껌뻑거렸다.

    내가 붓을 고르면서 중얼거렸다.

    “살다보니 나밖에 남기지 못하겠다 싶은 것들도 생기더군.”

    “…….”

    노인이 왜인지 안색이 진지해졌다.

    “산 사람입니까, 죽은 사람입니까?”

    “글쎄.”

    “화첩도 사가십시오. 그림 공부에 도움이 많이 될 것입니다.”

    이날 기본적인 회화 도구를 구입하는 데만 금화 삼십 장이 들었다. 아마도 노인이 바가지를 씌웠으리라. 달리 돈을 쓸 구석도 마땅치 않아서 알면서도 당해주었다. 서비스인지 뭔지, 노인의 손녀가 수레를 끌고 직접 저택까지 물건들을 배달했다.

    “합스부르크 집안 싸움이 겨우 끝났다는구만.”

    술집이 늘어선 거리를 지나치는데 잡담이 들려왔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조금 느려졌다. 사내들이 맥주를 주고받으며 세상 돌아가는 일을 떠들고 있었다.

    “무니헨이 쑥대밭이 되었다는데.”

    “남녀노소를 분간하지 않고 죄다 죽였다는 소문도…….”

    “과연 제국군은 자비가 없어.”

    나는 길 한복판에 우두커니 멈추었다.

    “…….”

    그렇구나.

    승리했구나.

    달리 말해, 이바르의 연기가 성공했다. 만일 라우라가 인형의 정체를 간파했다면 전쟁에 집중하지 못했겠지. 라우라가 지휘봉을 잡지 못하는 이상, 엘리자베트 통령을 이기는 것 또한 불가능했다.

    라우라는 이바르의 연기에 속아넘었다. 그리고 본연의 실력을 발휘하여 엘리자베트 통령을 패배시켰다. 무니헨 함락은 나에게 그런 걸 알려주었다.

    ‘잘했습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라우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었다.

    ‘역시 당신이 제일이에요. 라우라.’

    라우라는 환하게 웃어주겠지.

    그녀는 엘리자베트에 대한 자격지심으로 괴로워했다. 제2차 국화전쟁에서 풀지 못한 숙원을 이번에야말로 해결했다. 얼마나 기쁠까. 얼마나 나에게 칭찬을 듣고 싶어할까. 라우라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날인데도, 나는 그녀의 곁에 있어주지 못했다.

    ‘라우라에게 회한 이외에 다른 걸 남기지 못했다.’

    회한.

    가문에게 버림당하고.

    노예로 전락해버리고.

    세상 사람들에게 배신당한 라우라한테, 나는 또다시 한번 배신을 안겨주고 말았다.

    나는 힘없는 발걸음으로 저택에 돌아왔다. 여기까지 수레를 끌고와준 화방의 손녀에게 심부름값을 주었다. 여자애는 신나서 도시가 있는 방향으로 뛰어갔다. 다시 정적이 찾아온 방 한가운데서, 내가 무작정 그림을 그렸다.

    그날부터 폐인 같은 생활이 이어졌다.

    나는 술을 제외하고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 일과가 딱 두 종류로 나뉘었다. 환각들을 바라보면서 그림을 그리든가, 아니면 술독에 빠져 지냈다. 때때로 두 작업이 동시에 이루어지기도 했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대체로 동시에 진행되었다.

    내 아틀리에가 금방 그림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화폭에는 파이몬이, 바르바토스가, 라우라가, 라피스가, 데이지가 담겨 있었다. 남자들은 별로 그리기 싫었지만 군것질거리를 먹는 기분으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이 저택은 내 삶을 요약해둔 전시장처럼 되어버렸다.

    가끔 초상화를 멀리서 바라보노라면, 그림의 주인들이 저들끼리 떠들기도 했다. 대체로 내 두개골이 술에 절어서 흐물흐물해질 때 그러했다.

    ─ 언니. 제가 지금 선물 받겠다고 언니한테 이러는 것 같습니까?

    ─ 아니지. 암. 아닌 것 알고 있지. 그냥 내가 미안해서. 응?

    라우라와 바르바토스.

    얼마 전에야 접수한 정보이다만, 사실 라우라는 바르바토스를 딱히 마음에 두지 않았다고 한다. 바르바토스가 내 정실에 되어버릴 위험에 처하자 궁여지책으로 라우라가 미인계를 꺼내든 것이었다. 라피스가 전해준 사건의 전말을 듣고 얼마나 경악스러웠는지.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관계.

    그 중심에는 내가 서 있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말싸움에서 밀린 것일까. 바르바토스가 고개를 획 돌려서 이쪽을 쳐다보았다.

    ─ 단탈리안! 너 그런 짓을 우리 라우라한테 시켰단 말이야!?

    시키긴 뭘 시키냐. 멍청아.

    너는 지금 라우라한테 속고 있다. 바보가, 수천 년을 살아온 마왕 주제에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인간종 여자한테 헤벌레 빠져서는. 애당초 너는 애정에 너무 약하다. 한 파벌을 이끄는 수장이면서 감정적으로 약점이 지나치게 많다.

    그러니까 나 같은 놈한테 숙청당하는 거다.

    ─ 단탈리안!

    바르바토스가 무시무시한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바르바토스는 성큼성큼 내게 다가오는가 싶더니, 곧이어 환영이 사라지듯 꼭 그처럼 허물어졌다. 그녀가 없어지고 난 자리에는 차가운 공기밖에 남지 않았다.

    내가 조용히 술병을 들이켰다.

    ─ 무엇이든지 중독은 해롭습니다.

    이번에는 라피스가 잔소리를 해왔다.

    사실 라피스가 내게 한 말의 절반은 잔소리밖에 없었다.

    ─ 연초도 술도 부디 적당히 즐겨주십시오. 단탈리안 님의 정신이 무너질까, 소인은 두렵습니다.

    그래.

    내가 정신줄을 놓지 않을 수 있었던 까닭은, 항상 라피스가 옆에서 보좌해준 덕택이었다. 그녀는 아무런 말을 꺼내지 않고도 나를 질책할 줄 알았다. 라피스의 침묵은 편안하면서도 또한 내게 경계심을 안겨주는 힘이 있었다.

    이제 라피스는 없다.

    ─ …….

    라피스가 못 말리겠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숨결이 내 코앞을 살며시 스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대로 방바닥에 널브러져서 잠이 들었다. 온몸이 물감으로 지저분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아무도 보지 않을 텐데.

    내일은.

    내일은 또 무엇을 해야 할까.

    내일 모레는?

    또, 그 다음날은.

    아직 일 년도 지나지 않았지만 나는 내 삶이 영원히 이렇게 흘러가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텅 빈 하루. 과거의 잔상에 사로잡혀서 죽지도 못한 채, 꾸역꾸역 시간을 보내기만 한다.

    하지만 이게 좋다.

    먼지처럼 쌓여갈 뿐인 시간이 나에게는 어울린다.

    이따금 화방의 손녀가 찾아와서 물감과 종이를 제공해주는 것이 내 유일무이한 사회생활이었다. 손녀는 내 그림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늘고 있다면서, 이렇게 재능이 넘치는 사람은 처음 본다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내 입장에서는 심드렁할 따름이었다.

    여느 때처럼 뇌수를 알코올로 대체하고 깨어난 날이었다.

    화실에 처음 보는 여자가 들어와 있었다.

    “…….”

    그녀는 내가 그린 그림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처음에는 또 환각인가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뒤집어도 저런 여자를 만난 기억이 없었다. 내가 끄응, 하고 신음하며 방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여자가 소리를 듣고 몸을 돌렸다.

    “아. 일어났군요.”

    “……무단으로 집에 침입하면 죽어도 할 말이 없는데.”

    내가 얼굴을 찡그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여자가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제야 나는 여인이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마족이 입는 것과는 느낌이 다른 복장. 양복에 가까운 옷차림이었다.

    “제가 이 세계에 당신을 안내한 장본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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