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키는 자 --> 『491』
“…….”
눈을 뜨자, 온통 어두컴컴했다.
한동안 멀뚱하게 앞을 바라보았다. 앞을 바라본다는 자각도 없이. 몸을 움직이니까 판자에 부닥쳤다. 조금 더 팔다리를 움직였는데 사방이 가로막혀 있었다. 여기는 뭐냐. 내가 중얼거렸다. 그제야 깨달았다.
나, 관에 들어가서 누워 있었지.
왜 그런 짓거리를 저질렀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내 행위는 가끔 나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으므로 딱히 유별난 일이 아니었다. 나는 관뚜껑을 밀어서 빠져나왔다.
“으흡, 으아아아.”
뭔가 한참 자버린 느낌.
사흘에 한 번 잘까 말까 하는 생활이 이어진 지 어언 5년이 훌쩍 넘었다. 설령 잠이 든다고 해도 서너 시간 눈을 붙이면 많이 붙이는 꼴이었다. 이렇게 숙면을 취한 건 정말 오래간만이었다.
겨울잠을 자고 나온 곰탱이마냥 거하게 하품했다. 그런데 시야에 이상한 것들이 잡혔다. 새하얗고 몽실몽실한 솜사탕 같은 아이들이 관짝 주변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눈의 정령들이었다.
─ 깨어난 거예요.
─ 이 날씨에 자고도 살아남다니 대단해애.
─ 요새 인간종은 무척이나 야생적인 것?
─ 근육남이 대세일 거 같은 예감.
정령들이 소곤거렸다.
이 녀석들 오두막까지 들어올 수 있었나…….
“어흥!”
내가 두 팔을 크게 벌려 겁을 주었다. 정령들이 깜짝 놀랐다. 꺄아, 꺄아, 하고 허둥지둥 저들끼리 밟고 부딪치고 한바탕 난리를 치면서 도망쳤다. 그런데 내가 한숨을 쉬고 일어서려고 했을 때였다.
─ …….
저놈들이 도망치긴 도망치되 오두막 바깥까지 뛰쳐나가지 않은 것이었다. 반경 6미터 거리를 유지하면서 정령들은 물끄러미 이쪽의 기색을 살폈다. 정령들이 작은 목소리로―――그렇지만 나에게는 다 들렸다―――속닥거렸다.
─ 역시 허장성세인 모양?
─ 허우대도 없는데 괜히 쫄은 것 같다는 중론.
─ 전쟁을 각오하지 않으면 외교적 타협이 필요한 거야.
벌써 하루만에 내 성향을 파악해낸 듯했다.
이래서 정령들이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순수한 건지 영리한 건지 잘 분간이 안 되었다. 내가 어느 순간부터 블링이와 요정들을 피하기 시작한 것도, 녀석들의 영리한 순수성이 도저히 견디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새하얀 백색은 그 자체로 나 같은 인간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내가 손을 휘휘 저었다.
“귀찮게 하지 말고 가. 나 바쁜 남자야.”
정령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 여기서 바쁠 게 뭐 있는 걸까.
─ 우리는 그냥 신기해서 쳐다보는 건데 자의식과잉인 거야.
─ 허우대에다 정신머리까지 썩어 빠졌으면 이미 답이 없는 수준인 거?
“…….”
눈의 정령이라서 그런지 바람이나 숲에서 사는 애들보다 독설이 차갑구나. 이 아저씨, 까닥 잘못했으면 우울증이 또 도질 뻔했단다.
정령들을 무시하고 여행짐을 꾸렸다. 오두막에는 유사시를 대비하여 온갖 장비가 갖추어져 있었다. 마음속으로 이바르한테 감사의 말을 전하며 요긴하게 써먹기로 했다. 내가 행낭을 풀어서 짐을 구겨넣었다.
정령들이 또 슬그머니 다가왔다.
─ 이상해. 우리 말을 알아듣는 인간종은 마법사뿐인데.
─ 이 사람은 심장이 빙글빙글 안 돌아. 마법사가 아니야.
내가 묵묵히 짐을 쌌다.
이제 정령들은 대놓고 내 팔뚝에 매달리는가 하면 허벅지에 앉았다. 나를 새로운 놀이기구쯤으로 취급하자고 합의한 모양이었다. 여기서 반응해본들 물귀신처럼 더 들러붙겠지. 정령은 기본적으로 자기와 대화가 통하는 생명체를 엄청나게 좋아했다.
─ 정체가 뭘까? 저엉체가 뭘까?
얼씨구. 아예 한 놈은 내 머리통에 올라갔다. 거긴 에베레스트 정상이 아니다, 꼬맹아. 정복할 가치가 없는 곳이라고.
─ 이유도 모른 채 이별통보를 받은 남자. 십오 년에 걸쳐서 군역을 마치고 돌아오니, 마을의 그녀에게는 어째서인지 아비 없는 자식이. 돌아온 남자를 보고 표정이 굳는 여자. 과연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
─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최신 연극. 이곳에 개봉박두.
─ 사건을 많이 내놓거라. 사건을. 일단 많은 사건이 벌어지면 관객들은 놀라서 입을 떡 벌릴 거야. 거기서 관객들은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걸 찾으면 그만! 사건 하나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실력도 감출 수 있어.
─ 희대의 비평가, 이곳에 강림.
─ 이로써 연극계는 평정되었도다?
이 정령들은 도대체 평소 어떤 문화생활을 즐긴 것일까.
나는 자꾸만 딴죽을 걸고 싶어서 입술이 근질거렸다. 그래도 한 시간이 넘도록 침묵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정령들이 내 머리카락으로 꽈배기 아트라는 새로운 예술 분과를 창조했으며, 팔뚝은 그네가 되었고, 등짝은 미끄럼틀이 되었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침묵을 사수했다.
“후우.”
내가 사각형으로 된 가죽가방을 쥐었다.
외양은 평범하지만 이래 봬도 공간마법에다 경량화마법이 중첩된 아티팩트였다. 신체가 손상되었을 경우 갈아치울 예비 인형 부품, 리브라 금화 오만 장에 해당하는 금품, 실생활에 도움이 될 물품까지. 전부 자그마한 가방에 들어갔다.
준비 완료.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 몸에서 놀고 있던 정령들이 미끄러 떨어졌다.
─ 꺄아아아.
─ 삶의 하강곡선을 타고 내려간다아아.
나는 피식 웃고 오두막집을 나섰다.
그대로 정령들을 무시하고 나가려고 했는데 돌연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나는 이바르의 맹세를 신뢰했으나 세상사에는 만약이란 게 있었다. 만일 이바르가 내 인형에 일종의 추적장치를 달아두었다면? 내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아내서 언젠가 찾아오면 어떻게 될까.
정령을 이용하자.
“얘들아. 내 부탁을 들어주면 당분간 놀아줄게.”
─ 어떤 부탁?
─ 우리는 백지수표에 넘어가지 않는 부류.
─ 일단 들어보고 결정하겠다는 태도를 취하는 거야.
“내가 흔적을 남기면 최대한 지워주렴. 사실 무서운 아저씨들한테 쫓기고 있거든. 막 인간도 잡아먹고 정령도 잡아먹는 아저씨들인데, 혹시라도 내 자취를 발견하고 달려올지도 몰라.”
정령들이 서로 얼굴을 맞대었다.
자기들 나름대로 원탁회의를 개최하고 있었다.
─ 흔적이라면 마나의 자취나 발자국 등등?
─ 모처럼 쓸 만한 놀이기구가 왔는데 그 정도 수고는 괜찮을지도.
역시 나를 놀이기구로 취급하고 있었다.
정령들이 잠시간 회의를 진행한 끝에 내 제안을 흔쾌하게 받아들였다. 우리는 오두막집을 나와서 야트막하게 눈이 쌓인 산길을 내려갔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인간 도시가 어디에 있냐고 물었다. 정령들이 자기네만 믿고 따라오라며 앞장섰다.
이바르가 제작한 인형은 확실히 튼튼했다.
종일 걸어도 장딴지가 아프지 않았다. 체력과 근력이 본래 내 육체보다 월등하게 좋았다. 마왕의 신체와 마찬가지로 이 몸 또한 수면을 취할 까닭이 없었기에, 나는 사흘 내내 밤을 새서 걸었다.
말인즉슨 사흘 동안 정령들의 말상대를 해주었다는 얘기.
정령들은 정말 일 초도 쉬지 않고 나불나불 떠들었다.
─ 쟈코모는 왜 아저씨들한테서 도망치는 거야?
“인간을 많이 죽였거든.”
내가 가볍게 발걸음을 움직였다. 정령들이 발자국을 지워주었다.
“너무 많이 죽이는 바람에 원한을 많이 샀지.”
─ 인간종이 싫어서 많이 죽인 거야?
─ 우리도 인간종은 싫어. 만날 너무 춥다고 툴툴거려.
“싫지 않아. 오히려 좋아하는 편에 가깝지.”
─ 응? 좋아하는 걸 왜 망가트렸어?
내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글쎄. 왜 망가트렸을까. 처음에는 죽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죽였는데 나중에 가서는 그것도 아니었지. 사실 나도 잘 모르는 부분이 많아.”
─ 모르는 거야, 말하기 싫은 거야?
“…….”
─ 아니면 말할 수 없는 것?
묵묵하게 길을 걸었다.
정령들도 여기에 관해서는 더 파고들지 않았다. 녀석들은 주변 사람의 감정에 민감했다. 내 감정에 동화되어서 정령들도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물론 아주 잠깐뿐이었다. 오 분 정도가 흐르자 정령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떠들었다.
지금은 그 떠들썩함이 고마웠다.
환영들이 끊임없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정령들의 잡담에 묻혔으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눈밭이 적어졌다. 땅바닥이 드문드문 드러나나 싶더니 사흘째부터는 갈색이 흰색보다 많았다. 갈색의 비중과 반비례해서 눈의 정령들은 점차 내 동행에서 탈락하였다.
─ 더워어.
─ 녹아내린다~. 한여름의 첫사랑처럼 녹아내린다~.
─ 나는 여기까지야. 너희만이라도, 너희만이라도 끝까지 가줘. 나는 그걸로 만족하니까.
─ 하사관께서는 훌륭한 군인이셨습니다.
마력이 약한 아이들은 흐물흐물한 아이스크림이 되어서 어디론가 떠났다. 아마 우리가 걸어온 길로 되돌아가겠지. 여름이 지나고 겨울이 올 때까지 철새처럼 그곳에서 머물 것이었다.
제법 마력이 강한 정령은 사흘째도 버텼다. 그렇지만 나흘째 저녁이 되자, 내 곁에는 오직 한 명의 정령밖에 없었다. 이 정령은 내 정수리가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었는지 그곳에다 돗자리를 깔고 누웠다.
─ 이쪽으로 쭉 걸어가면 무장무장 큰 도시가 나오는 거야.
“혹시 도시 이름을 알고 있니?”
─ 노브고로드.
노브고로드. 분명히 모스크바 왕국의 산하에 있는 도시였다. 칼마르 연맹국이나 폴리투니아 왕국과 주로 교역하면서 성장한 상업과 예술의 중심지. 다만, 예전에 비해 성세가 퍽 줄어들어서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쇠퇴해가는 북방의 도시라.
지금 내 처지와 비슷한 구석이 있어서 호감이 느껴졌다. 일단 저곳에 둥지를 틀고 시세를 관망하는 편이 좋으리라.
─ 으으, 안타깝게도 나도 여기까지인 거야.
머리 위에서 흐느적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정령을 집어들어서 손바닥에 올렸다. 정령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이젠 더워서 안 되겠어?”
─ 태생의 한계를 절감하는 느낌.
“여기까지 안내해줘서 고마워. 덕분에 길 한번 잃지 않고 왔어. 나한테 부탁할 게 있으면 말해보려무나. 힘껏 노력해서 들어줄게.”
─ 세계제일의 부자로 만들어주세요.
생각보다 훨씬 더 영악한 정령이었다!
내가 입꼬리를 떨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상당히 들어주기 어려운 소원이네.”
─ 만능의 소원기가 아닌 거야?
“예전이었다면 가능했을지 모르겠는데 지금은 조금.”
─ 능력 없는 아저씨.
반박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 그랬으니까.
─ 그럼 뽀뽀나 해주세요!
“갑자기 소원의 난이도가 확 내려갔다…….”
세계제일의 부자가 되고 싶은 꿈 다음에는 나와 뽀뽀하는 것인가. 정령은 진짜 알다가도 모르겠다.
나는 정령의 하얀 이마에 입술을 가볍게 맞추었다. 차가운 감촉이 입술에 머물렀다. 정령은 꺄아, 하고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그리고 내 손바닥에서 빠져나와 공중을 한 바퀴 비행했다.
내가 작게 손을 흔들었다.
“나중에 또 만나자.”
그러자 정령이 활짝 웃었다.
─ 응. 또 만나요, 단탈리안 님!
하고 정령은 저 멀리 산자락을 향해 날아갔다.
녀석이 사라질 때까지 나는 제자리에 멍하게 서 있었다. 어퍼컷을 한방 먹은 기분이었다.
“……설마 도중에 깨달은 거냐.”
어쩌면 처음부터 알아챘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이바르에게 미리 부탁을 받아서 내 안내를 담당했을 수도 있었다. 이바르가 심혈을 기울여서 만들어놓은 오두막에 제멋대로 들락거리는 걸 봤을 때부터 눈치를 챘어야 했다. 그토록 철두철미한 이바르가 오두막에 아무런 방비도 안 해뒀을 리 만무하거늘.
“벌써부터 감이 많이 떨어졌군.”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가방을 고쳐 매고 느릿느릿하게 도시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