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90화 (489/510)
  • <-- 지키는 자 -->  『490』

    드디어 숲에서 빠져나왔다.

    땅바닥에 넘어진데다 나뭇가지에 쓸려서 몸이 묘하게 피곤했다. 이바르가 심혈을 기울여서 만들어준 인형인지라 삐끄덕거릴 위험은 없었지만, 그래도 소중하게 다루는 편이 좋겠지.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내 몸은 단순히 나의 것이 아니었다.

    내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버린다.

    한낱 망상에 불과할 수도 있있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어떠한 가능성이라도 허투로 내버려둔 채 모략을 진행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든,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야 했다.

    “…….”

    살아남는다, 인가.

    그러고보니 아주 오래 전에도 생존만 염두에 둔 적이 있었다. 기억이 어렴풋하지만 분명히 그런 시절도 있었다. 아직 사람들을 충분히 죽이지 않은 무렵이었을까. 목숨만 붙어 있으면 무엇이든 상관없다고 여겼는가…….

    그 시절이 좋았다. 무엇이든지 남의 탓으로 돌릴 수 있었다. 훨씬 더 거리낌 없이 살인을 저질렀다.

    지금 나는 똑같이 살아남는 것만을 바랐다. 하지만 '살아남는다'라는 말의 의미가 그때와 얼마나 많이 달라졌는가. 도저히 같은 말이라고 생각하기 어렵겠지.

    살기는 쉬워도 죽기는 어렵다.

    내가 작게 웃었다. 뭐가 우스운 건지 몰라도 매마른 웃음이 새어나왔다. 나는 품안에서 순간전이 마법서를 꺼내 두 조각으로 찢었다. 마나가 하얗게 피어오르면서 온몸을 감쌌다. 다음 순간, 나는 설원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새하얗게 눈으로 덮인 벌판뿐.

    단 한 군데, 당장 쓰러질 것처럼 낡아빠진 오두막이 있었다.

    〈던전 어택〉에서 그림으로나마 본 기억이 있는 풍경이었다. 이바르의 본체가 숨겨진 장소. 원래 이바르는 모스크바 왕국의 두메산골에다 본체를 놔두었다. 인적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으며, 가장 가까운 도시도 여기에서 사나흘을 꼬박 걸어야 했다. 밤새서 걸을 경우에만 그러하고 실제로는 일주일이 훌쩍 넘을 터.

    벽지 중의 벽지.

    순간전이 마법서에 좌표를 입력해두지 않았다면 절대로 찾아올 수 없는 오지였다.

    “으으. 춥다, 추워…….”

    내가 코를 훌쩍였다.

    비교적 따스한 대륙의 중부지방에서 외딴 북방의 산골짜기로 떨어졌다. 살갗이 알아서 쪼그라들었다. 내가 갑작스럽게 나타나자 신기했는지, 정령들이 눈밭에서 빼곰 고개를 들어서 나를 쳐다보았다.

    ─ 누구일까? 누가 우리 마을에 찾아왔을까?

    ─ 인간이 아니야. 은랑도 아니야.

    ─ 정체불명의 이방인. 인기인의 예감.

    ─ 질투해야 하는 거?

    내가 빵긋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정령의 언어가 들렸지만 신기하게도 정령들의 감정이 전해지지 않았다. 원래 이게 정상이긴 했지만, 요 수년 동안 마인의 감정을 자연스레 읽어온 나에게는 무척이나 생소했다.

    ─ 상냥한 사람인 것 같다는 예감이 드는 거야.

    ─ 안 돼. 미소가 예쁜 사람일수록 속이 음흉하다고 들었어.

    ─ 천진난만한 시절, 낭만 넘치는 약속, 그리고 예정에 없던 아이. 눈물 없이 관람할 수 없는 파탄과 배신의 36시간…….

    ─ 유비무환.

    ─ 일단 경계해보는 것으로.

    정령들이 이쪽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마 자기들 딴에는 위협한답시고 노려보는 것 같았다. 귀여워라. 여름이 다가온 바람에 추위를 좋아하는 정령들은 죄다 북방에 몰려왔겠지. 수많은 정령들이 두더쥐 게임처럼 고개만 살짝 치켜들고 있었다.

    “미안하다. 잠깐만 지나갈게.”

    내가 발걸음을 옮기자 정령들이 화들짝 놀라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모습마저 귀여워서 나는 미소를 지었지만, 이내 마왕성에 있을 정령들이 떠올라서 표정이 굳었다. 이 세계에 처음 떨어졌을 때부터 나와 함께해준 아이들. 그 아이들도 마왕성이 무너지면서 같이 소멸했겠지.

    라피스도.

    “…….”

    얼굴이 무표정해졌다. 그렇다. 나에게 무언가를 보고 흐뭇해할 자격 따위는 없었다. 자기만족을 위해서 연인이고 부하고 모조리 희생시킨 희대의 악인이 나 아니던가. 이제 와서 인간적인 척 안면근육을 비틀어봤자, 스스로에게도 우습고 역겨울 따름이었다.

    눈처럼 하얘질 것.

    단지 과거에 사로잡힌 망령이 되어 살아갈 것.

    이것만이 간신히 내게 허락할 만한 일이리라.

    오두막에 들어서자, 온갖 잡다한 물품이 나를 반겼다. 저절로 온도를 조절해주는 망토며 물이 떨어지지 않는 수통, 이바르의 예비인형들과 수북하게 쌓인 금화까지. 모험자가 발견했다면 군침이 질질 흐를 만큼 호화스러운 장비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성격 하나 꼼꼼하군.”

    내가 쓴웃음을 짓고 오두막 벽에 기대었다. 어깨에 망토를 덮자 몸이 딱 적당히 따스해졌다. 다만 얼굴에 스치는 공기가 몹시 서늘했다. 수백 년. 수천 년이나 정체된 공기가 오두막에 조용히 내려앉아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검은색 관이 덩그러니.

    “…….”

    잠깐 호기심이 들어서 관짝에 누워보았다.

    “의외로 편해…….”

    흡혈귀가 사용하는 관은 달라도 뭔가가 달랐다. 쿠션이라고 해야 할까. 푹신푹신한 재질의 가죽이 안쪽에 덧씌워져 있었다. 잘 보니까 숨구멍 비스무리한 통로도 몇 개 뚫렸다.

    “하하.”

    이러니까 정말로 죽은 거 같은걸.

    시체가 된 단탈리안, 이곳에 등장.

    아니. 더 이상 단탈리안이라고 자칭하면 안 되는가……. 단탈리안은 데이지와 함께 죽었다. 그것이 나를 알아준 데이지한테 선사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앞으로는 조금 다른 이름으로 살아갈 필요가 있었다.

    쟝 볼레? 프랑크에서 썼던 이름이지만 안 되었다. 조금 유명했으니까. 더 평범한 이름, 술에 술을 타고 물에 물을 탄 것처럼 평범한 이름이 좋았다. 글쎄, 뭐가 괜찮을까.

    “으으음.”

    나는 관짝에 틀어박혀 고심했다. 제3자가 본다면 상당히 포스트모던한 광경이리라. 사흘 내내 제대로 똥을 싸지 못한 변비환자처럼 인상을 찡그리고 고민하다보니, 문득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쟈코모. 쟈코모는 어떨까.

    잭 올란드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잭을 사르데냐어로 바꾸어서 읽으면 쟈코모가 되었다. 올란드라는 가문명까지 배끼면 곤란하므로, 나는 즉석에서 스크루타라는 성을 지었다. 대충 현재 내 처지에 빗대어 고대제국어에서 따왔다.

    사르데냐가 전화에 휩싸이면서 꽤 많은 난민이 발생했다. 나는 사르데냐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다 전쟁이 두려워 도망친 피난민. 그래서 쟈코모 스크루타. 그럴듯한 이야기를 지닌 한 명의 남자가 곧바로 만들어졌다.

    이런 가명이 쓸모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인간종의 마을이나 도시에 나가서 써먹을 때가 있겠지.

    “……나 참.”

    이런 처지가 되고도 여전히 미래를 염려하고 계획을 세우는 건가.

    정말이지 습관이란 게 무서웠다. 이제 미래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상당히 자세한 계획서를 작성하여 이바르한테 넘겨주었다. 웬만한 사고가 터져도 이바르가 알아서 잘 대응해줄 것이었다.

    애당초 이번 전쟁만 끝나면 마왕 단탈리안은 일선에서 물러서기로 되어 있었다. 사정이 어찌 되었든 간에 공개처형식을 망친 장본인이 단탈리안의 양녀였다. 그런 잘못을 저질렀는데도 멀쩡히 제국의 흑막으로 활동한다면, 제국에 기강이 바로 설 리 만무했다.

    단탈리안은 반쯤 은퇴하여 정치계에서 한 발자국 물러선다. 그렇다면 이바르도 충분히 본연의 정치력으로 내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대륙을 조종하고 우롱하는 것은 어려울지라도,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것쯤은 이바르 로드브로크에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대륙이 완전히 안정되었다 싶으면, 그때는……이바르가 결정하겠지.

    슬쩍 관뚜껑을 닫아보았다.

    뚜껑이 관을 덮으니 마치 외부세계와 단절된 것처럼 적막했다.

    완벽한 무음(無音). 완벽한 어둠이었다. 유사-죽음이라고 표현해도 좋았다. 너무 좁아서 그런지 하루 내내 나를 괴롭히는 환영마저 이곳에는 없었다. 나는 지나치게 좁은 곳에 있으면 환영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

    이대로 영원히 잠들어도 나쁘지 않겠다.

    환각이 보이지 않고 환청이 들리지 않는 것이 너무나 오랜만이어서, 무심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구나. 이게 원래 내가 평범하게 느끼는 감각이었구나.

    무언가 어색했다. 불편하다고 해야 할지, 불안하다고 해야 할지. 당장이라도 파이몬이 귓가에서 사랑 아닌 사랑을 속삭여야 할 것만 같았다. 새삼스럽게 나 자신이 정신병자라는 사실이 와닿았다.

    정신병에 시달리는 것까지는 괜찮았다.

    그러나 정신병에 매달리기 시작하면, 이미 사람으로서 끝장난 것이었다.

    서서히 잠이 쏟아졌다. 관짝에서 자본 사람이 세상에 몇 명이나 될까. 그렇게 실없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떠올리며 나는 숨을 깊이 내쉬었다. 내가 그토록 바라던 안식에 아주 조금, 다가선 기분이었다.

    조용하고.

    편안했다.

    “도대체 어디서 주무시는 것입니까.”

    어이없다는 목소리에 눈이 떴다.

    관뚜껑이 열어져 있었다. 눈앞에 금발의 소녀, 이바르가 눈썹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나는 아직 뇌수가 잠기운에 절여져서 사고가 혼란스러웠다.

    “이바르?”

    “예, 이바르입니다. 나 참. 어디로 사라지셨나 싶었더니 소녀의 방에 놔둔 관짝에 숨으셨을 줄은……전하께서 무슨 어린아이도 아니시고. 이제 와서 술래잡기를 즐기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지 않은지요.”

    술래잡기라니?

    “회의에서 도망치시려 해도 안 됩니다. 켄타우로스의 대부족장들이 벌써 접견실에 모여 기다리고 있습니다. 벌써 십 분이 넘었습니다. 여기서 더 무슨 결례를 범하시려는 것입니까.”

    아아.

    그랬다. 회의가 있었다. 언제나 회의야 있었지만. 언제도 없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언제나 회의가 있었다. 내가 관을 박차고 이바르의 침실에서 헐레벌떡 나왔다. 문 바깥에서는 라피스가 서 있었다.

    라피스가 나를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옷이 삐뚤어졌습니다, 단탈리안 님.”

    미안하다.

    내가 미소를 짓고 싹싹 빌자, 라피스가 무표정하게 다가왔다. 서로 코가 닿을 만큼 가까운 위치. 그곳에서 라피스는 내 옷깃과 넥타이를 능숙하게 매주었다.

    “단탈리안 님은 대체로 외견에 신경을 너무 안 씁니다. 마왕으로서 체면을 지켜주십시오.”

    외면을 안 꾸며도 내면이 아름다우니까 별로 상관없지 않을까?

    “……정신상담사가 필요하군요.”

    죄송합니다.

    조금 까불어봤습니다.

    “자아, 자아. 주군도 충분히 반성하는 것 같으니 넘어가게.”

    “라우라……당신이 항상 단탈리안 님의 어리광을 받아주니 문제입니다.”

    “라피스 언니도 만날 주군이 부탁하면 거절하지 못하면서 무슨 소리인가.”

    라우라가 웃었다.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웃음소리였다.

    “어이구, 지각해도 한참을 지각했네. 우리 단탈리안이 많이 컸어?”

    “바르바토스. 부족장들이 보는 앞에서 체신머리 없게.”

    “체면은 너나 차려. 나는 회의에 참석해주는 걸로 의리를 다했으니까.”

    바르바토스가 손을 휘휘 저으면서 술병을 치켜들었다. 회의실에서 당당하게 술을 꺼내 마시는 마왕은 세상이 아무리 넓다 해도 바르바토스밖에 없겠지. 파이몬이 부채로 입가를 가리고 한숨을 쉬었다.

    “죄송해요, 단탈리안. 어떻게든 소녀가 끌고 왔는데 태도가 저래서…….”

    파이몬이 바르바토스를 끌고 왔다고?

    놀랄 노 자로군.

    미안하다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끌고온 것 자체가 이미 역사서에 기록되어 유구하게 전해져도 될 만큼 대단한 업적이니까요.

    “아, 바르바토스! 나도 한입만 줘! 그거 겁나게 비싼 술이잖아!”

    “한심하기는. 남이 입에 댄 술을 뭘 마시겠다고 졸라아.”

    “응? 나는 남이 따먹은 여자랑 남자도 잘만 따먹는데?”

    “그거 정말 대단한 자랑이네―.”

    시트리와 가미긴.

    평소와 다름없는 풍경이었다. 굳이 차이점을 찾으라면 어딘지 모르게 날이 빠진 것일까. 바르바토스도 파이몬도 서로 투덜거리는 모양새가 묘하게 부드러워 보였다. 기분 나쁘게 언제 그렇게 친해진 겁니까.

    “아버님. 오늘 회의자료입니다.”

    아, 그래.

    고맙다.

    “별말씀을.”

    데이지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회의자료를 펼쳐보았다. 잘 모르겠다. 이미 전부 안 상태여서 그런지, 눈앞의 글자가 머릿속에 하나도 입력되지 않았다. 무얼. 괜찮겠지. 나는 서류가 없어도 회의를 성공시키는, 매우 유능한 좌장이었다.

    편안했다.

    이곳이 내가 있을 자리라는 확신이 충만하게 다가왔다. 그래. 사실 나는 이런 풍경을, 이 사람들과 함께 일을 나누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무엇인지 몰라도 나는 일을 제대로 해내고 있었다.

    내가 상석에 앉자, 사람들이 시선을 보내왔다. 바르바토스는 여전히 음흉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파이몬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시트리는……싱글벙글인가. 가미긴도 싱글거리고 있었지만 의미가 달랐다.

    라피스와 이바르 그리고 데이지는, 비록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내 뒤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자아, 여러분.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오늘도 만족스러운 해결책을 찾아보도록 하지요.

    우리 모두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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