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89화 (488/510)

지키는 자 <48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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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최후를 맞이해야 올바른가.

어느 순간부터 나는 오로지 이 생각에만 골몰했다.

얼굴의 근육을 움직여서 웃을 때도. 다른 마왕들과 심각하게 회의할 때도. 심지어 매우 끔찍한 일이지만, 연인들과 살을 섞을 때마저 나는 이따금 하나의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이 생각은 나에게 찾아올 때마다 눅눅하고 차가운 습기처럼 두개골에 달라붙었다.

어떻게 죽어야 할까.

“…….”

문득 뒤를 쳐다보았다.

사방에 나무가 우거져 있었기에 시야는 극히 짧았다. 저 너머에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내가 불러일으킨 전쟁 때문에. 여태까지 학살한 사십만 명에서 더 얼마를 더해야 할까. 나는 이제부터 간단하게 오십만 명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오십만 명.

오십만을 죽여버린 사람은 어떻게 책임을 져야 하는가.

파이몬을 내 손으로 직접 살해하기 이전까지는, 아주 명확한 계획이 있었다.

처형장에서 악인으로 사형을 당한다.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었다. 여태까지 내가 저지른 짓을 공개적으로 발표하면 그만이었다. 제8차 월맹군. 백합 전쟁에서 꼭두각시 전쟁까지. 바타비아의 총독 관저에서 일으킨 암살 소동도 사실은 자작극이었다. 숨김 없이, 있는 그대로 밝히기만 해도 내 죄값은 사형을 아득하게 뛰어넘었다.

처음에는 나를 두둔하려는 사람들도 많겠지.

공화주의에 찬동하는 지식인. 월맹군의 성과에 눈이 멀어서 무조건 신생 마왕군한테 박수를 보내던 마족. 노예해방령에 의해 사유재산을 갖게 된 자들.

그러나 한 명씩 입을 다문다.

월맹군의 주범이라는 얘기를 듣고도 많은 이들이 항변하리라. 어찌 되었든 월맹군은 승리했노라고. 애당초 먼저 음모를 꾸민 것은 파이몬이요, 이를 이용해서 마왕군에 승리를 안겨다준 단탈리안의 책략은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다. 물론 수십만 명이 죽었다! 하지만 대의를 위한 희생이야 언제나 불가피하다.

그러나 한 명씩 입을 다문다.

백합 전쟁의 전말을 전해듣고도 많은 이가 항변하리라. 중립파 마왕들을 숙청한 것이 순전히 기만에 불과했으며, 단탈리안이 의도적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것이 폭로되고도, 여전히 사람들은 항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확실하게 한 명씩 침묵해가는 것이다.

결국 누군가가 말한다.

마왕들과 대공들 대다수가 단탈리안에 의해 죽은 것 아닌가, 하고.

이제 목소리는 점차 거세진다. 과격해진다. 연이은 전쟁에서 죽어나간 병사들의 목숨이 거론된다. 마침내 마인들은 단탈리안이 자신들을 문자 그대로 가지고 놀았음을 깨닫고, 이 전무후무한 흑막에 끝없이 분노한다.

그때 광장에서는 어떤 함성이 울려 퍼질까.

‘죽여라!’

십만 명이 하나의 어조와 하나의 열망으로 소리치리라.

‘단탈리안을 죽여라!’

완벽한 무대.

신들조차 저주할 정도로 악마와 같은 본성을 타고난 마왕. 자신의 사욕과 가학심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마인과 인간종을 조종하고 학살했으나, 마침내 범행이 탄로나서 인민의 심판을 받는다.

‘죄인. 마지막으로 남길 참회의 말이 있습니까.’

사형집행을 맡은 자가 말한다. 마르바스일 수도 있고, 다른 마왕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마음속으로 점 찍어놓은 처형자는 다름 아니라 데이지다. 세상에서 나를 제일 증오하는 사람이 내 목을 자른다. 그것이야말로 흠집 하나 없는 결말이지 않은가.

‘참회?’

십만의 성난 관중이 바라보는 가운데, 내가 미소를 짓는다. 생애 마지막 연기가 될 미소를. 나는 완전무결한 연기를 펼쳐내겠지. 한없이 환희에 가득차서 희생자들과 인민들을 모욕한다.

‘나는 단 한 번도 참회한 적이 없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내 쾌락이었고, 보다 많은 사람을 학살하는 것이 내 과업이었다. 백만 명도 죽이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이 후회라면 후회로구나. 왜 나는 더 죽이지 못했는가!’

그 순간, 절대적인 악이 처벌되는 광경이 역사에 새겨진다.

정적이 가라앉는다. 내가 내뱉은 망언에 사람들이 경악한 것이다. 곧 폭탄이 터진 것처럼 시민들이 분노하여 온갖 물건을 던진다. 처형장은 난리가 나고, 어서 단탈리안을 죽여버리라는 소리만이 가열차게 반복된다.

어느 누구도 변명할 수 없는 악으로 남은 채.

딸아이가 휘두르는 대검에 의해 단탈리안은 사라진다.

이것이 최선.

내가 꿈꾸는 이상적인 결말이었다.

“욱……!?”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분명히 제대로 건넜다고 생각했는데 발을 헛딛었다. 아직 새로운 육체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일까. 나는 땅바닥에 구르면서 눈썹을 찡그렸다. 낙법을 펼치지 못해서 몸이 무척 쓰라렸다. 흙먼지가 얼굴을 덮었다.

‘쫓아오는 녀석은 없겠지.’

뒤쪽을 바라보았다. 수풀이 무성했다. 내가 알아채지 못한 걸지도 몰랐지만, 일단 추격꾼은 없다고 판단했다. 그렇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다. 그게 중요했다. 이 계획은 철저히 비밀리에 이루어져야만 의미가 있었다…….

‘어서 빠져나가야 한다.’

내가 발길을 재촉했다. 무릎에 심하게 상처가 났지만 상관없었다. 내 몸뚱어리는 웬만큼 자잘한 상처 따위는 너끈하게 버틸 수 있었다.

생각이 바뀐 시점은 파이몬이 죽고 난 이후.

나는 파이몬의 피가 묻은 손수건을 항시 품에 안고 다녔다. 가끔 생각이 정지할 때마다,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이 당해야만 하는 우울감이 몰려올 때마다, 나는 붉은 손수건을 꺼내서 가볍게 코를 파묻었다. 그러면 내 게으른 우울증도 씻은 듯이 사라졌다.

―――과연 죽음만으로 충분한가.

일종의 강박증과 같았다.

파이몬이 잠든 황궁의 건물에 홀로 들어가서 나는 다섯 시간이고 일곱 시간이고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부족했다. 무언가가 결정적으로 부족했다. 처형식에서 공개적으로 처단당하는 것이 정말로 최선의 결말일지, 어딘지 모르게 의문이 들었다.

어두운 안치소.

여태껏 내가 학살한 목숨들의 환영이 끈덕지게 손길을 내밀었다. 환영은 단순히 시각뿐만 아니라 촉각마저 홀렸다. 시커먼 손가락들이 내 팔뚝과 종아리, 허벅지, 목덜미를 할퀴었다.

‘죽는 것만으로 책임을 다할 수 있을까.’

나는 환영들에게 물어보듯이 중얼거렸다.

‘이것들을 전부?’

당연하게도 그림자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것들이 생전에 내뱉었던 소리를 기계적으로 반복했다. 이들은 내 기억과 심리가 투영된 잔상이 분명했으며, 나 자신이 질문에 만족하는지 안 하는지 판별해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무얼 더 이상 어떻게 마무리할 수 있는가.’

사고는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끊임없이 방황했다.

하지만 데이지가 연기해왔다는 것을 깨닫고 불현듯, 뇌우가 내려치는 것처럼 해답이 떠올랐다. 처음부터 해답의 형태로 주어진 생각은 아니었다. 그건 결정적인 질문의 형태로 먼저 내 두개골을 뒤흔들었다.

―――내가 죽으면 이 세계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데이지에게 정체를 간파당하고 나서야 이 중대한 질문이 나에게서 피어났다. 틀림없이 질문 중의 질문이며, 가장 무거운 질문이었다. 나는 단탈리안에 너무나 심취했다. 하지만 단탈리안은 하나의 착각, 그것도 하나의 '의도된 착각' 아니던가.

‘전부 끝나버린다면……?’

나는 이 세계가 어떤 곳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어쩌면 내가 죽든 말든 계속해서 사람들이 살아갈지 몰랐다. 그러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단탈리안의 악행은 유구하게 전해져서 그 소임을 다할 것이었다. 허나 만일 내가 죽는 것과 함께 이 세계마저 끝나버리면 어찌 되는가.

‘그래서는 안 된다.’

내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절규했다.

잭 올란드를 죽인 것이 없었던 일이 되어버린다.

사십만 명의 생명이 죽어나간 것이 없었던 일이 되어버린다.

파이몬의 숭고한 이상도.

바르바토스의 아름다운 신념도.

전부 없었던 일로.

‘그것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입술을 물어뜯었다.

만에 하나의 가능성.

내가 죽을 경우 이 세계 자체가 끝나버릴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있었다.

보통 죽는다는 것은 어둠에 드는 것. 그림도 소리도 없으며, 완전히 없어져버리는 것이다. 나의 성격과 기억과 목소리와 뉘앙스가 모조리 사라진다.

그것까지는 괜찮다.

마땅히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죄악이 소리없이 증발해버리는 것만은―――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세상은 나를 알아야 한다.

내가 어떤 작자였는지 기억해야만 한다.

그리고 나에 의해서 얼마나 수없이 많은 생명이 바스라졌는지 철저하게 기억해야 한다. 거기에는 파이몬이라는 여인이 있었다. 바르바토스라는 소녀가 있었다.

나의 딸.

데이지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

책임을 지기 위해서는 죽어야 했으며.

그 책임에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죽지 않아야 했다.

이 모순 속에서 나는 고민했다. 얼마나 사고에 침잠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안치소에 들어갔을 때는 하늘이 어두웠고, 나왔을 때는 새빨갰다. 나중에야 내가 이틀을 꼬박 그곳에 틀어박혔음을 알았다.

해답은 찾았다.

나머지는, 실행에 옮기는 것뿐.

‘단탈리안은 죽는다.’

먼저 라피스.

언제나 내게 조력해준 동반자.

‘하지만, 단탈리안의 신체가 아니라 내 의식은 다른 곳으로 옮긴다.’

‘그 말씀은……?’

‘이바르의 인형을 사용하겠어.’

라피스는 이미 모든 걸 알아들었다.

‘끝없이 책임을 지시려는 것이군요.’

‘그래.’

이바르의 인형에 의식이 옮겨 심어진 채로 나는 살아간다.

단탈리안으로서 살아가는 게 아니다. 단탈리안이라는 오해를 만들어낸 장본인, 마땅히 죄악을 짊어져야 하는 나로서, 계속해서 살아남는다.

‘저는……다시는 전하를 뵙지 못하는 것입니까.’

‘아아.’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단순히 목숨만 붙어 있는 상태로 남아야만 했다. 단탈리안이 누린 행복과 애정은 전부 버린다. 라피스도, 라우라도, 이바르도, 다른 어느 누구도,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채, 설령 알아낸다 하더라도 절대로 만나지 못한다.

이것이 최선.

단탈리안은 처벌받는 동시에 영원히 이 세계를 지탱하도록 강요받는다.

내가 나 자신에게 내리는 결말이었다.

‘나는 네가 살아주기를 원해. 라피스. 나는 잊어버리고…….’

‘그건 불가능합니다.’

라피스는 거절했다.

나를 만날 수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기를 거부하고, 마왕성과 함께 최후를 맞이하고자 했다. 그녀가 나를 설득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그녀를 설득할 수 없었다. 라피스 라줄리는, 그녀의 주군인 단탈리안과 함께 저물었다.

다음은 이바르.

‘아, 안 됩니다. 전하. 저는 못해요……저는 못해요, 전하.’

단탈리안을 계속 연기하라는 요구. 그리고 앞으로 결코 나를 만날 수 없다는 통보에,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절망했다. 차라리 마왕 단탈리안과 함께 죽을 것을 요구했다.

나는 라피스에게는 그런 최후를 허락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바르는 예외였다. 단탈리안을 끝까지 연기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이바르 이외에 그런 인재는 전무했다.

‘저뿐입니까.’

이바르가 망가진 인형처럼 자조했다.

동정심이 들었지만, 이미 한낱 동정심 때문에 발걸음을 돌리기에는 너무도 먼 곳까지 와버렸다. 게다가 이바르도 알고 있었다. 내 세력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에 이바르한테도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전하.’

결국 이바르도 납득했다.

‘영원히 전하와 만날 수 없음을……그 사실을 알고도 부정해야 하는 것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

데이지는 이런 결말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지. 그렇기에, 단탈리안의 본체는 그녀와 함께 죽어주었다. 데이지는 죽는 순간까지 단탈리안이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고 위안했으리라.

하지만.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내가 책임을 짊어지는 것은 오히려 지금부터다.

의미가 없어지지 않기 위해서.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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