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88화 (487/510)

무엇을 위하여 <48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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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녀라고 칭찬해주지 못할망정 옷차림을 지적하다니요.”

데이지가 자꾸 무엇인가를 말해나갔다.

나는 거기에 맞장구를 치고 적당히 어울려주었다. 그러나 내 머리 한켠에서는 계속해서 다른 것을 생각했다. 마치 얼굴 가죽이 머리와 분리되어서 따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나에게는 제법 익숙한 감각이었다.

“…….”

귓가에서 하나의 목소리가 속삭였다.

방금 전 꿈속에서 들은 목소리와 똑같았다. 파이몬의 음색이었다. 나는 그것이 파이몬이 아니라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었으므로, 별다르게 반응하지 않았다. 다만 데이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바르바토스 섭정도 잔뜩 귀여움을 받았지요. 아버님. 혹시 돼지가 교접할 때 어떻게 신음하는지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한 번쯤은 경청해볼 가치가 있습니다. 과연, 생살이 찢어질 때는 돼지도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습니다만.”

데이지가 비웃었다.

바르바토스에 대한 나의 애정을 이용해먹을 속셈이겠지.

과거에 나는 분노했다. 공개처형식이 열린 그날, 나는 데이지가 라우라와 파이몬을 무너트렸다는 생각에 이성이 마비되었다. 그리고 데이지에게 온갖 저주를 퍼부었다. 자결하라고 명령했다.

나에게서 그 말을 들었을 때 데이지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괴로웠겠지.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런데도 참아냈다. 심장에 새겨진 노예각인이 삐꺽거리는 것을 견디면서, 내 한마디 한마디에 의해 내장이 난도질당하는 것을 인내하고, 어떻게든 이곳까지 당도했다.

최후를 위해서.

더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나를 구하기 위해서.

“데이지.”

그렇지만 나는 구원과 같은 단어에 어울리는 인간이 아니었다. 데이지가 어떻게 생각해주더라도 그러했다. 바뀔 수 없는 사실이 이곳에 비석처럼 박혀 있었다. 나에게 안락한 위안 따위는 절대로 허락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이제 괜찮아.”

그걸 지금부터 밝힌다.

“이제 더는 연기하지 않아도 괜찮아, 데이지.”

“…….”

강철과 같이 차가웠던 데이지의 얼굴에 금이 갔다.

저 아이는 현명했다. 지금까지 내가 만나본 어느 누구보다도. 겨우 약간의 암시에 불과했지만, 데이지는 이 암시만으로 모든 것을 이해했으리라. 하지만 사람은 이해하고도 거절하고 싶은 것, 거절해야만 하는 것이 있었다.

“연기라니……잠꼬대가 심하시군요.”

눈동자가 유독 검은 여자아이였다.

갓 백지에 찍어 누른 묵색의 붓글씨처럼, 데이지의 머리카락은 한없이 어두우면서도 동시에 매끄럽게 윤이 났다. 그녀는 나를 만났을 때부터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이 세계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확신 속에서 자기 자신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또한 알았다.

“아버님의 말씀은, 원래부터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그래서 두려웠다.

그녀는 이미 이곳이 무대이며 자신이 어떤 배역이든 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듯했다. 마을사람들이 죽어나가 시체로 널브러진 가운데, 이 아이는 이미 눈앞의 학살자를 설득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나섰다. 그것이 나에게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죽여야 한다.

“헛소리가 심했습니다만, 오늘따라 유독 헛소리의 농도가……농도가 지독합니다. 의미, 불명이군요.”

언제든 죽일 수 있도록.

내가 죽일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당연히 데이지를 죽일 수 있었다. 문제는, 그녀가 나에게 죽는 것을 납득하느냐 마느냐. 오직 그뿐이었다.

혹시라도 나에게 정을 품으면 어떻게 되는가.

혹시라도 나를 ‘나쁘지 않은 사람’으로 여기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안 되었다. 그건 용납할 수 없었다. 살인이라는 것은 변명할 도리가 없이 악한 짓거리였다. 살인을 저지른 자, 그것도 끝없이 학살을 자행한 자는 어디까지나 악인으로 남아야 했다.

악인이 아닌 사람에게 자신이 살해당한다……그런 구도를 나는 결코 용납하지 못했다. 데이지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데이지에게 언제나 악인으로 남고자 결심했고, 따라서 언제 어디서 데이지가 살해당하더라도 그녀 스스로 납득할 수 있게 안배했다.

어떤 찬란한 대의가 있어서 네가 죽는 것이 아니다.

그저 너를 살해하는 내가 악인이므로, 변명할 구석이 없는 지점까지 도착하고 그곳에 영토를 선포한 악인이므로, 너는 살해당한다.

무미건조한 방정식.

하지만 간결했다.

“아버님은, 옛날부터 그런 부분이…….”

데이지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입술이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데이지가 대검을 휘둘렀다. 어떤 심정에서 검을 움직였는지 뼈저리게 느껴졌다. 연기가 간파당했다는 사실을 이해했지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서 시험해보는 것이었다. 이쪽이 공격을 피하거나 막아내기를, 데이지는 내심 간절히 바라고 있겠지.

진심 어린 살기.

칼날이 허초가 아니라 정말 내 목을 노리고 달려드는 것쯤은 느낄 수 있었다.

당연히 나는 미동하지 않았다.

“읏……!”

데이지가 급격하게 대검을 멈추었다. 칼날이 내 목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데이지의 시험은 실패했다. 그녀는 표정이 허물어졌다.

“어째서……어째서 피하지 않는 겁니까.”

가여운 데이지.

나의 딸.

“정말로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왜, 어째서…….”

단 한번도 아버지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녀가 힘들어 할 때 부드러운 위안을 남겨주지 못했다. 그녀가 고독에 몸서리를 칠 때 결코 옆에 있어주지 않았다. 내가 데이지에게 배역을 강요했다. 나를 증오하라고 요구했다. 딸에게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도 모른 채. 그렇지만 데이지는 한마디의 불평도 없이 내게 따라주었다…….

나는 처음으로 마음을 담아서.

데이지의 몸을 안아주었다.

“아…….”

너무나도 작은 몸집.

내 가슴에 들어오고도 빈 공간이 한참 남았다. 이렇게나 작고 가냘픈 아이였다. 나는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일까. 도대체 무엇을 저질렀는가……. 이 아이에게 수많은 사람을 죽이게 하고, 고문하게 만들고, 인간의 마음이 죽어버리도록 내버려두었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 아이를.

단순히 위험한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미안하다…….”

단탈리안은 누구에게도 사과해선 안 되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악인으로 남아야 하는 대명사였다.

따라서, 이것은 나 자신의 사죄.

온전히 나한테서 발언되는 사과의 말이었다.

데이지가 내 품안에서 떨고 있었다.

“너를 그대로 바라보지 않았어. 전부. 전부 내 잘못이야…….”

처음에 데이지는 반항했다.

자신을 죽이지 말아달라고. 파이몬이 사라지고, 바르바토스의 죽음마저 예정된 가운데, 자신마저 죽는다면 아버님은 견딜 수 없을 것이라고. 아니면 차라리 자신의 손으로 아버님을 죽이겠다며 절규했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말할 거라고 생각했어.”

나는 독약이 담긴 유리병을 꺼내 들었다. 단순한 독약이 아니었다. 한 모금만 마셔도 인간을 즉사시키는 맹독 중의 맹독. 제레미가 심혈을 기울여서 만들어낸 독극물이었다. 마왕인 나에게는 한 병만으로 부족하겠지만 걱정할 필요 없었다. 꽤 여러 병을 준비했으니까.

“아버님, 그건……?”

병마개를 열어 무색무취의 독약을 마셨다.

식도가 타오르는 고통이 느껴졌다.

내장이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다. 식도와 위장이 녹아내렸다. 나는 고통에 의식이 아득했지만, 필사적으로 두 번째 독약을 비우고, 세 번째 독약까지 입안에 한가득 머금었다. 아니나 다를까. 물약의 정체를 알아채고 데이지가 달려들었다.

“아버님!”

조금 더 가까이.

“안 돼……독약의 종류를, 이름을 말씀해주세요! 아, 아아! 안 돼……!”

더 가까이.

“싫어……이런 건, 싫어요…….”

이윽고 데이지가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을 때.

나는 오른손으로 힘겹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데이지가 고개를 들었다.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리는 그곳으로, 나는 가볍게 입술을 맞추었다.

“……!”

데이지의 눈동자가 커졌다. 하지만 아주 잠깐이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이해했는지 내 입술에 얽혀들었다. 역시 영리한 아이였다. 조금 더 데이지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조금 더 데이지의 곁에 머물러주고 싶었다.

머무를 수 있을 때는 머물러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고, 머무르고 싶어진 지금은 더 이상 그럴 시간이 없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생각해보면 나에게 후회란 언제나 이런 형태로 다가왔다.

하지만, 적어도 최후를.

독약이 조금씩 내 입술을 통해서 데이지의 입술로 떨어졌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약물은 다 흐르고 사라졌다. 우리가 천천히, 무언가 아쉬운 듯이 입술을 떼었다.

“……아파요, 아버님.”

데이지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나 역시 똑같이 웃고 있겠지. 얼굴에 감각이 없었지만 확신이 있었다.

“제레미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만든 물건이니까.”

“아팠어요……무척.”

데이지는 내게 응석을 부리며 꾸욱 안겨왔다.

이미 우리 두 사람의 마력이 폭주하고 있었다. 운석이 떨어진 것처럼 거대한 구덩이가 파였다. 바위조각과 돌조각이 중력에 거슬러서 허공에 부유했다. 하나의 세계가 끝나는 풍경. 우리 두 사람이 마침내 도착한 종착역이었다.

“이렇게, 아버님이랑 나눈 말도 기억도 사라지고……아무도 아버님을 기억해주지 못하고…….”

“그런 일은 생기지 않을 거야.”

게다가, 하고 내가 말했다.

“솔직히 다른 사람한테 기억되어도 좋을 만한 건 없으니까.”

“아버님은 항상 너무 삐딱해요.”

“무서워하지 않아도 괜찮아.”

내가 조금 더 강하게 데이지를 안았다. 아까부터 데이지는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죽는 것이 무서운 걸까. 이대로 사라진다는 것이 어쩔 수 없이 공포스러운 걸까. 생각해보면, 데이지는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았다. 두렵겠지.

“끝까지 같이 있어줄 테니까.”

“아버님.”

“그래.”

“……좋아해요.”

다시 한 번, 입을 맞추었다.

품안에서 생명이 꺼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데이지의 생명도. 내 생명도.

데이지가 내쉬는 숨결이 조금씩 약해졌다. 부드럽게. 나는 어딘지 모르게 데이지의 촛불이 아주 조금 더 먼저 꺼지리라는 사실을 느꼈다. 그것에 안도했다. 내가 죽은 것을 느낀 채로 데이지가 떠나길 바라지 않았다.

“…….”

시간이 무척 오래 흐른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데이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데이지는 옅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나는 평생 그녀에게 고통밖에 안겨주지 않았지만, 최후에 미소를 안겨주는 것만큼은 해낸 모양이었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몸이 죽어가는 감각.

머릿속이 정전되어가는 느낌. 이미 언젠가 한번 경험해본 감각이었다. 하지만 도저히 익숙해지기 어려웠다. 살아가는 건 싫어도 익숙해지기 마련인데, 왜 죽는 것은 몇 번이고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을까.

정말이지.

전신에 휘몰아치던 마력이 사방으로 빠져나갔다. 이제 몸 속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코로 내쉴 숨결조차 없었다. 나는 내장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조금이라도 더 데이지의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득해졌다.

사고가 정지했다.

눈앞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그리고………….

“…….”

마침내, 나의 두 눈동자로 앞을 바라보았다.

나는 땅바닥에 누운 채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잿빛 투성이의 하늘.

멀리서 새소리가 들려왔다. 나와 하늘 사이를 가린 나뭇잎들은, 이곳이 숲속 한가운데임을 알려주었다.

“……성공인가.”

내가 중얼거렸다. 자조하려는 느낌으로 말해보았지만 뜻밖에도 물기가 섞여 있었다. 나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데이지를 위한 눈물일까. 한동안 그 자리에서 소리를 죽이고 울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울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데이지를 위해서.

그리고 모두를 위해서.

“…….”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금도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이제부터, 이 세계에서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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