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위하여 <48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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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로 세 명이서는 안 돼요!”
“정말? 정말로 안 됩니까.”
내가 귀엽게 윙크를 했다.
팔자에도 없이 귀여운 척을 떨어보았지만, 내 노력이 무색하게도 파이몬은 진저리를 쳤다. 여기서 헷갈리는 지점은 과연 파이몬이 내 애교에 질색한 것인지, 아니면 내 제안에 질색한 것인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어느 쪽이든 절망적이었다.
“싫어요! 벌써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 단탈리안!”
“너무 비싸게 구는군요. 시트리랑은 몇 번이나 해보지 않았습니까.”
“시트리는 특별한 예외구요. 원래 소녀랑 애인이기도 했고, 또 시트리는 여자 역할과 남자 역할을 전부 해낼 수 있으니 편안했잖아요. 이건 얘기가 전혀 달라요. 전혀!”
내가 한숨을 쉬었다.
“제가 손이 닳도록 빌어도 안 될까요.”
“차라리 소녀가 기둥에 목을 매달고 죽어버리겠사와요.”
“제가 단검으로 복장을 쑤셔도 안 될까요.”
“그 전에 소녀가 단탈리안을 교살하겠어요.”
“파이몬.”
내가 진지하게.
세상에서 제일 난해한 형이상학적 문제를 드디어 풀어내겠다고 발표하는 철학자처럼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어떻게 바르바토스랑 세 명이서 잠자리에 들면 안 될까요.”
“싫어요―――!”
파이몬의 마왕성 공중정원에 끔찍한 절규가 울려 퍼졌다.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선제후 마왕들을 임명한 이후, 나는 공중정원에서 한가로운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공중정원은 사시사철 온화한 날씨가 흘러서 휴식하기에 딱 좋았다. 장미꽃이 만발한 풀밭에서, 나는 파이몬의 무릎베개를 만끽하고 있었다.
분위기가 참 좋다 싶어서 예전부터 생각해온 아이디어를 말해보았다.
바로 파이몬과 바르바토스 그리고 나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까놓고 말해서 3P였다.
“거절할 줄 알았지만 이렇게 반응이 격렬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뭘 한숨을 쉬는 건가요. 꼭 소녀가 나쁜 짓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한 단탈리안이 잘못한 거잖아요!”
내 얘기를 듣자마자 파이몬은 분기탱천.
아직 내가 머리를 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무릎을 빼버리는 바람에, 나는 졸지에 머리통이 땅바닥까지 떨어졌다. 조금 아팠다. 우리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서로를 마주보고 말싸움을 시작했다.
“아니, 한번 솔직하게 말해보십시오. 시트리는 괜찮고 바르바토스는 안 되는 이유가 뭡니까. 그거입니까? 바르바토스 아래에 거포가 안 달려서 불만입니까?”
“하, 알면서도 뭘 굳이 질문하는 건가요. 시트리는 원래부터 제 애인이었고, 저와 무척 친밀한 아이니까 괜찮을 뿐이와요. 바르바토스와 시트리 사이에는 고블린과 엘프 정도의 격차가 있답니다!”
“옛날에는 바르바토스랑도 애인 관계였다면서요.”
파이몬이 움찔거렸다.
“……도대체 몇 년 전 이야기인지요. 이천 년도 더 된 일이에요. 게다가 대판 싸우고 헤어졌는걸요. 누가 먼저 차버렸는지 이제 와선 기억도 안 나요.”
“한 번 애인이었는데 까짓거 두 번 못하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파이몬. 화끈하게 달려봅시다.”
“당신, 가끔 표현이 아주 싸구려가 된다는 거 아세요?”
파이몬이 나를 노려보았다. 경멸이 가득 흐르는 눈초리였다.
하지만 나는 나대로 할 말이 많았다.
“지금 이대로 계속 있다가는 언젠가 평원파와 산악파는 충돌하고 맙니다. 합스부르크 제국이라는 명분상의 국가로 조직들을 끌어 모았지만, 어차피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각 파벌의 우두머리부터 관계가 살벌한데 어쩌겠습니까.”
“…….”
“파이몬. 저는 당신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당신에게 제 숨김 없는 진심을 전하건대, 바르바토스 또한 저에게는 소중합니다. 저는 두 사람이 대립하지 않기를, 설령 대립하더라도 그 결말이 파국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파이몬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일단 육체적으로 우리 둘 사이를 봉합하겠다는 말씀인가요.”
“제가 보기에도 두 사람이 정신적으로 화해하기란 태양과 달이 진하게 입맞춤을 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하지 않을까 해서.”
“본심은요?”
“과거의 원한이고 뭐고 떠올릴 겨를도 없이 마구 보내버리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쓰레기…….”
파이몬이 드물게도 욕설을 입에 담았다. 파이몬 정도 되는 여자한테는 쓰레기라는 단어가 어마어마한 욕이었다.
“당신 성격에 소녀를 먼저 떠볼 것 같지 않아요. 바르바토스한테 말해보셨어요?”
“뭐.”
내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저께 일단 의견을 타진해보았습니다.”
“당황하면 말투가 정치적으로 변하는 게 당신의 못된 버릇이에요.”
“무슨 말씀인지 저로서는 도저히…….”
“됐어요. 결과나 말해보세요.”
내가 미소를 지었다.
“그때 맞은 채찍자국이 아직 등짝에 남아 있습니다만. 한번 구경해보시렵니까?”
“그럴 줄 알았다니까요.”
파이몬이 하얀 도자기잔을 들어 홍차를 홀짝였다.
“우리 두 사람이 화해하는 건 원리적으로 불가능해요. 그저 서로 비등한 세력을 갖춤으로써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 최선인걸요.”
“역시 아름다운 꿈에 불과했습니까…….”
“글쎄요. 소녀는 꿈이라기보다 저열한 망상이라 부르고 싶네요.”
“한 번쯤 해보고 싶었습니다.”
“정말 사심이 듬뿍 담겨 있군요!”
무슨 소리.
사나이라면 마땅히 꿈꿔도 이상하지 않았다. 왼쪽에는 바르바토스. 앙증맞은 몸매가 사랑스러운 백발의 소녀. 오른쪽에는 파이몬. 굴곡이 아름답게 져서 고혹적인 여인. 평원파와 산악파를 나란히 두고 즐긴다.
잠깐만. 혹시 그렇게 따지면 중간에는 중립파인 마르바스가 위치해야 하는 걸까.
“…….”
무시무시한 상상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안 되었다. 비록 내가 시트리와 농밀한 정사를 나누긴 했어도 시트리는 본래 여성. 아슬아슬하게 세이프. 아직 아슬아슬하게나마 세이프였다.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내딛으면 나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릴지 몰랐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단탈리안.”
파이몬이 슬그머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소녀는 단탈리안에게 바르바토스가 소중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바르바토스도 똑같을 거라고 믿습니다. 소녀와 바르바토스는 비록 죽는 그날까지 서로를 증오하겠지만, 단탈리안을 위해서라면 조금은 참을 수 있어요.”
“……그럴까요.”
내가 보이지 않는 물살에 끌려가듯이 파이몬의 무릎에 머리를 눕혔다. 부드러운 살결이 내 무거운 두개골을 받아주었다.
“그런 야트막한 안전장치가 과연 도움이 될지 의문입니다.”
“바르바토스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여려요. 만일 저를 없애는 것이 단탈리안에게 괴로움만 안겨주리라는 것을 확신하면, 바르바토스는 절대로 소녀를 죽이지 않을 거에요.”
“파이몬도 그렇습니까?”
“그럼요.”
파이몬이 손바닥으로 입가를 가리며 우아하게 웃었다.
“팔다리만 잘라버리는 걸로 용서할 수 있어요.”
“으이구. 그게 무슨 용서입니까.”
“적어도 목숨은 붙어 있잖아요?”
순수해 보이는 얼굴을 가진 주제에 머릿속은 은근히 살벌한 파이몬이었다. 그런 점이 매력이라고 생각하는 나도 분명히 뇌수가 썩어 있겠지.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눈을 감았다.
파이몬이 자그마한 목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만해도 좋으리라, 이제 끝나버렸으니. 어찌하여 그녀는 과거를 잊어버리고 오직 나의 슬픔만을 갈망하는가. 왜 끊임없이 눈물이 흐르도록 부추길까. 나의 고통을 위한 약을 나는 찾을 수 없도다…….
잠결에 잠기면서 중얼거렸다.
“파이몬.”
“네, 단탈리안.”
“의외로 노래는 별로 못 부르는군요…….”
“귀를 찢어버리는 수가 있어요?”
파이몬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화냈다가,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작게 웃었다. 나는 그 웃음이 바람과 함께 귓가를 장난스럽게 스치는 것 같아서 좋았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 그만해도 좋으리라. 이제 끝나버렸으니…….
하지만.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 * *
“…….”
잠깐 선잠에 잠겼을까.
누군가가 헛기침하는 소리에 조용히 눈을 떴다. 주위를 둘러보자, 친위병들이 잔뜩 긴장한 채 도열해 있었다. 적군의 검주가 이곳을 향해 돌파해오고 있기 때문이겠지. 더군다나 적은 단신으로 몇 겹이나 되는 전열을 꿰뚫었다. 사상최강의 전사임이 분명했다.
“군사를 뒤로 물려라.”
“전하. 그건 경호상의 이유로 불가하옵니다.”
자크리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이 충실한 용병은 언제나 내게 직업정신이 무엇인가 보여주었다. 그는 작은 세계밖에 몰랐지만 그렇기에 자크리의 세계는 단단했다. 그 강도는 마땅히 경탄스러웠다.
“우리 둘의 인연도 제법 오래되었군, 자크 보놈.”
“예. 전하께서 해방동맹의 일원이 되신 그날 밤으로부터 제법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래. 파이몬이 나를 이끌어주었지.”
자크리가 입을 다물었다.
자크리에게 파이몬은 하나의 우상과 같았다. 이 작고 옹골찬 난쟁이는 파이몬에게 매혹되어 전 생애를 공화주의에 투신했고, 이제는 파이몬의 후계자,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게 밝혀져 있는 나를 따르고 있었다.
“잠깐 파이몬의 꿈을 꾸었어. 여전히 아름답더군. 그녀의 목소리, 그녀의 얼굴, 심지어 그녀의 감촉마저 나에게는 생생히 느껴지고 있다네.”
“…….”
“자크리. 프랑크는 느슨한 공화국의 연합체가 되어가고 있다. 사르데냐 또한 도시국가들이 난립하는 상황에 처할 것이야. 일단 공화주의가 양팔을 널리 편다면, 다른 나라들이 아무리 발악하더라도 시대의 조류에 잠식되겠지.”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 말을 우회적이지만 확고하게 전달했다.
나는 오랜 친구를 대하는 말투에서 마왕의 말투로, 감히 거절을 허락하지 않는 말투로 어조를 바꾸었다.
“본인은 수양딸과 긴밀히 나누어야 할 대화가 있다. 방해는 용서하지 않겠다. 자크 보놈. 귀관은 친위대를 이끌고 후방으로 물러나도록. 활시위를 당겨서 적을 위협하는 것은 허락하되, 일체의 공격 행위를 금한다.”
“알겠습니다. 전하.”
자크리가 고개를 숙이고 보병과 궁병을 이끌고 빠져나갔다.
이윽고 내 눈앞이 환하게 트였다. 저 멀리서 흙먼지가 피어났고, 병기와 병기가 부닥치는 쇳소리가 아득하게 울렸다. 나는 지팡이로 땅바닥을 툭툭 두들겼다. 그것이 풍경에 묘한 리듬을 입혔다.
그리고―――.
데이지가 저곳에서 느릿하게 걸어왔다.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시녀복은 이미 칼날과 화살촉에 찢겨져 넝마조각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의 핏물인지, 데이지의 핏물인지 모를 새빨간 액체가 그녀한테서 흘렀다. 이제 몸을 가누기도 힘겨운 것일까. 대검을 쥔 데이지의 손이 조금씩 떨렸다.
“…….”
그렇게까지.
나에게 도착하기 위해 여기까지 노력했는가.
나는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녀석의 손에서 검을 빼주고 싶었다. 양팔로 데이지를 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일렀다. 치명적인 일격을 선사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참아야 했다.
데이지가 멈추었다. 그녀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데이지는 핏물이 눈가를 가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멍하게 얼굴을 문질렀다. 아주 약간 피가 벗겨졌다. 그리고 데이지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아…….”
내 존재를 깨닫고, 데이지가 가볍게 웃었다.
예전이라면 비웃음이라고 착각했을 그 미소였다.
나는 잠시 데이지가 먼저 말할 수 있게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데이지는 입술을 열지 않았다. 마치 시간감각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체내에서 피가 너무 빠져나간 탓이었다.
내가 입술 안쪽을 이빨로 깨물었다. 그렇게 겨우 입꼬리를 비웃는 모양새로 만들었다.
“……완전히 넝마짝이 다 되었군. 그 볼썽사나운 몰골은 무엇이더냐.”
그제야 데이지는 시간을 느낀 것 같았다.
데이지의 입가에서 미소가 짙어졌다. 의식적으로 연출해낸 미소. 오직 나 한 사람을 위해 여태까지 가공하고 완성한 가면으로, 데이지가 입술을 열었다.
“아버님을 뵙기 위해서, 이렇게까지 노력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