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위하여 <486화>
--------------------------------------------------------------------------------------------------------------------------------------------------------------------------------------------------------------------------------------------------------------------------
마왕성 지하 10층의 심처.
라피스 라줄리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국무상서한테 배정된 집무실에는 짧게는 이십 분, 길게는 한 시간마자 끊임없이 보고가 올라왔다. 오늘은 마왕성 건축을 담당한 이들이 집무실에 방문했다.
“아직 완공식 준비가 남았습니다만 어찌저찌 완성했습니다요.”
“그동안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아뇨, 아뇨. 위대한 마왕 전하께 봉사하는 것이야말로 소인들의 기쁨입니다.”
난쟁이와 고블린 대여섯 명이 웃었다.
칠 년 가까이 끌어온 공사가 드디어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사실 공사 자체는 이미 끝났다. 단지 이만한 대작업에는 마땅히 화룡점정이 필요한지라, 난쟁이와 고블린은 요 근래 가장 화려한 완공식을 열어볼 속셈이었다.
“저기, 상서님. 완공식에는 어떤 분들이 참석하실 예정인지 혹시 여쭈어도…….”
“단탈리안 전하와 친분이 있는 분들을 초대할 것입니다. 마르바스 전하와 시트리 전하, 가미긴 전하, 바싸고 전하는 모두 참석하겠지요. 기대해도 괜찮습니다.”
건축가들 안색이 환해졌다.
이들에게 완공식이란 일종의 장기자랑 무대였다. 자신들이 얼마나 멋지고 대단한 건축물을 만들어냈는지 알림으로써 몸값을 높일 수 있었다. 자고로 장기자랑은 직책이 높으신 양반들 앞에서 뽐내야 제맛이었다. 마르바스, 시트리, 가미긴, 바싸고가 있어준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상서님!”
“별말씀을.”
라피스 라줄리가 묵직한 돈주머니를 꺼내 난쟁이한테 건네주었다.
“아직 완공식이 남았다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여흥에 불과합니다. 오늘부로 여러분은 일단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영지로 올라가서 편안하게 쉬십시오.”
“오오……!”
이른바 수고비였다.
주머니가 상당히 묵직했다. 건축가들은 라피스 라줄리와 칠 년 동안 함께 일했다. 평소에는 지독하게 자린고비에다 자신들의 능력을 쥐어짤 대로 쥐어짜는 여자였으나, 하사금을 내릴 때만큼은 화끈했다. 섭섭함 따위는 구경하기도 힘들 정도로.
“오랜만에 코가 삐뚫어지도록 마실 수 있겠군요!”
“상서님께서도 바쁘지 않으시다면 소인들과 같이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저희가 그래도 한번은 대접을 해드려야 하는데……헤헤.”
“괜찮습니다.”
라피스 라줄리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함께하면 여러분도 편히 쉬지 못하겠지요. 또한 저에게는 아직 처리해야 할 업무가 있습니다.”
“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희야 아쉬울 따름입니다요.”
난쟁이와 고블린이 멋쩍게 굽실거렸다. 라피스 라줄리는 그들에게 까마득한 상관이자 고객. 알아서 받들어 모셔야 하는 위인이었다. 그런 사람과 같이 해봐야 즐거울 것 하나 없었으나 일단 예의상 권유했다. 라피스 라줄리 역시 예의 바르게 거절했다.
“그럼 소인들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예. 살펴가십시오.”
건축가들이 우르르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떠들썩한 분위기가 사라지자 공기가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라피스 라줄리는 의자에 앉아서 그대로 서류를 처리했다. 단탈리안을 대신하여 서명란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으며, 국무상서의 인가를 의미하는 도장을 기계적으로 정확히 찍었다.
“…….”
어느새 오늘 하루치 서류를 전부 처리해버렸다.
라피스 라줄리가 가만히 서류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동안 무표정하게 서류더미를 쳐다보다가, 이렇게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누군가가 번쩍 나타나 새로운 서류뭉치를 전달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마왕성이 완성되었다고 했지.’
라피스 라줄리가 일어섰다. 그녀는 습관처럼 복장을 단정하게 가다듬었다. 이제는 몸만큼이나 익숙하여 어쩌면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정복을 입은 채 태어나지 않았을까 싶었다.
‘태어날 때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라피스 라줄리가 마왕성 복도를 걸어갔다.
그녀의 발걸음에는 일정한 리듬이 있었다. 등을 쭉 펴고, 어깨가 일절 흔들리지 않은 채, 라피스 라줄리는 정면을 바라보며 나아갔다. 만일 눈앞에 단탈리안이 나타난다면 당장이라도 멈춰서 공손하게 인사할 수 있도록.
‘어미가 나를 버린 것이 생후 11일째였나.’
반인반마(半人半魔).
지금이야 단탈리안이 정책을 펼쳐 계급제도와 노예제도가 완화되었다지만, 라피스 라줄리가 태어났을 시기만 해도 마계에는 엄연히 부족마다 신분이 달랐다. 그중에서 반인반마는 어떠한 종족에도, 어떠한 부족에도 소속되지 못했다.
불가촉천민.
태어나자마자 어미에게 버림받았다. 서큐버스 부족은 애써 라피스 라줄리가 마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허락했다. 물론 허락만 했을 뿐이다. 라피스 라줄리는 어릴 적부터 굶주린 배를 끌어안고, 골목과 골목, 집과 집을 돌아다니며 구걸했다.
‘…….’
어느 날, 라피스 라줄리는 길바닥에서 눈을 떴다.
왜 자신이 정신을 잃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머리가 끈적했다.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만져보니 피딱지가 굳어 있었다. 라피스 라줄리는 누군가가 돌을 던지는 바람에 자기가 기절했음을 알았다.
‘살아야겠다.’
그렇게 라피스 라줄리는 결심했다.
마을에서 떠나 무작정 도시에 들어갔다. 라피스 라줄리는 온갖 더러운 일과 잡일을 손에 묻혀가며 어떻게든 생존했다. 쿤쿠스카에서 계급을 불문하고 인재를 등용한다 했을 때, 라피스 라줄리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상회에 투신했다.
‘더러운 창녀. 왜 자살하지 않나 모르겠어.’
‘서큐버스 년이 보나마나 뻔하지.’
‘지 애미랑 애비한테도 버림을 당했다면서.’
물론 그곳에도 차별과 멸시가 엄연히 있었다.
라피스 라줄리가 상회 건물을 돌아다닐 때면, 동료 상인들이 대놓고 바닥에 침을 뱉었다. 그중에는 불가촉천민 바로 위의 계급에 해당하는 하층민도 많았다. 하지만 라피스 라줄리는 꿈쩍하지 않고 업무에 임했다.
기회.
언젠가 기회가 찾아오리라.
자신을 멸시한 이들에게 복수한다―――한때는 그런 생각을 품었을지 몰랐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라피스 라줄리는 그저 순수하게 증명하고 싶었다. 무엇을 증명해야 할지조차 명확하지 않았다. 다만 자기 자신에게도 '증명되어야 할 무엇'이 있다고 생각했다.
막연한 기회.
그것은 오랜 기다림 끝에 다가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단탈리안 님. 쿤쿠스카 상회의 라피스 라줄리입니다.’
‘워, 워어?’
‘단탈리안 님과 쿤쿠스카 상회의 거래는 앞으로 제가 전담하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라피스 라줄리가 복도 한가운데서 멈추어섰다.
그녀는 대리석으로 마감된 복도벽에 손바닥을 대보았다. 차가웠다. 서늘했다. 고급스러운 복도. 라피스 라줄리에게는 이것보다 볼품없는 동굴이 오히려 더 익숙했다.
‘죄송합니다, 단탈리안 님. 실례지만 이렇게 말씀드릴 수밖에 없군요.’
‘말씀하시지요…….’
‘이렇게 볼품없는 던전은 제 짧은 마생(魔生)에서 처음 보았습니다.’
팔 년 만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
쿤쿠스카 상회의 밑바닥에서 전전하던 라피스 라줄리는 일국의 국무상서가 되었다. 유사시에는 단탈리안을 대신하여 합스부르크 제국의 업무까지 맡았다. 마계의 대공들은 그녀를 보자마자 공손하게 악수를 청했고, 한때 아득한 상관이었던 이바르 로드브로크조차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라피스. 보여주자. 약자의 긍지를.’
약자의 긍지.
단탈리안은 그녀에게 약속을 지켜주었다.
검은 산맥을 넘어 브란덴부르크를 평정했고, 합스부르크를 정벌하고 프랑크와 사르데냐를 토벌했다. 대륙과 마계에 존재하는 강자들은 모두 단탈리안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단탈리안의 옆에는 언제나 라피스 라줄리, 그녀가 말없이 서 있었다…….
버릴 수도 있었으리라.
토사구팽하고 보다 유능한 인재를 재상으로 삼았을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단탈리안은 단 한 번도. 결코 단 한 번도 라피스 라줄리를 무시한 적이 없었다. 누군가가 라피스 라줄리를 조금이라도 모욕한다면, 단탈리안은 곧바로 그 자를 참수하여 개먹이로 던졌다.
“국무상서.”
문득 목소리가 들렸다.
라피스 라줄리가 뒤를 돌아보니, 제레미 자경단장이 곰방대를 물고 서 있었다.
“이쪽은 준비를 다 끝냈어요. 슬슬 국무상서도 저와 함께 가시죠.”
“수고하셨습니다, 자경단장.”
라피스 라줄리가 고개를 까닥 숙였다.
“하지만 제가 있을 곳은 여기입니다.”
“……준비가 다 끝났다니까요. 약속한 시간이 되면, 여기, 무너져버려요?”
“자경단장.”
라피스 라줄리가 건조하게 말했다.
“제가 있을 장소는 이곳입니다.”
“…….”
제레미가 연초 연기를 허공에 흘렸다.
그녀는 허리를 깊숙하게 숙임으로써 상대방에게 최대한의 경의를 표현했다. 제레미는 평소와 달리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본래 아무런 표정이 없는 것이 그녀 본연의 얼굴. 제레미가 허리를 숙인 것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국무상서를 뵙고 적잖이 마음의 위안을 얻었습니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영지를 잘 부탁드립니다, 자경단장. 항상 파르시 영주대행과 함께하십시오.”
“예. ……제 목숨을 바쳐서.”
그리고 제레미가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라피스 라줄리가 반대편으로 향했다. 잠시 뒤, 넓직한 알현실이 나타났다. 알현실 양쪽에 마왕 단탈리안을 상징하는 깃발이 수십 기나 걸려 있었다. 정중앙에는 붉은색 양탄자가 펼쳐졌는데, 그 끄트머리에는 당연하게도, 단탈리안의 옥좌가 자리했다.
“…….”
라피스 라줄리가 알현실의 정중앙을 걸어갔다.
어떠한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사방이 적막했다. 심지어 그녀의 발소리조차 양탄자가 전부 받아냈다. 텅 빈 옥좌를 향해 나아가며, 라피스 라줄리는 한 남자에 대해 떠올렸다.
‘라피스. 연극은 실패했어. 우리는 실패하고 말았어…….’
‘책임을, 지실 생각이군요.’
‘그래.’
이윽고 옥좌에 도착했다.
라피스 라줄리가 바닥에 앉았다. 그녀는 옥좌에 다소곳하게 팔배개를 했다. 머리를 그곳에 기대고, 라피스 라줄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나는 네가 살아주기를 원해. 라피스. 나는 잊어버리고…….’
‘그건 불가능하군요.’
어디선가 쿠웅, 하고 진동이 전해졌다.
마왕성 전체가 흔들렸다. 마지막 작전이 시작된 것이었다. 마법사들은 마왕성 전역에 걸쳐서 반마법장을 형성하였고, 제레미가 이끄는 암살대는 핵심적인 구조물들을 파괴시켰다. 마왕성이 붕괴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였다.
‘저는 단탈리안 님을 잊고 살 수 없습니다.’
‘라피스……라피스…….’
‘죄송합니다.’
부디 같이 책임을 지게 해주십시오.
라피스 라줄리가 옥좌에 조금 더 머리를 파묻었다. 언뜻 향기가 났다. 몹시 그리운 향기. 언제 부터인가 그녀가 가장 좋아하게 된 냄새였다.
‘단탈리안 님.’
천장에서 돌먼지가 떨어졌다.
깃발들이 대리석 바닥에 쓰러졌다. 바닥이 갈라지는 소리가 기괴하게 울려 퍼졌다. 거대한 기둥들에 금이 갔으며, 사방에서 자그마한 돌덩이와 먼지구름이 피어났다. 마왕성 전체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비명은 점점 더 강해졌다.
라피스 라줄리가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단탈리안 님. 하지만, 지하 십 층은 규모가 너무 거대합니다. 조금은 줄여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그렇군요. 지하 팔 층이어도 충분합니다.’
그리운 기억.
자신의 질문에 단탈리안이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오직 라피스 라줄리에게만 보여주는 단탈리안의 맨얼굴이었다.
‘그러면 우리 둘만의 공간이 좁아지잖아.’
‘예?’
‘아니. 그러니까. 어, 내 마왕성은. 그렇다고.’
단탈리안이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단탈리안의 얼굴이 연하게 붉어진 것을, 라피스 라줄리는 틀림없이 보았다. 너무나도 뜻밖의 대답에 그녀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때 자신이 어떤 표정을 내보였을지, 그녀는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
라피스 라줄리가 미소를 지었다.
한없이 어두운 가운데, 모든 것이 무너졌지만 또한 조용했다.
무척이나.
라피스 라줄리는 그 고요함을 사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