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85화 (484/510)
  • 무엇을 위하여 <48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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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만 독약의 영향으로 잠시 정신을 잃으셨습니다.”

    “으음.”

    라우라 군무상서가 곤란하다는 듯 눈썹을 모았다.

    무탈하다는 말에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이번에도 어김없이 무리를 한 것에 화내야 할지, 잠깐 동안 고민하는 분위기였다. 이윽고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단탈리안에게―――단탈리안의 인형에 다가가서 한숨을 쉬었다.

    “…….”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누군가가 자신의 심장을 쥐어짜낸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가슴이 괴로웠다. 이바르는 한 달 전, 자신이 무너져 내리고 만 그날 밤, 단탈리안이 나지막하게 속삭인 말을 기억했다.

    ‘라우라를 시험대로 삼아.’

    차가운 목소리.

    온갖 인정(人情)을 끊어버린 듯한 어조에 이바르는 바닥 없는 슬픔을 느꼈다.

    ‘시험대입니까.’

    ‘그래, 이바르. 그대의 연기가 어디까지 통용될지 시험하는 것이다. 라우라는 틀림없이 나를 가장 사랑하는 여자야. 그대와 마찬가지로.’

    ‘…….’

    이바르는 단탈리안의 저의를 알아들었다.

    ‘제가 군무상서를 속이는 데 성공할 경우, 다른 사람들도 능히 손쉽게 속일 수 있다는 말씀이군요. 군무상서가 인형의 정체를 간파하지 못할 정도라면 제 조종술이 완전무결하다는 것을 의미할 테니 말입니다.’

    ‘그렇다.’

    ‘만약에 속이지 못했을 경우에는?’

    이바르가 질문했다.

    다소 도발적인 말투였다. 당신의 계획이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가. 더 솔직하게 말해, 이바르는 마음속으로 이 대본이 실패하기를 강렬하게 원하고 있었다. 실패해버려라. 영원히 고통에 잠기느니 차라리 파탄이 나버리는 편이 좋았다.

    단탈리안이 즉답했다.

    ‘라우라를 죽여라.’

    ‘…….’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라우라가 받아들일 리 없다. 라우라는 강인한 여자지만, 그 강인함은 그녀한테서 비롯하지 않는다. 내가 있다는 사실. 내 곁에서 함께한다는 사실. 거기서 비로소 라우라는 바로 설 수가 있어.’

    단탈리안이 창문을 바라보았다.

    단탈리안의 시선은 창밖이 아니라 다만 달빛이 창백하게 스며들어 있는 유리창에 머물렀다. 바깥에서 나방이 툭, 툭, 조용하게 유리창에 머리를 부닥치고 있었다. 나방은 왜 이곳이 안쪽인데 들어갈 수 없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사라지면 라우라는 끝이다. 복수에 미쳐서 날뛸 것이야. 무엇에 복수해야 하는지 자기 자신도 모르고 그저 한없이 세상을 원망하고 저주하겠지. 그리고 어느 순간, 내가 더 이상 없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닫고 자살할 것이다.’

    단탈리안이 가만히 나방의 투신을 바라보았다. 나방은 자기가 안쪽을 들여다 볼 수는 있어도 뚫고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얼른 날개를 파닥여서 어디론가 날아갔다. 그러자 단탈리안도 시선을 돌렸다.

    ‘나는 그런 최후를 바라지 않는다. 편안하게. 라우라 스스로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죽여주게.’

    ‘…….’

    이바르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 단탈리안이 예고한 시험의 순간이 다가왔다. 라우라는 침대에 다가가서 자신의 주군과 쏙 빼닮은 인형을 내려다보았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며, 이바르는 품속에 갈무리해둔 단검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눈치 채라.

    이바르가 가슴에 손을 올리고 간절히 열망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라우라 데 파르네세의 뒷모습이 비추었다. 하얀 목덜미가 무방비하게 이바르를 향해 노출되어 있었다. 단검으로 내리 찍으면, 라우라 데 파르네세와 같은 인간의 신체는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쓰러지리라.

    눈치 채라.

    이바르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당신이 사랑하는 남자이지 않는가. 눈이 멀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정도로 사랑하지 않았는가. 인형과 헷갈려서 구분하지 못할 만큼 그 사랑이 약하지 않을 터. 제아무리 똑같이 생겨도, 제아무리 무표정하게 누워 있어도, 무엇인가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아채라.

    그리고 이곳에서 끝내도록 하자.

    이바르는 라우라를 살해한 다음 곧바로 자결할 생각이었다. 라우라를 속이지 못하는 연기력으로 다른 마왕들, 가미긴과 시트리를 속여내기란 불가능했다. 단탈리안의 계획은 실패하고 무위로 돌아간다…….

    그것이 최선.

    이바르 로드브로크한테 유일하게 남은, 최선의 결말이었다.

    막사의 침대. 라우라가 인형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알아차렸을까. 이상한 낌새를 느꼈을까. 이바르가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라우라를 바라보았다.

    “어휴.”

    라우라 데 파르네세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다정한 질책이었다.

    “하여간 주군은 항상 무리하는 게 문제다.”

    그녀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은 채 인형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사랑스러운 애인을 어루만지듯 꼭 그처럼 라우라는 인형을 내려다보았고 또 속삭였다.

    “…….”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가슴에 올려둔 오른손을 제자리로 돌렸다. 그녀는 왼손으로 오른손을 덮음으로써, 자신의 손이 미약하게 떨리는 것을 감추었다. 이바르는 자신이 성공했다고 기뻐해야 할지, 실패했다고 슬퍼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내 이바르가 적절한 표현을 찾아냈다. 단탈리안이 승리했다. 그러나 자신은,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실패한 것이었다. 사실 언제나 그러하지 않았는가? 이바르는 자조 섞인 미소라도 지어보려고 했지만 뜻밖에도 괴로운 표정밖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군무상서.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음? 무슨 일인가.”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다음 시험을 진행하였다.

    단탈리안이 죽는 것과 동시에 마왕성은 붕괴되기 시작했다. 마왕성의 구조를 뒷받침하는 마력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에 마왕성 전체의 강도가 달라지면서 대대적으로 무너지는 것이었다.

    어차피 붕괴될 것이라면 지금이 기회였다. 단탈리안은 그렇게 말했다.

    ‘내가 죽자마자 라피스가 내부에서 폭발을 일으킬 예정이다. 크게 일으킬 필요도 없겠지. 마왕성을 지탱하는 핵심적인 구조물만 파괴하면 그만이니.’

    ‘라줄리 국무상서가…….’

    ‘전쟁 도중에 공화국이 특공대를 보냈다. 마왕성의 내부 구조를 알려준 사람은 데이지와 루크.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특공대가 정확히 마왕성을 타격했는지 설명할 수 있다.’

    마왕성이 붕괴하는 데 그럴듯한 이유를 마련할 것.

    단탈리안의 죽음을 숨기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건이었다. 다행히도 마왕성은 매우 깊은 지하에 위치했다. 무너져 내린 마왕성에 지하가 파묻히면, 그곳에 마력이 머무르는지 머무르지 않는지 알아채기 어려웠다.

    그리고 이는 두 번째 시험이기도 했다.

    ‘만약 파르네세 군무상서가 조금이라도 위화감을 느꼈다면.’

    라우라가 사라진 직후. 이바르가 막사에 들어와서 생각했다.

    ‘마왕성이 무너졌다는 사실에 의해 무언가를 눈치 챌지도 모른다. 단탈리안 전하는 이상하고, 마왕성까지 붕괴되었다. 그렇다면 도출되는 정답은 단 하나뿐이다.’

    반대로 말해, 라우라가 마왕성의 붕괴를 목격하고도 여전히 깨닫지 못한다면.

    '단탈리안이 사망했다'라는 사실을 감히 떠올리지도 못할 정도로 이바르의 인형이 완벽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바르는 라우라가 돌아올 때까지 차분히 기다렸다. 라우라가 아무것도 깨닫지 못해야만, 그제야 비로소 이바르는 확신을 품을 수 있었다. 자기가 인형을 앞세워서 연기하더라도 어느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리라는 확신을.

    “…….”

    초조한 기다림이었다. 이바르는 몇 번이나 회중시계를 꺼내어서 시간을 확인했다. 오 분, 십오 분, 삼십 분. 그녀는 반쯤 의도적으로 시계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되도록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안 그러면 저 침대 아래 단탈리안이 죽은 채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릴 게 분명하므로.

    “…….”

    이바르는 견딜 수 없어서 막사를 나왔다.

    잠시 뒤, 라우라 데 파르네세가 친위대를 이끌고 복귀하였다. 이바르는 그녀의 얼굴 표정을 보자마자 대본이 '성공'했음을 알았다. 라우라는 틀림없이 초조해 하고 있었지만, 이쪽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거나 질책하는 기색일랑 전혀 없었다.

    ‘그래. 좋다.’

    이바르는 마음이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단탈리안이 발견하고 키워준 소녀로서의 마음이.

    이제 갓 개화하여 피려고 했던 꽃잎이 떨어지고, 수천 년 동안 이바르를 움직인 지배자로서의 면모가 고개를 들었다. 마왕들을 비웃을 뿐만 아니라 그런 마왕을 추존하는 세상 전체를 경멸하는 목소리가 서서히 떠올랐다.

    ‘어디 한번 본인의 연기를 꿰뚫어 보아라. 너희들이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내 조종술이 완벽하다면―――어차피 단탈리안 전하에 대한 그대들의 사랑도 그 정도에 불과했다는 얘기이다.’

    이바르가 입을 열었다.

    “군무상서. 전하께서 의식을 차리셨습니다.”

    “주군께서!”

    “의식을 차리시긴 했어도 많이 힘들어하고 계십니다.”

    이바르는 자신이 자유자재로 연기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아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기에게 익숙했던 바로 그 감각이었다. 이바르는 대여섯 명의 인물을 한꺼번에 조종해왔다. 언젠가는 쿤쿠스카의 상주로서 지냈으며, 또 언젠가는 상회의 유망한 간부 후보로 지냈다. 여태까지 이바르의 가면을 간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탈리안을 제외하고.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라우라를 막사 안쪽으로 안내하였다. 마치 라우라의 발자국 소리를 엿듣고 정신을 차린 것처럼, 이바르는 인형을 조종하여 말을 내뱉도록 만들었다.

    “라우라입니까? 라우라의 발소리가 들리는군요…….”

    “응, 주군. 주군의 라우라이다.”

    이바르의 인형술에 군무상서는 감쪽같이 속아넘었다.

    “주군은 바보다. 무엇이든 몸으로 무마하려 하니까 또 누워버린 것 아닌가. 바보는 죽어도 고쳐지질 않는다더니, 아무래도 주군은 앞으로 영원히 바보일 모양이다.”

    “너무하는군요. 이래 봬도 최대한 노력한 결과입니다. 독약을 무려 세 병이나 마셨다구요……살아 돌아왔다는 점에서 전 이미 모든 의무를 다했습니다.”

    “주군은 지금까지 살면서 아무런 의무도 지킨 적 없다. 정말로.”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하…….”

    라우라가 눈물을 참아내며 인형에게 말을 걸면 걸수록.

    또한 인형이 단탈리안을 연기하며 대답하면 대답할수록, 이바르의 마음은 더욱 더 차갑게 냉각되었다. 문득 눈앞의 세상이 자신으로부터 한없이 멀어진 것 같았다. 지독한 거리감이 엄습했다.

    ‘그녀는 뭘 보고 있는가?’

    이바르가 라우라를 쳐다보았다.

    ‘나는 무엇을 보았던 것인가.’

    어쩌면 단탈리안이 대답해줄지 몰랐다. 그러나 이 질문을 내던지기에는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났다. 더 이상 그녀는 대답을 바라며 단탈리안을 올려다볼 수 없었다.

    ‘저 소녀에게는 아직 단탈리안 전하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바르가 이빨을 꾹 깨물었다.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탈리안을 몰락시킨 주범은 이바르 본인만이 아니었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 저 인간종의 여인도 몰락에 참여했다. 아니, 오히려 라우라야말로 가장 거대한 범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나만이 책임을 져야 하는가. 왜 전하께서는 저 소녀에게 안락한 여생을 허락했는가. 내가 인형술을 익혔기에? 나는 연기가 가능하고 저 소녀에겐 불가능하기 때문에?’

    불합리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망가트렸다.

    이바르는 교묘하게 단탈리안의 뉘앙스를 흉내 내어 라우라의 정신을 구석으로 몰아 세웠다. 간단한 일이었다. 단탈리안이 미묘하게 엘리자베트를 추켜세우는 발언을 계속해서 흘렸다. 라우라는 점점 더 고통에 빠져들었다.

    라우라가 숨결을 토해내듯 말했다.

    “하지만……주군에게는 소녀가 있다. 설령 불의의 사태가 일어날지라도 소녀는 충분히 대응할 자신이 있다. 주군. 굳이 아군이 패배할 경우를 대비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하니까요.”

    이바르가 마음속으로 싸늘한 비웃음을 지었다.

    “저는 제가 틀렸을 가능성을 도저히 간과할 수 없습니다. 그래요. 예컨대 갑자기 하늘에서 용이 나타나서 엘리자베트를 도울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

    라우라의 표정이 무너졌다.

    라우라는 어떻게든 얼굴을 가다듬으려 했으나 무리였다. 숨결의 떨림, 입술 끝이 부들거리는 것, 무엇보다도 창백해진 안색이 그녀의 심리를 적나라하게 암시했다.

    이바르는 그 짙은 절망을 전신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독백했다.

    ‘그대 역시 지옥을 맛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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