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84화 (483/510)
  • 무엇을 위하여 <48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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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단탈리안이 그토록 슬픈 눈동자를 지었는가.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이해했다. 불과 수십 분 전에 자신은 지극히 어리석게 행동했다. 그때 이바르는 이렇게 호언장담했다.

    ― 소녀에게 잘못이 있다면 소녀가 스스로를 벌하겠습니다.

    ― 어떤 잘못이라도 반드시 감당해내겠습니다.

    우둔의 극치.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자기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도 모른 채 너무도 쉽게 책임을 지겠노라고 맹세했다. 고작해야 그녀는 죽음을 각오했다. 이제 그녀는 사형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지금 그녀에게 들이닥친 것은 그와 비교할 수도 없으리 만치 장엄하고 악질적이라는 사실을 느꼈다.

    영원히 연기한다.

    단탈리안 전하는 죽어서 사라지고, 자신이 대신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은폐한다.

    영원히.

    “아, 안 됩니다. 전하. 저는 못해요…….”

    “이바르.”

    “저는 못해요. 전하, 소녀를 지옥에 떨어트리지 말아주세요. 안 됩니다.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리가……저에게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습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자존심을 버렸다.

    금발의 아름다운 흡혈귀는 단탈리안을 껴안았다. 어쩌면 껴안는다기보다 쓰러졌다고 표현해야 올바르리라. 이바르가 가느다란 두 팔로 단탈리안에게 매달렸다. 그녀의 팔뚝이 바람에 시달리는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저는 할 수 없어요. 절대로,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그대는 마계 제일의 상단을 지배했어. 그대처럼 오랜 세월 동안 마왕들을 상대해본 자가 없지. 마르바스의 정략도, 가미긴의 모략도 그대를 함부로 해칠 수는 없을 것이야. 이바르. 오직 자네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거짓말!”

    이바르가 고개를 들어 단탈리안을 올려다보았다.

    보라색 눈동자가 눈물에 뿌옇게 가려져 있었다. 그렇지만 눈동자에서 흘러나오는 분노와 애원은 지워지지 않고 오히려 강렬해졌다. 두 사람의 얼굴은 무척이나 가까워서 서로가 흘리는 숨결의 떨림을 미세한 강도까지 느낄 수 있었다.

    “더 이상 이바르 로드브로크를 연기하지 않아도 된다고……더는 인형으로 살아갈 필요 없이, 한 명의 소녀로, 있는 그대로 살아가도 된다고 말했으면서!”

    “…….”

    “당신께서 저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애, 애정 따위는 오래 전에 버렸는데. 다시는 아무한테도 기대지 않고 살아갈 거라고 맹세했는데, 당신이 나타나서……마왕에 대한 복수도, 전부 버리게 만들고……아아……!”

    “이바르.”

    “……!”

    단탈리안이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하자, 이바르는 단호하게 그 손길을 내쳤다.

    그녀가 자신의 옷섶을 스스로 찢어발겼다. 시녀복에서 앞가슴을 가리던 부분이 찢어지며 속옷이 드러났다. 이바르는 속옷마저 제 손으로 뜯었다. 속옷의 천조각이 천천히 허공에 흩날렸다.

    “전하……보세요.”

    그곳에는 소녀의 새하얀 나신이 있었다.

    희뿌연 달빛이 살결에 물들었다. 이바르는 단탈리안의 오른손을 잡아서 그녀의 가슴에 가져다 댔다.

    “당신이 저를 이렇게 만들었어요. 이건 제 몸이 아니었어요. 영원토록 어린아이인 채로 살아가고, 사람들에게 멸시당하는 흡혈귀……그런 건 제가 아닙니다. 저는 이바르 로드브로크. 위대한 쿤쿠스카의 지배자이자 마왕들의 복수자였습니다. 알고 계시지요? 저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바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결코, 절대로, 이런 보잘것없는 소녀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

    “당신이 저를 몰락시켰습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울부짖었다.

    “쿤쿠스카의 지배자도, 니블헤임의 군주도, 마왕들의 막후 조종자도……제가 가지고 있던 모든 걸, 제 모든 정체성을 당신이 앗아가지 않았습니까. 그런 건 제 진정한 모습이 아니라며, 당신께서 대신 짊어지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나요……저는, 이제 앞으로 단지 한 명의 소녀로 있으면 된다고…….”

    “…….”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거기서 이바르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다.

    단탈리안은 죽고 없어진 세상에서 자신만이 홀로 남는다.

    그 상상이 한번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자, 이바르는 어떤 단어도 문장도 말할 수 없었다. 심지어 단순히 남는 것이 아니었다. 단탈리안이 죽지 않은 척 연기해야만 했다.

    더 이상 단탈리안이 웃을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그 웃음을 지어야 했다.

    더 이상 단탈리안이 말할 수 없는데도, 자신이 그 목소리와 그 표정과 그 뉘앙스를 모조리 흉내 내며, 끊임없이 웃고 떠들고 속삭이고 살아가야 했다.

    이바르가 이빨을 까득 물었다.

    “……저 말고 다른 사람은요? 전하께서 죽으시면, 그 사실을 누가 또 아나요. 라우라? 군무상서는 알고 있나요. 가미긴은, 전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전부 어떻게 되는 건가요.”

    단탈리안이 침묵했다.

    “저뿐입니까.”

    이바르가 메마르게 웃었다.

    망가진 인형의 관절이 삐꺽거리는 것처럼.

    “그러니까 전하께서는, 전하가 죽은 줄도 모르고 달려드는 정인들한테……제가 전하를 대신해서 안아주고, 품어주고, 웃어달라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제가 그들까지 돌봐야 하는 것입니까.”

    “…….”

    “어찌 그리 잔인하실 수 있습니까.”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흐느꼈다.

    “이럴 거면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편이 나았습니다. 소녀의 삶 따위 다시는 줍지 않는 편이 훨씬, 훨씬 더 좋았어요. 전하……전하……제가 잘못했어요. 미안해요. 정말로, 전하의 양녀가 무고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모두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바르가 양손으로 단탈리안의 가슴을 꾸욱 쥐었다.

    그녀에게는 이미 전신에 힘이 없었고 손도 마찬가지였다. 이바르는 단탈리안의 옷가슴을 쥐어 잡으려고 했지만 자꾸 손이 미끄러졌다. 다시 한 번 단탈리안에게 손가락을 뻗었지만 이번에도 역시 미끄러져 내렸다. 결국 그녀는 단탈리안에게 온몸을 파묻을 수밖에 없었다.

    이바르의 얼굴과 단탈리안의 가슴. 그 좁디좁은 틈새에서 억눌리고 짓눌린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저도, 같이 죽게 해주세요…….”

    “…….”

    “이미 무너진 잔해에서 헤매게 내버려두지 말아주세요. 전하, 제발…….”

    그때.

    단탈리안이 이바르에게 입술을 맞추었다.

    ‘아.’

    이바르는 저항하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그를 밀쳐낼 힘이 없었다. 그에게서 벗어날 힘은 더욱 더 없었다. 처음으로 단탈리안에게 입술을 빼앗긴 그날처럼 이바르는 그저 나약한 소녀에 불과했다.

    ‘불가능해.’

    이바르가 두 눈을 감았다. 눈가에 고인 눈물이 자신의 무게를 주체하지 못하여 흘러내렸다. 눈물에게 중력이 그러하듯이, 이바르 로드브로크 역시 거부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심장을 옥죄고 있음을 직감했다.

    ‘결국, 무엇이든……나는 단탈리안 님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어…….’

    그녀는 저주스러웠다.

    이미 단탈리안에게 처음 몸을 허락한 날,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이렇게 되리라 예감했는지도 몰랐다. 그때도 눈물을 흘렸다. 그건 패배에 굴복하는 자의 눈물이었으며, 동시에 그 패배에 자신이 ‘기뻐하고 있다’라는 것에 대한 저주였다.

    모든 마왕을 죽이겠다는 일념만으로 살아왔다.

    이제 자신이 한 명의 마왕으로서 살아야 했다.

    “…….”

    죄.

    책임.

    단 두 개의 단어에 이바르는 심장이 아파 견딜 수 없었다.

    재앙과도 같은 입맞춤이 끝났다. 단탈리안이 이바르를 품에 안았다. 그는 이바르의 어깨에 머리를 숙이고 나지막하게 귓속말했다.

    “이바르. 거절해도 좋습니다.”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가, 하고 덧붙일 필요가 없었다. 단탈리안이 전부 알아듣고 대답해주었으므로.

    “아무런 아픔 없이 죽을 수 있도록,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이바르는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다. 당장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하지만 단탈리안의 대답은 기껏해야 절반밖에 대답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바르는 무엇보다도 나머지 절반을 두려워하며 말했다.

    “단탈리안 님은.”

    “괜찮습니다. 제가 모두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

    예상에 적중한 대답이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심장이 찢어지는 격통에 사로잡혔다. 만약 여기서 자신이 편안한 죽음을 선택한다면, 자신의 잘못에서 도피할 것을 고른다면, 단탈리안은 그녀를 어떤 의미로든 인정하지 않을 속셈이었다.

    부드럽지만 차갑게 끊어내리라.

    단탈리안의 곁에서 오롯하게 머무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받아들이는 자뿐.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진즉에 그 사실을 알았으나, 이런 경우, 즉 책임을 받아들이고자 하면 영원히 단탈리안이 없는 곳에서 살아가야 하는 경우 따위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것, 보세요.”

    이바르가 웃었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역시, 잔인하잖아요…….”

    단탈리안은 그녀의 미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그는 아무 말도 돌려줄 것이 없어 그저 조금 더 강하게 이바르의 몸을 안았다.

    거친 손바닥이 이바르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단탈리안이 머리를 빗질해주는 것을 좋아했다. 언제나 그녀가 찾을 수 없었던 평안을, 그토록 바라던 안식을 전해주었다. 그리고 이바르는 다시 한번 절대로 평안해질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살아가리라는 사실을 인지했다…….

    달빛이 구름에 숨어들었다.

    흡혈귀인 그녀에게 익숙하기 그지없는 어둠이 방안에 가라앉았다.

    이바르가 조용히 속삭였다.

    “말씀하세요, 전하.”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모든 계획을 단탈리안에게 전해 들었다. 단탈리안의 극본은 그녀가 생각한 것보다 한층 가혹했다. 이바르가 영원히 단탈리안을 만나지 못하리라는 것이 확정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로지 단탈리안을 위하여.

    * * *

    단탈리안이 데이지와 공멸한 직후.

    이바르는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구덩이 속으로 몸을 던졌다. 데이지의 마력과 단탈리안의 마력이 서로 얽히면서 일대에 거대한 구덩이가 파였다. 땅이 갈라지고 흙먼지가 날리는 그곳으로 이바르는 뛰어갔다.

    “…….”

    그곳에, 마치 잠이 든 것처럼, 단탈리안과 데이지가 포개어져 있었다.

    데이지는 단탈리안에게 꾹 얼굴을 파묻었고, 단탈리안은 그런 데이지의 손을 잡아주었다. 두 사람 모두 한없이 평화로운 표정이었다. 만약 이곳이 어느 침대였거나 평야의 한복판이었다면, 이바르는 두 사람이 잠에서 깨어나지 않도록 조용히 모포를 덮어주었을 것이다.

    “…….”

    그렇지만 두 사람은 죽었다.

    이바르는 단탈리안의 몸뚱어리를 짊어졌다. 눈물이 흘러나올 것 같았지만 필사적으로 참았다. 여기서 시간을 낭비할 틈이 없었다. 이바르는 입술을 꾹 깨물고, 구덩이를 빠져나왔다.

    친위대가 자신에게 다가왔다.

    “전하께서는 무사하십니다. 다만 의식을 잃으셨습니다. 빨리 막사에 모셔야 하니 길을 비켜주십시오.”

    “예.”

    “그리고……구덩이 안에 있는 소녀의 시체를 고이 보관하십시오.”

    배신자의 시체는 오체를 분시하고 효수한다.

    그러나 이바르는 단탈리안의 계획을 듣자마자 데이지를 위해 그녀와 똑같이 닮은 인형을 준비했다. 이 인형은 거의 완성되어서 마지막으로 시체와 어디 다른 점이 없는지 확인해보는 절차만이 남았다. 데이지의 몸은 아무도 모르게 정중히 보관될 것이었다.

    그것이 이바르가 그녀에게 보내는, 유일한 속죄였다.

    ‘빨리.’

    누군가가 보기 전에 거사를 끝마쳐야 했다. 이바르가 막사에 들어가서 단탈리안의 시체를 침대 아래에 숨겼다. 대신, 미리 침대 아래에 가져다놓은 단탈리안의 인형을 꺼내 마치 의식을 잃어 누운 것처럼 침대에 눕혔다.

    “…….”

    이바르는 단탈리안의 시체를 침대 아래 숨기고서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무릎을 꿇었다. 그녀가 침대에 매달려서 눈물을 흘렸다.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이제 모든 재앙이 시작할 것이었다…….

    등 뒤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바르는 곧바로 뒤를 돌아보았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 군무상서가 그곳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서 있었다. 이바르가 허겁지겁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았다.

    ‘내가 우는 모습을 봤다!’

    그녀가 일어나서 인사하려 하자, 라우라가 손짓으로 그녀를 제지했다. 이 손짓으로 이바르는 상대방이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했음을 깨닫고 안도했다. 다행이었다. 정말로 다행이었다…….

    하지만 무엇이 다행이라는 말인가.

    “주군께서는 용태가 어떠한가?”

    라우라의 질문에 이바르가 입술을 열었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저주하면서.

    “예. 무탈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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