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위하여 <48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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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하고도 보름 전.
달이 밝게 빛나는 한밤이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단탈리안의 침실에 들어갔다. 단탈리안이 이바르를 침실에 부르는 것은 매우 오랜만이어서, 그녀는 내심 가슴이 두근거렸다. 단탈리안 님께서 다른 여인과 동침을 끊은 지 제법 오래되었다. 어쩌면 오늘 자신이 그 휴식기를 끊어트릴지 몰랐다…….
‘오늘 낮에는 조금 이상하셨지만.’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오늘 대낮 무렵에 벌어진 기행을 떠올렸다. 단탈리안은 갑자기 그와 똑같이 생긴 인형을 찾았다. 그리고 인형으로 자신의 의식을 옮기더니, 무슨 이유인지 황궁을 온통 돌아다녔다.
‘라피스 라줄리도 이상했다.’
결국에 두 사람은 한참 뒤에야 집무실로 함께 돌아왔다. 둘은 어두워진 안색으로 끊임없이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엿듣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단탈리안이 라피스 라줄리를 제외하고 모두, 절대로 집무실에 들어오지 말 것을 명령했으므로.
“실례하겠습니다, 전하. 이바르입니다.”
“아아. 들어오도록 해라.”
“예.”
이바르가 방문에 들어서자마자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그녀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다소 놀랐다. 방안에는 단탈리안만 있는 게 아니었다. 단탈리안이 나무의자에 앉아 있었고, 바로 옆에서 라피스가 조용히 서 있었다.
‘……아무래도 잠자리를 달래라고 불러주신 건 아니겠다.’
하늘이 무너지더라도 자신이 라피스 라줄리와 함께 세 명이서 놀아날 일은 없었다. 즉, 이번에 단탈리안이 그녀를 부른 것에는 다른 이유가 있으리라.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애써 억누르려고 했던 불안감이 싹텄다.
“전하. 부르셨사옵니까.”
“그래, 이바르. 내가 사랑하는 소녀여. 이리 가까이 와보거라.”
“…….”
뻔한 말임에도 이바르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단탈리안이 직접적으로 자신의 애정을 표시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단탈리안은 애정을 말보다는 행동으로,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몸으로 보여주었다.
‘라피스 라줄리도 있는데, 전하도 남사스러우시지.’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작게 “예” 하고 대답하고 종종걸음으로 다가갔다. 만약 라피스 라줄리가 없었다면 전하에게 애교라도 부려보았을 텐데, 보는 눈이 있어 차마 그러기 힘들었다. 이바르는 정숙한 시녀처럼 시종일관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이바르.”
“네. ……제 정인(情人)이시여.”
이바르가 모기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건 일종의 과시였다. 자신과 단탈리안이 얼마나 깊은 사이인지 라피스 라줄리한테 보여주는 것이었다. 사실 이바르는 라피스에게 어마어마한 원한을 가슴에 담아두고 있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단탈리안이 작게 웃었다.
“그래. 이바르. 내가 오늘 그대한테 다소 잔혹한 얘기를 들려줄지도 모르겠어. 아니, 틀림없이 잔혹한 얘기가 되겠지. 그대한테나. 나한테나.”
그제야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고개를 들었다.
단탈리안은 슬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바르는 심장이 서늘해졌다. 단탈리안의 그런 얼굴을, 이바르는 지금까지 단 한 번밖에 보지 못했다. 그건 이바르에게 최악의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전하께서 파르네세 군무상서를 친히 벌하셨을 때…….’
그때 이바르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의 광기를 엿볼 수 있었다.
가히 경악스러울 정도의 결백증 내지는 집착. 단탈리안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사실은 거기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하지만 이바르는 자신의 마음이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이 남자에게 향했음을 깨달았다. 그 광기에 직면하고도 단탈리안에 대한 감정이 전혀 변하지 않았기에.
‘어째서. 왜 그런 표정을……?’
이바르가 조심스럽게 라피스 라줄리의 안색을 살펴보았다. 안타깝게도 이바르는 상대방의 얼굴에서 어떠한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 이바르가 입술을 깨물었다.
“혹여, 소녀가 어떤 죄를 저지른 것인지요?”
“자네는 아무런 죄도 범하지 않았어. 다만……그래. 우리 둘 다 잘못을 저질렀지.”
“말씀해주시옵소서.”
이바르가 망설이지 않고 방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소녀에게 잘못이 있다면 소녀가 스스로를 벌하겠나이다. 이것만이 소녀의 소원입니다. 전하께서 그 손을 더럽히실 일 없이, 부디 소녀가 속죄할 기회를 허락해주시길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이바르는 단탈리안이 군무상서를 몸소 처벌할 때 얼마나 망가졌는지 알고 있었다. 그건 본질적으로 단탈리안이 자기 자신에게 내리는 형벌이었다. 이바르는, 자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이 죄값을 짊어지길 원하지 않았다.
“…….”
단탈리안의 미소가 더 처연해졌다.
“그대는 내가 앞으로 말할 잘못을 꼭 짊어질 필요가 없어. 내 얘기를 전부 들은 다음에 그대가 선택해도 괜찮아.”
“만약 그것이 제 잘못이라면.”
이바르가 단호하게 말했다.
“전하, 부디 소녀가 짊어지게 해주소서. 소녀는 강인합니다. 비록 시녀의 옷을 입고 있을지라도 저는 삼천 년을 홀로 버텨온 로드브로크의 진조. 어떤 잘못이라도 반드시 감당해내겠습니다.”
설령 그 형벌이 죽음일지라도.
이바르는 구태여 소리내어 덧붙이지 않았지만, 단탈리안 역시 그녀의 뜻을 충분히 알아들었다. 단탈리안은 더욱 슬퍼진 눈동자로 이바르를 바라보았다.
“이바르. 군무상서가 데이지를 납치했을 때 그대도 협력했다고 말했지.”
“예, 전하. 군무상서께서 계획을 짜셨으나 실행에 옮긴 사람은 소녀였습니다. 시녀장을…….”
이바르가 멈칫하고 단어를 고쳤다.
“그 배신자를 방심하게 만든 다음에 감금했습니다.”
“데이지는 군무상서를 파탄시켜 내 세력을 무너트리려고 했다. 그것이 진실이다. 이바르, 자네는 그리 생각하고 있는가?”
“예, 전하.”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확신했다.
그녀에게 데이지 폰 커스토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미치광이에 불과했다. 인간을 고문하는 것에서 끝없는 쾌락을 느꼈다. 입을 열면 거짓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데이지가 공개처형식에서 날뛰었을 때, 이바르는 ‘저것이 저럴 줄 알았다’라고 한탄했다.
‘미치광이에게는 아무리 은혜를 입혀도 소용이 없다. 냉정하게 잘라내야 한다. 그걸 알고 있었는데도, 나는 단탈리안 님이 걱정되어 차마 강하게 말씀드리지 못했어.’
이바르가 후회했다.
납치극이 탄로되었을 때, 이바르는 단탈리안이 너무도 단호하게 처벌을 집행하는 바람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만일 그때 자신이 조금 더 독하게 마음을 먹고 나섰다면―――데이지 폰 커스토스는 태생이 더러운 종자이고, 언젠가 틀림없이 배신할 것이니 지금 처벌해야 한다고 말했다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지 몰랐다.
평원파와 산악파의 균형이 더 오래 지속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바르바토스와 파이몬, 두 사람을 한꺼번에 포용할 비책이 생겼을 것이다.
‘그깟 인간종 한 명 때문에 전부 망가졌다.’
하지만 모든 것이 엎어지고 말았다.
이바르는 거기에서 책임을 느꼈다. 납치로는 부족했다. 아예 단탈리안에게 사형을 선고받을 것을 각오하고, 자신이 직접 데이지 폰 커스토스를 사살했어야만 했다. 약간의 방심과 약간의 머뭇거림이 사태를 이 지경까지 몰고 왔다…….
단탈리안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사실이 아니다, 이바르.”
“예……?”
“데이지는 단 한번도 나를 배신한 적이 없어.”
이바르 로드브로크의 얼굴이 의문으로 물들었다. 전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바르는 모든 전말을 전해들었다.
어두운 침실. 방안을 비추는 것은 유리창 너머에서 새어나오는 달빛밖에 없었으며, 그마저도 이따금 구름에 가려졌다가 다시 드러나기를 반복했다. 희미한 달빛이 구름에서 벗어나올 때마다, 그 횟수가 더해질 때마다, 이바르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
이바르가 어깨를 떨었다.
“그럴 리……없습니다. 무언가 착각이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전하…….”
적막만이 침실에 감돌았다.
단탈리안은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완벽한 확신이 없는데도 이런 이야기를 확정해서 들려주는 사람은 더욱 더 아니었다. 이바르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가 어떤 인물인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인정할 수 없었다.
“소녀가……그럼, 소녀가 전하를…….”
단탈리안을 나락으로 몰아세운 죄인은 데이지 폰 커스토스가 아니라.
다름 아니라 군무상서와 이바르 로드브로크 본인이라는 사실을.
대체 어떻게 인정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럴, 리가…….”
“이바르.”
단탈리안이 입을 열었다.
그는 한없이 부드러운 눈길로, 마치 이바르의 이마를 쓰다듬는 것처럼 상냥하게 말했다.
“그렇게 되어버렸어.”
“…….”
뚝, 하고.
이바르의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끊어졌다.
고요하게 시간이 흘러갔다. 이바르는 한참이 지나서야 자신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입술이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저, 저는……저는 어떻게 해야…….”
내가 단탈리안 전하를 지옥에 떨어트렸다.
이바르의 머릿속에서는 그 생각만이 끝없이 메아리쳤다. 죽는 것이야 간단했다. 자신이 죽음으로써 죄값을 치를 수 있다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수천 년을 이어온 이 삶을 끊어도 좋았다. 그렇지만 죽음 따위가 무엇을 바꿀 수 있겠는가?
파이몬이 죽었다.
산악파가 파멸했다.
평원파마저 모조리 숙청당했다.
한낱 자신의 목숨으로 속죄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것이 부서지고 말았다.
공포와 슬픔이 이바르의 전신을 뒤덮었다. 그녀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단탈리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라우라가 망가진 것은 나의 책임이야. 그렇게 될 줄 몰랐지. 내가 안이한 탓에 라우라가 극단에 서버렸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안다고 자부했던 내가 결국은 바로 코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조차 몰랐던 셈이지. 우스운 일이다…….”
“…….”
“이미 늦었지만 나는 책임을 지고자 하네. 이바르. 만약 그대가 허락해준다면 둘이서 함께 책임을 지고 싶다.”
둘이서 함께 책임을 진다.
그 의미를 알지도 모른 채, 이바르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 그녀에게는 단탈리안만이 해답을 제시할 수 있었다.
“저는 책임을……제가 책임을 지는 방법이, 존재하는 것인가요……?”
“그래. 이바르.”
단탈리안이 의자에서 일어나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바르와 단탈리안의 눈높이가 똑같아졌다. 단탈리안은 오른손으로 이바르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나는 데이지와 함께 죽을 것이다.”
“…….”
“데이지에게는 잘못밖에 저지르지 않았어. 녀석한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다. 반면에, 그 녀석은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했지. 이제 내가 데이지한테 모든 것을 돌려줘야 할 차례야…….”
아.
이바르는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단탈리안이 무엇을 명령하려는 것인지, 어떤 의미에서 자신이 책임을 짊어질 것인지, 벌써 알아버렸다. 그럼에도 이바르는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전하께서 사라지시면……마왕군이, 제국이 무너집니다…….”
“그래. 그렇게 되겠지.”
단탈리안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러니까 단탈리안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형은 계속 있어주어야 한다.”
“전하……제발……제발, 그것만큼은…….”
“이바르.”
단탈리안이 말했다.
“앞으로 영원히, 나를 대신해서 단탈리안을 연기해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