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82화 (481/510)
  • 무엇을 위하여 <48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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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시체를 내려보았다.

    보랏빛 눈동자에 수많은 감정이 떠오르고 가라앉았다. 이바르는 감정들을 빠르게 정리했다. 자신은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이고, 앞으로도 이런 일을 수없이 마주치게 될 것이었다. 감상에 잠길 시간 따위는 불필요했다.

    “목을 잘라 군진에 효수하십시오. 보존마법을 거는 것을 잊지 마세요. 우리가 제도(帝都)에 개선할 때 이 배신자의 머리가 제일 앞줄에 세워질 것입니다.”

    “예.”

    하사관이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이바르의 심문은 친위대에 깊은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심문은 요점만을 정확히 짚었으며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이바르 스스로 배신자를 죽였다는 것 또한 가산점이었다. 모름지기 용병들은 피를 무서워하는 사람을 경시했다. 이런 점에서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단호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로드브로크 님. 바르바토스 전하는…….”

    “무엄하군요. 전하가 아니라 죄인입니다. 그녀는 대역죄를 범했습니다.”

    이바르가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목소리에 서슬이 날카롭게 서 있었다.

    “호칭에 주의하십시오. 다름 아니라 단탈리안 전하께서 집행하신 법정의 판결입니다.”

    “소, 송구합니다.”

    “전하께서는 죄인을 안으로 들이라 하명하셨습니다.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귀관들은 혹시라도 만일의 사태가 일어날 것을 대비하여 이곳에 대기하십시오.”

    “예.”

    이바르는 사지가 잘린 바르바토스의 몸뚱어리를 두 손으로 가지런하게 들었다. 친위대가 깍뜻하게 허리를 숙인 가운데, 이바르가 막사에 들어갔다. 각종 보호마법이 둘러쳐진 막사에 들어서자 별안간 사방이 적막해졌다.

    “…….”

    이바르가 바르바토스를 의자에 앉혔다. 이바르는 막사 한켠에 마련된 물양동이를 들고 와서 바르바토스의 얼굴을 정성스럽게 닦았는데, 그건 경애하는 주군의 애인에 대한 예의였다. 이바르는 주군이 실제로 바르바토스를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알았다…….

    ‘하지만 뭘 위해서?’

    수건이 바르바토스의 얼굴에 묻은 핏물을 닦아냈다. 그럴수록 하얀 수건이 붉게 물들었다. 이바르가 수건을 물양동이에 적시자, 샛붉은 물감과 같은 것이 천천히 물에 퍼졌다.

    ‘이 세상에서 모든 마왕을 없애겠다는 일념으로 살았다. 이제 나에게는 단탈리안 님만이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단탈리안 님을 위해서 나를 버렸는데, 다시 내가 나에게 찾아와야 한다는 말인가.’

    이바르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문득 한없는 고독을 느꼈다. 본래 그녀에게 익숙했지만 당분간 잊고 살았던 바로 그 고독감이었다. 망망대해에 자신만이 내던져 있었으며, 언젠가 육지에 도착하리라는 희망도, 하다못해 자신이 조타하고 있는 배가 침몰하리라는 희망조차 없었다.

    “……으응.”

    바르바토스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바르가 손을 멈추고 의자에서 한 발자국 떨어졌다. 잠시 뒤, 졸리운 듯 먹먹한 눈동자로 바르바토스가 앞을 바라보았다. 약기운 탓인지 눈매에 힘이 없었다. 바르바토스는 눈가를 찌푸리고 다시 피기를 반복했다.

    “썅…….”

    조금 정신이 돌아오자마자 그녀는 욕지거리를 흘렸다. 머릿속이 어지럽다는 것 자체가 바르바토스에게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바르바토스가 신음을 내뱉었는데, 자기가 흘린 욕지거리 때문에 두개골이 온통 진동한 것이었다.

    “이러다 완전 병신이 다 되겠네, 시발…….”

    머리가 욱씬욱씬거렸다. 마치 누군가가 뇌를 직접 주물럭거리는 것 같았다. 바르바토스는 극심한 두통을 참아내며 똑바로 정면을 바라보려고 애썼다. 여기까지 해내는 데만 해도 십 분이 걸렸다.

    “바르바토스 전하를 뵈옵니다.”

    이바르가 치맛자락을 양옆으로 붙잡고 허리를 숙였다. 바르바토스를 배려해서 그녀는 될 수 있는 대로 목소리를 낮추었다. 바르바토스의 얼굴이 더욱 더 구겨졌다.

    “넌 또 어디서 기어나온 년이야.”

    “소녀, 단탈리안 전하를 모시는 이바르 로드브로크라 하옵니다. 존귀하신 바르바토스 전하를 영접하게 되어 일신의 영광입니다.”

    “아, 그 흡혈귀?”

    바르바토스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두통이 또 격해졌다. 그녀는 대체 얼마나 많은 물약이 자기 몸안에 흘러다니는 것인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아마 지금 자기가 피를 흘려서 누군가에게 먹이면 그 사람은 하루종일 헤롱거릴 게 분명했다.

    “시부랄. 상황 파악이 안 되는데, 넌 뭐냐. 너도 그거냐? 미친 년이야?”

    “바르바토스 전하께서는 공화국의 정보부에서 구출되었습니다. 이곳은 합스부르크 제국군의 군진, 단탈리안 전하의 개인 막사입니다.”

    “…….”

    이바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바르바토스는 거의 모든 사정을 이해했다. 그 증거로, 고통에 가득 차 있던 바르바토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무표정해졌다.

    “그런가. 단탈리안이 이겼나.”

    바르바토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더없이 무심했지만 그렇기에 하나의 뉘앙스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이 있는 그대로 흘렀다. 그녀는 말이란 게 결국은 어떤 암시밖에 주지 못한다는 걸 이해하고 있었고, 이럴 때 차라리 침묵하는 걸 선택했다.

    “……뭐. 인간종에 죽는 것보다야 나으려나. 단탈리안 녀석, 나 죽이면 그거 평생 환각에 시달릴 거잖아. 그럼 얌전히 죽어줘야지. 죽어도 녀석 괴롭히는 재미로 살게.”

    어조는 장난스러웠지만 표정에도 목소리에도 아무런 색채가 없었다. 바르바토스는 무채색 그 자체였다.

    “자아. 난 언제 죽일 건데? 웬만하면 단탈리안 녀석 안 보고 뒈지고 싶은데.”

    “…….”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눈을 감았다. 그녀는 마왕이 아니었다. 상대방의 감정을 읽어내는 재주 따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눈앞의 소녀가 어떤 감정인지 손에 뚜렷하게 잡혔다.

    “단탈리안 님은……평소부터 몸에 유언장을 항상 갖고 계셨습니다.”

    “어?”

    “그분께선 항상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셨습니다. 당신께 소중한 인연들에게 한 마디의 말을 남겨두셨지요. 그중에서도 바르바토스 전하를 가장 소중히 다루셨습니다.”

    이바르가 품속에서 편지를 하나 꺼내었다.

    “본래 함부로 공개해서는 안 될 물건입니다만, 제 독단으로 바르바토스 전하께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그녀는 바르바토스가 편하게 볼 수 있도록 편지를 펼쳤다.

    편지에는 단탈리안이 여러 연인들에게 남기는 말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어쩐지 날림으로 쓰인 필기체에 바르바토스는 그리움을 느꼈다. 단탈리안의 글씨체였다. 한없이 어설프고 불친절한 글씨.

    「바르바토스는 나의 가장 충실한 친우이다.」

    「내 삶에 허락된 모든 애정과 우정을 그녀에게 바친다.」

    편지는 그렇게 시작하였다.

    「바르바토스. 너는 어딘지 여린 구석이 있어서 걱정이다. 내가 죽으면 분명히 겉으로 내색하지 않는 주제에 속으로 별 염병을 떨 것이다. 이 염병의 구체적인 목록은 다음과 같으며, 이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나의 처방전을 따라주길 바란다.」

    「첫 번째. 나에게 혹시나 못해준 것이 있었는가 걱정하지 말도록. 너는 나에게 항상 필요 이상의 애정과 이해를 보여주었다. 이는 내가 보증한다.」

    「두 번째. 어쩌면 내 죽음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걱정하지 말도록. 너의 삶이 온전히 너의 것이듯 나의 죽음은 오로지 나의 것이다. 내 소유물을 존중하라. 이게 무슨 의미인지 너라면 알아줄 것이다.」

    「세 번째. 정말로 쓸데없는 노파심인 것 같지만, 행여나 순결 같은 관념을 지키겠답시고 갑자기 색욕을 끊어버리지 말도록. 이미 죽어버린 나에게 부당한 책임을 짊어지우는 일이다. 결단코 말리고 싶다. 사자(死者)를 존중해라.」

    잠시간 바르바토스는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편지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단번에 알았다. 애인에게 보내는 유언장. 보통은 사랑한다고, 당신을 알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영원히 기억할 거라고,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단탈리안의 편지에는 단 한 마디도 사랑을 암시하는 구절이 없었다.

    “……등신 머저리 새끼.”

    바르바토스의 입꼬리가 힘없이 휘어졌다.

    예전에는 편지의 의미를 알아채지 못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단탈리안의 비밀을 알고 난 지금이라면 알 수 있었다. 단탈리안은 자신이 죽인 사람들의 환영에 시달렸다. 따라서, 자신의 죽음에 의해 누군가가 고통을 겪는 것을 무엇보다도 싫어했겠지.

    나를 잊고 살아라.

    나 따위로 인해서 슬픔을 느끼지 마라.

    단탈리안의 유언장은 오직 그럴 목적으로 쓰여졌다. 마치 자신의 존재를 영원토록 지워버리고 싶어하는 것 같은 그 편지에, 바르바토스는 조용히 분노하고 또한 슬퍼할 수밖에 없었다.

    “…….”

    바르바토스는 다시 한 번 참을 수 없는 욕망에 휩싸였다.

    단탈리안과 함께 살아가기를 원했다. 마왕이 아니어도 좋았다. 평원파가 전부 숙청당해버린 지금도, 바르바토스는 도저히 단탈리안을 미워할 수 없었다. 오히려 단탈리안에 대한 그녀의 마음은 더욱 더 간절해져서,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그를 구하고자 했다.

    단지 그의 곁에 머무르고 싶었다.

    “이바르라고 했나. 마지막으로……마지막으로 단탈리안을 볼 수는 없을까……?”

    바르바토스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미 자신은 한 번 단탈리안에게 거절당했다. 그래도 어쩌면, 이라는 생각을 바르바토스는 떨쳐낼 수 없었다. 조금 더 처절하게 애원하면 부탁을 들어줄지 몰랐다. 자신의 자존심을 전부 버리고, 정말 개처럼 애걸한다면……그 연약한 녀석은 자신의 청원에 넘어갈지도 몰랐다.

    “…….”

    “무리한 부탁이란 건 알아. 그냥 내가 마지막 가는 길에 얼굴만 보고 싶다고 전해줘. 그러면, 그러면 녀석은 부탁을 들어줄 거야. 거절하지 않을 거야.”

    바르바토스는 결심했다. 단탈리안을 위해 자존심을 버리자고.

    그 남자를 내버려두고 죽는 것이 너무도 두려웠다. 이 감정을 안은 채로 평안하게 죽기란 불가능했다. 어떻게 해도 후회를 남기고 떠나버릴 것이었다. 바르바토스는 후회 어린 삶을 인정하느니, 차라리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고 싶었다.

    “…….”

    이바르 로드브로크의 얼굴은 변치 않았다.

    그녀의 표정은 아까 전 바르바토스가 중얼거렸을 때와 똑같았다. 차마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심장을 터트린 바람에 도리어 표정이 사라졌다.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한참이 지나서야 입술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불가합니다.”

    “……부탁할게.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단탈리안을 위해서라고 생각해줘. 정말이야. 그 녀석, 이대로 놔두면 죽어버릴 거야. 너도 옆에서 지켜봤다면 알 거 아니야. 단탈리안을 내버려두면 안 돼…….”

    “불가합니다.”

    “제발…….”

    바르바토스가 몸을 비틀어 의자에서 떨어졌다. 그녀는 사지가 없음에도 어떻게든 기어서 이바르의 발등에 입술을 맞추었다. 이바르는 바르바토스가 얼마나 긍지 높은 마왕인지 익히 알았으므로, 그녀의 행위에 더없는 고통을 느꼈다.

    “불가하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마침내 이바르가 평정심을 잃어버렸다.

    “저에게, 아무리 저한테 부탁하셔도 안 됩니다! 제가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아셨습니까. 이미 당신은 단탈리안 님을 만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건 결정사항입니다!”

    “말 한 마디를 전달해줄 수는 있잖아……응? 한 마디만. 내가 보고 싶다는 말만이라도 전해주면…….”

    “그러니까,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말해야 합니까! 단탈리안 님은―――.”

    이바르가 분노한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한 순간, 이바르는 목이 메였다. 소리가 입안에서 멤돌았다. 그녀는 이빨을 꾹 물고, 분노와 슬픔, 무엇보다도 고통을 담아내어, 절규하듯이 내뱉었다.

    “단탈리안 님은, 이미 죽었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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