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81화 (480/510)

무엇을 위하여 <48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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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국의 의뢰…….”

루크가 멍하게 중얼거였다.

합스부르크 공화국이 자신들한테 납치를 의뢰했다니. 그런 건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설령 공화국에서 어떤 수작을 부렸더라도 데이지와 루크를 포섭하기란 불가능했다. 단탈리안에 대한 두 사람의 애착은 진심이었다.

“로, 로드브로크 님. 데이지는…….”

“제 질문에는 예, 아니오, 두 가지 종류로 대답해주십시오. 다시 하문하겠습니다.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통령이 당신과 데이지 폰 커스토스에게 납치를 의뢰했다. 이것이 사실입니까?”

루크가 입을 다물었다.

아마 어딘가에서 메모리아 마법이 발동되고 있으리라. 루크도 가까스로 사태를 파악했다. 자신의 거짓 증언을 수집함으로써 마왕군은 훗날 벌어질 명분 싸움에서 승리하려는 것이었다. 이바르의 단호한 눈빛과 마주보노라니, 정치적 식견이 한없이 부족한 루크도 그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영원히 사실이 정해져버려.’

루크가 고개를 숙였다.

‘대부님에 대한 데이지의 마음이. 헌신이. 전부 없었던 게 돼. 공식적으로, 역사적으로,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걸로…….’

천민을 양녀로 거둬준 아버지의 믿음을 간악무도하게도 배신한 자, 데이지.

그 배신을 증언한 자, 루크.

이 구도의 잔인성에 루크는 몸이 떨렸다. 그는 알고 있었다. 데이지에게 단탈리안은 모든 것이었다. 상대방은 지금 데이지의 모든 것을 부정하라고, 다름 아니라 그녀를 사랑했으며 또한 그녀의 혈육이었던 루크에게 요구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대답하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까?”

“…….”

루크는 목이 메여서 좀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식도가 부어올라서 목구멍을 강하게 압박하는 것 같았다. 호흡마저 가팔라졌다. 루크는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속죄란 이런 것이었는가.

자기가 가장 소중하다 생각하는 것마저 스스로 배신해야 하는가.

“맞습니다…….”

루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기가 말해놓고도 너무나 나약한 소리라서, 루크는 다시 한 번 뚜렷하게 발음해야 한다는 사실을 곧바로 깨달았다. 이바르 로드브로크의 위협적인 침묵이 자신에게 그걸 말없이 요청하고 있었다.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통령이……저와 데이지에게 의뢰했습니다……커스토스 영지에는 공화국의 첩자가 많았습니다. 제가 마을을 돌아다닐 때 몰래 접근해와서.”

“공화국의 간자가 당신에게 접근해서. 그리고 어떻게 되었습니까?”

“누구라도 상관없으니 마왕군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마왕을, 한 명 납치해달라고.”

주위에서 병사들이 수군거렸다.

이 수군거림에는 명백히 적의가 넘실거렸다. 인간종과 내통하는 것은 마인에게 있어 크나큰 수치였다. 애당초 배신자란 시대와 직업을 막론하고 가장 경멸받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그걸 받아들였습니까?”

“예.”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탈리안 전하께서는 당신들을 양녀와 대자로 거두어주셨습니다. 그 전에 당신들은 프랑크의 변방, 아무것도 없는 산골짜기에서 나약하게 살아가는 화전민에 불과했습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막힘없이 루크를 질책했다. 마왕성에서 청소나 잡일을 담당하던 일개 시녀의 모습은 사라졌다. 일찍이 단신으로 마계 제일의 상단을 세우고, 한 도시의 지배자가 된 흡혈귀가 그곳에 서 있었다.

“들개조차 자신에게 한끼 밥을 내려준 주인에게 은의를 느끼거늘, 하물며 당신들은 단탈리안 전하에 의해 천민에서 귀족이 되었습니다. 일생을 다 바쳐도 갚지 못할 은혜입니다. 왜 전하를 배신하고 통령에게 붙었습니까.”

“왜냐하면…….”

루크가 어깨를 떨었다.

그리고, 루크는 자신이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깨달았다. 어떻게 해야 데이지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을 것인지 알아차렸다.

“……영웅이 되고 싶었습니다.”

“영웅이요?”

“예. 마왕을 처단하고 인류를 구원해내는 영웅이……비록 비천한 화전민으로 태어났지만, 저도 제 이름을 역사에 남길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대부님에게 실제로 처단당해야 마땅할 죄목 따위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이유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습니다…….”

이바르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공명심입니까. 어리석음의 극치입니다. 고작 그런 욕구를 위해서 자신과 여동생의 삶을 구원해준 은인을 파탄으로 몰아넣은 것입니까.”

“처음에는……저도 처음에는 배신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공상에 불과했어요. 가끔 길을 걷다가 문득 떠오르는 상상……누구라도 두세 개쯤은 마음속에 품고 다닐 망상에 불과했습니다. 거기에 공화국이 기회를 주었습니다.”

어리석은 배신자를 연기하자.

루크는 도저히 여동생처럼 현명해질 자신이 없었다. 하다못해 현명한 것처럼 위장할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어리석은 자를 연기할 수는 있었다.

자신만큼 어리석은 인간이 어디 있는가. 루크가 알기로 그는 세상에서 제일 우둔했으며―――그렇기에 어리석음의 연기야말로 유일하게 가능한 해답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공화국이 기회를 주다니요?”

“명분 따위는 자신들이 만들어주겠다. 당신들은 그저 계기를 마련해주면 된다고. 얼마든지 영웅으로 치장해줄 테니, 어느 마왕 하나만 납치해오라고.”

“비열하고 사악한…….”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이빨을 으득 물어뜯었다. 도저히 연기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표정이고 어조였다. 이에 호응하듯, 친위대 병사들이 분개하며 큰소리를 내질렀다. 공기가 들떴다. 사람들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 가운데에서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심문을 이어나갔다.

“고작 그런 이유로 공화국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까?”

“제 여동생은……데이지는 반대했습니다. 너무 위험하다고, 성공할 가능성이 적다고. 하지만 여동생은 어린 시절부터 저한테 약했어요. 제가 밀어붙이면 억지로라도 따라주었습니다. 저는 여동생의 그런 마음을 이용했습니다…….”

잠시.

서릿발과 같이 매섭게 기세를 몰아치던 이바르가 아주 잠시 멈칫했다.

“……데이지 폰 커스토스가 아니라 당신이 주범이라는 말입니까.”

“예. 애당초 제 여동생은 주로 마왕성에만 머무릅니다. 공식적인 행사가 있을 때만 영지에 모습을 드러냈지요. 첩보원들이 접근하기에 여동생은 별로 좋은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반면에, 저는 영지에 자주 돌아다녔으니 포섭하기 보다 수월했겠죠…….”

루크가 이바르 로드브로크를 올려다보았다.

루크의 얼굴에는 간절한 애원으로 뒤덮여 있었다.

자신이 모든 오욕을 뒤집어쓰겠다. 여동생의 명예만큼은 지키게 해달라. 심문에서 무엇을 질문해도 당신이 바라는 대로 대답해드릴 테니 이 소원만은 지켜달라.

그것이 어리석은 오라비가 동생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헌신이므로.

“…….”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입술을 깨물었다. 날카로운 어금니에 입술이 찢어졌다. 비릿한 피냄새가 혓바닥으로 번졌다.

그녀는 혼자서 심문을 주관하고 있었다. 단탈리안에게 대본을 지시받았지만, 이제 와서 심문을 멈추고 단탈리안에게 달려가 어떻게 해야 할지 묻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자신의 재량만으로 지금 루크가 고백한 발언을 처리해야 했다.

‘단탈리안 님.’

이바르가 마음속으로 용서를 빌었다.

‘죄송합니다. 소녀, 이바르 로드브로크. 처음으로 단탈리안 님께 독단을 저지르겠습니다.’

금발의 흡혈귀가 다시 차가운 눈초리를 지었다.

“이기적인 공명심으로 일생의 은인을 배신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심지어 혈육까지 말려들게 하다니. 악독한 배신자여. 당신에게 입이 있다면 어디 변명해보십시오.”

“…….”

루크는 자신의 이마를 이바르가 서 있는 방향으로 내렸다.

루크가 몇 번이고 이마를 땅바닥에 내리찍었다. 살갗이 찢어지고 피가 흘러내렸다. 흙먼지가 얼굴 전체를 덮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크는 계속하여 이마로 밑바닥을 쳤다.

“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누, 눈이 멀었습니다. 영웅이라는 이름에. 모르겠습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때는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보, 보십시오. 저는 바르바토스를 다시 데려왔습니다. 제 죄를 용서받기 위해……무, 물론 대죄입니다. 용서받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반성하고 있습니다……모, 목숨. 예. 목숨만 살려주세요……!”

정말로, 감사합니다.

여동생의 명예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더러움을 제가 오롯하게 가지고 갈 수 있도록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루크는 다만 그런 마음으로 이마를 내리쳤고, 이바르 역시 어떠한 대화를 나누지 않았지만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루크가 내뱉는 말은 모두 그가 진실로 나타내는 마음과 반대되었다. 루크가 흘리는 눈물 역시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과 정반대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살려달라고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이렇게 죽게 해주어서 감사하다고.

“팔을 자르겠습니다. 다, 다리도 자르겠습니다. 앞으로 평생 병신이 되어서 살겠습니다. 다시는 검을 잡을 수 없어도 좋습니다. 그러니 목숨만……제발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루크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당신의 여동생은 이미 죽었습니다. 당신이 제멋대로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무고한 혈육이 희생당했습니다. 아니, 그녀뿐만이 아니지요.”

이바르 로드브로크 역시 그녀의 본심이 아닌 단어들을 내뱉었다.

“이번에 전쟁이 일어남으로써 죽어나간 무수한 병사들. 인민들. 그 모든 생명이 당신의 보잘것없는 공명심으로 인해 쓰러졌습니다! 그런데도 살기를 바라는 것입니까. 그런데도 당신은 목숨만을 살려달라고 뻔뻔하게 요구하는 것입니까.”

“죄송합니다……하, 하지만 여기 바르바토스가 있습니다.”

루크가 옆자리에 뉘인 바르바토스를 가리켰다.

“제가 아니었다면 바르바토스는 죽었을 것입니다! 공화국의 통령은 무서운 여자입니다. 바르바토스가 무사히 빠져나가는 것을 용서했을 리 없습니다. 아, 아시지 않습니까. 거기서 바르바토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었으면 이번 전쟁의 원흉이 누구인지 밝혀지지도 않았을 것…….”

“하.”

이바르가 코웃음을 쳤다.

“어차피 공화국은 패배했습니다.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라면 바르바토스뿐만 아니라 당신 또한 처리되었겠지요. 진실을 아는 사람은 아예 사라지는 편이 좋으니 말입니다. 배신자여. 당신은 그저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자신이 숙청당할 것 같았기에 도망쳤을 뿐입니다.”

“아닙니다! 저, 절대 아닙니다! 저는 정말로 후회해서 용서를 빌고자…….”

“끝까지 자신의 추악함을 직시하지 않는군요.”

이바르가 무표정한 얼굴로 루크를 내려다보았다.

“저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주군이신 단탈리안 전하를 대신하여 명령합니다. 루크. 제 발에 입을 맞추십시오.”

“어, 얼마든지! 얼마든지 사죄하겠습니다!”

루크가 개처럼 달려들어 이바르의 신발에 입술을 맞추었다. 주변의 병사들이 혐오스러운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루크의 모든 행동은 메모리아로 저장되고 있었다.

“일어서십시오.”

“예, 예에.”

루크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이바르가 단검을 휘둘렀다.

칼날은 정확히 루크의 목 정중앙을 일직선으로 갈랐다. 단검이 살을 파고 지나간 자리에서 검붉은 피분수가 솟구쳤다. 루크가 양손으로 자신의 목을 감쌌지만, 피분수는 손바닥이 미처 가리지 못한 틈을 통해서 분출되었다.

“……, …….”

루크가 무릎을 꿇었다.

그는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목에서는 이미 목소리가 흘러나오지 못했다. 핏물이 식도를 물들였다. 루크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 눈앞이 하얘졌다. 이바르가 그런 루크를 바라보면서 차갑게 선언했다.

“화전민의 아들 루크. 그대는 사사로운 이기심에 사로잡혀 은인을 배신하였으며, 혈육을, 더 나아가 대륙의 무고한 인민을 쓸데없는 피바람에 몰아세웠습니다. 그 죄값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사형입니다.”

“…….”

“부디 영원히 잠들기를.”

그 말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었을까.

루크는 온몸에서 힘이 빠져 이윽고 쓰러졌다. 고통이 사라지지 않았다. 목이 너무도 아팠다. 피가 새어나가는 감각이, 생명이 사그라드는 촉감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루크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죽음이 찾아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잘한 것일까.

나는 제대로 마지막까지 잘 해냈을까.

‘데이지.’

의식이 까마득하게 작아졌다.

그 공간은 지나치게 작아 오로지 한 마디의 말을 남겨둘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이 자리에 무엇을 남겨두어야 하는지 자신이 결정해야 했다. 아무도 들을 수 없는 한 마디를. 따라서 온전히 자기 자신만을 위한 한 마디를.

루크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데이지.’

자그마한 소리.

그것이 루크의 마지막 한 마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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