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80화 (479/510)

무엇을 위하여 <48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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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방에서 루크를 발견한 사람은 단탈리안의 친위대였다.

루크는 온몸에 피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 정보부에서 탈주하면서 베어넘긴 검주와 요원들의 핏물이었다. 숲 속에서 걸어나오자 루크는 단박에 경비병의 눈에 띄었다. 경비병은 현명하게도 루크한테 “웬 놈이냐” 내지는 “멈춰라” 하고 겁박을 지르지 않았다.

─ 휘이이익!

경비병은 대신에 피리를 꺼내서 호각을 불었다.

한 청년이 전신에 피칠갑을 한 채 나타났다. 그것도 제국의 총사령부가 가까이 위치한 후방으로. 웬 놈이냐고 물어볼 것도 없었으며, 구태여 멈출 것을 부탁할 이유도 없었다. 동료의 호각을 들은 병사들이 재빨리 모여들었다.

서른 명의 난쟁이 병사들이 순식간에 집합했다.

“…….”

루크가 눈을 찌뿌둥하게 찡그리며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병사들이 창대를 쥐어잡은 각도, 창칼이 날카롭게 다듬어진 정도, 쓸데없이 군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것과 얼굴 표정에 두려움이 없는 것. 루크는 한눈에 병사들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정예병이네.’

어떻게 할까, 하고 루크가 생각했다.

‘죽이려면 전부 죽이고 갈 수 있기는 한데.’

루크는 되도록 자신이 직접 단탈리안을 만나고자 했다.

차마 단탈리안에게 ‘데이지가 죽을 때 마지막으로 뭐라고 말했나요’ 하고 물어볼 염치는 없었다. 대부님이 친절하게 말해주리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다만, 만약 데이지의 유언을 전해들을 수 없다면, 그녀를 죽인 단탈리안의 얼굴 표정이라도 보고 싶었다.

그런 걸 보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루크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단탈리안을 직접 보지도 않은 채 누군가에게 사로잡혀 문답무용으로 사형당하는 것만큼은 싫었다. 전력을 다해 거부할 생각이었다.

“으으음. 저기.”

루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자 친위대가 더욱 매섭게 창을 들이밀었다.

“아.”

루크는 조금 곤란했다.

자신에게는 말재주가 부족했다. 대부님이나 데이지는 달변가 중의 단별가였는데, 왜인지 자신은 거의 눌변에 가까웠다. 이 자리에 데이지가 있었으면 교묘하고 화려하게 병사들을 설득하여 대부님이 있는 곳까지 편안하게 갈지 모르겠다고, 루크가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마법과 같은 일은 못할 거야.’

루크가 울적하지만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제가 여러분이랑 그, 대화 같은 걸 할 수 있을까요?”

“무슨 개수작이야.”

“그러니까 제가 누구이고, 왜 여기 왔는지, 여러분한테 설명할 기회가 있을까 싶어서요. 이성적인 대화가 가능하다면 고맙겠습니다만…….”

난쟁이 친위병들이 잠깐 서로를 쳐다보았다. 죄다 얼굴들이 석상처럼 무뚝뚝했다. 그들이 눈빛으로 얘기했다. 그 대화 내용은 눈앞의 인간종 청년이 정신병자인지 아닌지 의논하는 것이었으며, 일단 얘기나 들어보자고 중론이 모였다.

“말해봐.”

“감사합니다. 저기, 저는 합스부르크의 귀족 출신입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공화국이 멸망할 것 같아서 제국에 망명하려고 왔습니다.”

“귀족?”

난쟁이 병사가 미간을 좁혔다.

자고로 용병에게는 두 가지 종류의 귀족이 있었다. 하나는 자기네를 고용해주는 귀족 어르신이었고, 다른 하나는 탈탈 털어먹을 사냥감이었다. 병사들은 머릿속에서 눈앞의 청년을 총사령부로 끌고 가는 것이 이득일지, 아니면 여기서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하는 것이 이득일지 곰곰이 따졌다.

“거 얼굴이 잘생긴 게 귀태가 있기는 있구만. 급수가 어떻게 됩디까?”

“네?”

“급수요, 급수. 귀족이라고 다 같은 귀족이나. 핏줄만 내려받고 흙 파먹는 양반도 귀족이고, 저기 궁전에서 으리으리하게 돌아다니는 양반도 귀족인데. 그쪽이 어느 정도 귀족이신 줄 알고 우리가 대접해드리겠소?”

“아…….”

루크가 볼을 긁적거렸다.

마치 꼭 처음으로 세상에 내팽개쳐진 기분이었다. 용병들이 이쪽을 바라보는 눈초리나 그들의 어투, 모든 것이 낯설었다. 루크는 그동안 자기가 얼마나 단탈리안의 그늘 아래에서 안전하게 살았는지 새삼스레 느껴졌다.

“일단, 공작가의 아들이긴 한데요.”

“공작?”

난쟁이 병사의 얼굴이 조금 더 엄격해졌다.

“그거 직급이 가장 높네요?”

“아무래도 왕족을 제외하면 그렇겠죠?”

“사생아라든지 삼남이나 사남이라든지……뭐 그런 건 아닙디까? 혹시나 해서.”

루크가 고민에 잠겼다.

커스토스 공작가의 가주는 단탈리안이었고 후계자는 명백하게 장녀인 데이지였다. 데이지가 죽은 게 확실한 지금, 커스토스 공작가의 후계라고 할 만한 사람은 반쯤 양아들로 취급받는 루크 자신밖에 남지 않았다.

“아니요. 아마 제가 후계자일걸요.”

“사령부로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도련님.”

난쟁이 병사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루크는 어떻게든 상대방을 설득한 것 같아서 안심했다. 그런데 여전히 한 명만 제외하고 나머지 병사들은 루크를 향해 창날을 겨누고 있었다. 루크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는데, 대표로 나선 한 명의 병사가 살갑게 웃었다.

“그래도 도련님이 간자가 아니라는 보장이 없으니까 무기는 내려줍시사 부탁드립니다.”

“아, 예.”

루크가 손에 들고 있던 장검을 검집에 집어넣어 병사한테 건네주었다.

병사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혹시 몸안에 위험한 흉기나 뭐 그런 비스무리한 물건을 갖고 계십니까?”

“네. 조금.”

“그것도 곤란하니까 죄송하지만 상의랑 하의를 벗어주실 수 있을까요? 나체로 끌고 가겠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냥 잠깐 벗으셨다가 다시 입어주시면 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루크가 순순히 협조했다.

루크는 끈을 풀어 조심스럽게 바르바토스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온통 핏자국으로 더럽혀진 집사복을, 마왕성에서 단탈리안의 집사로 일할 때 받은 제복을 벗었다. 루크의 몸은 겉모습과 다르게 섬세한 잔근육으로 뒤덮여 있었다.

“야아.”

병사 중 한 명이 저도 모르게 탄사를 흘렸다. 베테랑 용병이 보기에도 감탄스러울 만큼 제대로 만들어진 몸이었다.

“도련님이 검기를 쓸 줄 아나보네.”

“아. 그게 보여요?”

“근육이 딱 검기 쓰는 무사용인걸. 부럽습니다. 우리 같은 애들은 몸을 불려야 싸움을 해도 제대로 하거든요. 직급도 높으시고, 얼굴도 훤칠하게 생기셨고, 게다가 몸까지 좋아. 여자들 겁나게 따먹으셨겠네.”

“…….”

루크가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그때 뒤에서 사태를 지켜보던 병사 한 명이 동료의 옆구리를 툭툭 쳤다. 병사는 루크가 내려놓은 바르바토스를 손가락질했다. 바르바토스 역시 몸 전체에 핏물이 묻었지만, 적어도 사람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저게 뭐야?”

“……팔다리 잘린 사람 아냐?”

“망명 귀족이 사지병신은 왜 들고 다녀.”

점차 많은 병사들이 수군거렸다.

수군거림을 전해들은 대표 병사가 루크에게 말했다.

“아. 그런데 도련님, 저어기 내려놓으신 물건이라고 할까. 사람이라고 할까. 저건 뭡니까?”

“마왕 바르바토스입니다.”

“예?”

루크가 상의를 전부 벗었다.

“바르바토스요. 설마 모릅니까? 대부님의 애인인데.”

루크의 푸른색 눈동자가 병사를 바라보았다. 눈이 호의적으로 웃고 있었다. 하지만 병사는 루크의 눈동자 자체는 결코 웃지 않고 있음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거기에는 우물처럼 깊고 새카만 눈동자만이 있었다.

“대부라니…….”

난쟁이 병사가 움찔했다. 그 눈동자를 정면에서 직시하니 문득 뒤통수가 서늘해졌다.

저건 위험했다. 위험한 놈의 눈초리였다. 가끔 전쟁터에서 자포자기한 살인마가 저런 눈빛을 품곤 했다. 난쟁이 병사는 천천히 뒤로 물러서서 동료들의 대열에 합류하고자 했다. 그러나 병사가 발뒤꿈치를 움직이자마자, 루크가 병사에게 질문했다.

“병사. 당신의 직급이 어떻게 됩니까.”

“……친위대 하사입니다.”

“마침 잘 됐군요.”

루크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단검들을 땅바닥에 우수수 떨어트렸다.

“저는 단탈리안 전하의 양아들. 커스토스 공작가의 이름을 빌릴 자격이 있는 자입니다. 귀군의 군주(軍主)이신 단탈리안 전하께 루크가 찾아왔다고 전해주십시오. 아울러, 당신의 연인인 바르바토스까지 함께 도착했다고.”

병사가 침을 꿀꺽 삼켰다.

“알겠습니다. 잠시.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그는 동료 병사들에게 귓속말로 뭐라 속삭인 다음, 헐레벌떡 군진을 향해 달려갔다.

잠시 뒤에 병사가 백 명 가량의 근위병과 함께 돌아왔다. 근위병들은 조용히 항오를 맞추어서 루크를 포위했다. 물 샐 틈도 없이 완벽한 포위망이었다. 그동안 루크는 상의를 발가벗은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병사가 다가왔다.

“가시지요, 도련님.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루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바르바토스를 등에 짊어지고 일어섰다.

루크가 한 발자국 걸을 때마다 백 명의 근위병도 함께 움직였다. 병사들의 경계는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더 삼엄해졌다. 백 명이 백오십 명으로, 백오십 명이 이벽 명으로 불어났다. 그렇지만 루크는 불안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뻤다.

‘정말 대부님한테로 가고 있구나.’

경계가 엄격해진다는 것은 그만큼 안전이 중요한 장소에 가까워진다는 얘기였으므로.

아니나 다를까, 루크는 무사히 합스부르크 제국군의 사령부 군진에 당도했다. 막사들이 끝없이 줄지어 펼쳐졌다. 제국을 뜻하는 검은 독수리의 깃발이 펄럭거렸다. 루크는 보병과 궁병, 심지어 기병들의 포위를 받으며 군진의 중앙으로 향했다.

이윽고.

“도련님, 여기에 무릎을 꿇어주십시오.”

가장 화려한 막사가 루크에게 보였다.

루크는 어떠한 반항도 하지 않고 얌전히 무릎을 꿇었다. 단지 그 전에 바르바토스를 끈에서 풀어 자신의 옆에 부드럽게 눕혔다. 과다한 약물에 의해 바르바토스는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

루크가 이마를 땅바닥에 갖다 대었다. 그야말로 죄인의 모습이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루크의 머리 위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드십시오, 집사장.”

“……로드브로크 양.”

루크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서 있었다.

시녀복을 입은 금발의 소녀는 여느 때처럼 표표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언가에 불만스러운 것처럼, 혹은 슬픈 것처럼 입가가 굳었다. 붉은색 눈동자는 차갑게 루크를 내려다보았다.

“전하께서는 지금 의식을 잃고 계십니다. 당신의 심문은 제가 담당합니다.”

“의식……대, 대부님께서 변고를 당하신 건가요?”

“시녀장을 처단하실 때 다소 무리를 하셨습니다.”

처단.

한 사람의 죽음을 의미하기에는 지나치게 삭막한 울림에 루크가 전율했다. 다시 눈물이 차오를 것 같았다. 하지만 루크는 자기가 죄인임을, 이런 자리에서 함부로 눈물을 흘려도 될 처지가 아님을 되새겼다.

“그러니까, 대부님께서는……지장이 없으신 거지요……?”

“당신께 직접 전하의 용태를 보여드릴 수도 있습니다. 모두 당신이 얼마나 성실하게 대답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말하겠습니다.”

루크가 쿵, 하고 이마를 아래에 내리박았다.

“말하겠습니다. 무엇이든 말하겠습니다. 어떤 처벌이 내려져도 달게 받겠습니다. 하, 하지만 마지막으로 대부님을 뵙게 해주세요. 제 소원입니다. 로드브로크 양, 제발…….”

“…….”

이바르가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이바르의 시선은 냉철한 의지로 가라앉아 있었다.

“좋습니다. 먼저 이것부터 하문하지요. 루크,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통령이 당신에게 마왕 바르바토스의 납치를 의뢰한 것이 맞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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