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위하여 <47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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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질기게 추격해오는군.”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수도 무니헨, 동쪽 성벽.
엘리자베트가 전방을 내다보면서 눈썹을 찡그렸다. 이미 예상한 바였으나 적군의 추격이 만만치 않았다. 조금쯤 멈추어서 시체를 약탈해도 괜찮을 텐데, 무엇에 쫓기듯이 정신없이 이쪽을 향해 달려들었다.
쿠르츠가 투구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말했다.
“설마 이 참에 우리를 완전히 끝장내겠다는 심보는 아니겠죠?”
“글쎄. 적군에게는 공성장비가 없다. 이 이상 접근해봤자 소득이 없을 터이다만…….”
흐음, 하고 엘리자베트가 침음을 흘렸다.
대다수의 병사는 무사히 성안으로 도망쳤다. 현재 각 부대에서 중대장들이 병사들을 서둘러 다독이고 있었다. 정비가 완료된 부대들은 성벽으로 올라와서, 만에 하나 공성전이 벌어질 가능성을 대비하였다.
“저거 보십시오, 각하. 저놈들도 아예 재편성을 하고 있는데요.”
쿠르츠가 전방의 평야를 가리켰다.
무니헨의 성벽 아래에는 넓고 깊은 해자가 파여 있었다. 해자 바깥에는 견고한 목책이 대여섯 겹으로 세워졌다. 원래부터 드넓은 평야에 자리 잡았으므로 난공불락이라 부르기에는 손색이 있었지만, 적어도 쉽사리 함락할 만한 도시는 아니었다.
그런데 평야 저편에서 합스부르크 제국군은 부대를 재정비하고 있었다. 연대기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병사들을 유도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전열이 깔끔하게 늘어섰다.
“아무리 봐도 숙영지를 세우려는 건 아닙니다.”
“으음. 역시 바로 공격하려는 것인가.”
“소인이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의문이 깊어졌다.
무니헨 정도의 규모를 가진 도시에 투석기도 없이 덤벼드는 것은 무모했다. 마법사 전력도 엇비슷했다. 이런 상황에서 싸움을 걸어본들 적군의 피해만 심대해질 터. 엘리자베트는 상대편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일단 전군에 농성을 준비할 것을 명령하라. 적이 아무런 대책도 없이 공격하진 않을 것이다. 틀림없이 숨겨둔 비책이 있겠지.”
“예, 각하.”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부관들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그렇게 약 한 시간. 제국군과 공화국군이 각자 자군의 전열을 정비했다. 오늘 다시 한번 치열한 싸움이 예약되었다는 것을 알리려는 듯, 두 군대는 평소보다 호화롭게 밥을 먹었다.
엘리자베트도 간부들과 함께 끼니를 떼우고 있었다. 이때 정보부의 요원이 다가와서 쿠르츠에게 귓속말을 속삭였다. 쿠르츠의 얼굴이 구겨졌다.
“전하.”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칼마르어로 말했다.
“나쁜 소식을 하나 전해드리게 되었습니다. 정보부의 지하에 수감되어 있던 바르바토스가 탈주했다고 합니다.”
“…….”
수프를 떠먹던 엘리자베트의 은수저가 뚝 멈추었다.
“그, 데이지인가 하는 여자애가 데리고 다니던 시종을 혹시 기억하십니까.”
“……금발의 남자애 말인가.”
“녀석이 의외로 검을 깨나 놀리는 놈이었습니다. 정보부를 지키던 검주 한 명이 죽었고, 한 명이 크게 부상을 당했답니다. 지금 정보부원들이 최선을 다해서 쫓고 있습니다만.”
엘리자베트가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았다. 그녀의 눈빛이 어둡게 침잠했다.
“최선을 다한다는 보고보다 믿음직스럽지 못한 말이 달리 없지. 슐라이어마허 정보부장. 바르바토스는 이미 아국의 손에서 벗어났다. 본인이 그리 판단해도 좋겠는가?”
“송구하지만 그렇습니다.”
쿠르츠가 한숨을 쉬었다.
“본래 정보부에 붙어 있던 검주들도 거의 전부 전쟁터에 나섰습니다. 게다가 단탈리안의 양녀가 사라졌으니 더 이상 심각하게 주의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죠. 설마 시종까지 검주 이상가는 실력자일 거라고는……소인의 실책입니다요.”
“어디로 도망쳤는가?”
“경비가 제일 적은 서문으로 도주했습니다.”
엘리자베트가 손바닥으로 이마를 가렸다. 그녀의 눈가에서 짙은 피로가 묻어나왔다.
“우리의 경계를 약화시키기 위해 일부러 공성전을 벌일 것처럼 위장했나……감쪽같이 속아넘었군.”
“그럼 저건 역시 허장성세일까요, 각하?”
“아마도.”
엘리자베트가 중얼거렸다.
“문제는 이게 사전에 계획된 탈주극이라는 점이다. 단탈리안의 양녀가 사라져서 우리가 안심하자마자 바르바토스가 탈출했다. 허면, 애당초 바르바토스를 들고 우리한테 투항한 것 자체가 거짓일 공산이 높다.”
“…….”
“이번 전쟁은 엄밀히 말해서 바르바토스의 존재에 의해 촉발했어. 전쟁의 원인이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니. 무척이나 피곤해지는군.”
쿠르츠는 그건 아닐 거라며 반박하고 싶었다. 데이지라는 소녀를 정보부에서 얼마나 혹독하고 철저하게 심문했던가. 만약 소녀의 마음속에 다른 뜻이 있었다면 반드시 심문 과정에서 탄로났으리라.
그렇지만 엘리자베트 통령이 너무도 피곤해보여서, 또 쿠르츠 본인이 잘못한 것도 커서, 그는 입을 다물었다. 엘리자베트가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최악의 사태를 각오해야 할지도 모른다.”
“최악의 사태라니요? 바르바토스가 단탈리안에게 넘어가는 경우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쿠르츠는 자기가 말해놓고도 그 경우를 떠올리니 머리가 아파왔다.
만약 바르바토스가 이대로 무사히 제국에 돌아가서 ‘나는 그동안 공화국에 붙잡혀 있었다’라고 증언하기라도 하면 공화국의 처지가 매우 난감해졌다. 아마 대륙의 거의 모든 국가에서 공화국을 맹비난하겠지. 공화국 외교상서는 자신의 미래에 절망한 나머지 정말로 목을 매달아버릴지 몰랐다…….
엘리자베트가 고개를 무겁게 저었다.
“아니. 그 정반대다.”
“예?”
“바르바토스가 이대로 단탈리안 쪽으로 넘어가지 않고,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 당해버리는 것이야말로 최악의 사태에 해당한다.”
쿠르츠가 미간을 좁혔다.
“오히려 잘되는 일 아닙니까요? 그럼 우리가 바르바토스를 납치했다는 증거도 함께 사라집니다. 아무것도 두려워할 게 없어 보입니다만.”
“자네는 천생이 정보부 사람이라서 그런지 생각하는 각도가 고정되어 있군.”
엘리자베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의 입장이 아니라 다른 국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게. 제국에서는 바르바토스가 납치되었다고 주장하고, 우리는 아니라고 주장하지. 그런데 제국군이 승전을 거둔 직후, 갑자기 바르바토스의 마왕성이 허물어지는 것일세. 열국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나?”
“……!”
쿠르츠가 숨을 죽였다.
“제기랄. 우리가 바르바토스를 없애버렸다고 생각하겠군요!”
“아아. 납치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공화국에서 교살한 것 아니냐……십중팔구 그런 의심이 생겨날 것이다.”
엘리자베트가 묽은 포도주를 들이마셨다. 식초에 가까운 포도주의 신맛이 입안을 강하게 자극했다. 덕분에 엘리자베트는 머릿속이 조금 더 투명해졌다.
“반대로 만약 바르바토스가 단탈리안에게 무사히 넘어간다면 오히려 우리에게 유리해진다. 제국이 자작으로 납치극을 연출한 것 아닌가. 어떻게 납치당했다는 바르바토스가 멀쩡하게 다시 나타났는가. 열국들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법하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으리라.
엘리자베트가 재차 한숨을 쉬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어주는 것은 심증만 있을 뿐 물증이 없다는 점일까. 아니, 단탈리안이 소문대로 바르바토스를 사랑하고 있기를 바라야겠군. 정치적인 이득을 외면해서라도 바르바토스의 목숨을 살려두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엘리자베트는 다만 단탈리안이 정치적 이득과 애인의 생명, 둘 중 하나가 걸렸을 때 후자를 선택하는 모습을 도저히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만큼 '인간적인' 면모가 있었다면 처음부터 엘리자베트가 단탈리안을 두려워할 이유도 없었다.
‘인간인 내가 마왕의 안녕을 빌게 될 줄이야.’
엘리자베트가 짧게 자조했다.
“어찌 되었든 오늘 안에 전투가 재개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천천히 식사하게.”
“예, 각하.”
* * *
루크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후우, 후욱……흐아아.”
데이지가 전쟁터로 뛰쳐나간 직후, 루크는 몰래 정보부에 잠입하여 바르바토스를 탈취했다. 이때도 경계가 완전히 없어지진 않아서 두 명의 검주가 정보부를 지키고 있긴 했다. 루크는 능숙하게 검주들을 처리했다.
바르바토스는 여전히 사지가 잘린 채 약물에 절어 깊이 잠들어 있었다. 루크는 바르바토스를 단단히 등에 짊어지고 정보부를 빠져나갔다. 그 순간, 루크는 마치 한 줄기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심장 부근이 썰렁해지는 것을 느꼈다.
‘데이지가 죽었구나!’
루크가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뚝 멈추었다.
‘데이지. 아아, 데이지!’
루크는 본능적으로 노예각인이 사라졌음을 느꼈다.
자신은 자유로워졌다. 그러나 루크는 결코 자유가 기쁘지 않았다. 눈가에서 눈물이 차올라, 루크의 새하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주인을 잃었다.
혈육을 잃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유일무이한 첫사랑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
루크가 옷소매로 눈가를 닦았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이 멈추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참았다. 데이지는 죽었다. 하지만, 그렇지만, 데이지가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명령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루크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움직여야 해. 아버님이 있는 곳으로……어서.”
루크가 바르바토스의 몸뚱어리를 들쳐메고 걸어나갔다.
‘작전대로 데이지가 대부님한테 죽었어. 이제 대부님은 바르바토스를 순전히 데이지의 계략에 의해 피해자로 전락한 사람으로 볼 거야.’
그는 경비병의 시야에 걸려들지 않기 위해 철저히 건물의 그림자와 그림자 사이를 뛰어 건너면서 이동했다. 성벽의 경비병은 루크가 다가오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대부님은 바르바토스를 죽이지 못해. 그래. 바르바토스와 대부님이 나란히 희생자로 전락해서, 서로가 서로를 위로해주는 결말이 완성돼. 그걸로 됐어.’
경비병이 잠시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사이, 루크가 재빨리 성벽을 타고 넘었다.
완전히 조용하게 성벽을 넘을 수는 없었는지 경비병이 침입자를 눈치 챘다. 경비병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검을 빼들었지만, 이미 루크는 성벽을 다 넘고 땅바닥을 향해 풀쩍 뛰었다.
‘응. 데이지가 그걸로 만족한다고 말했으니까……나도 만족해.’
한 발자국 뒤늦게 경비병들이 루크를 발견하고 다급하게 활시위를 당겼다. 성벽 위에서 화살들이 날아갔다. 그것들은 루크가 지나간 자리에만 허무하게 박혔다. 루크가 후우, 후우, 하고 숨을 쉬며 뛰어갔다.
‘왜냐하면, 나는 데이지를 위해 살기로 결심했으니까.’
그것이 루크가 한 맹세였다.
자신이 무식하고 무지한 탓에 데이지가 5년 내내 괴로움에 시달리는 것을 전혀 몰랐다. 루크는 평생을 다 바쳐서라도 그 죄값을 속죄하고자 했다. 설령 단탈리안이 자신을 보고 진노하여, 데이지를 죽였듯이 꼭 그처럼 자신을 죽일지라도, 루크는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우리는 만족할 수 있어.’
얼마나 뛰었을까.
루크는 무니헨에서 한참 멀리까지 뛰어온 기분이 들었다. 이 정도면 반마법의 영향에서 벗어났겠지 싶어서 루크가 마법서를 꺼내 들었다. 루크가 순간전이 마법서에 마력을 흘러보냈다.
성스러울 정도로 새하얀 빛무리가 루크를 감쌌다.
‘그렇지, 데이지?’
잠시 뒤.
루크는 무니헨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전이되었다. 나무가 우거진 숲이었다. 루크가 주위를 조심스레 살피며 숲을 걸어나오자, 저 너머, 합스부르크 제국군의 깃발이 펄럭거리는 군진 막사들이 보였다.
저곳에 대부님께서 머무르고 계시리라.
루크가 묵직한 발걸음을 내딛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