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78화 (477/510)
  • 무엇을 위하여 <47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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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들의 수급을 베어서 한데로 몰아넣어.”

    “시체 틈새에 생존자가 있을 것이다. 제대로 찔러서 확인해.”

    트레비소 평야.

    해상도시 베네치아의 후방에는 드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마왕군의 부관과 병사들이 이리저리 적당히 뛰어다니며 명령을 수행했다. 사령관인 마르바스가 그들을 어딘지 아련한 눈길로 가늘게 쳐다보았다.

    오른편에서 시트리가 다가왔다.

    “전부 처리했어.”

    “시트리인가. 수고했다.”

    “수고는 무슨. 우리 병사들이나 고생하지.”

    시트리가 다소 힘이 없는 손길로 투구끈을 풀었다. 그녀가 아무렇게나 투구를 던지자,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부관이 능숙하게 받아냈다. 군중의 시종들이 다가와서 시트리에게 젖은 수건과 물잔을 대령했다.

    “아, 괜찮아.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시종이 몸을 닦아주려고 하자 시트리가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시종들이 송구하다는 듯 뒷걸음치며 물러났다. 시트리는 단번에 물잔을 비우고, 얼굴을 수건으로 마구 문질렀다.

    “피해는 어찌 되는가.”

    “아나톨리아 촌동네 애송이들은 문제가 아니었어. 싸울 줄 모르는 신병이 대부분이던걸. 써는 맛도 없어서 느긋하게 즐길 틈도 없었지. 하긴 이삽만이니 뭐니 떠들 때부터 알아봤어야지. 안 그래?”

    시트리가 수건을 뒤로 던졌다. 전쟁터의 모래 먼지가 벗겨지자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났다. 마르바스는 그녀가 예전보다 더욱 아름다워졌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싱글벙글 웃고 다니던 옛날보다.

    지금처럼 한 군데 망가져서 무표정해진 그녀가 더 아름답다고.

    “문제는 합스부르크 공화국 애들이었어. 전쟁질하는 방법을 알더라. 브르타뉴에서 원군을 보내지 않았으면 결과가 나빴을지도 몰라. 결과적으로 내 병사가 삼천 명이나 상했어.”

    “적군의 상황은 어떠한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 마르바스 아저씨.”

    시트리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전멸이라는 단어 말고 적한테 다른 걸 허락한 적이 있어?”

    그때 군진의 천막 바깥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마르바스와 시트리가 시선을 돌렸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가운데 한 남자가 병사들에게 양팔이 붙잡혀 있었다. 제법 직급이 높은지 화려한 갑옷을 껴입었다.

    “아나톨리아의 장군인 모양이군.”

    “정확하게 말하면 총사령관이지.”

    시트리가 빈 물잔을 옆으로 뻗었다.

    시종이 얼른 다가와서 살얼음이 낀 물을 따라주었다. 시트리는 물잔을 기울이며 지그시 적군의 장군을 바라보았다. 멋들어지게 턱수염이 자라난 장군은 계속해서 큰소리로 고함을 치고 있었다.

    “본인이 아나톨리아어는 미처 익히지 못해서 말이다. 뭐라고 떠드는 것인가?”

    “아저씨가 모르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나 멍청한 년인 거 그새 잊었나.”

    “음. 안타깝게도 우리 둘 다 저 남자가 떠드는 말을 이해할 수 없군.”

    부관이 도끼를 꺼내들었다. 병사들은 아나톨리아의 장군을 더더욱 강하게 잡았다. 장군이 경악스러운 눈초리로 주변의 병사를, 그리고 천막 아래서 시원하게 얼음물을 들이키고 있는 시트리를 쳐다보았다.

    “그러게.”

    시트리가 무심하게 말했다.

    “참 안타까운 일이야.”

    휘익, 하고 도끼가 공기를 갈랐다.

    땅바닥에 머리통이 떨어졌다. 아나톨리아 제국의 총사령관이자 재상인 남자는 최후까지 엉망진창으로 표정이 구겨져 있었다. 병사들이 다음으로 처형할 사람을 끌고 나왔다. 비명이 터지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단속적으로 울렸다.

    “적장들 죽이는 데 한 세월이 걸리겠네.”

    “명색이 십오만 대군이었으니 말이다.”

    평원에는 수만 구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마르바스를 위시한 마왕군은 작전대로 베네치아를 포위했다. 아나톨리아 제국은 마왕군을 경계하며 일단 도시에 틀어박혔다. 하지만 후방에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원군이 도착하자, 제국군은 과감하게 협공하기로 결정했다.

    이걸 경솔하다고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나톨리아 제국군은 물경 13만에 이르렀다. 여기에 합스부르크 공화국군 3만. 도합 16만 대군이 적을 양면에서 공격하게 된 것이었다.

    반면에 마왕군은 약 6만 명에 불과했다.

    이들은 베네치아를 둘러싸느라 얇고 기다란 포위망을 형성했다. 병력이 적을뿐더러 두께까지 얄팍했다. 당연하게도 아나톨리아 제국군은,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라 판단했다.

    전투 중반까지는 제국군이 유리했다. 마왕군이 제아무리 통상 세 배의 병력차까지 감당할 정도로 강력하다고 해도, 양방향에서 압박해오는 적을 상대하기란 어려웠다. 마왕군은 금세라도 붕괴될 것 같았다.

    ―――브르타뉴를 상징하는 흑백합의 깃발이 평원 저편에서 등장하지만 않았다면.

    칠천 명으로 이루어진 브르타뉴 기사단은 문자 그대로 제국군의 측면을 파쇄했다. 그러자 얌전히 수비 태세로 임전하던 마왕군이 거짓말처럼 공세를 퍼부었다. 전투는 삽시간에 난전으로 바뀌었다.

    모든 군세의 진형이 허물어졌다. 전투가 처절한 개싸움이 될수록 유리해지는 것은 마왕군이었다. 마왕들은 마인들에게 일일이 직접 명령을 내릴 수 있었으므로.

    아군과 적군이 뒤섞여서 아수라장이 연출되었다. 마왕군과 달리 아나톨리아 제국군은 섬세하게 명령을 주고받을 수가 없었다. 한 시간, 두 시간이 흐르자 어느새 전투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변모했다.

    학살이 시작된 것이었다.

    특히 시트리가 이끄는 일만 명의 군세가 잔혹했다. 이들은 시트리를 중심으로 뭉쳐 전장을 한바탕 피바다로 만들었다. 살려달라며 항복하는 인간도, 후퇴하려고 등을 보인 인간도, 시트리는 일절 용서하지 않고 사살했다.

    거의 광란에 가까운 학살에 인간군은 전의를 잃어버렸다.

    온 평원에 마왕군의 뿔나팔이 울려 퍼졌다. 군마의 말발굽과 늑대의 발톱이 십육만 대군의 내장을 짓이겼다. 그중에서 살아남아 베네치아로 도망치는 데 성공한 인간은 겨우 오만 명에 불과했다.

    단 한 차례의 싸움으로 십만이 죽어나갔다.

    “아아, 완전히 지쳐버렸어~.”

    천막 아래로 가미긴이 걸어왔다. 그녀는 금발이 제멋대로 뻗쳐 있었다. 전투 내내 와이번에 올라타서 이리저리 바쁘게 날아다니느라, 머리카락이 볼썽사납게 굳고 말았다. 가미긴은 시종들이 달라붙어서 몸을 닦아주는 걸 흐뭇하게 즐겼다.

    “도망치는 놈들한테 전부 추격대 붙였으니까 행여라도 문제는 없을 거야. 뭐, 베네치아로 가버린 애들은 여기서 손쓸 수가 없지만.”

    “수고했다.”

    “그럼, 그럼. 엄청나게 수고했지. 어휴, 난 역시 전쟁 체질이 아니야. 그냥 침대에서 뒹굴뒹굴거리는 게 삶의 낙이라니까.”

    잠시 뒤에 바싸고가 들어옴으로써 사령관급 마왕 전원이 모였다.

    전투 때문에 그들은 모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큰일을 끝낸 사람들이 흔히 그러하듯, 마왕들도 의자에 앉아서 멍하게 바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인간군의 장군들이 계속해서 처형되고 있었다.

    네 명의 마왕은 나란히 앉아서 그 풍경을 관람했다.

    “이제 몇 명 남았는가?”

    “으응. 대충 백 명만 더 베어버리면 끝났다는데.”

    “끔찍하군.”

    바싸고가 눈썹을 찡그렸다.

    “처형수한테 얼른 죽여버리라고 전해라. 이러다 밤을 꼬박 새버리겠어.”

    “저것도 최대한 빨리 죽이는 거라네. 다섯 명이서 돌아가며 죽이고 있지 않은가.”

    “거 다섯 명이 한 명씩 잡아서 죽이면 안 되는가?”

    “자네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오히려 품위가 떨어지는군.”

    마르바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바싸고에게 말했다.

    바싸고가 신경질적으로 포도주를 들이켰다.

    “품위는 무슨. 전쟁에서 예법 따지는 것만큼 우스운 소리지. 단탈리안 그놈은 어떻게 됐나?”

    “자네에게는 불행한 소식이겠네만, 그쪽도 승전을 거두었다네.”

    “빌어먹을. 세상에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증명되는군.”

    바싸고가 땅바닥에 묽은 침을 뱉었다. 가미긴이 깔깔 웃었다.

    “아서라. 단탈리안이 죽기를 기대하느니 차라리 네가 먼저 목 매다는 편이 현명할걸. 이제 걔 누가 막을 건데? 응? 이 자리에서 비공식적으로 말해두지만 난 단탈리안 편이다아?”

    “이래서 연애를 늦게 하는 연놈이 더 무섭다는 거다.”

    바싸고가 나지막하게 욕지거리를 흘렸다.

    “천 년 만에 처음으로 남자를 사귀더니 아주 눈에 뵈는 게 없이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주지 않는가. 한심한 것. 옛날에 잠시라도 네가 현명한 여성이라고 생각한 내 과거를 지워버리고 싶다.”

    “헤에. 우리 현명한 바싸고 전하께서 날 그리 높이 평가했는 줄 미처 몰랐네. 바싸고 전하께서는 무진장 똑똑하시니까 틀림없이 단탈리안한테 꿀리지 않았겠지?”

    “…….”

    “하여간 단탈리안도 신기해. 브르타뉴 애들도 여기로 보내고, 우리도 전부 여기로 보냈는데, 어찌저찌 혼자서 또 이겨버리네.”

    “흥.”

    바싸고가 썩은 얼굴로 포도주를 꿀꺽꿀꺽 마셨다.

    나른한 공기가 흘렀다. 기이한 풍경이었다. 사방에 수천수만 구의 시체가 대지를 뒤덮었으며, 눈앞에서도 처형식이 끊임없이 이어졌건만, 학살의 주범인 마왕들 주변에는 권태로운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그래도 살아남을 사람만 살아남았군.”

    바싸고가 중얼거렸다.

    “여기서 괜히 딴짓을 꾸밀 마왕은 없지 않느냐.”

    “으응. 아마도?”

    가미긴이 하품을 했다.

    “확실히 명줄이 길다 싶은 사람들끼리만 남았어. 지금 와서 하는 말인데, 난 파이몬이나 바르바토스나 언젠가 제 명에 못 살겠다 싶었다니까.”

    “…….”

    시트리가 가미긴을 슬쩍 노려보았다. 가미긴이 헤헤 웃으면서 양손을 가운데로 모았다.

    “미안, 미안. 그냥 솔직하게 털어놓는 거야. 뭐라고 해야 할까. 바르바토스나 파이몬은 색깔이 강하잖아. 짧고 굵게 살면 살았지, 나처럼 가늘고 길게 살 운명은 아니었다. 뭐, 그런 얘기야~.”

    “…….”

    시트리가 고개를 돌렸다.

    “이번 전쟁이 끝나면 우리한테 싸움 걸어올 나라도 없으니 한동안 평화로울 거잖아. 여기까지 살아남은 사람끼리 사이좋게 지내자구. 쓸데없이 계략이니 모략이니 뒤에서 콩을 까면 어디의 무서운 마왕님께서 화내실걸.”

    “걱정하지 마라. 이제는 싸울 기력도 없어.”

    바싸고가 한숨을 쉬었다.

    “중립파는 어떠냐. 마왕군을 집권할 생각이 있는가?”

    “본인은 이대로 만족한다. 사실 본인은 평화를 사랑하는 남자라네.”

    “아무렴 그러시겠나.”

    전쟁은 끝났다.

    아직 정리해야 할 피라미들이 남아 있긴 했지만, 그건 전쟁이라기보다 처리작업이라 표현해야 올바르리라. 제국의 정점에 위치한 네 마왕들은 처형식을 지켜보며, 이제부터 찾아올 평화를 예감하고 있었다.

    평화.

    ‘결국 평화를 위해서 그 많은 피를 흘렸는가?’

    바싸고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정말로 아무런 가치가 없군. 도대체 마왕군에 뭐가 남았다는 말인가.’

    하지만 곧이어 바싸고는 생각을 중단했다. 자신은 살아남았다. 그걸로 충분했다. 바알도, 아가레스도, 바르바토스도, 파이몬도 없어져서 시시하게 되었지만 이런 마왕군도 나쁘지만은 않았다.

    ‘내 한 목숨을 챙기는 것만으로도 이미 삶에 대한 예의를 다한 것이야.’

    부관이 힘차게 도끼를 휘둘렀다.

    ― 후욱!

    도끼가 공중에 핏물을 흩뿌리며 또 다시 한 명의 머리를 절단하였다.

    잘린 머리는 데구르르 굴렀다. 멈출 듯 멈추지 않을 듯 굴러가던 머리통은 어설프게 땅바닥을 한 바퀴 돌더니, 이윽고 힘이 떨어졌는지 뚝 멈추었다. 거기에 차가운 정적이 감돌았다.

    잘린 머리는 추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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