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위하여 <47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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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호의 기회라니.”
라우라가 당황하여 무심코 반문했다.
“주군. 우리가 추격전에서 성과를 거두리라는 사실은 자명하나, 무니헨을 함락시키는 데 필수불가결한 공성장비는 아직 갖추어지지 않았다. 억지로 공성을 시도하면 아군의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날 것이다.”
“오우거를 이용하면 됩니다.”
단탈리안이 대답을 미리 마련해놓은 것처럼 바로 말했다.
“기억나지 않습니까, 라우라. 우리가 제일 처음 벌인, 전쟁다운 전쟁이요. 우리는 합스부르크 제국으로 쳐들어가기 위해 검은 산맥을 건너야만 했지요…….”
“…….”
라우라가 입을 다물었다.
제8차 월맹군. 아직 십 년이 채 흐르지 않았건만 라우라에게는 아득히 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그때는 아직 모든 게 낯설고 어수룩했다. 지금은 마왕군의 총사령관을 맡은 라우라도 그땐 일개 부관에 불과했다. 마인들은 인간인 라우라를 우습게 여겨서 노골적으로 따돌렸다…….
라우라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아. 당연히 기억한다. 소녀가 어찌 잊어버리겠는가.”
“저는 선봉대의 참모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라우라는 기껏해야 마궁수(馬弓手)의 지위에 머무를 뿐이었지요. 이제는 흐뭇하기까지 하군요. 그래요, 제파르 대장이 우리를 이끌어주었습니다…….”
“…….”
“그때도 아군에게는 제대로 된 공성장비가 없었습니다. 완전히 준비가 부족했지요. 그런데도 제파르 대장은 보란 듯이 청색 산성의 성문을 깨부수었습니다.”
단탈리안 말이 옳았다.
제8차 월맹군. 평원파는 최대한 신속하게 검은 산맥을 돌파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선봉대장을 맡은 서열 제16위의 마왕 제파르는, 거추장스러운 공성장비를 동원하는 것을 과감히 포기했다.
대신에 제파르는 오우거들을 육탄 병기로 활용했다. 오우거에게 큼직한 공성추를 들쳐메도록 했다. 오우거들은 문자 그대로 몸통째로 성문에 박치기를 가했다. 천 년이 넘도록 인간계를 수호해온 청색 산성은 다섯 번째 오우거의 돌격에 무너지고 말았다.
하지만, 하고 라우라가 주저했다.
“아군에는 오우거가 없다. 전투 초반에 전부 소모해버리지 않았는가.”
흐으, 하고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대저 승패는 병가지상사라. 승리를 이끄는 것이 사령관의 임무라면, 패배를 대비하는 것 또한 사령관의 자세입니다. 라우라. 아군의 후방에는 일흔 마리의 오우거가 매복하고 있습니다.”
“뭐……!”
라우라의 녹색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오우거 칠십 마리를 따로 마련해두었다는 것인가, 주군!”
“잘츠부르크를 함락한 날만이 아니라 틈이 날 때마다 조금씩 소환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진군 속도를 늦춘 것도 있지요.”
“소녀는 전혀…….”
라우라가 무언가를 말하려다 말문이 막혔다.
감탄사가 나온다기보다 의문사가 입안에 맴돌았다. 어째서인가. 왜 주군은 패배할 경우에, 그리고 오직 패배했을 경우에만 유효한 기책을 준비해두었는가.
엘리자베트 통령도 똑같았다. 겨우 패배했을 때만 써먹을 수 있는 특공대를 미리 준비시켰다. 이번에도 주군은 저 가증스러운 공화국의 통령과 동일한 사고방식을 보여주었다. 라우라는 그것이 견딜 수 없이 외롭게 느껴졌다.
왜냐하면 라우라는 결국에 공화국 통령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제 단탈리안이 똑같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하고 라우라가 생각했다. 나는 주군 역시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차마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 라우라의 심장을 적셨다. 주군에게 가장 가까이 서 있는 것은 나. 주군에게 가장 충실히 휘둘러지는 검 역시 나. 라우라는 그렇게 믿었다. 이 믿음이 흔들린 적은 없었다.
하지만 유독 엘리자베트가 거론될 때만 라우라는 불안에 사로잡혔다.
그 불안은 지금도 현실로 나타났다.
“주군. 일흔 마리의 오우거가 더해졌다면 전투에서 보다 쉽게 이기는 것이 가능했다. 아무리 패배를 대처해야 한다고 해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는 전투에서 그토록 여유를 부리는 것은 병법에 어긋나는 일 아닌가.”
“물론 그렇습니다.”
하고 피로와 고통에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도 상대가 엘리자베트 아닙니까.”
“…….”
“저번 전쟁에서도, 이번 전쟁에서도, 우리는 서로의 수를 빤히 내다본 상태에서 병력을 움직였습니다. 도리어 전쟁이 단순해졌지요. 하지만 제가 상상하지 못한 무언가를, 미처 예상하지 못한 수단을 동원해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꾸욱, 하고.
라우라의 가슴이 조였다.
“하지만……주군에게는 소녀가 있다. 설령 불의의 사태가 일어날지라도 소녀는 충분히 대응할 자신이 있다.”
라우라가 필사적으로 평정을 가장했다.
나를 최고라고 말해주지 않았는가, 하고 라우라가 마음속으로 애걸했다.
자신에게는 언제나 라우라가 최고라고, 엘리자베트보다 라우라가 더 대단하다고, 단탈리안은 틀림없이 그렇게 말했다. 넓은 품으로 라우라를 껴안으면서 부드럽게 속삭였다. 라우라는 오직 단탈리안의 인정에 기대어서 행복을 느꼈다.
그런데 왜 패배할 경우를 고려했는가.
‘소녀는 반드시 통령에게 승리한다. 주군도……주군도 그렇게 믿어준 것이 아닌가. 분명히 그리 믿는다고 소녀에게 말해주지 않았는가.’
라우라가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목소리에서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라우라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저도 모르게 단탈리안의 손을 꾹 쥐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주군. 굳이 아군이 패배할 경우를 대비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하니까요. 저는 제가 틀렸을 가능성을 도저히 간과할 수 없습니다. 그래요. 예컨대 갑자기 하늘에서 용이 나타나서 엘리자베트를 도울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쿨럭, 하고 기침 소리가 또 다시 불길하게 울렸다.
“엘리자베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우거 일흔 마리는 그녀에게 미처 예상하지 못한 변수. 이걸로 쐐기를 박습니다.”
“…….”
그러니까.
‘주군께서는 내 승리를 믿는 것보다.’
그것 이상으로.
‘공화국 통령의 유능함을 믿었는가.’
잠시간 침묵이 내려앉았다.
라우라는 몇 번이나 입술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입술이 열릴 때마다 약하게 눈가가 자극되었다. 이때 방심해버리면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라우라는 병상에 앉은 주군한테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았다. 울음소리를 들려줘서 쓸데없이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라우라는 단탈리안 앞에서 표정과 목소리를 가다듬는 데 익숙했다. 주군이 좋아할 수 있는 여자가 되도록 끊임없이 노력했으니까.
“……응. 주군은 역시 대단하다.”
라우라는 밝게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었다.
본인 스스로 뚜렷하게 밝힌 적은 없었지만, 단탈리안이 사실 현명한 여인에게 몹시 끌린다는 사실을 라우라는 알았다. 단탈리안이 사랑하는 라피스 라줄리가 그러했다. 이걸 눈치 챈 날부터 라우라는 매일 휴식시간이 생길 때마다 각종 학문서적을 읽었다.
단탈리안이 누군가에게 말한 적은 없었지만, 그가 자기 스스로 올곧게 바로서는 인생을 동경하며 또한 그런 여인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라우라는 알았다. 단탈리안이 사랑하는 바르바토스가 그러했다. 이걸 알아차린 날부터 라우라는 단탈리안에게 매달리고 싶은 마음, 애정을 요구하고 확인하고 싶은 욕망, 그 모든 것을 억눌렀다.
현명하고 대범한 여인.
단탈리안의 이상형에 어울리도록 언제나 자신을 깎아내고, 쳐내고, 잘랐다.
“대단할 것도 없습니다. 그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할 따름입니다.”
“아니다. 나에게 주군은 대단하다. 언제나…….”
라우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기서 더 머물러봤자 자꾸 안 좋은 일만 떠오를 것 같았다. 그러면 안 된다, 하고 라우라가 생각했다. 주군은 음울한 여자를 싫어한다. 대놓고 애정을 요구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니까 참아야 했다.
주군에게 나는 어디까지나 최고로 남아야 하므로.
“주군이 승리의 발판을 준비해주었다. 본인은 어서 군사를 통솔하여 무니헨을 함락시키겠다. 걱정하지 마라. 공화국은 오늘 해가 지기 전에 그들의 자랑스러운 수도를 잃어버릴 것이다.”
“아아. 믿고 있습니다, 라우라.”
병자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저는 조금 피곤하군요. 잠깐만 눈을 붙이겠습니다…….”
“응. 푹 쉬어라. 눈을 뜨면 이미 소녀가 주군의 명령을 완수하고 있을 것이다.”
라우라가 그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라우라는 그러나 입술의 감촉을 즐길 수도 느낄 수도 없었다. 당장이라도 눈물이 흘러넘칠까봐 다른 무언가에 집중하기가 불가능했다. 평소와 달리 입맞춤에서 애정을 느끼지 못한 채, 라우라는 서둘러 막사를 뛰쳐나왔다.
“아…….”
막사의 출입구에서 나오자마자, 라우라의 볼에 눈물이 흘렀다.
라우라가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가락 틈새로 눈물이 새어나왔다. 아, 아, 하고 라우라가 어떻게든 신음을 죽이기 위해 목소리를 억눌렀다. 라우라는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소리없이 흐느꼈다.
왜 자신은 라피스 언니처럼 태어나지 않았는가.
왜 자신은, 이토록 노력하는데 엘리자베트 통령과 같은 위치에 올라서지 못하는가.
라우라에게는 단탈리안이 유일했다. 하지만 단탈리안에게는 라우라가 유일하지 않았다. 거기서 라우라는 참을 수 없는 수치심과 슬픔이 몰려왔다. 이런 마음을 없애려고 라우라는 의도적으로 바르바토스의 애인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단탈리안은 라우라의 외도에 오히려 기뻐했다.
질투나 독점욕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자괴심에 시달리는 것은 다만 라우라뿐이었다.
‘주군은 잔인하다……주군은 너무도 잔인하다…….’
라우라가 눈물을 흘렸다.
그렇다.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니 주군이 옳았고, 슬픔을 느끼는 자신이 틀렸다.
사랑이라는 미명 아래 상대방을 지배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니 주군이 옳았고, 눈물을 흘리는 자신이 틀렸다.
항상 주군은 올바랐고 그녀, 라우라만이 잘못되었다. 열다섯 살의 소녀가 단탈리안에게 거두어진 그날부터 언제나 그러했다. 라우라는 단 한 번이라도 주군이 자신을 위해서 잘못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일어나지 않는다.
“아……아아…….”
라우라가 손으로 가슴을 쥐어잡았다. 왜 마음이 고통스러운데 몸이 이토록 아픈지, 라우라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눈물로 흐릿해진 땅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라피스 언니가 죽었다면.’
신음과 신음의 틈새에서 어떤 생각이 드문드문 이어졌다. 그 생각은 한번에 연결되지 않았다. 몇 번의 울음과 몇 번의 억누름, 수십 번의 절규가 사라지고 나서야 그 생각은 하나의 문장으로 완성되었다.
‘그리고, 공화국 통령도 죽는다면. 바르바토스도 죽는다면. 주군에게는 나밖에 없는 것인가. 주군에게 나는, 최고일 뿐만이 아니라 유일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인가.’
라우라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럴 리가 없다는 사실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주군은 라피스 라줄리가 죽는 것만으로도 간단히 파멸할 것이다. 그곳에 더 이상 라우라가 갈망하는 단탈리안은 남아 있지 않다. 그저 단탈리안의 외양을 갖춘 인형만이, 부스러기와 같은 잔해만이 흐트러지겠지.
‘하지만, 공화국 통령만큼은.’
라우라가 이빨을 물고 고개를 들었다.
붉게 충혈된 눈에는 적의가 감돌고 있었다.
‘그 망국의 황녀만큼은 죽여도 된다. 그녀를 죽이면 나는 주군에게 한 발자국 더 다가서게 된다. 아무한테도 넘겨주지 않겠다. 절대로, 아무한테도.’
라우라가 앞으로 걸어나갔다.
잠시 뒤, 합스부르크 제국군 전군에게 공격 명령이 하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