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위하여 <476화>
--------------------------------------------------------------------------------------------------------------------------------------------------------------------------------------------------------------------------------------------------------------------------
친위대는 신중하게 통로에 들어갔다.
어두컴컴한 동굴 천장이 이따금 잔잔하게 흔들렸다.
천만다행으로 마왕성 입구에 비해 이곳은 진동하는 정도가 약했다. 비밀통로는 마왕성에서도 가장 튼튼한 강도를 자랑했다. 지극히 자명한 이유, 즉 비밀통로가 약간의 충격에도 무너져내려서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 때문이었다.
─ 키히이이익.
― 케르흐르.
거대한 거미들이 통로 바닥을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그들은 라우라를 알아보고 친위대를 습격하지 않았다. 라우라는 문득 자기에게 마물의 언어를 알아듣는 능력이 없는 것이 몹시 억울하게 느껴졌다.
‘라피스 언니가 피신했는지 안 했는지, 공화국의 특공대가 여기를 통해 침입했는지 안 했는지, 그것만 알 수 있어도 운신의 폭이 넓어질 텐데!’
그렇지만 라우라의 귀에 거미들은 그저 음산하고 불쾌한 울음소리를 발산할 따름이었다. 새삼 마왕인 주군이 이곳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군이라면 훨씬 더 능숙하게 사태를 처리했겠지.
“속도를 높인다.”
“예, 전하.”
라우라는 통로가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친위대가 명령에 복창하며 빠르게 발을 움직였다. 언제 어디서 공화국의 특공대가 기습해올지 몰랐으므로 주변에 대한 경계만큼은 아끼지 않았다.
라우라는 여태껏 몇 번 비밀통로를 오갔다. 하지만 오늘만큼 여기가 낯설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드문드문 들려오는 진동 소리도, 물에 젖은 토끼마냥 약하게 떨어대는 종유석도, 모조리 어딘가 멀게 느껴졌다…….
‘주군이 잠들었다. 라피스 언니가 없다. 그것만으로 이렇게 불안해지는가.’
라우라는 점점 더 강하게 입술을 씹었다. 연하게 피냄새가 혓바닥을 타고 흘렀다. 라우라는 쓸데없이 불안감을 가라앉히느라 기력을 소모하는 대신, 불안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조금 더 속도를 높였다.
“장군.”
난쟁이 친위병이 난감해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통로를 전부 지나칠 때까지 습격은 없었다. 마물이 아군을 공격하는 일도 다행히 벌어지지 않았다. 통로의 천장과 기둥은 약간 불안하긴 해도 여전히 굳건했으며, 충분히 시간을 벌어줄 것 같았다.
문제는.
“입구가 막혀 있습니다.”
“…….”
통로에서 마왕성 9층으로 이어지는 출입구가 붕괴되어 있었다.
마치 이곳만 의도적으로 틀어막은 듯, 거대한 돌무더기가 무너져 내려 있었다. 병사들이 둘러붙어서 해결할 수준의 방해물이 아니었다. 라우라는 누군가가 완벽하게 의도적으로, 나머지 통로는 내버려두고 이곳 출입문만 파괴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어떻게 방도가 없는가……!”
라우라가 분노로 뇌까렸다.
“전하. 일대에 지나치게 강력한 반마법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단순히 통신과 전이가 차단된 것이 아닙니다. 모든 계통의 마법을 차단한 것처럼 보입니다.”
친위대의 마법사가 면목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모든 계통의 마법이라니. 적군은 대체 얼마나 많은 마법사를 투입한 것인가!”
“만일 우리가 얻은 정보대로 정말 마왕성 전체에 걸쳐서 반마법이 이루어졌다면……최고위 마법사들이 개입한 것 아닐지 감히 사료하나이다.”
“제기랄.”
라우라는 그녀답지 않게 작전 도중에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하지만 아무도 라우라를 제지하지 않았다. 마음이 답답하기는 친위대도 마찬가지였다. 존경하는 단탈리안 전하의 본거지가 파괴되고 있거늘 어찌 분하지 않겠는가.
‘두 가지 가능성. 두 가지 가능성 중 하나다.’
라우라가 손가락을 깨물었다.
‘공화국의 특공대가 여기로 침입한 뒤, 아무도 탈출하지 못하도록 출입구를 봉쇄했다. 이 경우에 특공대는 그야말로 죽음을 각오한 것이다. 자신들이 도망칠 구멍까지 없애버린 꼴이다.’
이 경우, 상황은 더더욱 절망적이었다. 마왕성 안에 있는 인원은 도망치지 않을뿐더러 도망치지도 못한다. 결사대와 사생결판을 나누겠지. 라피스 라줄리가 생존할 가능성이 줄어들었다.
‘다른 하나는……라피스 언니가 출입문을 막아버린 것. 침입을 미리 눈치 채고 비밀통로로 탈출한 다음, 추격자들이 쫓아오지 못하도록 일부러 붕괴시킨 경우이다.’
라우라가 간절히 후자의 가능성에 희망을 걸었다.
아주 미약한 희망은 아니었다. 두 개의 근거가 있었다.
첫 번째, 공화국의 특공대가 이곳으로 침입했다기에는 통로가 너무나 깔끔했다. 거미 무리는 다소 당황하긴 했어도 멀쩡하게 돌아다녔다. 침입자가 들이닥쳤다면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졌을 거다. 적어도 거미의 시체가 몇 개쯤을 널려 있어야 자연스러웠다…….
두 번째, 마왕성에 거주하는 마인들이 지나치게 당황했다. 만일 특공대가 지하 9층에 난입했다면, 그 위쪽에서 살고 있는 마인들이 허둥거릴 필요는 비교적 적었다.
‘비밀통로가 아니라 입구에서 정면으로 침입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렇다면 마인들이 혼란에 휩싸인 것도 이해되었다.
특공대는 압도적인 전력을 앞세워서 마왕성에 쳐들어왔다. 마왕성을 지키는 마물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곧이어서 전력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퇴. 이에 마왕성의 주민까지 공포에 휩싸여서 대대적인 혼란이 벌어졌다…….
가능하다.
충분히 가능하다.
라우라가 마음을 다잡았다.
“……여기서 물러선다.”
“장군!”
“어차피 우리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라우라가 차가운 눈초리로 단언했다.
“판단의 책임은 모두 본인이 진다. 설령 국무상서에게 불화가 덮쳤을지라도 단탈리안 전하께 책망을 받을 사람은 오직 본인뿐이다. 그대들은 내 명령에 복종하도록.”
“……알겠습니다.”
친위대장인 자크리가 고개를 숙였다. 총사령관이 책임을 지겠다고 말했다. 그 의지를 손상시킬 권리도 실력도 자크리에게는 없었다.
* * *
라우라는 그대로 되돌아서 비밀통로를 빠져나왔다.
그녀는 친위대를 둘로 나누었다. 자크리에게 이백오십의 병력을 맡겨서 커스토스 영지에 합류하도록 명령했고, 자신은 나머지 이백오십 명을 이끌고 전장으로 돌아갔다.
라우라가 군막사에 다가서니 이바르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바르는 라우라 못지 않게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군무상서. 보고는 들었습니다.”
“아아. 면목이 없다…….”
라우라가 눈썹을 찡그렸다.
“통로가 완전히 막혀 있었다.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단지 국무상서가 커스토스로 안전히 피신했기를 바랄 뿐이야…….”
“국무상서도 국무상서지만 더 급한 일이 생겼습니다. 군무상서. 전하께서 의식을 차리셨습니다.”
“주군께서!”
라우라가 활짝 얼굴을 폈다. 그러나 즉시 안색이 어두워졌다. 주군이 바란 대로 그녀는 전투에서 승리를 거머쥐었다. 이건 분명히 자랑해도 좋을 쾌거였다. 하지만 국무상서가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을 감히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라우라는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그런 라우라의 심정을 알아차렸는지 이바르가 슬픈 얼굴로 말했다.
“의식을 차리시긴 했어도 많이 힘들어하고 계십니다. 국무상서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가 자칫 용태가 더 나빠지실지 모릅니다. 최소한의 기운을 차리시기 전까지 비밀로 해두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
라우라가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국무상서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얘기를 접하면 주군이 어찌 반응할까. 틀림없이 직접 국무상서를 구하기 위해서 아픈 몸을 억지로 일으킬 것이었다. 온몸이 독약에 의해 너덜너덜해진 주군이 그러는 것을 라우라는 지켜보고 싶지 않았다.
더 나아가, 사실상 현재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라피스 국무상서가 사망했을 경우, 그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라피스 국무상서가 살아서 피신했을 경우, 역시 그들이 할 일은 전무했다. 결국 운명은 이쪽이 아니라 저편에 달려 있었다…….
“일단 주군을 만나 뵙겠다.”
“전하께서는 아직 매우 약하십니다. 부디 주의해주십시오.”
“알고 있네.”
두 신하가 막사에 들어갔다.
라우라는 침대를 보고 마음이 울적해졌다. 주군의 몸뚱어리는 여전히 힘없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병자가 가느다랗게 눈을 떴다.
“라우라입니까? 라우라의 발소리가 들리는군요…….”
“응, 주군. 주군의 라우라이다.”
라우라가 침대에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병자의 손을 꾸욱 쥐었다. 문득, 라우라는 주군의 눈에 초점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베갯머리 방향에서 한없이 나약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미안합니다. 지금 눈앞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조금, 무리를 해버렸군요.”
“아…….”
라우라는 눈가에 물이 차올랐다.
얼굴이 너무도 수척했다. 눈을 감았을 때는 뚜렷하지 않았던 주군의 인상이 지금은 완전히 수척해진 채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당장 기절할 것처럼 눈 밑은 새카맣게 변색되었고, 피부는 하얀 것을 뛰어넘어 창백했다.
‘말할 수 없다. 이런 주군에게는 라피스 언니에 대해 말할 수 없어…….’
라우라가 손등으로 눈가를 닦았다.
제아무리 병상에 누워 있다고는 하나, 라우라가 생각하기에 주군은 주군이었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면 무슨 일이냐며 질책할 게 뻔했다. 라우라는 단탈리안 앞에서 거짓말을 성공시킬 자신이 없었다.
“주군은 바보다. 무엇이든 몸으로 무마하려 하니까 또 누워버린 것 아닌가. 바보는 죽어도 고쳐지질 않는다더니, 아무래도 주군은 앞으로 영원히 바보일 모양이다.”
그렇기에 라우라는 쾌활하게 말했다.
상대방이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하도록.
부디 주군이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기를 마음속으로 빌면서.
라우라의 간절한 소망이 닿았을까. 아니면 단지 그만큼 상태가 나쁘기 때문일까. 다행히도 그녀를 질책하거나 추궁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너무하는군요. 이래 봬도 최대한 노력한 결과입니다. 독약을 무려 세 병이나 마셨다구요……살아 돌아왔다는 점에서 전 이미 모든 의무를 다했습니다.”
“주군은 지금까지 살면서 아무런 의무도 지킨 적 없다. 정말로.”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하…….”
기침 소리가 울렸다. 라우라는 혹시라도 주군이 각혈하지 않을까 걱정되어 초조하게 침대를 바라보았다. 기침은 몹시 메말랐지만 핏기는 섞여 있지 않았다. 라우라는 또 다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주군은 바보다. 정말로 바보다.”
“이번 전쟁만 끝나면 안 그래도 얌전히 살 계획입니다. 전쟁도 없이. 정치도 최소한으로 줄이고. 조용하고 한적하게……하지만, 아직은 정원 생활을 꿈꾸기에 조금 이르지요. 라우라. 전투는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아군의 승리다. 주군. 공화국군은 패퇴하고 있다.”
라우라가 짐짓 밝은 어조로 떠들었다.
그녀는 주군에게 거짓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무엇보다도 주군의 기운을 차리게 해줄 몇 마디 희소식을 전해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현재 아군이 적을 바짝 추격하고 있는 중이다. 무니헨의 코앞까지 쫓아가라 명령해두었다. 공화국군은 결코 쉽사리 물러서지 못할 것이야.”
“과연. 무니헨까지 추격하는 것입니까.”
침묵이 있었다.
잠시 뒤, 나약하게 떨리는 한 마디가 떨어졌다. 그곳에는 분명히 강철과 같은 의지가 숨어 있었다.
“라우라. 곧바로 기세를 몰아 무니헨을 함락시키십시오. 지금이야말로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수뇌부를 전멸시킬, 절호의 기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