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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475화 (475/510)
  • 무엇을 위하여 <47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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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우라가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다. 그녀는 잠시간 침묵에 잠겼다.

    “……마왕성의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 파악할 수 있겠는가?”

    “마왕성 전체에 강력한 반마법이 펼쳐져 있습니다. 일단 커스토스 영지 부근으로 심부름꾼을 보냈습니다. 아마 반각이 지나기 전에 보고가 올라올 것입니다.”

    당장에 상태를 알 수가 없었다. 마왕성이 얼마나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는지 몰랐다. 어쩌면 대단치 않은 기습에 불과할 수도 있었고, 대대적인 습격에 시달리는 걸 수도 있었다.

    라우라가 침음을 삼켰다.

    “어쩌면 일분일초가 아까운 상황일지도 모르겠군…….”

    “예, 소인이 판단하기에는 너무도 거대한 문제입니다.”

    라우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동의했다. 단탈리안 마왕군의 서열 제1위인 주군은 현재 의식을 잃었다. 서열 제2위인 라피스 라줄리 국무상서는 때마침 습격을 당한 마왕성에 머물렀다. 서열 제3위인 자신이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라우라는.

    “……정찰 보고가 올라올 때까지 기다린다.”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 이상의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이바르가 걱정스럽게 라우라를 바라보았다.

    “괜찮겠습니까? 다름 아니라 라줄리 국무상서께서 위험에 처하셨을지 모릅니다. 만에 하나라도 국무상서가 상처라도 입으신다면, 단탈리안 전하께서는 틀림없이 진노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마왕성은 난공불락이다. 쉬이 함락될 리 없어.”

    라우라가 가늘게 눈을 떴다.

    “아마도 이것은 공화국 통령의 계책이다. 지금 공화국은 전쟁터에서 패퇴하고 있다. 이 절묘한 순간, 만일 우리가 다른 곳에 정신을 팔린다면 적군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고 도망칠 수 있다.”

    “적군에 의해 계획된 습격입니까…….”

    “그럴 가능성이 높다.”

    왜 하필 지금 이 순간인가.

    처음부터 이쪽의 전력을 분산시킬 속셈이었다면 오늘이 아니라 어제쯤에 난동을 부렸어야 옳았다. 그러나 공화국은 본대가 패주하는 때를 정확하게 노렸다. 라우라는 상대편의 의중이 심히 의심스러웠다.

    “이럴 때는 정반대로 생각하는 것이다.”

    “정반대라니요?”

    “왜 지금과 같은 순간을 노렸는가, 라고 질문해서는 안 된다. 왜 지금과 같은 순간을 노릴 수밖에 없었는가. 이것이 올바른 질문이다.”

    라우라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이바르에게 설명한다기보다 단지 판단을 입으로 풀어재끼는 느낌이었다.

    “만약 적에게 마왕성을 끝장낼 정도로 막강한 특공대가 있었다면, 전투가 한창 일어나는 도중에 습격을 명령했을 것이다. 아군은 무시무시한 혼란에 휩싸였겠지. 특히 주군을 심리적으로 압박할 수 있었다. 만약 적에게 마왕성을 적당히 위협할 정도의 특공대가 있었다면, 전투가 시작하기 직전에 습격을 일으켰을 것이다…….”

    하지만 공화국은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았다.

    즉, 하고 라우라가 말했다.

    “적군에게는 실질적으로 마왕성을 위협할 특공대가 없다. 그저 습격하는 척 가장할 수만 있을 뿐이야. 아마도 통신 마법을 절단하고, 순간전이 마법을 가로막는 수준의 방해밖에 하지 못하겠지.”

    “……과연.”

    “실제로는 습격도 무엇도 없다. 습격이 일어났다는 착각을 우리에게 심어주는 것이 적군의 진정한 목적이다. 그리하여 조금이라도 더 수월하게 후퇴하고자 하는 게야.”

    이바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지 모르게 납득했다는 얼굴이었다.

    “일단 마왕성에 대한 원군은 없다. 그리 결정하신 것이군요.”

    “아아. 본인의 판단이 잘못되었을 가능성도 있다마는, 대군을 운용하는 데 있어 위험한 다리를 건널 수는 없다. 우선 자네가 파견한 정찰병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지.”

    “알겠습니다.”

    이바르가 허리를 꾸벅 숙이고 막사로 들어갔다.

    라우라는 그녀를 따라가려다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아까 전부터 기묘한 위화감이 라우라의 등골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라우라는 위화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고, 그렇기에 묘한 불쾌감을 느꼈다.

    ‘혹시 본인이 잘못 판단한 부분이 있는가?’

    라우라가 막사 입구에 서서 찬찬히 자신의 사고를 복기했다.

    ‘주군은 공화국 통령을 대륙에서 제일 뛰어난 군재(軍才)로 평가했다. 사람을 보는 안목에서 주군은 틀린 적이 없었다. 허면, 그 정도로 뛰어나다는 통령이 단순히 특공대를 버림패로 사용할까……버림패……그렇군.’

    라우라가 가볍게 입술을 깨물었다.

    ‘만약 통령이 이번 전투에서 승리했다면 특공대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진다. 구태여 우리를 견제할 필요가 사라지니까. 요컨대, 통령은 오로지 패배했을 경우에만 유효한 수단을 미리 준비했다는 얘기가 된다……그건 불합리하다!’

    라우라는 그제야 위화감이 약간이나마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렇다. 마왕성 전체에 반마법을 펼치려면 상당한 규모의 마법사 부대가 필요했다. 그만한 전력이 있었다면 차라리 방금 전 전투에서 활용하는 편이 훨씬 더 현명했다. 어쩌면 그 마법 전력 덕분에 엘리자베트가 승리를 거두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패전을 감수하고서라도 마법사 부대를 마왕성에 보냈다?

    더군다나, 쓸모라고는 오로지 자기네가 패전했을 경우에만 유효하도록?

    ‘허면 통령은 일부러 패전을 노렸다는 얘기가 된다. 패전으로 인해서 자기가 얻을 것도 없는데 말이다. 불가하다! 그런 멍청한 짓거리를 저질렀을 리 없어.’

    라우라가 손바닥으로 이마를 덮었다.

    ‘하지만,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시간이 초조하게 흘렀다. 라우라는 좀처럼 막사에 들어가지 못했다. 엘리자베트 통령의 행동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그리고 라우라는 의문을 남겨둔 채 전쟁터에 머무르는 성격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후퇴를 노렸다. 그런 것이 가능한가……?’

    라우라가 휙 하고 부관들을 쳐다보았다.

    부관들은 계급이 아득하게 높은 상관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군인만큼 상사의 기분에 민감한 직업이란 없었다. 더욱이 상사가 보통 상사도 아니고 총사령관이자 황제의 대리장군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제군. 시급히 확인해줄 것이 있다.”

    “무엇이든 명령해주십시오, 전하.”

    부관들이 일제히 군례를 올렸다. 흠 잡을 구석이 없이 훌륭한 자세였다.

    “적군이 후방에 보급마차들을 대량으로 세워뒀는가 확인하도록.”

    “예, 전하! 곧바로 통신을 돌리겠습니다.”

    “으음.”

    만에 하나라도 공화국 통령이 일부러 패전을 노렸다면―――비록 왜 패전을 해야만 하는지, 라우라는 전혀 짐작할 수 없었지만―――후방에 보급마차들을 배치했을 것이었다.

    용병들에게 보급마차는 가장 먹음직스러운 약탈감이었다. 신나게 적군을 쫓아가다가도 도중에 보급마차를 발견하면, 일단 추격을 중지하고 마차를 털어먹어야 마땅했다. 당연했다. 그깟 잡졸들 대여섯 명 죽이느니 마차 하나를 터는 것만 못했다.

    ‘이곳은 무니헨에 극히 가까운 거리에 있다. 보급마차를 필요 이상으로 동원할 이유도 필요도 없어. 그런데도 보급마차가 대량으로 배치되었다면……오직 우리군의 추격을 가로막기 위해서 끌고 왔다는 뜻이다.’

    라우라가 부관의 보고를 기다렸다.

    잠시 뒤, 부관들이 수정구를 통해 연락을 끝냈다. 그들이 라우라에게 말했다.

    “전하. 좌익의 기병대에서는 전방에 보급마차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우익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익의 기병대는 아직 재정비를 끝내지 못해서 추격전에 돌입하지 못했습니다.”

    “중앙의 아군은 보급마차를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그 숫자가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하옵니다. 대량의 보급마차는 우선 아군의 시야에 발각되지 않았다고 사료되옵니다.”

    “…….”

    라우라가 작게 신음했다. 사고가 다시 미궁에 빠져들었다.

    이바르가 막사에서 걸어나온 것은 그때였다. 이바르는 품안에 통신용 수정구를 품고 있었는데, 발걸음이 조급하였고 안색이 심각하게 어두웠다. 라우라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설마. 말도 안 된다. 그럴 리가 없어.’

    라우라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며 이바르에게 다가섰다.

    “보고가 올라왔는가.”

    “예, 군무상서. 사태가 심각합니다. 마왕성에서 주기적으로 계속 진동과 소음이 들려온다고 합니다.”

    “진동과 소음?”

    “심부름꾼이 아직 멀리서 정찰했을 뿐이라 확실하지 않습니다만, 아마도 마왕성 내부에서 일종의 폭발이 터지고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럴 리가……!”

    라우라는 등골이 싸늘해졌다.

    폭발음이라면 십중팔구 전투의 흔적이었다. 적군의 특공대가 침입하여 마법을 난사하고 있는 풍경이 순식간에 라우라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마왕성의 비밀통로는 정예병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만약, 모종의 계략에 의해 방어선이 뚫렸다면.

    ‘라피스 언니에겐 군사를 다루는 재능이 없다!’

    문제는 라피스 라줄리의 책임감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막중하다는 점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라피스 라줄리는 적도의 군화 아래 마왕성이 짓밟히는 걸 용서하지 않는다. 설령 적군이 노도와 같은 기세로 몰아닥쳐도, 설령 자신에게 그 공격을 막을 방도가 없다 하더라도, 라피스 라줄리는 결코 물러서지 않으리라.

    왜냐하면 그곳은 단탈리안이 돌아올 집이므로.

    절대로 제3자에 의해 침범되어서는 안 될 장소이므로.

    라우라가 이빨을 물었다.

    ‘라피스 언니가 죽으면 안 된다……!’

    라우라는 유일하게 라피스 라줄리를 자신보다 상위의 여인으로 인정했다. 자신보다 라피스 라줄리가 주군에게는 더 큰 의미를 가졌다. 때때로 주군의 편애에 씁쓸함을 느끼기도 하는 라우라였지만, 지금 그런 감정은 중요치 않았다.

    “사정이 바뀌었다. 이바르. 본인은 곧바로 마왕성으로 향하겠다. 그대는 주군을 곁에서 지켜다오.”

    “알겠습니다, 군무상서. 부디 무운을.”

    “아아. 무운을.”

    라우라는 급히 친위대를 소집했다.

    난쟁이 자크리가 이끄는 단탈리안의 친위대는 베테랑 용병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녀는 오백 명의 친위대와 함께 단번에 마왕성 부근으로 전이했다. 여기에만 어마어마한 금액의 마법서가 소모되었다.

    “지금부터 전속력으로 마왕성을 향해 진군한다!”

    “예, 장군!”

    친위대가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들은 라우라를 전하가 아니라 장군이라 불렀다. 이건 그들에게 암묵적으로 허락된 특권으로서, 오로지 마왕 단탈리안만을 전하라고 부르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친위대는 전원이 기마술을 익히고 있었기에 빠르게 진군했다. 커스토스 영지 외곽을 빙 둘러서 친위대가 마왕성에 당도했다. 그리고 누가 뭐라고 말하지도 않았건만, 거의 동시에 친위대들이 말발굽을 멈추었다.

    “이건, 대체…….”

    라우라가 망연하게 눈앞의 광경을 쳐다보았다.

    장엄한 풍광을 자랑하던 마왕성이 통째로 요동치고 있었다. 마치 자그마한 지진이라도 일어나는 것 같았다. 마왕성 내부에 살던 마족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뛰쳐나왔다. 서둘러서 도망치는 바람에 수많은 마인들이 발을 헛디뎠으며 그대로 압사당했다.

    아비규환이 그곳에 펼쳐졌다.

    설마 마왕성의 각 층을 지탱하는 기둥들이 훼손당한 것인가. 그야말로 마왕성의 내부 구조에 훤하지 않으면 훼손하기 어려운 물건이었다. 내부에 상당한 솜씨의 첩자라도 있지 않는 이상.

    라우라가 입술을 꾹 물어뜯었다.

    “……다른 입구로 향한다!”

    저런 난리통에 수백 명의 친위대와 함께 돌입하기는 불가능했다. 라우라는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비밀통로를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곧이어 그들은 강변에 숨겨진 비밀통로에 도착했다.

    다행히도 아직 비밀통로는 무사했다. 적어도 겉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라우라는 우물처럼 새카맣게 이어진 통로의 저편을 바라보며, 차마 견딜 수 없는 불길함을 느꼈다.

    “장군님.”

    “…….”

    친위대장 자크리가 조용히 라우라를 불렀다. 결단을 재촉하는 목소리였다.

    라우라가 각오를 끝마쳤다. 국무상서가 위험에 처한 것을 방관할 수 없었다. 라우라는 목을 치켜들고 소리쳤다.

    “이대로 돌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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